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7 - 177. 데우스 엑스 마키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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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음...”
엘리야가 골이 아프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두 번째 시련의 개념은 잘 알겠다.
험지에서 벌어지는 배틀 로얄 서바이벌.
당장 시작하자마자 간단한 생존 도구 묶음 하나만 쥐여서 곧바로 마수 출몰 다발 구역에 던져버리는 것만 봐도 그만큼 뚜렷할 수가 없다.
그런 면에서, 지금 이 상황은 그녀의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게 틀림없었다.
“...그것들은 대체 다 어디서 구하셨대요?”
엘리야가 곤혹스러운 목소리로 꺼낸 질문에,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남자 중 한 명이 답 없이 손에 잡혀있는 장검 하나를 손아귀 안쪽에서 휘릭 돌렸다.
“...”
아니.
맨몸으로 쑤셔 넣고 하는 서바이벌이라며.
누가 봐도 이쪽을 죽일 생각 만만으로 챙겨온 무기로 완전 무장을 한 인간들이 살기를 흩뿌리고 있는데요.
어딜 어떻게 봐도, 용사 선발 안에 ‘정당하게’ 끼어든 인원들이 아닌 건 분명해 보였다.
라나가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고 호언장담한 게 이런 거였나.
“...”
햇빛 아래로 반사광을 뿌리는 장검과 잘 갖춰진 방어구를 본 엘리야가, 문득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천 부츠. 천 바지. 천 상의.
당장 전장에 투입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대방의 장비와 비교하면 어디 농사지을 때 입는 편한 작업복 같다.
모르긴 몰라도 용사 선발 도중에 이런 인간들을 밀어 넣을 수 있을 정도면 어지간히 막강한 권력을 가진 인간일 거고, 그런 인간이 투입 시킨 인원들이라면 어중이떠중이일 리가 없지.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그런 실력을 가진 인간들을 이런 것만 입고 상대하는 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짓이다.
“저기, 하다못해 왜 이런 짓을 하시는지 정도는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넌 목표물이 아니야, 엘리야 크리사낙스.”
“...예?”
“지금이라도 물러서면 살려주마.”
그런 말을 내뱉은 남자가 검을 들어 지금도 시선에서 영혼이 빠져나가 있는 다우드를 겨눴다.
“우리 목표는 저 남자야. 함구하고 물러서면 네 목숨 정도는 아껴주지. 용사 후보를 해했다간 후폭풍도 장난이 아닐 테니까.”
“...”
다우드를 노린다라.
엘리야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목적을 안다면 상대방이 어디 소속인지 추리하기가 더 편해진다.
다우드를 노린다라. 그럴 만한 후보들이...
“...”
잠시 생각하던 엘리야가 더욱 진지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어디서 오셨어요...?”
“...”
“선생님 죽이고 싶어 할 사람이 생각해보니까 한두 명이 아닐 것 같은데, 어디서 왔는지 힌트라도 좀 주시면-”
“...마지막 경고다. 지금 당장 물러서서 저 남자를 넘겨.”
아, 성황국 출신이구나.
그런 말과 함께 장비에 깃드는 전투용 가호를 본 엘리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그렇다면 루미놀 대주교의 입김이 들어간 인간들일 확률이 높을 것이다.
하긴, 딸래미한테 한 짓을 보면 안 죽이고 싶어하는 게 더 이상하지.
“...에휴.”
엘리야가 한숨을 내쉬면서 도구 묶음 사이에 끼어있던 짧은 단도 하나를 꺼내 들었다.
날은 뭉개져 있고,
어딜 어떻게 봐도 전투용은 아니다. 기껏해야 가죽 손질이나 고기 자르는 것도 겨우 할만한 폐품이지.
“...뭘 하는 거지?”
그녀가 그걸 뽑아 드는 걸 본 누군가가 그렇게 질문했지만.
다음 순간.
-!
그렇게 말한 인간의 몸이 그대로 수직으로 치솟았다.
순식간에 근처로 접근한 엘리야가 아래에서 치솟아 오르는 일격을 단검으로 꽂아 넣었기 때문일 것이다.
장비의 수준 차이가 아니었으면 그대로 졸도해도 이상하지 않을 위력이겠지.
붕 떠올랐다가 바닥에 메다 꽂히는 동료를 본 일행의 무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무슨 짓이지?”
엘리야가 대답하는 대신에 뒤를 흘끔 돌아보았다.
다우드의 기색을 면밀히 살핀다.
전투 상황이라면 늘 눈가에 총기가 도는 인간이었는데, 지금은 당황의 기색이 더 강하다.
“...”
역시, 아직 ‘돌아올’ 기미조차 없는 게 분명하다.
그녀의 도움이 없으면 그대로 죽을 거란 거지.
“...정신이라도 나간 건가.”
그 사이, 앞에서 다시 그런 말이 날아왔다.
“용사 후보라고 해도 그런 빈약한 장비로 이 인원들을 다 상대하는 건 불가능한데. 그렇게 죽고 싶나?”
“죽고 싶진 않죠, 당연히.”
엘리야가 단검을 빙글 돌리며 씩 웃었다.
“그래도 선생님 정도면 목숨 한 번 걸어볼 가치는 있는데요?”
“...”
일행의 무리가 한숨과 함께 검을 뽑았다. 그 장비에 가호가 깃든다.
“...네 선택이다.”
못해도 상급에 준하는 전투 사제. 명백하게 엘리야 이상 가는 역량을 가졌을 것이 분명한 상대다.
거기에 더해 주변에 있는 수하들까지 생각한다면, 이 자리에서 저기와 싸우는 건 자살행위다. 승산은 0에 수렴한다.
“이 자리에서 죽어라, 엘리야 크리사낙스.”
“...에휴.”
하지만.
이번에도, 도망가는 대신에.
엘리야가 다시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이기만 했다.
이게 뭔 개고생이람.
하여간 이게 다 다우드의 인복이 모자란 탓이다.
그리고.
“먼저 반한 게 잘못이지.”
그녀의 잘못이기도 하고.
이어서, 엘리야와 무장 인원들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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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노어?”
검은색 공간에 느닷없이 등장한 인간을 보니 그런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너.]
당황한 건 나만 그런 게 아닌지, 온몸으로 회색 기운을 뭉게뭉게 피어 올리는 엘노어를 본 하얀 악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어서, 녀석의 이가 부득 갈렸다.
[나와 반려의 보금자리에... 그 빌어먹을 녀석의 그릇이-]
그런 문장에 내 표정이 뒤틀린다.
‘...보금자리라고?’
나는 그런 거 들은 적 없는데.
단어 자체가 굉장히 불길하다.
“...”
아, 그렇군.
이해했다.
‘...처음부터 내보낼 생각이 없었네.’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입에 쓴웃음이 지어진다.
배역이니 뭐니 거추장스러운 제약을 달아놓은 건, 자기가 ‘주도권’을 가져오기 위해서겠지.
배역에 쭉 따라오면 거기에 맞춰서 무슨 수작을 부려서 나를 영원히 이 세계에 가둘 생각이었을 것이다. 자신과 함께 주욱 같이 있도록.
내가 배역을 깨면 방금 한 것처럼 제약 운운하면서 내 영혼의 소유권을 강탈하려 들고.
어느 쪽이건 난 이 녀석에게 구속당할 수밖에 없는 지옥의 이지선다다.
그리고.
나만 그걸 깨달은 게 아닌 모양인지, 여태 침묵하고 있던 엘노어가 입을 열었다.
“...보금자리?”
그 붉은색 안광이 형형하게 빛난다.
어지간히 화가 난 게 분명한 모습이었다.
“너, 처음부터.”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에서.
그 목소리가 찢어진다.
[저 사람,ú´ÂÁö, 독차지할î°¡생각이었구나?]
“...”
아니.
잔뜩 노이즈가 잔뜩 낀 목소리를 듣자마자 직감한다.
지금 목소리를 내는 건, 엘노어가 아니다.
엘노어의 ‘몸’을 빌려 말하고 있는 다른 존재지.
[회색...!]
그리고 엘노어의 기색이 그렇게 변하자마자, 하얀 악마의 눈동자에 노기가 치솟는다.
[잘도 그 뻔뻔스러운 면상을...! 내 공간에...!]
아까까지도 그리 원만한 기색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거의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만난 급이다.
그런 말에 이어, 하얀색 기운이 공간 전체에 점멸했다.
칠흑같던 공간이 순식간에 새하얘진다. 하얀 악마가 전력을 다 하고 있다는 증거다.
[죽여주겠어--!!]
악마의 마기는 항상 위협적이지만, 지금 이 심상 세계 안에서 하얀 악마가 뿜어내는 기운의 강력함은 특별하다. 기세만 따지면 물질계에서 회색 악마가 다루던 마기 이상 가는 수준의 위압감이 느껴진다.
“...”
틀림없이, 이 두 명 간에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인다.
이 정도 증오심은, 그런 게 없는 게 아니면 납득이 가는 수준이 아니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사이, 하얀색 마기가 한꺼번에 엘노어 쪽으로 쇄도한다.
하지만.
-!!
-!
-...
일거에.
그 마기가 정지한다.
회색 마기에 닿은 하얀색 마기가 완전히 멈춘다. 마치 ‘시간’이 통째로 얼어버린 것처럼.
[...!]
그 모습에, 하얀 악마의 표정이 슬쩍 뒤틀린다.
[...]
그리고, 그와 동시에.
시간이 얼어붙는다.
주변 공간의 색깔이 점점 칠흑같은 어둠에서 회색으로 서서히 ‘침식’당한다.
하얀 악마가 주도권을 잃어버리고 있단 소리다.
‘...이거 맞냐?’
나조차도 아연실색한 모습으로 그걸 바라본다.
모든 악마는 차원을 가리지 않고 최고위급의 위상을 가지는 존재들이고, 따라서 남의 심상 세계 안에서도 자신의 권능을 발휘하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적어도 ‘정신 관련’ 계열에서는 악마 중에서도 최선두를 달리는 게 하얀 악마다.
그런 녀석이 절대적인 지배권을 가지는 세계 안에서 이런 능력이라니?
-...
-...!
스물스물 기어 나온 회색 기운에, 안 그래도 살풍경하던 이 공간이 아예 정지하기 시작한다.
회색 악마가 그 몸을 빌리고 있던 엘노어도, 나도, 하얀 악마까지도.
그나마 하얀 악마는 같은 위계에 속하는 악마라서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는 모양이지만, 그릇인 엘노어는 물론이고 타천의 인장을 보유하고 있는 나조차도 예외 없이 정지한다.
[...하아아...]
그리고, 하늘 위에서 뭔가가 내려온다.
사르륵, 하고 한숨과 함께.
사뿐하게 바닥에 착지하는 녀석이 있다.
머리 위에 씌워져 있는 헤일로를 연상시키는 ‘왕관’.
회색 악마.
판데모니엄의 지배자.
그 중에서도, 최강.
[너 때문에... 너 때문에 내 반려가, 너 때문에-!]
회색 악마의 모습을 보자마자, 하얀 악마가 절규하듯 그런 문장을 꺼내놓았다.
[알아.]
곧바로, 그런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ú´Â밉겠지. 저 남자가 나중에 죽는 게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도ú´Â알아.]
“...”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죽는다고?’
나중에?
“...”
그게 무슨 말이니, 회색 악마야.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사이.
[그래도.]
회색 악마의 동공이 좌우로 쭉 찢어졌다.
평소에 나한테 보여주던 그 천진난만한 모습과 비교한다면, 전율이 일만큼 차이가 있는 표정.
악의.
상대방에 대한 시꺼먼 감정이 응축된.
그런 표정을 지은 회색 악마가, 순식간에 하얀 악마 앞에 도달했다.
“...!”
이 녀석을 본 뒤로 처음 보는, 진짜로 ‘악마’라고 불러도 될 만큼 악의가 충만한 표정이다.
일순간 숨이 턱 막히는 감각이 엄습하는 것과 동시에, 회색 악마가 하얀 악마에게 그 양손을 뻗었다.
[저¾î°¡남자는.]
그리고, 거기에 닿자마자.
하얀 악마가 갈기갈기 ‘찢겨 나간다’.
분쇄기에 넣기라도 한 것처럼. 일순간에.
하얀 악마의 모습 전체가, 일순간 전파 방해가 들어온 영상처럼 흐릿하고, 지직거린다.
그 입이 벌어진다. 고통의 비명이라도 토해내기 위함이었겠지만.
그러기도 전에, 회색 악마가 갈기갈기 찢긴 하얀 악마의 몸중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부분인 머리를 붙잡았다.
[내¾´öC거야.]
이어서, 녀석이 그걸 바닥에 내리쳤다.
풀스윙해서 때려박는 것처럼, 명백하게 ‘부숴버리기’ 위한 행동.
다시, 하얀 악마의 모습이 지직거린다. 그 표정이 끔찍한 고통에 일그러진다.
[내ÇÏ¿¡거야.]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회색 악마의 붉은색으로 빛나는 그 동공에 흉폭함이 깃든다. 다시 붙잡은 하얀 악마의 머리를 들어올린다.
다시, 바닥에 그 머리를 내려친다.
다시.
또 다시.
계속해서.
상대방을 완전히 죽여버리려는 것처럼.
콰작, 하고 바닥이 부서진다. 하얀색 조각이 사방으로 튀어 오른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사방이 진동한다. 그럼에도, 회색 악마가 뿜어내고 있는 적의는 진정될 기미가 없다.
감히 자기 물건에 손 댄 대가를 치루라는 것처럼.
[손대지öCÏ¿마.]
콰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공간이 산산조각난다. 하얀 악마의 남은 몸체와 함께, 주변에 올라와 있던 마기가 유리가 깨지는 것처럼 흩어져버린다.
“...”
야.
아무리 그래도, 같은 악마인데.
이 압도적인 힘의 격차는 뭐냐.
이건, 설정에 정해져 있는 회색 악마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힘이다.
마치.
같은 악마끼리의 위계조차 뛰어넘은 것 같은, 혼자서 거의 초월자에 준하는 힘을 발휘하는 것처럼.
‘...어떻게?’
무슨 일을 거쳐서 이렇게까지 강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
회색 악마 무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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