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65 - 165.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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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기운이 없네, 엘리야.”
팔코가 그런 말을 꺼내들자, 건너편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트리샤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야가 방에 틀어박혀 외부와 단절된 정도는. 요 며칠 정말 심각할 정도였으니까.
용사 선발 시험의 첫 번째 시련을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돌파해 놓고서 보이는 태도치고는 대단히 이상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대외적으로, 선발 시험 안에서 이뤄진 모든 내용은 기밀에 부쳐지고 있었으니까.
감정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여자가 아니라면 뭔가 그 안에서 큰 일이 터졌을 거라고 짐작조차 불가능했을 거란 소리다.
“...”
지금까지 아무 말 없던 트리샤가 그 말에 폭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엘리야가 대외적인 평가와 다르게 생각보다 기분의 고저가 대단히 심하다는 건 그들 전원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보통 이 정도로 낙담하는 경우는 보통 한 가지 경우뿐이다.
적어도 그녀가 알기로는 그랬다.
“다우드 씨는?”
“...그분은 왜?”
그녀의 질문에 팔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트리샤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기색이었지만, 역시 모범생답게 대답은 금방 꺼내 드는 모습이었다.
“소문 정도는... 듣긴 했는데.”
“소문?”
“그 사람, 원래 학부 안에 안 좋은 소문 엄청 드글드글 했잖아. 개 미친 난봉꾼이라고.”
“...”
슬프게도, 트리샤 역시 그 소문 자체를 부정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당장 엘리야 본인부터가 상대방이 그런 인간이라는 걸 알고도 콩깍지가 씌인 것 아니던가.
“그랬지?”
“그런데...”
거기까지 말을 꺼내놓은 팔코가 대단히 난감하다는 기색으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지금 그 분, 의무대에 입원해 있다고 들었거든?”
그럼 엘리야가 저 정도로 기운이 없는 이유도 거기에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공공연하게 그쪽을 ‘지키겠다’고 말하고 다니던 게 엘리야다. 의무대에 입원해 있다면 뭔지는 몰라도 어떤 ‘것’에서 다우드를 못 지켰다고 추리하는 게 합리적이겠지.
트리샤가 그렇게 생각하며 턱을 쓰다듬고 있자니, 팔코가 곧바로 다음 문장을 꺼내놓았다.
“그런데 그 앞에 여자들이 최소 열댓명 가깝게 우루루 몰려있대.”
“...”
“학부에서는 드디어 그 난봉꾼 새끼 업보를 청산할 기회라고 좋아하는 애들이 꽤-”
물론.
단순히 그쪽을 지키지 못하는 것 이상으로, ‘경쟁자’들의 면면을 한꺼번에 확인하게 된 이유도 있는 게 분명했다.
궁금한 점이라면, 대체 그쪽에 무슨 일이 있기에 평소라면 서로 대면대면했을 인간들이 한꺼번에 집결했냐는 거지.
‘...다우드 씨.’
트리샤가 고개를 돌려 현재 출입이 봉쇄된 의무대 건물을 바라보았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어지간히 대단한 일이 그 안쪽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시행된 조치일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신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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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실 안으로는 묵직한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침상 위로는 두 명의 인간이 나란히 누워있었다. 한 명은 유리아 그레이하운처. 한 명은 다우드 캠벨.
“상태는 어떻지?”
설리번 재상이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옆에 서 있던 성녀와 트리스탄 공녀도 그 말에 마른침을 꿀꺽 넘기며 인드라 경에게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이 놈, 대체 뭐 하는 놈이길래 그만한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거야?’
그런 생각이 의무대의 인드라 경의 머릿속으로 스쳐지나갔다.
당장 병실 바깥으로는 이 남자의 용태가 궁금해서 모여 있는 인간이 거의 열댓 명은 되었지만, 환자의 안정을 이유로 전부 의무대의 인드라 경한테 내쫒긴 상태였다.
그나마 대표로 뽑혀온 인간들이 이 세 명이고.
인드라 경이 조심스럽게 사방에 펼쳐둔 자신의 마력을 거둬들였다.
“양쪽 모두 생체 징후는 이상 없습니다. 몸에 뭔가 이상이 있지는 않단 소리죠.”
“...그럼 몸이 아닌 쪽은 어떠한가.”
그런 질문이 연이어 날아들자, 인드라 경이 입을 다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억 상실증에 대한 이야기라면... 저도 명확한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뭔가 ‘영혼’ 관련해서 대단히 복잡한 공정이 있었다는 건 알겠어요.”
“공정?”
“일단 이 다우드라는 남자의 몸은, 지금 ‘원래 영혼’이 없는 상태입니다. 누군가가 그걸 강탈해갔죠.”
“...”
인드라 경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유리아 쪽으로 홱 돌아갔다.
특히 설리번 재상의 눈에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증오마저 깃든 기색이었고.
“반응을 보니 다들 원인을 짐작하고 계신 것 같은데, 맞습니다. 마치 이 둘의 영혼이 뒤섞인 것 같아요. 이 유리아라는 학생의 몸 안에 이 두 명의 혼이 전부 들어가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하얀 악마가, 이 남자의 영혼을 꼭 붙들고 안 놓아주는 느낌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절대로 다른 사람 주지 않겠다고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하지만... 혼이 없다면 보통 아무 것도 못 하는 식물인간이 되어야 정상 아닌가요? 다우드는 어째서 거동이 가능한 거죠?”
혼은 대상의 기억과 인격을 담고 있는 저장 장치다.
개념적으로는 그게 몸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순간 몸은 죽은 고기나 다름 없겠지만, 다우드는 기억 상실 증상이 있으나마 멀쩡하게 움직였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게, 시련 마지막에 정령체가 등장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습니다만... 그게 무슨 관계라도?”
“지금 이 남자를 습격했던 정령체가 이 남자의 영혼을 ‘대체’하고 있어요.”
방 안에 있는 전원이 멍한 기색으로 눈을 끔뻑거렸다.
“대체?”
“육은 영혼을 담는 그릇이고, 영혼이 없더라도 그 ‘성질’만큼은 남죠. 이 남자, 그 짧은 순간에 대체 무슨 술수를 부렸는진 모르겠지만. 그 때 그 정령체를 ‘인공 영혼’으로 가공해냈어요. 자신의 영혼이 없더라도 육체가 무리 없이 작동할 수 있도록.”
“...”
그 방 안에 있는 전원이 침묵했다.
이야기만 들어도 그게 기적 수준에 닿은 묘기라는 건 금방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해가 안 가는 건, 그 짧은 순간에 그런 판단을 내리고, 실행으로 옮기고, 결국엔 성공해냈단 거지.
“...걸물은 걸물이야.”
설리번 재상이 신음처럼 그런 말을 흘리는 사이, 인드라 경이 다시 말을 덧붙였다.
“물론, 그런 묘기라도 결국엔 임시방편이긴 합니다, 이 유리아라는 학생 몸 안에 있는 영혼을 본디 육에 불어 넣지 못 한다면, 결국 육까지 죽고 말 거에요.”
그 말이 흘러나오는 것과 동시에.
병실 안쪽으로 묵직한
그와 동시에 병실 바깥쪽으로도 대단히 묵직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
‘...바깥 쪽은 왜?’
엘노어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병실 문쪽을 바라보았다.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엿듣고 있었던 게 분명하지.
아무튼.
“...방법은 있습니까, 인드라 경.”
엘노어가 침침한 목소리로 꺼내놓은 말에, 인드라 경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안타깝게도, 지금 당장은 없습니다. 정령체가 이 남자의 영혼을 대체하는 동안은 특수한 영향이 나타날 수 있으니,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해주는 것 정도가 있겠네요.”
“영향이라면...?”
“성격이나 행동 양식의 변화가 다소 있을 수 있습니다. 단순히 기억을 잃어버리는 것 이상으로요.”
“영향?”
“인공 영혼이라, 본인이 쌓아놓은 ‘지식’은 있는데 ‘경험’은 전부 날아간 상태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항력이 많이 낮아져 있을 겁니다.”
“...무슨 뜻이지, 그게?”
“간단한 말인데요, 재상님.”
인드라 경이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을 이었다.
“생각보다 대단히... ‘순진’해져 있는 상태일 가능성이 높단 이야깁니다.”
“...”
“누군가 뭐라고 속이려고 한다면 그대로 속아 넘어갈 가능성이 대단히 높단 소리죠.”
“...”
병실 안팎으로, 숨소리도 크게 들릴만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틀림없이.
폭풍전야와 같은 침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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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으으음...]
칼리반 크리사낙스가 깊은 침음성을 흘렸다.
방금 자기가 들은 게 도저히 안 믿긴다는 기색이었다.
이 녀석이 저녁에 정신을 차린 이후로, 어떻게든 말을 걸어 대화를 이어가는 것 까지는 성공해낸 참이었다.
[...너 지금 뭐라고 했냐?]
다우드 캠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진무구하게 뜬 눈동자에서는 방금 자신이 말한 게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기색이 절절하게 뿜어지고 있었다.
“...저는 난봉꾼 같은 사람이 싫다고 말씀드렸는데요?”
[...]
“이 여자 저 여자 건드리고 다니는 사람 중에 정신머리 똑바로 박힌 사람은 어디에도 없잖아요.”
[...]
“갑자기 그런 화제를 왜 물어보시는 지도 잘 모르겠는데요...”
[...어, 그렇지. 니 말이 맞다. 미안.]
정말로 당황스럽다는 듯이 얘기하는 모습에, 칼리반이 얼이 빠진 기색으로 답했다.
‘...이 새끼 누구야.’
기억 하나 잃었다고 본성까지 바뀌나?
이게 여자 여러 명 끼고 살겠다고 당사자들 듣는 앞에서 당당하게 말하던 새끼가 맞나?
“음... 그런데, 뭐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되나요?”
[뭘?]
“말씀하시는 걸 보아하니 기억을 잃기 전에 저랑 절친한 사이셨던 것 같은데, 저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절 위해 병문을 와 줬으니, 괜찮은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맞나요?”
[...어, 그게...]
“이상할 정도로 여성분들만 계셨던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다들 친구인 게 분명해요. 제 학창 시절은 좋은 친구들로 가득했나보네요!”
칼리반은 가디언이다.
기본적으로 정의롭고 심성이 착한 인간이란 뜻이다.
지금 이 아무것도 모르고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자신의 과거에 대해 묻는 순수한 영혼에게 진실을 알려주는 짓은 차마 그 심성으로는 못할 짓이고.
[...아니, 뭐. 그래. 어. 맞아...]
“역시 그렇죠?”
다우드가 씩 웃으며 그런 말을 꺼내놓자, 칼리반이 차마 뭐라고 더 답할 수가 없다는 기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평소랑 다르게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기색이 절절하게 전해져서 두 배는 더 당혹스럽다.
그가 속으로 그런 감정을 씹어삼키고 있자니, 누군가 다우드의 병실 문을 두드렸다.
“...간병인이 올 시간은 아닌데요?”
고개를 갸웃거린 다우드가 그렇게 말하며 침상에서 일어섰다.
시간도 한참 늦은 저녁이다. 면회객이 올 수 있는 시간도 아닐 텐데. 대체 누구지?
그런 생각을 하며 문을 열자, 거기엔 다우드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아, 그러니까, 엘리야 씨...?”
다우드의 목소리에 반가움 반, 당혹 반이 섞였다.
자신이 쓰러졌을 때 그대로 들쳐 업고 미친 듯이 의무대로 달려간 고마운 사람인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왜 정규 면회 시간이 아니라 이런 야트막한 시간에 찾아왔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묘하게 얼굴이 붉은 엘리야가 다우드의 어깨를 콱 틀어쥐었다.
“...다행이다.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에 제가 먼저 왔네요.”
“...엘리야 씨?”
자세히 보니까 숨결도 묘하게 달콤하다.
“...열이라도 나시는 건가요? 인드라 경을 호출할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
아니, 그냥 뭐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에 눈이 뒤집힌 것 같은데.
칼리반이 차마 입 바깥으로 꺼내놓지 못한 말을 곱씹는 사이, 엘리야가 숨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 잘 들으세요.”
“예, 잘 들을게요.”
얌전하게 나오는 대답에, 엘리야가 큽, 하는 소리와 함께 가슴을 틀어쥐었다.
뭔데 귀엽지, 이 사람.
인드라 경한테 이런 식으로 굴 거라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이렇게... ‘순진한’ 다우드는, 생각 이상으로 파괴력이 좀 있다.
“...”
물론.
그런만큼이나, 지금 그녀가 할 짓은 도저히 인도적으로 옳은 행동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다른 여자들에게 선수를 뺏길 수는 없다...!
그 무시무시한 여자들에게서 이 사람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도의 방책이다...!
“다른 녀석들이 앞으로도 뭐라뭐라 헛소리를 할 거긴 한데요. 그런 말은 듣지 마세요. 제 말만 들으세요. 아시겠죠?”
“...예?”
“일단 선생님이 알아야 할 사실 한 가지가 있어요.”
엘리야가 심호흡을 했다.
“선생님이랑 저, 사실 약혼한 사이에요.”
“...”
다우드의 얼굴이 살짝 창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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