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66 - 166. 다들 입만 열면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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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우드가 뭐라고 말을 꺼내놓지도 못하고, 멍하니 엘리야를 마주보고 있자니.
그녀가 대답조차 기다리지 않고 이어서 문장을 와다다 쏘아붙였다.
“선생님은 제 약혼자고, 그러니까 제 말만 들으시면 괜찮을 거에요!”
“...저기, 그, 엘리야 씨-”
다우드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엘리야가 말을 턱 끊고 들어왔다.
“그, 그, 그러니까-! 푸, 푹 쉬세요! 다음 시련 때 다시 봬요!”
와다다 쏘아붙이는 문장이었다.
마치, 지금 이 자리에서 그의 대답을 들었다간 뭔가를 주체할 수가 없을 거란 것처럼.
잔뜩 붉어진 얼굴을 감싼 엘리야가 그대로 도망치듯이 병실 바깥으로 뛰쳐나가는 걸 보고 있던 다우드가, 이내 홀린 듯한 몸짓으로 비틀거리며 자신의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저기요, 칼리반.”
[어.]
칼리반이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감각을 애써 억누르며 간신히 대답했다.
세상에.
자기 여동생이 이제 하다하다 저기까지 굴러떨어지는 꼴을 직관하게 되다니.
평소에 이 녀석을 놀리던 업보를 그대로 돌려받는 기분이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요.”
[음.]
그래, 그 충격이야 이해한다.
느닷없이 처음 보는 여자가 약혼녀라면서, 살아남으려면 자기 말만 들으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고 있다면야 누구나 황당함에 머리가 어지러울-
“저, 약혼녀까지 잊어버릴 만큼 정신머리가 똑바로 안 박혀있던 사람이었나요?”
[...]
칼리반이 아득해지는 의식을 간신히 붙들었다.
그거야... 아니지.
절대 아니다.
정신 머리가 똑바로 안 박혀있던 놈이라는 사실 자체엔 동의하지만.
사실 엘리야가 이 녀석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고 싶어서 몸을 비트는 건 눈에 뻔히 보이긴 했는데.
다우드는 어디까지나 ‘선각자 문제와 악마들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누구와도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지 않는다’가 모토였으니까.
[...몰라.]
“어, 전부터 저를 알고 계셨다 하지 않으셨나요? 제가 약혼자 얘기도 아예 모르는...”
[모르는 건 모르는 거라고, 새끼야.]
“...”
순수하게 질문하는 녀석에게 패악질을 부리는 건 칼리반으로서도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약혼은 무슨...!’
칼리반이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뒷목을 잡으며 속으로 그런 비명을 질렀다.
적어도 자기 여동생이 욕심에 눈이 멀어서 사기를 치고 있다는 걸 오빠라는 인간의 입으로 실토하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그래도 충고 하나만 하자면.]
“예.”
[너한테 다른 여자들이 하는 말은 한 번... 심사숙고 해보는 게 좋긴 할 거다. 그게 진짜로 하는 말인지.]
그나마 이 정도로 힌트라도 던져주는 건 최소한도의 양심이었지만.
오히려 다우드가 그 말을 듣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며 소울 링커 쪽을 돌아보았다.
“그럼 그런 걸로 거짓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
있었지.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두 자리에 가까운 수의 여자에게 그러고 다니던 놈팽이가 한 놈 있었다.
“농담하지 마세요. 사람 마음 가지고 장난 치는 천벌 받아 마땅한 인간이 어디에 있습니까.”
[...]
“엘리야 씨도 그렇고, 다른 분들도 그런 사람이라고 함부로 의심하는 게 말이나 되겠습니까. 그렇게나 좋은 분들인데.”
[...]
“오히려 그런 사람들과의 관계도 똑바로 기억해내지 못한 제가 너무 죄스럽죠.”
말하는 건 하나하나가 정론이다.
분명히 맞는 말이기는 한데...!
‘...좆됐네.’
칼리반이 그런 문장을 뇌까렸다.
적어도.
너를 포함해서 니 주변에 있는 인간들은 하나같이 다 정신 나간 인간들이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순순히 알려줄 수 있는 분위긴 아니다.
칼리반이 그렇게 생각하며 스스로의 시야를 옆쪽으로 슬쩍 돌렸다.
다우드 옆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유리아가 그쪽에 있었다.
지금, 저 몸에는 하얀 악마가 다우드의 영혼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려 온갖 수작을 다 부리고 있겠지.
[...]
어차피 죽을 거란 생각은 안 한다.
그동안 이거보다 더하면 더 했지 결코 덜 한 위기에 휩쓸리던 놈은 아니었으니까.
그 모든 상황에서도 결국 끝끝내 살아남았으니, 이번에도 무슨 술수를 부려서라도 빠져 나올 건 분명할 것이다.
다만, 바라는 건.
‘부탁이니까, 빨리 돌아와라...!’
제발.
다우드란 녀석이 지금 이 순간만큼 그리운 적이 없었다.
눈앞에서 악마의 그릇들이 극한까지 추해지는 걸 그만 보고 싶은 마음은, 그가 누구보다도 절실한 것이 분명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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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선발은 공식적으로는 진행 중이지만, 현재는 소강상태에 접어든 참이었다.
물론 대외적인 이유로는 그저 다음 시험 장소인 투쟁의 용광로에 두 번째 시련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겠지만, 어느 정도 정보력이 좋은 사람들은 내막을 알고 있을 것이다.
시련을 주관하는 패권국들의 수장이 며칠 정도는 시련을 유보 시키자는 내용에 모두 동의했으니까 일어난 일이다.
아마, 그들의 모든 관심은 결국 이 남자에게 집중되어 있을 테니 일어난 일이렸다.
제국의 황제와 재상, 부족 연합의 대족장, 심지어는 성황국의 법황까지.
“...당장은 별다른 이상이 없어 보이네요.”
루시엔이 그런 생각을 쭉 떠올리며, 다우드의 몸 위에 올려놓고 있던 손을 치웠다.
양손에 신성력을 발휘하여 이 사람 몸 안에 어떤 이상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쭉 점검한 참이다.
육에 깃든 영혼이 정령체로 대체된 지금, 이 남자의 영과 육에 어떤 이상이라도 없는 지 검사를 맡는 건 대체로 그녀의 일이다.
물론 엘판테 의무대의 인드라 경 또한 대단히 믿음직한 인재지만, 적어도 영혼 관련된 문제에서는 성직자들의 정밀한 점검을 따라올 자들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
바꿔 말하면.
그녀 정도 되는 역량에 도달한 성직자라고 해도, 당장 이 남자에게 해줄 수 있는 건 현재 상태의 점검뿐이란 소리다.
본래의 인격을 되찾게 해줄 만한 ‘대책’은 아직 그 누구도 내놓지 못한 상태였다.
트리스탄 공녀는 방법을 알아보겠다며 도서관에 틀어박혔고, 설리번 재상은 방법을 논의하겠다며 마찬가지로 황궁 내부의 회의실에 틀어박힌 상태였다.
루시엔 본인 또한, 이 남자를 도와줄 뾰족할 수단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고.
‘...얼마나, 죄스러운 일입니까.’
루시엔이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옆 침대에 누워 있는 유리아를 흘끗 바라보았다.
자신의 여동생을 탓하고픈 마음은 없다.
하지만, 이 남자가 그녀와 동생 때문에 두 번이나 큰 봉변을 당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자신과, 동생은.
평생에 걸쳐 이 남자에게 속죄해야 할 지도.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사이, 다우드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그녀에게 말을 던져왔다.
“언제나 감사합니다, 성녀님.”
“...”
그녀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의 눈앞에 경건히 예를 취하고 있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평소라면 그녀가 필요한 일이 생겼다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들이밀면서 이것저것 요구해대는 남자가, 지금은 정말로 자연스럽게 그녀를 ‘성녀’ 취급해주는 모습은 그야말로 어색하기 짝이 없다.
“...아니요. 제 여동생도 엮인 일이니까요.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
그렇게 말을 이어가려던 루시엔의 문장이 뚝 끊겼다.
탈의 상태던 다우드가 상의를 걸치면서 근육이 생동감 있게 꿈틀거리는 모습이 눈앞에 생중계 되고 있었으니까.
이 남자, 예전이랑 다르게 쓸데없이 몸이 좋아졌다.
최근 아카데미 내부에는 이 남자의 모습을 보고 ‘슬슬 이 정도면 외모만큼은 봐줄만 하지 않냐’라는 말이 여학우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돌고 있을 정도로.
‘...이, 이 무슨 불경한...!’
루시엔이 그렇게 생각하며 얼굴을 쓸어내리는 사이, 그 모습을 본 다우드가 다시 눈을 감고 조용히 머리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불경한 모습을 보여드렸군요.”
“...왜, 왜 사과하시는 건가요?”
“숭고한 경지에 오른 것이 분명한 성녀님께서는 이런 걸 봐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으시겠지만, 그래도 노파심에...”
“...”
이 남자, 알고 이러는 건가.
사람 가슴에 쿡쿡 박히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다.
“그나저나, 몸에 이상이 없다는 건 조금 격렬한 행동을 해도 상관이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기는 합니다만... 무엇 때문에 그러십니까? 혹시, 무언가를 당신에게 부탁하는 인간이라도?”
루시엔이 싸늘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혹시라도 이 남자에게 손익 관계를 따지며 뭔가를 시키는 인간이 있다면, 절대 참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남자는 지킴을 받으며 쉬어야 할 대상이다. 눈치도 없이 감히 자신의 용건만을 들이대는 인간이 있다면-
“아,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
그녀의 모습을 본 다우드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저는 엘리야 씨와 함께 용사 선발에 참여 중이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아주 당연하다는 듯 흘러나온 대답이었다.
“그녀와 함께 하기로 한 일이 있다면 반드시 마무리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어서, 미소가 그 얼굴에 걸렸다.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
루시엔이 주먹을 꽉 쥐었다.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다. 방금 그 말 한 마디 만으로, 온몸의 핏줄이 싸늘하게 식는다.
왜 이런 감정이 드는 진 그녀로서도 잘 알 수가 없었다.
감히 자신이 이 남자의 호의가 다른 여자에게 향해있다고 거기에 불만을 토해낼 처지가 아니라는 건 잘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
가슴이, 아파.
이유조차 알 수 없는데도. 왜 그렇게 아픈 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이 남자가 다른 여자를 그렇게 소중히 대한다는 걸 인지하자마자, 그런 감각이 찾아온다.
잘 열리지 않는 입을 간신히 열어 문장을 꺼내놓는다.
“...위험할 수도 있어요, 다우드 캠벨.”
“그래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이 남자는, 기억을 잃은 상태다.
그런데도,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저도 모르게, 루시엔이 그런 질문을 입에 담았다.
왜, 자신은 이 남자에게 그렇게나 죄를 많이 저지르고 마는데.
다른 이들은, 무슨 연유로 기억을 잃은 남자에게 이 정도로 소중한 호의를 받는단 말인가.
그 차이점이 무엇이기에.
“예? 당연한 것 아닙니까.”
이번에도 아주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엘리야 씨는 제 약혼자라고 들었습니다만?”
“...”
상상도 못한 이유에, 루시엔이 뒤통수에 망치를 한 대 얻어맞은 얼굴이 되었다.
‘...웃기시네...!’
약혼녀는 무슨...!
루시엔이 경악하여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상태로 그런 문장을 연이어 떠올렸다.
이거, 수작질 부린 거다.
기억을 잃고 쉽게 속아 넘어가기 딱 좋은 남자에게 그런 좋을 대로의 욕망을 들이민 거다.
‘...그래, 그렇게 나오시겠단 거지...!’
그렇다면, 그녀도 참을 수 없다.
“그럼, 저도 그런 행동을 말릴 정단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다우드에게, 루시엔이 발끈하여 입을 열었다.
“저, 저는, 당신이 기억을 잃기 전에, 그러니까...!”
그런 말을 꺼내놓으려다가.
이내 말문이 턱 막힌다.
“...”
자신 말이지.
이 남자와, 무슨 관계지?
연인은 아니다. 여자친구도 아니다. 지인은 너무 애매하다.
말하자면 필요한 용건이 있을 때마다 찾아와서 이 남자가 자신을 부려먹고 가는 도구 같은 입지지만, 그걸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잖은가...!
“...성녀님?”
의아하다는 기색으로 자신에게 말을 건내는 다우드의 모습을 본 루시엔의 얼굴에 다급함이 깃들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그,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우드가 멋쩍은 웃음을 얼굴에 걸며 그렇게 말했다.
“어차피 성녀님 같은 분과 저 따위가 무슨 대단한 관계를 맺으셨겠습니까. 대륙에서 가장 존귀한 분 중 하나인데요.”
“...”
“제가 실수로 성녀님께 폐를 끼치지나 않았으면 다행입니다.”
따뜻한 말이다.
하지만, 웃긴 일이지만.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오히려 그런 말을 했기 때문에, 이 남자가 그녀에게 저지른 불경 중 가장 어마어마한 것이 떠올라 버렸으니까.
“...”
온 몸이 으슬으슬 떨릴 정도로 불경하고, 수치스럽고, 평소의 루시엔이라면 결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생각이지만.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저지르지 않으면 진다. 이미 다른 사람에게 선수를 빼앗기기도 했다.
그러니까.
“...”
루시엔이 심호흡을 하고,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언제 이 남자에게 호출될지 모르니까 상시 소지하고 있던 물건이다.
목줄.
개 목걸이에 가까운 디자인의 그것.
“...성녀님?”
느닷없이 이상한 물건을 꺼내든 루시엔의 모습을 본 다우드가 그렇게 말했지만.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그걸 자신의 목에 턱 걸었다.
아, 이걸 직접 입 바깥으로 꺼내려니까 전신에 경련이 올 지경이다.
하지만, 해야한다.
그래야 이 남자를 다른 여자들의 수작질에 휘말리지 않게 할 수 있다...!
“...저, 저는...”
루시엔이 눈을 질끈 감으며, 자신의 목에 건 목줄의 손잡이를 다우드 앞으로 내밀었다.
“당신의 애완동물...이었는데요...”
“...”
다우드의 입이 쩍 벌어졌다.
“다, 당신이, 저, 저를, 이, 이렇게 만들었으니까...”
“...”
“채, 책임지고, 가셔야, 하는! 그런특별한사이에요-!”
숨도 쉬지 않고 쏟아지는 마지막 문장을 듣자마자.
다우드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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