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5 - 175. 연극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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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라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다우드 씨, 어쩐지 상태가 좀 메롱하지 않슴까?”
“...”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동의한다.
엘리야가 쓴웃음을 지으며 옆에 멍하니 서 있는 다우드를 바라보았다.
설리번과 페이놀 덕분에 아탈란테가 악마의 그릇들 머리통을 박살 내기 전에 다우드를 되찾아 온 건 좋지만, 그 이후로는 거의 항상 이 상태다.
정신이라도 놓은 것처럼 멍하니.
이래서야, 두 번째 시련에서 절대 좋은 꼴은 못 보겠지.
“...”
엘리야가 한숨을 내쉬며 주변에 펼쳐진 거대한 역장을 바라보았다.
엘판테에서 보여준 인상적인 인조 던전에 비한다면 그 스케일만 커다랗지 단순히 무지하게 단단하고 커다란 반구 형체의 역장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무섭다.
저런 걸로 ‘가둬야만’ 하는 존재가 있단 소리니까.
첫 번째 시련이 후보들의 대담함과 용력을 시험하고자 하는 의도였다면, 두 번째 시련은 그 인내심과 계획력, 임기응변을 보고자 한다고 했던가.
그 결과로 나온 게.
‘...맨몸으로 마수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라니.’
엘리야가 시험 방식을 상기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투쟁의 용광로 근처에 널려있는 마수 출몰 지역에 맨몸으로 후보들을 밀어 넣고, 이틀을 그 안에 살아남으라고 했었다.
거기에 그 마수들을 광폭화시켜 평소보다도 훨씬 더 공격적으로 만들어 놓은 상태에서.
이쯤 되면 제정신이라면 성년도 채우지 못한 인간들에게 시킬 짓이라는 생각이 안 들겠지만, 용사라는 이름값에 걸린 무게는 그만큼 무겁단 뜻이겠지.
그리고, 거기서 추가되는 문제라면.
“엘리야 씨와 다우드 씨는 저번 시련에서 총합 점수 1등이었으니 다른 후보들의 견제를 지독하게 받을 검다. 괜찮으시겠슴까?”
“...괜찮을 리가 없죠.”
엘리야가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곧 저 반구 형태의 역장 안으로 같이 들어갈 다른 후보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그리고.
“...”
상공에 설치된 ‘관람석’에서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제국의 황제, 부족 연합의 우타드 족장, 그리고 성황국의 루미놀 대주교가 나란히 앉아있었다.
문제는 마지막 인물이지.
다우드를 거의 불구대천의 원수 노려보듯이 바라보고 있다.
‘...이해는 합니다.’
엘리야가 식은땀을 흘리며 그런 말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전 시련에서 이 인간이 옆에 있는 라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생각한다면 아버지 되는 입장에서 저런 짓이 안 나오는 게 더 이상하겠지.
이번 시련에서 대놓고 이쪽에다가 무슨 수작질이나 안 부리면 다행이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그렇게 중얼거리기가 무섭게, 라나가 고개를 홱 돌려 엘리야를 바라보았다.
“어라, 엘리야 씨.”
“예?”
“사실 별일 안 생길 수도 있었는데, 방금 엘리야 씨가 그 말 해서 무슨 일이 반드시 생길 검다.”
“...”
뭐라는 거야.
엘리야가 가늘어진 눈으로 라나를 노려보았다.
“...불길한 농담은 됐어요.”
“농담 아니지 말임다.”
라나가 문장에 어울리지 않게 씩 웃으며 말했다.
“저, 예전부터 감이 좋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지 말임다.”
“...”
“제가 확신하는 일이라면 반드시 일어난다고 보셔도 좋슴다!”
제발.
그런 불길하고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그렇게 웃으면서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대체.'
엘리야가 여전히 멍한 다우드를 보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 돌아오시는 거에요, 선생님?'
슬슬.
안 돌아오면 위험할 느낌이다.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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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ystem Message >
[ ‘달콤한 연극’ 이벤트의 가장 중요한 국면입니다. ]
[ 대상 ‘유리아’에게 비극이 생기지 않도록 막으셔야 합니다! ]
그런 창이 떠오르는 걸 보며 실소를 흘린다.
마치 귀에다 대고 윽박지르는 느낌이다.
‘내가 이러려고 너 여기에 데리고 온 것 알지? 똑바로 처신해!’ 라고 하얀 악마가 계속 경고를 보내는 느낌이랄까.
“...성하께서 오고 계시네요.”
유리아가 저택 위쪽에서 내려오는 승강기를 보고 그런 말을 꺼내 들었다.
얼굴에는 이 녀석이 늘 유지하려고 애쓰는 의젓한 표정이 걸려 있었지만, 그 손은 애처롭게 떨리고 있다.
아무리 심지 굳고 의젓하다고 해도, 아직 애다. 완벽한 자제력을 발휘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리고, 난 그 옆에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시종 씨는 아까부터 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요?”
“시간을 확인하고 있답니다, 아가씨.”
“...?”
시간을 확인할 거면 시계를 보면 되지 왜 그러고 있냐고 묻는 것 같은 표정이 유리아의 얼굴에 걸렸지만.
내가 확인하고 있는 건 ‘시스템창’ 옆에 붙어있는 숫자들이다.
여기 안에서 흐른 시간이 아니라 ‘바깥’에서 어느 정도로 시간이 흘렀는지 파악하는 용도다.
‘...두 번째 시련은 슬슬 시작했으려나.’
여러 가지 조건을 고려했을 때 슬슬 강제로라도 엘리야가 두 번째 시련에 돌입했을 타이밍이다.
“...”
그렇다는 말은, 여기서 내가 빨리 빠져나가야 할 이유가 굉장히 뚜렷하게 있다는 말과도 똑같고.
두 번째 시련에서 그쪽이 무슨 일을 당할지는 모르겠다만, 엄밀히 말해서 메인 퀘스트는 엘리야 쪽이다. 가장 중요성이 높단 거지.
“...”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쪽 퀘스트를 대충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나도 이런 사정이 있으니까.
조금 파격적인 방법을 써먹기는 할 거다.
“시종 씨.”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 사이, 유리아가 내 옷깃을 잡아당기며 내 주의를 끌었다.
눈앞으로는 승강기 안에서 법황이 내리고 있었다.
복장은 다르지만, 보자마자 알겠다. 저 재수 없는 얼굴은 잊어버린 적이 없으니까.
“...”
그리고 그 양손에 들린 봉인구에 감싸인 검도 유심히 바라본다.
단절자.
유리아가 이후로 계속 몸에 붙이고 다니는 검이다.
저렇게나 많은 봉인구를 덕지덕지 붙여놨음에도 불길하단 느낌이 한눈에 전달된다.
그 모습을 본 유리아도 일순 흠칫하면서 떨었지만.
“...다녀올게요.”
이내 애처롭게 지어낸 웃음을 얼굴에 건다.
간신히 두려움을 억누르고 애처롭게 짜내는 목소리인 것도 분명하다.
저게 본인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나오는 반응이렸다.
“...”
여기서부터는 나도 아는 내용이다.
이대로 유리아가 법황의 인도대로 단절자를 잡고, 강제로 녀석에게 떠밀려 저택 안에 있는 인간 전원을 학살.
녀석에게 아주 깊은 트라우마를 안겨주는 이벤트다.
바꿔 말하면.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틀어막을 이벤트이기도 하다.
“...”
원래대로는 시도도 안 할 방법이다.
배역을 깨지 말라느니 뭐니, 하얀 악마가 온갖 제약을 나한테 덕지덕지 붙인 상황이라면 더욱 더.
이건 나치고도 뒷감당이 좀... 도박이라서.
하지만, 아마 어떻게든 되긴 될 거라 믿고 저지르면 될거다. 언제는 내가 생각하고 일 저질렀나.
‘...좋아.’
그러기 위한 수단을 점검한다.
이 순간을 위해서 아껴놓은 게 있거든.
[ '스킬 복사권'을 사용합니다! ]
[ 대상 ‘유리아’에게서 스킬 1개를 복사해올 수 있습니다! ]
찾고 있던 스킬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아서 찾을 수 있었다.
< System Message >
[ ‘스킬: 단절의 저주’를 복사해옵니다! ]
[ 세 발자국 안에 들어온 이들을 피아식별 없이 공격합니다! ]
[ 대상 ‘단절자’를 잡으면 해당 효과가 발생합니다! ]
그렇지.
●
“잘 지냈나요, 유리아?”
지척에 다가온 법황이 그런 말을 꺼내놓자, 유리아가 이내 몸을 움찔 떨었다.
항상 그렇듯, 정중하고, 예의 바르며, 간드러지는 목소리다.
혹자는 모든 성인들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분위기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유리아로서는 뱀이 쉭쉭거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목소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영광스러운 승천이 예정된 날이 바로 오늘이랍니다, 유리아.”
잔잔한 미소를 지은 법황이, 그렇게 말하며 그녀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기다란 검이다.
작달막한 체구의 그녀의 신장과 거의 비슷해 보일 정도로.
“일단 잡아보시겠습니까? 당신만을 위해 준비한 물건이에요.”
“...저, 성하...”
유리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꼭, 잡아야 하나요?”
하기, 싫어.
아파 보인다. 무서워.
저걸 잡는 순간, 반드시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그런 생각에 꺼낸 말이었지만.
“...유리아.”
법황의 목소리를 들은 그녀의 몸이 다시 움찔했다.
기색은 여전히 부드럽다.
하지만,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이.
그 적의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눈이.
피부를 에이는 것 같은 냉막한 시선이다.
네 ‘존재 가치’는 이것뿐이니, 부정하지 말라는 압박감이 담긴.
“당신에게 부여된 의무를 저버릴 생각이십니까?”
“...”
“당신을 먹여주고 길러준 게 교단이라는 걸 잊지는 않으셨을 텐데요.”
“...”
“은혜를 저버리는 나쁜 아이가 될 생각이신가요?”
“...아, 니요...”
그녀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답한 내용에, 법황이 다시 자애로운 미소를 띄웠다.
“그 말이 듣고싶었습니다, 유리아. 역시 유리아는 착한 아이에요.”
“...”
유리아가 다시 자신의 눈앞으로 내밀어지는 검에 눈을 질끈 감았다.
‘...시종 씨.’
왜 그 사람이 떠올랐는진 모르겠다.
이상하게도, 이렇게 무섭고 떨리는 순간에 가장 의지가 될 존재로 언니보다도 먼저 떠오른 이름인 건 틀림없었다.
“...”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게 틀림 없었다.
아무도, 그녀를 도와주지 못 한다.
그저 곧 일어날 비극에 휩쓸리는 걸 순응하는 운명뿐.
유리아가 떨리는 몸짓으로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
그러나.
유리아가 그걸 잡기도 전에.
누군가의 발걸음이 지척으로 느껴진다.
“...시종 씨?”
자신의 곁에 다가온 남자의 모습에, 유리아가 반사적으로 그런 의문을 흘렸다.
“지금 무슨...?”
제대로 된 의문을 토하기도 전에, 그 손이 법황에 손에 잡힌 단절자의 칼자루를 잡았다.
이어서, 검에 담긴 ‘저주’가 다우드의 몸을 타고 쭉 올라왔다.
수백 년을 넘게 묵은 해묵은 저주가 그 몸을 침식한다.
원래대로는 이런 저주에 침식당한 인간은 그 고통에 미쳐 그대로 즉사해도 이상하지 않지만.
그 대신에, 다우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검을 뽑아들었다.
마치, 이전에 이런 저주를 수도 없이 다뤄본 누군가의 경험을 그대로 ‘전수’받기라도 한 것처럼.
이어서.
“얍.”
휙, 하고.
그걸 법황을 향해 휘두른다.
단절자의 검날이, 그대로 그 목을 슥 지나갔다.
물이라도 베는 것처럼 부드러운 동작이었다.
데구르르.
법황의 머리가, 그런 볼품없는 소리와 함께 바닥을 굴렀다.
“...”
“...”
“...”
피분수가 촤악- 하고 뿜어져 나오는 주변으로.
침묵이 깔렸다.
침묵.
또 침묵.
이어서, 계속해서 침묵.
“...흠.”
모두가 넋을 잃고 그 광경을 쳐다보는 사이, 그런 광경을 만들어낸 남자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연극은 역시 반전이 있어야지.”
그와 동시에.
주변으로 지옥도가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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