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8 - 158. 산 넘어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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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놀 대주교가 대단히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베일 안에서 천사를 바라보는 게 느껴진다.
아마 저쪽 입장에서는 당혹스럽겠지.
원래대로는 악마의 기운을 보자마자 호통을 쳐야 할 사람이 지금 딱딱하게 굳어 내 쪽만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사자시여?”
주교가 그런 말을 꺼내놨음에도, 천사님이 여전히 파들파들 떨리는 눈으로 말을 이어가는
“...”
그리고, 내 입장에서 말하자면.
땡잡았다.
원래대로는 내가 만나려고 해도 본인이 도망갔을 인간이, 지금은 떡하니 내 눈앞에 자리 잡고 있다.
[너, 너, 왜, 왜 여기에...]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가 ‘내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것만 봐도 금방 알 수 있겠지.
천사 입장에서는 물질계에 모습을 드러낼 때 항상 경건하고 위엄찬 분위기를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다.
다만, 그런 입장에 놓인 사람이라도 도저히 억누르지 못한 신음을 토해 놓을 만큼, 저 역천사님에게 난 트라우마 그 자체다.
까딱 잘못했다가 나 때문에 악마한테 잡아먹힐 뻔했는데 오죽할까.
“...방금 오랜만이라고 하지 않았어?”
“저 녀석이 천사님과 만난 적이라도 있다는 거야?”
그런 웅성거림이 주변에 있는 관중들에게서 하나둘씩 올라오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천사님의 얼굴이 더더욱 안 좋아지고 있는 모양새고.
“...”
유일하게, 옆에 있던 엘리야만 뭔가를 알 것 같다는 표정으로 나와 천사님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고 있다.
이 녀석은 나와 천사님이 마주치던 그 순간에 같이 있었으니까 그럴 테지.
“...저, 선생님.”
“음?”
“저도 선생님하고 꽤 오래 보다 보니까, 나름대로 파악이 그럭저럭 될 때가 있거든요.”
“응.”
“...지금 역대급으로 쓰레기 같은 짓을 계획하고 있는 표정이세요.”
“...”
얘 감이 좋아졌다는 느낌은 전부터 계속 들긴 했는데.
진리의 눈인지 뭔가 얻어온 이후로는 거의 독심술을 쓰는 것 같다.
대체 뭔 능력인데, 그거.
[너, 나한테서 또 대체 뭘 바라는 거야? 그 음흉한 표정은 또 뭐고?!]
“...”
아니면, 지금 내 얼굴이 누가 봐도 썩은 내가 풀풀 나는 지경이거나.
‘뭐, 별 건 아니구요.’
칼리반과 마찬가지로, 이 사람도 정신에 말을 거는 건 그냥 머릿속으로 생각하기만 해도 답변할 수 있는 모양이다.
다행인 부분이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건 입 바깥으로 꺼내려면 대단히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니까.
‘사람이 중요한 일을 하려고 하는데 자꾸 시작점에 서지도 못 하게 방해하는 놈들이 있어서요.’
아니, 진짜로.
엘판테에서도 그랬고, 투쟁의 용광로에서도 그랬고, 나 진짜 죽도록 뛰어다니면서 악마한테 세상 안 박살나게 하려고 노력 중인데.
자꾸 자기 사심 채우려고 방해하는 놈들이 너무 많다.
여기서는 성황국이 되겠지.
그러니까.
그쪽을 대차게 물 먹일 대사를 하나 준비시켜보자.
‘천사님이 여기서 저를 위해 하나만 증언해주시면 좋겠는데요.’
[...증언?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머릿속으로 필요한 내용을 전달한다.
반응은 극적이었다.
[이런 인간 같지도 않은 쓰레기가-!]
“...”
[그, 그런 말을 내 입으로 어떻게 하라는 거야!]
글쎄.
해야 할 걸.
그렇게 생각하며 창을 조작하여 스킬을 강제로 역천사님에게 적용시킨다.
공중에 둥둥 떠 있던 역천사님이 날개를 접고 지상으로 두둥실 내려온다.
[어, 어? 뭐야 이거?!]
참으로 귀중한 ‘천사한테 직접 써먹을 수 있는 명령권’을 사용한 참이다.
그러니까.
조금, 수위가 높은 단어를 꺼내 들게 만드는 것도 당연하지.
“...정말로 오랜만이네요.”
[왜, 왜 내 입이 마음대로 움직이는 거야?! 너 나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것-]
역천사님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앵앵거리며 울렸지만.
그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가 ‘부탁한’ 문장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보고 싶었답니다, ‘주인님’.”
그 문장이 떨어지자마자.
“이 비천한 종은 어떤 명령이든 받들 준비가 되었답니다.”
넓디넓은 광장이.
일순간 침묵으로 뒤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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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ystem Message >
[ 대상 ‘역천사 A1101’이 당신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인식합니다! ]
[ 부정적인 영향이 각인됩니다! ]
[ 부정 각인 2중첩! 3중첩시 특별한 효과가 발생합니다! ]
[ 스킬: 악의 지배가 발동됩니다. 대상에게 사용 가능한 명령권 1회를 얻습니다! ]
와.
명령권이 복사가 되네.
피식 웃으며 눈앞으로 떠오르는 창을 바라본다.
역천사님이 그런 문장을 내뱉자마자 루미놀 대주교가 황급하게 역소환시켜버려서 그쪽의 반응을 살필 겨를도 없었는데, 이 정도면 만족이다.
명령권 리필 안 되면 어떻게 할까 걱정했는데, 역시 천사가 기껏 물질계의 인간에게 ‘주인님’이란 워딩을 쓰는 것 자체가 멘탈을 제대로 으깨놓은 모양이지.
인간으로 따지자면, 애완동물을 상대로 주인님이라 부르는 수준의 추태다, 그거.
[...소년왕 지금 자냐?]
‘거의 그렇죠? 왜요?’
그 사람은 대부분 항상 침묵 상태긴 하지.
활발한 칼리반과 다르게, 그쪽은 기본적으로 항상 조용하다.
금술 관련해서 뭔가를 또 준비하려고 틀어박힌 것 같긴 한데, 그래도 가끔 얼굴이라도 비춰주면 좋을 텐데.
[그러게 말이야. 지금이 딱 같이 박수 쳐 줄 타이밍인데.]
“...”
[이제 니 주변에 있는 여자가 아니면 아예 죄책감도 안 느끼는 모습, 보기 좋다. 사람이 한결같아서 아주 호감-]
헛소리는 무시하고 책상 위로 시선을 돌린다.
“...폭탄 떨어졌네.”
어제 있었던 일을 연이어 대서특필하고 있는 언론지들을 보고 있으니까 그런 말이 절로 나온다.
“우와아... 난리도 아니네요...”
그런 내 말에 이어, 소파에 앉아서 내가 본 자료들을 2차로 넘겨받어 쭉 훑어보던 엘리야 역시 그런 신음을 흘렸다.
“유명해질 거라 하시더니, 이건 진짜 해도 너무한 수준 아닌가요?”
엘리야가 그렇게 말하며 기사들의 헤드 라인 몇 개를 연이어 읽어내렸다.
[ 천사의 복종 선언, 성황국에서는 여전히 이에 대해 묵묵부답- ]
[ 루미놀 대주교는 ‘집단 환각’에 대한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으며- ]
“...아무리 그래도 집단 환각 같은 소리를 진지하게 할 정도면 어지간히 충격이긴 했나 봐요.”
그렇겠지.
성황국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악몽과도 같은 일일 것이다.
그네들이 가지고 있는 입지와 영향력의 대부분은 ‘초대 용사’를 배출했다는 점과 ‘천사’들의 직접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는 종교적 권위에서 나온다.
그런데, 자기들 입으로 자격이 의심된다고 말한 쪽한테 천사가 ‘주인님’이니 뭐니 하는 단어를 내뱉는다니. 개망신도 그런 개망신이 없다.
물론 집단으로 쌓인 영향력을 발휘하여 공식적으로 그런 사실을 무마시킬 순 있겠지만, 그 광경을 목도한 수많은 사람들의 입을 전부 다 틀어막을 순 없다.
내가 대체 천사와 무슨 관계냐는 화제는 앞으로 무시무시한 기세로 퍼져나가겠지.
그리고.
그런 사람이 ‘수행원’으로 붙어있는 ‘용사 후보’의 인지도도 더불어서 무시무시하게 폭등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대륙 전체에서도 가장 뜨거운 사람 중 한 명으로 떠오른 소감은?”
“...솔직히 아직은 별로 체감 안 되는데요. 화제성이 높아졌다고 해 봐야 당장 주변에 무슨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관심이야 원래도 엘판테 안에서 많이 받고 있었고.”
“...”
인싸라서 좋겠다.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아직도 ‘뭔가 수상한 놈’ ‘음흉한 인간’ ‘친구 없는 아싸’ ‘그런데도 수상할 정도로 주변에 여자는 많은 놈’ 수준의 인식을 아직도 못 벗어났는데 말이야.
처음 아카데미에 입학할 때 꿈꿨던 평범한 학원 생활하고는 이미 억만 광년 정도 떨어진 인식이다.
“...선생님? 왜 눈가가 촉촉하세요?”
“내 눈빛이 영롱해서 그래.”
“...”
아무튼.
적어도 성황국과 법황은 이걸로 용사 선발 내내 나한테 태클을 걸 여지가 원천 차단된다고 봐도 좋다.
그래서, 그건 좋은데.
“...그런데 넌 아까부터 뭐 하고 있는 거냐?”
그런 말이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아니, 얘 자기 방 내버려두고 다짜고짜 내 방 쳐들어와서 가구를 점거하고 있는 것부터가 그런데.
아까부터 신문지에서 뭘 자꾸 사각사각 오려내고 있다.
“선생님하고 저하고 같이 한 프레임에 찍힌 사진들 모으고 있어요.”
“...”
“아, 이거 잘 나왔다.”
그걸 굳이 왜 내 방에 와서 하고 있냐.
이런 쪽에 눈치가 그리 좋지 않은 나라도 노골적으로 ‘어필하려고’ 저런 걸 하고 있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얘 요즘 들어 부쩍 적극적인데?’
아니, 진짜 요즘 들어 계속
그렇게 말하는 엘리야를 할 말을 잃고 바라보고 있자니, 소울 링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탁 하나만 해도 되냐.]
‘예?’
[둘이 거사 치룰 때는 제발 나 모르는 데서 해줘라.]
‘...’
[지금도 힘들어 죽을 것 같은데 그거 보면 진짜 두 번째로 사망할 것 같은데.]
‘...그럴 일 없어요.’
거사는 뭔 거사야.
예전에 유리아한테 이등분 난 것도 아직 생생한데, 그런 거 했다가는 내가 다른 악마의 그릇들한테 20조각이 넘게 분해돼도 이상하지 않다.
칼리반의 헛소리에 한숨을 내쉬며 아탈란테가 전달해준 서류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원래대로는 개막식이 진행되면서 사람들에게 다 공표되었을 용사 선발의 대략적인 진행 계획이 거기에 적혀 있었다.
당장 행사 도중 일어난 사건이 너무 폭탄급이라 전부 흐지부지 되긴 했지만, 관계자들에게 관련 서류가 전부 전달되긴 한 모양이지.
‘...제일 중요한 건...’
같이 시련에 참가할 후보자 리스트다.
경쟁자 리스트기도 하지.
내가 어떻게든 빡치게 만들어서 날 죽이려고 달려들게 만들어야 할 인간들의 목록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장 ‘변수’가 크게 터져나올 가능성이 높은 부분이기도 하고.
지금까지 내 행적을 돌아봤을 때, 항상 이런 부분에서
‘부족 연합은 쌍둥이 광전사로 두 명. 제국은 엘리야와...’
페이놀 라이펙.
그 이름을 보자마자 얼굴에 쓴웃음이 걸린다.
생각해보면 말이야.
< Quest Info >
[ 메인 퀘스트 ]〖 챕터 4 – 적야 〗
[ 관련 이벤트가 곧 발생합니다! ]
지금 챕터에서 메인으로 진행되는 이벤트 이름은 ‘용사 선발’인데, 챕터의 배경이 되는 메인 퀘스트의 이름은 ‘적야’다.
페이놀이 최종 보스로 등장하는 챕터가 그렇다지만, 문제는 어째서 놈이 ‘최종 보스’로 등장하게 되냐 그건데.
“...”
선발 도중에, 녀석이 폭주할 계기가 생긴단 거다.
그걸 막아내는 게 내 일이고.
[언제나처럼 뚝딱뚝딱 해결하면 되는 것 아니야?]
‘변수만 없다면 그렇겠죠.’
[음?]
‘악마 관련된 일이면 성황국 말고 무조건 얼굴을 들이밀 놈들이 하나 더 있거든요.’
내 편안한 시나리오 진행을 방해한다는 점에선 그쪽보다 훨씬 더 악질인 놈들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서류를 다음 장으로 넘긴다.
아무튼, 여기까진 나도 아는 목록이다. 게임 안에서 등장하는 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인선이지.
틀림없이 강력한 놈들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대처가 가능한 부분이다.
“...”
문제는.
성황국 쪽 리스트를 훑어보면서 튀어나왔다.
내가 그토록이나 경계하던 ‘변수’가, 아주 대놓고 얼굴을 떡하니 들이밀고 있었으니까.
1번 후보. 대신전 1학군의 수석. 아주 정석전인 인선이다. 나도 아주 좋은 선택이라고 박수를 쳐줄 수 있지.
문제는, 다른 놈인데.
“...좀 살살 가자.”
프로필에 비춰진 얼굴을 보고 있으니 신음처럼 그런 말이 흘러나온다.
딱 봐도 경박한 인상을 주는 남자 한 명. 겉으로 보기에는 여자 잘 후리는 제비처럼 생긴 놈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
그쪽을 보자마자 현기증이 엄습한다.
눈앞이 필 정도지.
세상이 너무 대놓고 나 엿 먹으라고 변수 부여하는 게 아닌가 싶은 억하심정마저 생기는 느낌이다.
그거야, 이 놈의 정체가.
“...밸런스 붕괴잖아.”
용사 선발 자체를 ‘애들 장난’으로 만들 수준의 괴물이니까.
토커.
선각자의 심복.
조각 두 개 짜리 엘노어도 제압 가능한 놈이, 거기에 떡하니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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