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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 사랑받는 운명입니다 (152)화 (153/258)

Chapter 152 - 152. 난입

 

 

“재상 각하, 외람된 말씀이오나.”

 

 

이야기를 쭉 듣던 엘노어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신 때문에 범세계적 혼란이 초래되었다는 사실을 들었음에도 별로 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일단 그런 사태가 저 때문에 촉발되었다고 주장하시는 건 잘 알았습니다.”

 

“...”

 

 

‘주장’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재상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어조야 평탄하지만,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그래서 그건 전부 니 의견에 불과하다’라고 일축하는 내용이다.

 

그런 것으로 도덕적으로 자신을 규탄하는 건 별다른 효력을 발휘할 순 없단 거지.

 

이어서 흘러나오는 말도 그런 맥락이었다.

 

 

“하지만 그게 다우드와 제 관계에 무슨 관련이 있단 말입니까?”

 

 

설리번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미소가 걷혀나갔다.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게 아닐 텐데요, 트리스탄 공녀.”

 

 

재상이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악마와 관련된 이들은 전 대륙의 공적입니다. 비단 악마 숭배자들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거기에 연루된 인간들까지 전부요.”

 

“알고 있습니다.”

 

 

엘노어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슬쩍 돌렸다.

 

 

“그래서 그게 어쨌단 말입니까.”

 

“...”

 

“아직 정해지지도 않은 사안으로, 당신이 저한테 이래라 저래라 할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걸 결정하는 건 저와 다우드입니다. 제삼자가 아니라.”

 

 

이젠 각하라는 존칭마저 붙이지 않는다.

 

말하는 거야 평탄하지만, 붉은색 안광을 흩뿌리는 표정은 평소보다 더 한 무표정이다. 일부러 뭔가를 억누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글쎄요, 트리스탄 공녀.”

 

 

설리번 또한 싸늘하게 온도가 내려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의 존재 자체가 이 남자에게 잠재적으로 피해를 줄 거라 확신하고 있으니, 억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

 

“당신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설리번의 황금색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 남자, 당신 때문에 안 좋은 일에 휩쓸릴 수도 있답니다? 아주, 아주 위험한 일에도요.”

 

 

엘노어가 멈칫했다.

 

이 말만큼은 자신도 뭐라 반박할 수 없단 태도다.

 

잠시지만 피가 나오도록 입술을 깨문 그녀가, 다시

 

 

“...당신이 하는 말이 진실이라는 전제하에나 일어날 피해 아닙니까.”

 

“직접 들이받아야만 참인지 거짓인지 구분되는 건 어리석은 자들의 특성입니다만, 트리스탄 공녀. 생각은 자유죠. 하지만.”

 

 

싸늘한 조소가 뒤이어 흘러나왔다.

 

 

“추해 보이긴 합니다.”

 

 

엘노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확연한 사실을 애써 스스로 부정하는 모습이라니. 이 남자를 독점하고 싶다는 게 과분한 욕심이라는 걸 아직도 모르는 건가요?”

 

 

깊게 가라앉은 황금색 눈동자가 음험한 빛을 발한다.

 

 

“이 남자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주제에. 몇 번이고 자기 때문에 이 남자를 희생하는 걸 보고도, 욕심을 버리질 못 하는 모습이 추하기 짝이 없다구요. 사랑 못 받고 자랐다고 광고라도 하시는 건가요?”

 

 

차갑게 타오르는 불꽃 같은, 섬뜩할 정도로 강렬한 시선이 엘노어에게 가서 틀어박힌다.

 

“이해는 합니다. 당신 환경이 환경이니, 근처에 그런 적당한 거리감을 가르쳐 줄 사람도 없었겠지요. 불쌍하게도.”

 

 

가만히 듣고만 있는데도 오한이 든다.

 

지금, 재상님이 엘노어를 향해 뿜어내는 냉기는 그 수준의 적의가 깃들어 있었으니까.

 

 

“그래도, 어리광을 부릴 때와 장소는 가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당신같이 아둔한 자라도.”

 

“...”

 

 

나한테 날아오는 말이 아닌데도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나온다.

 

 

“...하아.”

 

 

그 사이. 엘노어가 오히려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가만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

 

방금 그런 말까지 들었음에도 평온하다고까지 느낄만한 모습이다.

 

 

“...글쎄요.”

 

 

이어서 담담한 목소리로 답이 흘러나왔다.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습니다. 재상 각하.”

 

“뭐죠?”

 

“당신은, 반드시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

 

 

그렇게 말하는 엘노어의 얼굴에도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피가 얼어붙는 감각이 전신을 타고 올라온다.

 

저건, 엘노어가 곧 ‘검을 휘두를’ 적을 상대로나 보여주는 표정이니까.

 

이어서.

 

그 몸에서 ‘회색 기운’이 확 솟구친다.

 

 

< System Message >

 

[ 대상 ‘엘노어’가 격분합니다! ]

[ 대상 ‘엘노어’의 타락 수치가 200%를 초과합니다. ]

 

 

이 사람이 지금 얌전하게 반응하는 건 화가 안 났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폭풍전야였을 뿐이다.

 

임계점에 오른 분노가 터지기 직전의 상태로 몸 안에 응축되어 있던 것뿐이지!

 

계획을 짜고 어쩌고 할 사이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으니까.

 

이전에, 엘노어가 폭주했을 때 무슨 일이 생겨났는지 생각한다면 더더욱!

 

 

“...역시 천박해.”

 

 

이어서, 그런 말과 함께.

 

 

“수틀리면 검을 휘두르는 것밖에 모르죠, 당신?”

 

< System Message >

 

[ ‘타천의 인장’이 반응합니다! ]

[ 대상 ‘설리번’이 =Removed object=의 기운을 끌어내는 걸 감지합니다! ]

 

 

설리번의 몸에도 ‘황금색’ 기운이 깃들기 시작했다.

 

 

‘역시...!’

 

 

이 인간도, 악마에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크게 관여되어 있다.

 

저건, 악마가 ‘권능’을 쓸 때나 보여주는 모습이다!

 

곧바로 소울 링커를 착용한다. 안쪽에 있던 칼리반의 어안이 벙벙한 목소리가 곧바로 들려왔다.

 

 

[어, 뭐야? 왜 또 갑자기 깨워?]

 

‘닥치고 마력이나 내놔요. 급하니까!’

 

 

엘판테 한복판에서 악마 두 명이 충돌하게 둘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진짜 시나리오 전체가 통째로 날아간다!

 

 

[잠깐, 악마 두 명? 그걸 막을 순 있어?!]

 

‘몰라요. 어차피 못 하면 죽어!’

 

 

그렇게 답하며, 가용 가능한 수단을 모조리 다 점검한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 System Message >

 

[ ‘생존의 조력자’ 룰이 발동합니다! ]

[ 대상 ‘엘리야’가 당신의 위기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

[ 대상의 능력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

[ 대상이 ‘진리의 눈’을 개안합니다! ]

 

“...?”

 

 

이건 또 뭐야?

 

그렇게 생각하며 눈앞에 느닷없이 떠오른 창을 바라보는 사이.

 

 

“히야-”

 

 

회관 입구에서.

 

 

“역시 난입하길 잘했네요. 난리도 아닌데?”

 

 

그런 목소리와 함께.

 

‘섬광’이 날아왔다.

 

 

 

 

엘리야 크리사낙스가 게임 안에서 보여주는 성장 그래프는, 사실 주인공임을 감안해도 조금 미친 수준이 맞다.

 

내가 이 녀석을 처음 만났을 때 떠올린 일격으로 산맥을 날리느니 어쩌니 했던 건 결코 과장이 아니거든.

 

물론,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냐.

 

 

-!

-!

 

 

소리만 따지면 이만큼 맥없는 장면도 없을 것이다. 그냥 엘리야갸 엘노어와 설리번의 뒤통수를 콩, 콩, 하고 때렸을 뿐이니까.

 

 

“...”

 

 

그리고, 그 모습을 보자마자.

 

온몸에 솜털이 일어나는 것 같은 감각이 내 전신을 휩쓸었다.

 

단순히 엘노어와 설리번이 동시에 반응조차 못할 속도로 그런 짓을 했다는 사실도 사실이지만, 진짜로 어이없는 부분은 따로 있다.

 

 

“...지금.”

 

 

어안이 벙벙한 페이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인도 악마 두 명이 부딪히는 사태만큼은 어떻게든 막으려고 했는지, 온몸에서 마력을 운용하려던 모습이지.

 

 

“악마의 그릇 두 명을, ‘때려서’ 제압한 겁니까?”

 

“...”

 

 

그래.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면, 내가 본 광경도 정확하게 그것과 동일하다.

 

악마의 권능을 일으키고 있던 엘노어와 설리반이, 동시에 맥없이 쓰러졌다.

 

일격에 의식을 잃은 것처럼.

 

이 녀석, 지금 맨주먹으로 저 두 명을 뒤통수치는 걸로 제압한 거다.

 

 

“선생니임-!”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엘리야가 그렇게 말하며 내 앞으로 폴짝 뛰어왔다.

 

방긋방긋 웃으면서 내 손을 잡고 마구마구 위아래로 흔든다.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단 기색이다.

 

 

‘...애가 성격이 바뀌었나?’

 

 

아니, 생각해보면.

 

원작 모습을 생각하면 원래 이게 맞다.

 

나 때문에 좀 죽상으로 늘어지고 여기저기에 휩쓸리고 한 거지.

 

 

“잘 지내셨어요? 와, 진짜 오랜만!”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화사한 웃음을 짓고 있는 엘리야를 바라보다가, 간신히 질문을 꺼내놓는다.

 

 

“...너, 방금 그거 어떻게 한 거냐?”

 

“네? 어떻게라뇨?”

 

“어떻게 두 명 다 한 방에... 재웠냐고?”

 

 

내 말에, 엘리야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그거야...”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녀석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뭐라고 해야 하나. 안 다치게 치려면 맨주먹으로 쳐야 하는데... 그렇게 해서 사람 제압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특히 공녀님은 흠집도 안 날 것 같고.”

 

“...그렇지?”

 

“그래서 안에 있는 걸 쳤어요. 악마의 조각이라고 하던가, 그거?”

 

 

아주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온 대답이었지만.

 

 

“...”

 

“...”

 

“...”

 

 

침묵이 묵직하게 가라앉는다.

 

나, 페이놀, 심지어는 소울 링커 안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조잘거리던 칼리반마저 입을 다문다.

 

아니.

 

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악마의 조각을, ‘때렸다’고?

 

 

“...뭐?”

 

 

한참 동안 이어지던 침묵을 깨고 내가 간신히 입을 열어 꺼낸 말이었지만.

 

엘리야가 여전히 빙글거리는 웃음을 지은 채로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그냥, 최근 들어서 온갖 것들이 아주 잘 보이더라구요. 저 악마의 조각이라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람’도 잘 보이고.”

 

 

그러고 보니, 아까 전에도 시스템창에서 진리의 눈을 개안하니 뭐니 하는 말을 꺼내긴 했다.

 

지금 이 녀석도 자세히 살펴보니까 눈에 안대 비슷한 걸 차고 있고.

 

 

“그래서, 그 안쪽에 있는 사람이 보이길래. 한 번 때려봤거든요?”

 

 

엘리야가 씩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되던데요?”

 

“...”

 

“리루 상대로 몇 번 해보니까 아주 좋아 죽던데. 그 조각이란 거 가진 사람들은 거기 직접 얻어맞으면 엄청 아픈가 봐요.”

 

“...”

 

 

완전히 정지한 것 같은 뇌를 어떻게든 움직여서, 이 녀석의 말을 조합해보자면.

 

이 녀석은 지금, ‘그릇’을 때려서 그 안에 있는 악마의 조각에 ‘직접’ 타격을 가했단 소리다.

 

그러니까 아마 폭탄에 직격당해도 멀쩡할 인간들이 뒤통수에 한 대 맞고 쓰러진 거고.

 

 

‘...어떻게?’

 

 

이해가 안 간다.

 

지금 엘리야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는데.

 

이건 이 세계관 전체를 뒤져도 유례가 없는 힘이다.

 

악마의 힘을 억누를 수 있는 건 같은 악마. 혹은 치천사 위계에 달한 천사. 그리고 성검을 든 용사뿐.

 

그게 법칙이다. 게임 시스템 안에 정해진 룰 같은 거라고.

 

그런데.

 

방금 그거 뭐냐.

 

게임이었다면 버그라고 생각할만큼 황당한 짓이다. 지금 여긴 버그 따위가 일어날 리가 없는 현실이고.

 

아니, 뭐냐 얘.

 

권성님.

 

대체 애를 어떻게 개조시켜 놓은 거야?!

 

 

“...그래서, 어떠세요?”

 

 

엘리야가 그렇게 말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선생님을 위해서, 열심히 수련한 능력인데요.”

 

“어?”

 

 

그리고 그 눈동자를 마주치자마자.

 

 

“...”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친다.

 

왜 그랬는진 모르겠는데,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고생했네. 진짜 말도 안 되는 능력이네.”

 

 

“그렇죠?”

 

 

엘리야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 제가 지켜드릴게요.”

 

 

그런 말과 함께.

 

녀석이 내 손을 꼭 틀어쥐었다.

 

어디에도 보내지 않겠다는 것처럼.

 

 

“앞으로는, 이런 나쁜 여자들이 선생님을 위협하려고 해도. 제가 지켜드릴게요. 그러려고 열심히 수련했어요.”

 

“...”

 

“그러니까.”

 

 

하지만, 내쪽으로 고개가 돌아오면서. 이내 그런 기색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엘리야가 다시 활짝 웃었다.

 

 

“저랑, 떨어지시면 안 돼요?”

 

“...”

 

“그랬다가는 저 난폭한 여자들이 선생님한테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모르니까-”

 

 

그렇게 말한 녀석이, 내 손을 들어올려 자신의 약지를 턱 걸었다.

 

 

“응, 약속. 항상 붙어있기.”

 

 

이어서, 녀석이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항상 선생님 지켜줄 수 있게. 아셨죠?”

 

 

거의 안광을 빛내며 그런 말을 녀석을 보고 있자니.

 

날 지켜주겠다고 건 좋은데.

 

 

“...”

 

 

왜, 등골에 오한이 흐르지?

 

뭐라고 해야 할까.

 

 

[...집착 전조 증상이지, 이거?]

 

“...”

 

[너 내 여동생이 너한테 물들어서 타락하는 거 보여주려고 나 깨운 거냐?]

"..."

 

아니야.

 

헛소리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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