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 사랑받는 운명입니다 (174)화 (175/258)

Chapter 174 - 174. 연극 (4)

 

 

유리아의 저택 투어는 해가 다 저물어가는 저녁 시간이 되어서야 끝났다.

 

정확히는 인공조명이 어둑어둑해지는 시간이겠지만.

 

 

“...”

 

 

하늘을 올려다보면 태양처럼 보이는 뭔가가 떠 있긴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조형물이 술식에 따라 움직이는 것에 불과하다.

 

시설 자체가 지하 깊숙이 숨겨져 있단 소리지.

 

참 편집증적으로 꾸며놓기도 했다.

 

 

“이만하면 시종 씨도 저택에 대해 잘 아실 거라고 믿겠습니다.”

 

 

어린 유리아가 엣헴, 하는 동작과 함께 당당하게 그런 말을 내뱉었다.

 

나에게 여길 전부 소개시켜 준 것이 어지간히 자랑스러운 모양이라, 나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쳐준다.

 

이에 녀석이 더욱 우쭐해진다. 가슴팍이 확 치솟아오르고 콧숨까지 흥, 하고 내뿜는다.

 

머리까지 쓱쓱 쓰다듬어주니 곧바로 정색하긴 했지만.

 

 

“...뭡니까. 어린애 취급하는 겁니까.”

 

“...”

 

 

그러게.

 

어쩌자고 나름 고용주한테 이런 짓까지 했을까.

 

예전부터 느끼는 건데, 난 어린애를 좀 과하게 귀여워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 녀석처럼 어린 동생 느낌을 주는 경우라면 더더욱.

 

 

“...”

 

 

옛날 생각이 좀 나거든.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그런 생각을 털어낸다.

 

유리아에게 빙그래 미소를 지으며 손을 치운다.

 

 

“미안합니다. 기분 나쁘셨나요?”

 

 

하지만, 그런 말을 내뱉자마자 유리아가 내 손을 덥석 붙들었다.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그쪽을 보고 있자니, 녀석이 한참동안 입을 우물거리다가 이내 간신히 입을 떼어놓았다.

 

 

“...그만두라고는 안 했습니다.”

 

“...”

 

 

상관이고 뭐고 어린애가 맞긴 한가보다.

 

머리가 헝클어질 때까지 녀석을 벅벅 쓰다듬어준다. 고양이가 고로롱거리는 것 같은 기분 좋은 표정이 녀석의 얼굴에 떠올랐다.

 

 

‘...너그러운 걸 넘어서 물러터졌네, 진짜.’

 

 

이쯤되면 누가 고용주인지도 모르겠다.

 

늦잠 잔 나를 이 녀석이 깨우러 오지를 않나, 내 일을 가르쳐주겠다고 하루 종일 자기가 더 바쁘게 움직이질 않나.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자니, 이내 주변에서 쏟아지는 다른 인간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

 

 

정말, 정말로.

 

내가 이 녀석하고 가까이 붙어있는 걸 불쾌하게 여기는 눈치들이다.

 

이런 ‘것’에게 내가 이런 관심을 주는 것 자체가 불편하다는 것처럼.

 

 

“...슬슬 들어가서 주무셔야지요, 아가씨.”

 

 

치밀어오르는 불쾌감을 못 참고 그런 말을 꺼내놓았다.

 

이 녀석들 사이에서 유리아를 때어 놓아야겠단 생각에 꺼내놓은 말이었지만.

 

그런 말을 듣자마자, 유리아의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

 

 

뭐지.

 

방금 한 말에 뭔가 실수라도 있었나.

 

 

“버, 벌써...요?”

 

 

녀석이 떠듬떠듬 꺼내놓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한다.

 

“저택 구조도 전부 알려주셨고, 시간도 꽤 지나지 않았습니까.”

 

“...저, 저택 안에, 아, 아직, 둘러보지 못한 곳이 있을 수도 있... 있...”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거리는 녀석을 보고 있으니,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내가 한 말에 실수가 있는 게 아니라.

 

유리아가 지금, 나랑 떨어지는 걸 무서워하고 있는 거다.

 

 

“...”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해결법도 간단하다.

 

 

“...그럼 오늘만 특별히 아가씨를 재워드리도록 할까요.”

 

“...!”

 

 

순간 확 밝아지는 녀석의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하여 공주님은 왕자님을 만나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베드 타임 스토리라는 건 그 개념을 듣기만 했지, 내가 남한테 읽어주는 건 또 처음이다.

 

고전적인 이야기다.

 

세상에게 핍박받던 공주님, 그걸 구해주는 백마 탄 왕자님.

 

어떤 동화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기분 좋은 해피 엔딩.

 

 

“...”

 

 

하지만, 그런 흔해 빠진 이야기를 들은 유리아의 눈동자는 더 없이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아름다운 이야기에요...”

 

“...그렇습니까?”

 

“네. 왕자님이 마지막에 공주님 12명과 동시에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이 특히 인상 깊었어요.”

 

“...”

 

 

그런 내용이 있긴 했지.

 

애들 읽는 동화에 이상한 걸 쑤셔 넣는 편찬자들도 제정신이 아닌 게 틀림없다.

 

 

“왕자님이 조금 이상할 정도로 쉽게 여자를 꼬시는 게 독자 입장에선 이게 뭔가 싶기도 하고, 난관을 이상할 정도로 쉽게 돌파하고, 그렇게 꼬신 여자들 전부를 난봉꾼처럼 후려치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이야기에요...”

 

“...”

 

 

이상하네.

 

왜 내 가슴이 아프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유리아가 머뭇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요, 시종 씨.”

 

“예, 아가씨.”

 

“저한테도, 그런 왕자님이 찾아올까요?”

 

“...”

 

 

말문이 턱 막힌다.

 

글쎄.

 

이 녀석한테 직접 말하기는 미안한 내용이지만, 이 뒤에 이 녀석이 겪는 건 단절자와 접촉 이후 저택 전체에 피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거다.

 

아마 ‘액막이’의 역할을 깨우기 위해 법황이 강제적으로 그런 ‘무대’를 만들어 놓겠지.

 

 

“...”

 

 

그리고, 그 내용을 대충이나마 알고 있는 내 입장에선.

 

빈말로라도 왕자님 어쩌고 하는 말을 꺼낼 수가 없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엿같아지는 이벤트거든, 그거.

 

 

!!! Warning !!!

 

[ 대상에게서 불순한 의도가 감지됩니다. ]

[ 해당 지식은 ‘전속 시종’이 알고 있을 수 없는 정보입니다. ]

[ 발설하지 마십시오! ]

[ 배역을 깨트리지 마십시오! ]

 

“...”

 

 

눈앞에 떠오르는 붉은색 경고창에 쓴웃음을 지으며 그걸 바라본다.

 

애초에 그걸 말할 수도 없고.

 

나한테는 ‘배역’을 깨지 말라는 제약이 붙어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 있는 녀석들은, 솔직히 죽어 나자빠지는 꼴을 본다고 해도 그렇게 안타까울 것 같지는 않다.

 

내 기준으로 인간 말종 쓰레기만 모여있는 곳이니.

 

유리아가 그쪽을 베었다는 사실에 나중에 죄책감을 가지긴 하지만, 차라리 처음부터 그걸 모르고 있는 게 약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자니, 유리아가 침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 제 옆에는, 언니밖에 없거든요.”

 

“...예?”

 

“...이렇게 제 응석을 받아주시는 것도 시종 씨가 처음이에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며 입을 다무는 유리아를 바라본다.

 

 

‘...분명히.’

 

 

‘밖에’라고 했다.

 

이 저택에서 본인이 고립된 처지라는 걸 자기도 알고 있다는 뜻이다.

 

 

“...아가씨. 그게 무슨-”

 

“...혼자라는 건 이미 알고 있어요.”

 

 

유리아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교리에 따르면, 생명은 신성한 것이에요.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신성한 합일. 그런 교리에 따르면... 저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이... 그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비천한 생명체에 불과하니까요.”

 

 

그런 목소리로.

 

자신이 주변에서 경멸받아 마땅한 존재라고. 스스로도 알고 있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 어린아이가, 그런 잔혹한 말을 담담하게 읊고 있다.

 

 

“...그러니, 불평하면 안 돼요. 슬퍼해도 안 돼요. 저 같은 것한테도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대해주시는 분들한테 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까.”

 

“...”

 

“부여된 의무는... 제 소임은, 꼭 해내야 해요.”

 

 

그렇게 말하며, 애써 만들어낸 미소를 짓는 유리아의 모습을 말문이 막힌 상태로 바라본다.

 

 

“성하와 언니가 여기에 방문하는 게 곧입니다. 그때가 되면... 제가 받은 친절에 보답할 수 있겠지요.”

 

 

이 새장 속에 갇힌 인생을 친절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그렇지만.

 

말하는 뉘앙스에서 확실히 풍겨져 온다.

 

이 녀석도 이미 알고 있다.

 

저택 안에 진심으로 자신을 생각해주고 위해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도.

 

자신이 만들어진 목적이 결코 본인에게 좋은 의도가 아니란 것도.

 

며칠 뒤에 법황이 루시엔을 데리고 오는 것도, 결코 자신에게 좋은 일이 생기지는 않으리란 것까지도.

 

 

“...”

 

생각해보면, 저택 구경을 하는 내내 나한테 계속 무르게 대했던 것도.

 

기껏해야 전속 시종한테, 저택의 주인쯤 되는 사람이 그런 태도를 취한 것도.

 

본인의 ‘처지’를 알고 있으니, 그저 최대한 친절하게 대한 것뿐이렸다.

 

그쯤 되면, 의문이 생긴다.

 

 

‘...왜?’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가.

 

왜 그런 사실을 알고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건가.

 

 

“...”

 

 

떠오르는 이유야 하나뿐이다.

 

지금까지 봐온 이 녀석의 성격을 보면 한 가지밖에 없다.

 

그냥.

 

본인에겐 선택지가 없으니까.

 

처음부터 다른 길을 선택할 환경조차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그건, 너무.’

 

 

끔찍하지 않은가.

 

한창 뛰어놀 때의 어린아이가.

 

부모의 품에서 응석 부리고, 넘치도록 사랑받고, 세상을 알고, 넘어져도 일어서고, 그렇게 자라야 할 아이가.

 

특정 목적에 이런 새장 속에 갇혀, 혼자 고립되어, 끝끝내 자신에게 한 줌의 사랑조차 주지 않는 이들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해버리는 건.

 

그걸 전부 스스로 받아들이고, 자기 의지로 행할 만큼 착하고 조숙한 아이가, 그런 최후를 맞이하는 건.

 

너무.

 

끔찍하지 않은가.

 

 

“...그래도.”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자니, 유리아가 침침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시종 씨같이... 착한 사람을 만나서 다행입니다.”

 

“...”

 

“시종 씨는, 다른 사람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아요.”

 

 

그런 말을 듣고 있자니.

 

문득, 한 가지를 깨닫는다.

 

 

“...”

 

 

눈앞으로 창 하나를 불러온다.

 

 

< Event Info >

▶달콤한 연극◀

 

[ 대상 ‘유리아/하얀 악마’를 설득하십시오. ]

[ 3일의 제한 시간이 주어집니다. 그 안에 배역을 깨거나, 심상 세계에서 탈출하지 못 한다면 영원히 해당 세계에 갇힙니다! ]

[ 당신에게 부여된 ‘역할’은 ‘유리아 아가씨의 전속 시종’입니다. 배역을 깨지 마십시오! ]

[ 대상 ‘유리아’에게 닥쳐 올 비극을 막으세요! ]

 

 

마지막 줄에 특히 집중하여 다시 한번 쭉 읽어내린다.

 

슬슬 알 것 같다.

 

하얀 악마가 날 여기에 왜 쑤셔 넣었는지.

 

나한테서 뭘 바라는 건지.

'...비극을 막아달라는 거지.'

 

이전에 리루와 푸른 악마의 관계에서도 한 버 확인한 바 있지만.

 

‘악마’와 ‘그릇’의 관계는, 생각보다 대단히 긴밀하다.

 

세라스와 자색 악마 같은 예외도 있지만, 그건 그놈만 그런 거니까 빼고.

 

그 녀석은.

 

진심으로 유리아가 자신의 가장 악몽 같은 과거에서 ‘행복한 장면’을 보길 원하는 거다.

 

그러니까.

 

 

“...아가씨.”

 

 

내가 여기서 해줘야 할 일도 명확하다.

 

애써 웃고 있는 유리아에게, 나도 마주 웃어준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내 말에, 유리아가 힘없이 미소 지었다.

 

 

“...시종 씨는, 착한 사람이네요.”

 

 

아마 부질없는 격려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며칠 뒤에 자신에게 큰 불행이 닥쳐온다는 사실을 본인도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런 사건의 주체가 다름아닌 법황이라는 자연 재해나 다름없는 인물이니, 막을 수도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나도 빈말로 하는 게 아니다.

 

 

“제가 구해올게요.”

 

“...?”

 

 

유리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지 모르겠단 기색이다.

 

 

“조금 이상할 정도로 쉽게 여자를 꼬시고, 난관을 이상할 정도로 쉽게 돌파하고, 그렇게 꼬신 여자들 전부를 난봉꾼처럼 후려치는 미친 놈이긴 하지만."

"...예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리아에게 말을 잇는다.

 

솔직히, 백마 탄 왕자님은 모르겠다. 나는 그런 배역은 별로 자신 없거든.

 

하지만.

 

 

“분명히 올 거에요. 어떤 놈이.”

 

 

백마 탄 초인 정도는, 그럭저럭 할 수 있을 것 같다.

 

연극에서 정해진 전개를 깡그리 뒤엎어버리는 배역 말이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