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6 - 176. 데우스 엑스 마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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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제 어느 때건, 이 두 사람을 가져다 놓으면 숨 막히는 침묵이 생겨나는 모양이다.
페이놀이 그렇게 생각하며 말 없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설리번과 엘노어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필요한 일이 있다고 불러서 모이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경직된 분위기는 여전히 적응이 안 된다.
물론 그럼에도 그녀는 대륙 단위로도 손 꼽히는 천재 마법사다. 이런 좌불안석 같은 분위기에서도 부탁받은 바는 어떻게든 끝내놓는다.
“...준비는 다 끝났습니다.”
페이놀이 그렇게 말하며 작성한 결계 위에서 물러났다.
그 중앙으로는 눈을 감은 유리아가 곤한 상태로 누워있었다.
첫 번째 시련 뒤로 다우드와 함께 정신을 잃은 뒤로 단 한 번도 눈을 뜬 적이 없는 상태였다.
그 모습을 말 없이 살피던 설리반이, 이내 뒤편에 있는 엘노어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전에도 설명드렸지만, 당신이 해줘야 할 일은 간단합니다. 준비가 됐다면 이 결계 중앙에 놓인 전송진 위로 올라가시면 되구요.”
“이해하기 쉽단 의미지 달성이 쉽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알겠습니다, 재상님.”
고저 없는 목소리로 받아치는 엘노어의 모습에 설리번이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맞는 말이다.
아니면 애초에 처음 이 여자를 부를 때부터 목숨이 위험하다는 말은 꺼내지도 않았겠지.
“이전에 설명드린 위험 부담은 확실히 이해하셨습니까, 트리스탄 공녀.”
“아니요.”
“...”
당당하게 돌아오는 대답에, 설리번이 입을 딱 다물었다.
“솔직히 말해서, 재상님이 해준 이야기 중 절반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습니다. 너무 허무맹랑한 이야기밖에 없어서.”
“...”
“애초에 알아야 할 건 몇 가지밖에 없지 않습니까.”
엘노어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다우드가 위험하고, 목숨이 위험할 만큼 힘든 일이지만, 그럼에도 제 도움이 필요하다. 그 정도면 된 것 아닌가요?”
“...”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래도 똑바로 주지시켜야 할 부분은 분명히 있다.
“...우습게 봐서는 안 됩니다, 트리스탄 공녀.”
설리번이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이 안은 하얀 악마가 구축한 심상 세계입니다. 물질계의 필멸자 수준이라면 접근할 엄두조차 하지 않는 게 정상인 곳이죠. 저 안에서, 하얀 악마는 신이나 다름 없는 권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확실히, 그렇지.
페이놀이 쓴웃음을 지으며 속으로 수긍했다.
하얀 악마라면 모든 악마 중에서도 ‘정신’ 계열에서는 가장 강력한 권능을 부릴 수 있는 악마다.
대표되는 권능부터가 타인의 정신을 지배할 수 있는 거니까.
그리고 지금 그들이 엘노어에게 시키려는 일은, 그런 공간에 이 여자를 ‘강제로 쑤셔 넣어’ 다우드를 데려오는 거다.
제정신이라면 발상조차 할 수 없는 계획이겠지만, 그걸 하겠냐고 물어보는 여자나 하겠다고 답하는 여자나 둘 다 제정신이 아니라서 성립된 계획이다.
“...당신이라면, 판데모니엄의 왕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존재를 품이라면 그래도 저 안에서 선방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으니까 부탁하는 겁니다. 악마 수준에서도 다른 그릇들은 절대로 안 돼요.”
그 말을 들은 엘노어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악마. 판데모니엄의 왕.
이전에 정체불명의 언령술사도 그렇고, 설리번 재상도 그렇고.
그녀의 몸 안에 그런 게 깃들어 있다고 계속해서 말해줬었다.
거기에 그녀의 어머니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도.
그리고.
엘노어가 알기로.
그 모든 이야기에 대한 정체를 알고 있는 자는 한 명뿐이다.
관련된 모든 일에 엮여있을 것 같은 인간.
‘...트리스탄 대공.’
기드온 게일스터드 라 트리스탄.
그녀의 아버지.
다음 번에 만나게 된다면.
이게 대체 뭘 가리키는 건지 반드시 알아내야겠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입을 다물고 있자니, 다시 눈앞에서 문장이 날아들었다.
“아무튼, 긴장을 단단히 하셔야 한 단 소리입니다. 아무리 같은 악마라 해도 관할권이 다르니, 당신이라고 해도 안전을 보장받진-”
설리번이 그렇게 말을 이어가려고 하자, 문득 유리아의 몸이 꿈틀거렸다.
이전까지 계속 미동도 없던 것에 비하면 대단히 격렬한 움직임이라, 그 자리에 있던 전원이 움찔하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어서.
-!
-!!
그런 몸짓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는 듯, 페이놀이 작성해놓은 결계가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방 안에 있는 세 명의 표정에 당혹감이 떠오를 만큼.
“...페이놀. 이건?”
재상의 의문에, 페이놀이 급하게 결계를 점검했다.
이어서 그녀가 심각한 목소리로 답했다.
“...안에서 큰일이 일어나는 모양입니다.”
“큰일이라니?”
“뭔지는 모르겠지만 심상 세계를 만든 당사자가 대단히 화가 났어요. 이대로라면...”
페이놀이 말끝을 흐렸다.
차마 이 뒤에 이어지는 문장을 그대로 내뱉을 수는 없단 기색으로.
“...심상 세계가 아예 뒤틀릴 겁니다. 다우드 캠벨의 영혼이 영원히 파괴될 수도 있어요.”
“...!”
설리번과 엘노어의 눈이 동시에 동그래졌다.
“...그럼 당장 들어가야겠군.”
엘노어가 꺼낸 말에 페이놀이 다급한 목소리로 문장을 덧붙였다.
“잠깐 대기하세요, 트리스탄 공녀. 그래도 당장 이 안으로 들어가는 건 너무 불안정합니다. 이 상태에서 들어가면 당신이 반드시 죽습니다! 제가 최대한 빠르게 결계를 진정시켜 놓을 테니-”
“결계를 진정시키는 동안 다우드가 해를 입을 확률은 더 올라가지 않나.”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당장 당신이 확실히 죽는 것보단 나아요!”
페이놀이 다급하게 말했지만.
정작 그걸 듣는 엘노어는 어깨만 으쓱하며 담담하게 답했다.
“그럼 그냥 내가 죽는 쪽에 걸도록 하지.”
“...예?”
“그 남자가 죽을 확률이 올라가는 것보단 그게 낫네.”
그런 말과 함께.
엘노어가 그대로 미친 듯이 요동치는 결계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
“...”
저 미친년이.
설리번과 페이놀이, 동시에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
!!!!!! Warning !!!!!!
[ ‘배역’을 깨트렸습니다! ]
[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
[ 심상 공간에서 탈출할 확률이 현저하게 줄어듭니다! ]
그런 메시지가 눈앞으로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사방에서 비명이 쏟아진다.
“성하! 성하아아아-!”
“의원을 불러와! 보, 보안 시스템도 가동 시켜!”
법황의 머리가 뎅뎅 데구르르 하고 바닥을 구르는 사이, 주변으로 온갖 비명과 함께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이어서 저택 전체에서 무장한 인원들과, 온갖 종류의 공격 술식과, 가호와, 적대적으로 돌변한 호문쿨루스와...
기타 등등. 기타 등등.
너무 많아서 뭐가 뭔지도 모르겠다.
저택 전체가 적으로 돌변하는 것 같은 모습이란 건 알겠지만.
“...시종...씨...?”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유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보세요, 아가씨.”
그리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싱긋 웃는다.
“세상에서 외톨이로 혼자 남는 것보다 훨씬 더 지옥 같은 게 뭔지 아세요?”
“...네?”
“혼자라고 느끼도록 만드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거에요.”
“...”
유리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니까.”
피식 웃으며 말을 잇는다.
“...그런 장애물, 제가 지금부터 치워드릴게요.”
사실, 이렇게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개인적으로 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마음에 안 든다.
어린 유리아도 그렇고. 이 녀석을 가둬두고 ‘사육’하는 것 같은 환경도 그렇고. 그런데도 이 녀석을 경멸하는 것 같은 인간들의 태도도 그렇고.
전부.
다.
내 ‘옛날’을 떠올리게 만들어서.
“...”
심호흡을 하며 단절자를 쥔다.
복사해온 특성 덕분에 생각보다 몸에 걸리는 부하는 적은 느낌이다.
유리아에게 일어날 비극을 막으라고 했던가.
그럼 내가 떠올린 방법은 간단하다.
이 녀석이 죽이기 전에 내가 다 죽여버리면 되는 거잖아.
“곱게 죽지는 못할 거다, 빌어먹을 배교자 녀석!”
“전원 포위해! 산채로 생포해야 한다!”
산채로 생포하라는 게, 딱히 자비를 베풀겠다는 뜻이 아니라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이기 위해 제압하겠단 소리지만.
< System Message >
[ 위기 상황이 감지됩니다. ]
[ 생명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수준으로 판단합니다. ]
[ 스킬: 절체절명을 EX등급으로 적용합니다. ]
< System Mesage >
[ ‘트리스탄류 검술’ 특성이 적용됩니다. ]
[ 검의 숙련도와 위력이 늘어납니다! ]
< System Message >
[ 현재 ‘단절의 저주’가 적용중입니다! ]
소울 링커가 없어서 마력 보충이 안 되니, 신성 관련 스킬을 쓰지는 못하지만.
지금 나한테 내장되어 있는 스킬만 하더라도, 단순 근접전에서 나를 당해낼 수 있는 건 어지간한 강자 수준에서도 손에 꼽는다.
하물며 법황조차 일순간 목을 날려버릴 수 있는 단절의 저주와 함께라면야.
-!
일검.
호선을 그리며 휘둘러진 검에, 저택 일부가 통째로 ‘썰려나간다’.
범위 안에 있는 인간들도 모조리 휩쓸려 육편으로 변해버린다.
검을 한 번 휘둘러 풍경을 바꿔버리는 건 원래대로는 엘노어쯤 되는 스펙이어야 할 수 있는 짓인데, 단절자 + 절체절명 + 트리스탄류 검술의 삼단 연계다. 그 정도면 나도 비슷하게 흉내 정도는 낼 수 있나 보지.
“괴, 괴물...!”
“저게 대체 뭐야...!”
주변에서 비명과 함께 그런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지만.
거기에 뭐라고 반응하는 대신 고기 써는 기분으로 주변에 있는 인간들을 전부 벤다.
피분수가 뿜어져 나오고 사람의 신체가 사방을 날아다니는 걸 보고 있으니 속이 좀 메슥거리긴 하는데, 솔직히 별다른 감흥이 없다.
실제 세계면 몰라도, 이거 심상 세계잖아.
근본적으로는 하얀 악마가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그거지.
다만.
그걸 대단히 마음에 안 들어 하는 녀석이 있는 것도 분명하다.
!!! Warning !!!
[ 지금 당장 ‘배역’으로 복귀하십시오! ]
[ 지금 당장 ‘배역’으로 복귀하십시오! ]
[ 지금 당장 ‘배역’으로 복귀하십시오! ]
[ 지금 당장- ]
눈앞으로 떠오르는 붉은창의 크기가 점점 커진다.
나에게 거의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하지만, 무시하고 계속 썬다.
계속 벤다. 계속 죽인다. 계속 피를 주변으로 흩뿌린다.
그리고, 이어서.
< System Messa-
눈앞으로 메시지창이 떠오르려다가.
[반려, 지금 뭐 하는 거야?]
무언가에 의해서 ‘가로채어’진다.
이어서.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이 일시정지한다.
마치 초월적 존재가 개입한 것처럼.
“...”
속으로 한숨을 내쉰다.
원래대로면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건 회색 악마가 유일하지만, 적어도 ‘자기가 만든 세계’ 안이라면 비슷한 짓을 할 수 있는 녀석이 있다.
[배역, 지키라고 했을 텐데?]
그런 말과 함께.
눈앞으로 시리도록 새하얀 색을 내뿜고 있는 ‘악마’가, 공간을 찢어버리며 튀어나왔다.
유리아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하얀 악마다.
“...”
그래.
기다리고 있었다.
이 정도로 깽판을 내놓으면 반드시 올 줄 알고 있었지.
그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나고 있다.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푹 꺼지는 것 같은 냉막한 시선을 유지한 채로, 녀석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내 턱을 잡고 들어올려, 자신의 눈을 바라보게 한다.
[발언을 허락해줄 테니, 말해 봐. 왜 경고를 무시한 거야?]
그와 동시에, 내 거동이 살짝 돌아온다.
간신히 입을 움직일 수 있는 정도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문장을 내뱉는다.
“답답하잖아.”
[...뭐?]
“애초에, ‘배역’이라는 제한을 왜 걸어놓은 건데?”
내 말에, 하얀 악마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이상하잖아. 유리아한테 일어날 일을 막고 싶었다면 굳이 그런 제약을 걸 필요가 없어. 행동 범위도 제약되고, 어울리지도 않고.”
[...]
“왜, 굳이 그런 걸 나한테 계속 강요한 거야?”
정확하게 뭘 어떻게 하려는 건진 모르겠다만.
유리아를 생각하는 마음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이런 심상 세계를 만들고 유리아의 과거를 ‘개변’시킴으로서 녀석에게 뭔가 긍정적인 효과를 끼치려고 했던 것도 분명할 거고.
다만.
이 배역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꿍꿍이가 있었던 것 아니야?”
그런 게 아니면.
굳이 그런 제약을 나한테 붙일 필요가 없거든.
그런 걸 통해 기대할 수 있는 기능은 딱 한 가지뿐이다.
하얀 악마가 만들어낸 세계에 나를 자연스럽게 ‘고정’시킬 수 있다는 것.
자기 입맛대로 나를 휘두를 수 있다는 것.
모든 악마 중에서도 가장 집착이 심하고 나를 구속하려고 하는 하얀 악마에게 그런 ‘구실’을 준다면, 나중에 어떤 식으로 불똥이 튈지 모른단 소리지.
[...]
하얀 악마의 얼굴이 계속해서 꿈틀거렸다.
[...나는.]
한참을 침묵하던 녀석이, 간신히 입을 열어 답했다.
녀석이 이를 부득 갈며 말했다.
[그냥, 당신을 바꾸고 싶었을 뿐이야.]
“바꾸다니, 뭘.”
[...당신이 처할, 미래를. 내가 깃든 그릇의 과거를.]
“...무슨 소리야?”
[...]
녀석이 한참을 침묵했다.
아까보다 훨씬 더 길게.
이내, 녀석이 눈을 질끈 감고 도리질을 쳤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떨어내는 것처럼.
[...시끄러워. 아무튼 당신은 내가 건 제약을 어겼어.]
그렇게 말한 하얀 악마가 내 앞으로 손을 들어올렸다.
[그렇다는 말은, 당신의 영혼은 내가 소유권을 박탈해도 괜찮단 소리야. 그건... ‘협정’ 위반도 아닐 거고.]
“...”
...협정?
또 못 알아들을 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분위기를 보니 설명을 들을 기회는 없어 보인다.
녀석의 손에 하얀 마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방법이야 예상과 달라졌지만.]
녀석이 조용히 중얼거리는 들려왔다.
[이번에야 말로, 계속 함께 있을 수-]
하지만, 그런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
-!!!!!!!!!!!!!!!!
공간이.
뭉그러지고, 비틀리고, 작살나고.
한꺼번에 ‘휩쓸려나갔다’.
마치, 내가 처음 여기에 들어올 때 보던 무저갱과 같은 암흑만이 주변에 자리한다.
누군가의 ‘등장’으로 심상 세계가 통째로 박살난 것처럼.
[뭐...!]
경악성이 하얀 악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정신을 기반으로 펼쳐진 심상 세계 안이라면, 그 지배권은 오롯이 자신이 들고 있어야 정상이다.
그래야만 하는데.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찢어발기고 들어오는 존재가 과연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에 식겁한 녀석이 뒤를 돌아보니.
“그대.”
그곳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지금 다우드에게 뭘 하려는 겐가?]”
그런 문장과 함께.
회색 기운이 사방으로 폭발하듯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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