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6 - 156. 인과응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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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가만히 있어? 지금 위기 아니야?]
상자를 받고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향해 칼리반이 그런 말을 꺼내놓았지만.
‘...위기, 이긴 한데요.’
제일 먼저 든 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
부족 연합의 혼례는 다른 국가들의 전통과 비교하더라도 상상을 초월하는 대형 행사다.
이유를 대자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부족 연합은 가장 적은 구성원을 끈끈한 숫자로 메꾸는 가진 곳이란 게 큰 역할을 하겠지.
그런 면에서.
대족장의 씨족 중 한 명이 혼인한다면, 그건 진짜 규모를 떠올리기만 해도 두통이 찾아오는 수준의 대사건이란 뜻이다.
“...”
그렇다는 말은.
지금 이렇게 상자 하나 달랑 들고 와서 청혼을 하는 건 원래대로는 절대 일어나선 안 될 일이지.
이렇게 조촐한 걸 넘어서 급발진이라고 봐도 해도 좋을 수준의 청혼은 원래대로라면 절대 용납되지 않을 테니까.
하물며 전통을 그렇게나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이런 방식의 청혼은, 위기감보다 위화감이 먼저 일어난다.
“...결혼이요?”
그래서.
일단 조심스레 그리 질문한다.
이 사람이 진심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건가, 싶어서.
“...응.”
하지만.
지금 내 시선을 피하며 그렇게 말하는 리루의 목소리는, 여전히 똑같다.
부끄러워 하는 건 분명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의지가 확고하게 깃들어 있다.
“...이런 말이 갑작스러운 건 알아.”
리루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예?”
“가만히 뒀다간, 빼앗길 것 같단 말이야.”
얼굴을 덮은 양손 아래로 그런 목소리가 중얼중얼 흘러나왔다.
그렇게 말하는 리루의 목소리는, 이 사람 답지 않게 대단히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다.
거기엔, 틀림없이.
두려움마저 섞여 있다.
평소에 항상 당당하던 태도와 대조되는 모습이라서, 오히려 훨씬 더 피부에 와닿는다.
이 사람, 진짜 진심으로 나에게 부딪히고 있다는 게.
“...”
하지만.
[...거절하게?]
어쩔 수 없지 않나.
엘노어의 경우도, 유리아의 경우도 그랬지만. 사실 그때 당장 내 목숨이 날아갈 수준의 위기가 아니라면 다 거절했을 거다.
항상 악마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하는 내 입장에서 보면,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니까.
“...”
이를 악문다.
잇몸에서 혈향이 느껴질 정도로 세게.
사실 항상 쓰레기니 뭐니 하는데.
진심으로 나한테 부딪히는 인간들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건 항상 죄스러운 일이다.
“죄송해요, 리루.”
아무리 내가 악마들을 다 끼고 산다고 선언한 참이라도, 갑작스럽게 이런 걸 가져온다면.
받아줄 수가 없다.
그런 목표에 닿는 건, 메인 시나리오를 전부 정리하고 모든 위협 요소를 없앤 다음이다.
결국 내가 여기서 해야 할 말도 정해져 있다는 뜻이다.
“...당장은, 너무 갑작스럽네요.”
“...”
“아직은, 거기까지 닿기 위해서는 서로 알아야 할 부분이 너무 많지 않나... 싶어요.”
힘겹게.
목이 틀어막히려는 느낌을 간신히 억누르며 그런 말을 최대한 침착하게 이어간다.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당연히 이런 말을 듣고 곧바로 대답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 리가 없겠지만.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표정도 보이지 않는다.
“...미안해요, 리루. 지금은, 좀 힘들 것 같아요.”
침울하게 말을 잇는다.
리루에게선 별다른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냥 고개를 푹 숙여 바닥을 바라볼 뿐이다.
“...지금은, 이라는 건.”
낮게 깔린 목소리로,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나중에는 대답이 달라진다는 뜻이야?”
“...”
달라지지.
나 애초에 당신 끼고 살 생각이라니까.
하지만, 지금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다.
그냥, 두루뭉술하게 흘리는 것 정도로만 가능하지.
“...일단 서로를 먼저 알아보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쓰게 웃으며 그런 말을 남긴다.
사실 상투적으로 체면치레나 하려고 남기는 거절 멘트에 가깝지만, 그럼에도 말 자체는 틀림없이 진심이다.
나하고 이 사람, 아직 서로에 대해 알 게 산처럼 쌓여있다. 앞으로도 계속 볼 거고.
“...그러면. 서로를 알아본 다는 건 무슨 말인데.”
“결혼같은 이야기는 힘들더라도... 함께하는 시간은 얼마든지 같이 가질 수 있단 소리죠.”
결혼하는 건 무리더라도.
차근차근 시작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내 말에, 리루가 다시 말을 꺼내놓았다.
“...그러면.”
한참을 우물거리던 리루가.
이내 긴장된다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 이성 관계부터 시작할 수 있는 거야?”
“...그 정도는, 얼마든지요.”
당장 주변에 결혼 안 해주면 죽인다고 달려드는 여자가 수두룩하다. 남녀 관계 정도야 양반이지.
주변에 얘기할 때도 그 정도면 어찌저찌 넘어갈 수 있는 수준에 걸친 관계일 것이다.
“그래?”
그 말과 함께.
리루가 내내 얼굴에 두르고 있던 손을 치웠다.
“...?”
그런데.
표정이 좀, 이상하다.
“...??”
왜.
분명히 내가 청혼을 거절했는데.
이 사람은 ‘해냈다! 걸려들었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거지?
“...남녀 관계니까, 친구보단 가까운 거지? 아직 연인은 아닌 거고.”
심지어, 그런 말을 내뱉으며 아예 씩 웃기까지 한다.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여 답한다.
“그, 그렇죠.”
“그래, 그러면.”
리루가 이젠 아예 활짝 웃으면서 내 어깨를 턱턱 두들겼다.
이어서 그녀가 나를 콱 끌어안았다.
“...리루?”
“남녀 관계면 이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거잖아.”
“...리, 리루?”
“앞으로 종종 만나자고. 내가 부를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리루의 표정에, 살짝 비틀린 사나운 웃음이 깃든다.
평소의 리루가 그대로 깃든 모습이다.
마치.
방금 전까지 내 얘기를 듣고, 침울해하고, 힘빠진 기색처럼 보이던 건 전부 ‘연기’였다는 것처럼.
“네가 먼저 ‘차근차근 하자’고 말한 거였으니까, 내빼기 없기다?”
“...”
“그럼, 그래.”
볼을 긁적거리며 그렇게 말한 리루가.
그 호쾌한 웃음은 여전하지만, 거기에 살짝 얼굴을 붉히며.
내 어깨를 주먹으로 툭 밀며 말했다.
“잘 부탁해. 내 ‘남자친구’님.”
“...”
어.
뭐지.
왜 식은땀이 나지?
나, 지금 뭔가 아주 엄청난 실수를 한 것 같은...?
“그, 그럼 이만! 좋은 저녁 돼라!”
스스로가 한 말이 어지간히 부끄러운 모양이었는지, 리루가 그런 말을 남기고 후다닥 도망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는 저녁 밤하늘 아래에 혼자 우두커니 방치되었다.
“...”
방금 대체, 뭐야?
[걸작이네, 진짜. 이게 인과응보인가? 네 표현대로 하면 나비 효과?]
그런 나에게.
칼리반이 어이가 없다는 목소리로 말을 던져왔다.
“...뭐에요, 갑자기?”
[아니, 눈 뜨고 코 베이는 걸 직관하고 있는데 어떻게 안 웃기냐. 저거 다 네가 하는 짓 보고 그대로 배운 거 아니야. 니가 반대로 당하는 걸 보고 있으니까 희극이 따로 없네.]
“예?”
무슨 소리야, 이 사람.
칼리반이 낄낄거리며 말을 이었다.
[니가 결혼을 거절함으로써 강제로 저쪽이랑 ‘남녀 관계’부터 강제로 시작하게 됐잖아?]
“...”
[원래대로는 딱히 신경도 안 쓰고 있었는데 말이야. 네쪽에서 먼저 접근할 생각도 없었고. 근데 지금은 저쪽이 ‘남녀 관계’라면서 아무 부담 없이 접근해도 할 말이 없는 구실을 줘버렸네?]
“...”
[주변에 하도 안 만나주면 죽겠다고 달려드는 놈들이 많으니까. 오히려 이런 식의 여우 같은 접근은 생각도 못했지, 너? 내성이 낮은데?]
응?
[남녀 관계로 시작하자고 니 입으로 수긍한 이상, 너 이제 저쪽이 그거 관련해서 뭔가를 하자고 하면 내뺄 수도 없어. 정당성도 저쪽이 쥐고 있고.]
“...자, 잠깐만요.”
[아무리 네 주변 여자들이 네 관심 좀 받으려고 발작해도, 널 주도적으로 ‘부를 수 있는’ 여자는 한 명도 없었다고. 그런데 지금 한 명 생겼네?]
잠깐만. 그게. 그러니까.
그게 그렇게 되나?
[고단수네, 저 아가씨.]
“...”
[너 지금 작업당한 거야, 임마.]
“...”
[청혼은 낚시라고. 처음부터 주도권 가져오려고 함정 판 거야.]
그 말을 듣고.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그제서야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어?”
이전에 있던 엘노어의 청혼이나, 거기서 바로 이어진 유리아의 돌격과는 달리.
이번에는 ‘악마 관련 경보’가 떠오르지 않았다는 점.
즉.
저 사람, 처음부터 ‘거절당해도 상관없는’ 상태로 나에게 찾아왔단 소리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찌르면 내가 이렇게 행동할 것이라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이 사람치고는 괴상한 방법으로 청혼을 한다 싶더라니.
“...어...?”
나.
지금 역으로 가스라이팅 당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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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루 가르다는 아직도 화끈거리는 얼굴을 힘겹게 문질렀다.
[우와, 진짜로 하셨네요?]
“...시끄러.”
그녀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퉁명스레 그리 중얼거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현실감이 없다.
방금, 자신은.
“...저기. 있잖아.”
[네. 리루.]
“저 녀석이 이제 내... ‘남자친구’면, 나, 나...”
그녀가 얼굴을 쓸어내리며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저 녀석하고, 그, 뭐냐... 데이트나, 키, 키, 키스 같은 것도, 하, 할 수 있는 거야?”
[...]
푸른 악마가 필사적으로 터져 나오려는 폭소를 억눌렀다.
세상에.
이게 다 큰 여자 입에서 나올만한 소리인가.
생긴 것나 하고 다니는 짓과는 다르게, 연애 방면에선 진짜 말도 안 되게 순수한 인간이다.
‘...조언해 드리길 잘 했네요.’
애초에, 청혼이라건 리루의 원래 ‘속도’를 생각한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짓이다.
첫 이성. 첫 교제. 첫 고백. 첫 연애.
앞으로 이 남자와 함께 쌓아나갈 모든 시간들은, 그녀에게 있어서 일생에 단 한 번도 없었던 사건들의 연속이다.
그런데 그런 걸 지나쳐 버리고 청혼이라니, 억울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저지른 일이다.
“...어차피, 네가 여기서는 무조건 거절당할 거라고 하길래. 그런 짓을 왜 하냐고 했었는데.”
리루가 살짝 흥분된 목소리로 달뜬 호흡과 함께 그렇게 중얼거렸다.
“...진짜 여기 분야에선 믿을 만하네, 너.”
그동안 이 녀석과 함께 지내며 깨달은 점이라면, 이 푸른 녀석이 가끔씩 떨어트리는 ‘미래’에 대한 정보는 거의 진짜라는 점.
심지어는 이 녀석에게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그녀도 ‘몇 초’ 뒤의 미래가 불현듯 떠오를 때가 있다.
이 녀석이 말하기로는 ‘융합’ 도중 일어나는 부가적인 요소라나.
-회색도, 자색도, 적색도 다 겪어가는 과정이에요. 조각과 그릇의 합일. 다만 우리는 의사소통이 그쪽보다 훨씬 수월하니까 ‘조율’하기 편하다는 정도?
-조율? 무슨 조율?
-어, 밤일 할 때 서방님이 한 번에 두 가지 맛을 즐길 수 있다는 거?
-...
-농담이고. 나중에 가면 알게 될 거에요, 리루.
푸른 녀석이 쿡쿡 거리며 그렇게 말한 기억이 있다.
-서방님이 가장 위험할 순간에, 저희가 가장 빛날 수 있단 소리니까요.
그런 통 알 수 없는 소리도 함께 따라오긴 했지만.
아무튼.
[예, 뭐. 계속 말씀드렸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니까요?]
푸른 녀석이 그녀의 근처를 둥둥 떠다니며 킥킥거렸다.
[서방님의 지금 상황을 생각하면, 지금 이 청혼은 폭탄이나 다름 없어요. 받아들일 리가 없죠.]
다만.
그 부분을 찌르고 들어가서, 오히려 다른 그릇들은 상상도 못 할 ‘자연스러운 관계’를 구축할 계기를 얻었다.
그런 이점을 이어갈 ‘무대’도 조만간이고.
[음... 시간축의 흐름을 생각하면, 당장 내일이 용사 선발이던가요.]
푸른 악마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용사 선발? 그건 또 뭐야?”
[그런 게 있어요. 꽤 중요한 사건이거든요.]
적어도.
다우드 캠벨의 ‘위기’와 관련된 분기점은, 전부 여기서 시작된다.
용사, 회색 악마, 하얀 악마, 붉은 악마, 전부 얽혀서 돌아가는 대혼돈의 도가니.
‘원래대로’는, 거기에 푸른 악마 자신과 리루가 낄 자리는 없다.
하지만.
[...‘이번 회차’는 조금 다를 거에요, 서방님.]
푸른 악마가, 입술을 살짝 핥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저번처럼, 다른 녀석들만 서방님을 탐하게 두진 않을 거라구요?]
틀림 없이.
듣고 있던 리루로서도 살짝 등골이 서늘해질만큼 고혹적인 울림이 담긴 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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