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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 사랑받는 운명입니다 (167)화 (168/258)

Chapter 167 - 167. 타협

 

 

“...칼리반.”

 

 

다우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수전증이라도 온 것 마냥 위태롭게 부들거리는 다른 쪽 손 위에는, 방금 성녀가 맡기고 간 목줄이 들려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방금 들었던 문장이 재생되고 있었다.

 

 

-가, 가끔, 저를 위해서라도 이걸 채우고, 사, 산책에 나가도록 해요!

 

-...

 

-그, 그런 행동을 정기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건강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니까. 절대로 다치지 않도록 유의하세요! 그럼 전 이만...!

 

 

대단히 부끄럽다는 기색으로 또 와다다 쏘아붙이긴 했다만,

 

거기까지 회상을 마친 다우드가, 자괴감이 물씬 배어 나오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 대체 기억을 잃기 전에는 무슨 짓을 하고 다녔던 겁니까?”

 

[...]

 

 

글쎄.

 

지금 그걸 말해주면 아마 본인이 자살할 수도 있으니까 묵비권을 행사하는 편이 낫겠지.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지.]

 

“제가 지금 들은 말을 정리해 보면.”

 

 

다우드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말했다.

 

 

“대륙 단위에서 촉망받는 천재인 용사 후보와 약혼한 상태에서, 성황국의 신앙을 믿고 있는 모든 종교인들의 우상인 성녀에게 목줄을 채워서 끌고 다녔다는 겁니까?”

 

[...]

 

“...그것도 본인이 저한테 와서 애완동물이니 뭐니 하는 말까지 할 정도로 자주?”

 

[...]

 

 

정리해서 들어보니까 어마어마하긴 하다.

 

비록 한쪽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지만, 그런 거짓말을 칠 정도로 홀딱 빠지게 만든 건 틀림없이 이 녀석의 작품이니까.

 

이 녀석이 몰고 다니는 사건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확 체감이 되는 느낌이랄까.

 

 

“...불륜 아닙니까, 이거?”

 

[저번에도 얘기했지만. 네 주변 여자들이 하는 말은 한 번 정도는 걸러 들어야 하는 게 좋을 거다.]

 

 

 

다우드가 신음처럼 내뱉는 질문에, 칼리반도 한숨과 함께 그리 답했다.

 

물론 성녀의 경우에는 선동과 날조 하나 안 섞인 진실 밖에 없긴 했다만, 그래도 하여튼 본인도 저렇게 먼저 와서 ‘산책’시켜 달라고 조를 정도는 절대 아니었으니까.

 

이 녀석이 정신이 나간 틈을 타서 어떻게든 수작질을 부리려고 했다 보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잠깐만.’

 

 

칼리반이 문뜩 섬뜩한 생각을 떠올리며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제 이 녀석이 기억을 잃은 지 겨우 이틀째인데, 그 새를 못 참고 두 명이 달려들어서 이 녀석을 구워삶으려고 시도했다.

 

그것도 그나마 이 녀석한테 집착을 덜 하는 부류의 인간들이.

 

그러면, 이 녀석 근처에 있는 여자들의 숫자와 면면을 봤을 때, 이건 겨우 시작일 가능성이 높다...!

 

 

‘...시작이 약혼녀, 그 다음은 애완동물, 그 다음은 뭐야?’

 

 

그렇게 생각한 칼리반이 전율하는 사이, 다우드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뭔가 아주 단단히 결심했다는 기색이었다.

 

 

“칼리반 씨.”

 

[어?]

 

“저, 아무래도 직접 확인해봐야겠습니다.”

 

[뭘?]

 

“이렇게, 제가 약혼녀를 두고 염문을 흩뿌리고 다닌 사람들이 또 있는지요.”

 

[...]

 

“설마 제가 그 정도로 정신 나간 사람도 아니고, 성녀님한테 그런 일까지 한 상황에서 그런 사람이 더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하지만...”

 

[...그거 있잖아. 한 번만 다시 생각보는 게 어떨까?]

 

 

틀림없이, 그다지 권장되는 일은 아니다.

 

지금 이 남자가 만난 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그나마 이 녀석 근처에서 가장 순둥순둥한 부류 두 명.

 

더 만났다간 진짜로 못 버틸 수도 있겠지.

 

그런 생각에 칼리반이 만류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이내 그 입이 다시 닫혔다.

 

제일 큰 이유라면.

 

 

‘...어차피 지가 쌓은 업보인데, 뭐.’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 녀석이 안 찾아가도 알아서들 찾아올 거다.

 

늦든 빠르든 알게 될 건데 그걸 막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아니야. 됐다. 누구부터 만나러 갈 건데.]

 

“...누구라고 할까요. 질문이 이상합니다만.”

 

[응?]

 

“전 다 같이 불러 모아 놓고 혹시 제가 손댄 분이 더 있는지 여쭈려고-”

 

[...야. 잠깐 앉아 봐.]

 

 

아무리 언젠가는 닥쳐올 일이라지만.

 

본인이 직접 자살하러 가겠다는 건 말리는 게 맞을 것이다.

 

 

 

 

세상에는 서로 결이 절대로 맞지 않는 인간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아마 이 자리에 합석해 있는 인간들은 그 말이 참으로 맞다는 것에 진심으로 동의할 것이다.

 

 

“...”

 

“...”

 

 

엘노어와 설리번 재상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마 시선에 물리력이 있었다면, 지금 그대로 스파크가 튀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무시무시한 적의가 그 시선에 섞여 있었다.

 

 

“...용케도 초대에 응하셨네요, 트리스탄 공녀.”

 

 

설리번 재상이 싸늘한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라도 안 오겠다고 버틴다면 직접 사람을 보내 억지로라도 끌고 오려 했습니다만.”

 

“트리스탄 공작가는 예의와 도리와 절차라는 걸 아는 가문입니다, 재상님.”

 

 

그걸 들은 엘노어도 조소가 담긴 목소리로 응수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사람을 죽이면서 몸집을 불리는 게 익숙한 이들에겐 낯선 개념이겠습니다만.”

 

“...”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지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누굴 가리켜 하는 말인지는 뻔한 문장이었다.

 

덕분에 근처에 있던 시종과 수행원들은 전부 죽을 맛이라는 표정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존귀한 축에 들어가는 여자 두 명이 서로 잡아먹으려고 으르렁거리는 건 근처에 있기만 해도 피가 버쩍버쩍 마르는 경험이 틀림없을 테니까.

 

트리스탄 공작가와 재상의 사이가 안 좋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사석에서 서로 죽일 듯이 험담을 주고 받는 것을 보면 특히나 더 체감이 잘 될 것이다.

 

 

“...피차 서로 잡담이나 나눌 사이도 아니고 하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그리고, 그 사실을 바꿔 말하면.

 

 

“캠벨 자작 이야기입니다, 공녀. 당신도 짐작했으니 아무렇지도 않게 제 집무실에 성큼성큼 들어왔겠죠”

 

 

여러모로 경악스러운 사실이다.

 

이 두 명조차, 아주 잠깐이나마 서로 협력하게 만들 수 있는 남자의 존재가 있다는 건.

 

 

“...저희 둘 다 같은 결론에 도달했겠죠. 당신도 머리가 안 굴러가는 인간은 아니니까요, 공녀.”

 

 

설리번이 침착한 목소리로 꺼내는 문장에, 엘노어도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문헌을 샅샅이 뒤져본 결과, 하얀 악마에게 당한 ‘피해자’는 그쪽이 만들어 낸 심상 세계에 갇히게 된다고 들었습니다. 외부의 간섭은 어떤 것도 무의미하다고.”

 

 

그러니까 엘판테에 있는 고급 인력조차 손도 못 대는 상태로 죽을 쑤고 있는 것이리라.

 

 

“...”

 

“...”

 

 

엘노어와 설리반이 말 없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아마 지금 양쪽 다 똑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있겠지.

 

악마 단위의 존재가 진심으로 힘을 쓰기 시작하면, 그걸 대응할 수 있는 건 치천사 수준에 달한 천상의 존재나.

 

같은 악마뿐이다.

 

 

“...슬픈 이야기입니다만.”

 

 

설리번이 날 선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저 남자를 구하기 위해서 ‘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저는...”

 

 

문장을 이어가려던 그녀의 목소리가 잠시 뚝 끊겼다.

 

이어서 눈도 스르르 감긴다.

 

기억에 짓눌리는 것 같은 모습이다.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누군가’와의 추억을 기리는 것처럼.

 

아련한 분위기였다.

 

 

“...사정이 좀 있거든요.”

 

“...”

 

“제 안에 있는 ‘존재’의 힘을 쓰는 데 제약이 좀 많이 걸립니다. 특히 저 남자가 상대라면.”

 

 

엘노어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또, 알아듣지 못 할 이야기다.

 

혼자서만 아는 이야기를 하는 건 아무래도 상관 없는데.

 

자신은 알지 못하는 이야기에 자꾸 다우드를 엮는 것은 대단히 불쾌하다.

 

이어지는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튀어나오는 것은 그 때문이었으리라.

 

 

“...제 몸에 깃든 게 ‘악마의 조각’이니, 그 힘을 이용한 협력을 약속 받고 싶으신 거라면-”

 

“아니.”

 

 

설리번이 날카로운 미소를 지으며 엘노어의 말을 끊어냈다.

 

 

“당신의 몸에 깃들어 있는 건 단순히 ‘악마’가 아니에요, 공녀.”

 

“...무슨 말씀이십니까.”

 

“같은 단위로 묶는 게 가능은 하니까 다들 회색 악마라고 부르고 있기는 하지만. 그건 그 중에서도 특히나 격이 다른 존재에요. 그러니까 이런 부탁도 당신에게 드리는 겁니다.”

 

“...”

 

“다른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당신만이 가능하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설명을 잠자코 듣고 있던 엘노어가 이야기를 뚝 끊었다.

 

 

“결론만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붉은색 눈동자가 황금색 눈동자를 투명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제가 당신에게 협력하면, 다우드를 구할 수 있습니까?”

 

“구할 수 있습니다, 공녀. 당신이 죽을 수도 있지만.”

 

“방법이 뭡니까.”

 

 

망설이지 않고 튀어나온 대답에, 설리번이 실소를 흘렸다.

 

 

“...조금은 망설여 보시는 게 어떠신가요.”

 

“다우드 관련된 일입니다. 목숨을 거는 건 대단한 일도 아니죠.”

 

 

정말 그 말대로, 딱히 무슨 대단한 결의가 담긴 어투조차 아니었다.

 

마치, 그렇게나 당연한 일이란 것처럼.

 

그 남자 관련된 일이라면, 자신의 목숨 정도는 얼마든지 바칠 수 있다는 것처럼.

 

 

“...”

 

 

설리번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눈을 감았다.

 

 

‘...이전에도 그랬지. 항상 그랬어.’

 

 

그 마음만큼은, 그녀가 ‘보아온’ 모든 상황에서도 항상 한결 같았다.

 

어떤 파국으로 치닫더라도, 어떤 선택이 어떤 파멸적인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엘노어와 회색 악마의 행동 양식은 항상 동일했다.

 

다우드 캠벨을 위한다.

 

그게 무슨 대가를 가져올지라도.

 

 

“...욕심에 불과할 뿐이지만.”

 

 

하지만, 그 ‘결과’를 예상할 수 있는 입장에선 그런 말밖에 해줄 수 없겠지.

 

 

“...예?”

 

“아무것도 아닙니다.”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답하는 엘노어에게, 설리번이 대수롭잖다는 목소리로 응수하며 다시 엘노어를 바라보았다.

 

 

“일단. 방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드리기 앞서 여쭐 것이 있습니다.”

 

 

설리번이 엄격한 표정으로 꺼내놓는 말에, 엘노어의 표정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대체 무슨 질문이 날아올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분위기를 잡는 걸 보면 최소한 헛소리는 하지 않을 것이 분명-

 

 

“당신, 캠벨 자작과 했던 가장 과격한 행위가 뭡니까?”

 

“...예?”

 

“이성적으로 과격한 행위 말입니다. 당신 같은 쑥맥이니 어지간해서는 아닐 거라 생각하긴 하는데, 혹시 동침이라도-”

 

 

상상도 못 한 질문에, 엘노어가 답지 않게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뭐, 무, 당, 지금 대체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안 해봤다는 반응이군요. 그거 다행이네요.”

 

 

설리번이 대단히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저도 아직 못 해 본 걸 당신이 했다면 정말로 죽이고 싶었을 테니까요.”

 

“...”

 

“첫 번째는 제가 가져가고 싶거든요.”

 

 

아, 그래.

 

다우드와 재상을 포함한 누구와도 동침한 적이 없구나.

 

지식이 늘었다.

 

 

“뭐, 그건 그냥 제 개인적인 사담이었고...”

 

 

정작 그런 말을 꺼내놓은 설리번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얼빠진 엘노어에게 문장을 계속 던지고 있었지만.

 

 

“당신이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는 건 정말 천운입니다, 공녀.”

 

“...”

 

“당신이 당신의 몸뚱아리만큼 문란해서 이미 그 남자에게 손을 댔다면, 이 방법은 절대 불가능-

 

“...설리번 재상.”

 

 

엘노어가 슬슬 두통이 몰아치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보통 그녀는 이걸 남에게 선사하는 쪽이지 느끼는 쪽은 아니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인 모양이다.

 

 

“부탁이니까, 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 부탁드립니다.”

 

 

참으로 진심이 담긴 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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