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83 - 183. 두번째 시련 (5)
●
사실 세간의 인식과 다르게, 설리번 재상과 황제는 그렇게 눈만 마주쳐도 으르렁거리는 사이가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서로 아예 접점이 없는 사이라고 보는 게 가장 적절할 것이다.
아래쪽에서 어떻게든 상대방을 잡아먹으려고 으르렁거리는 휘하의 신하들과 다르게, 이 둘이 서로를 향해 개인적으로 가지는 태도는 참으로 한 결 같았다.
무관심.
네가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건드리지 않는다. 가끔가다 충돌할 일이 생긴다면 신속하고, 공정하고, 최대한 일이 커지지 않도록.
제국이라는 거대한 국가 안에서 사실상 권력 구도를 양분하는 체제인데도 내란이나 거대한 싸움이 터지지 않는 건 통수권자들의 이런 태도가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상황은 대단히 기묘한 대치였다.
“...”
방안으로는 끔찍할 정도의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이 정도의 국빈이 두 명이나 모인 자리인 만큼 대단히 우수한 경호 인원들이 있었지만, 그들조차도 문득 긴장감에 마른침을 넘길 만큼.
그런 분위기의 근원지는, 중앙에 앉아 주변으로 살벌한 분위기를 뿌리고 있는 설리번 재상일 것이다.
이윽고, 그녀가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천천히 눈을 밀어 올렸다.
“무슨 생각으로 저지르신 일입니까, 폐하.”
살이 에이는 느낌이 드는 것 같은 냉기가 담긴 목소리였다.
근처에서 압박감을 느끼고 있던 누군가는 차마 자제하지 못 한 마른침을 삼켰을 정도로.
“검성을 시켜 무력화장을 생성하라 지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세실리아 11세가 근처로 처져 있는 베일 너머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설리번도 서늘한 시선으로 베일 너머를 바라보았고.
마치, 싸움이라도 걸 것처럼 적대적인 기색이었다.
그런 긴장 섞인 침묵이 더 길어지려는 찰나.
“무력화장은 겉보기로는 만능에 가까운 사실이지만, 파훼법도 대단히 명확한 기술입니다.”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유리처럼 매끄러운 목소리였다.
“...”
설리번 재상의 인상이 일순 찌푸려졌다.
그녀의 시선이 그렇게 말하는 거한에게 돌아갔다.
황제의 직속 호위.
등 뒤에 메달려 있는 거대한 검. 성인 남성보다 머리 두 세 개는 커다란 거대한 체구와, 그에 어울리지 않는 신사적인 기품을 전신으로 뿜어내는 중년 남성.
라드 알렉산더 바르폰.
현대의 검성.
트리스탄 대공과 켄드리드 변경백마저 한 수 접고 들어간다는 제국 최강의 전투원.
단순히 제국 최강을 넘어, 그 분야의 정점이라는 성인聖人의 칭호를 받은 이 중에서도 한 손가락에 꼽히는 강자다.
권성이 사지를 잘려 전성기 위력의 대부분을 잃어버린 시점에서는, 마탑의 주인이나 법황 정도를 데리고 오는 게 아니라면 아예 비견될 인간조차 없을 괴물.
“...당신에게 물은 것이 아닙니다, 라드 경.”
그녀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런 말을 꺼내놨지만, 이번에도 대답은 거침없이 돌아왔다.
“그저 효과 범위 바깥으로 걸어 나오기만 하면 될 노릇입니다. 그걸 막는 어떠한 제재 수단도 없어요.”
“...”
그건 알고 있다.
그만큼 강력한 기술인데도 왜 대놓고 실전에 활용된 적이 없는 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기도 했다.
하지만.
“...효과 범위 바깥으로 나서면, 그대로 시련에서 실격 처리로 알고 있습니다. 일부러 거기에 맞춰 설치하신 것 아닙니까.”
“목숨이 아까운 이는 그렇게 하겠지요. 거기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
“용사라는 이름값에 걸리는 무게는 그 정도가 아닌 게 오히려 이상합니다. 타국의 수뇌부들도 인정하는 사실이구요.”
검성이 부드러운 미소를 띈 상태로, 그런 문장을 평탄하게 이었다.
“...허나 참가자들이 그 정도의 위협을 무릅쓰는 건 너무 가혹한 처사-”
“설리번 재상.”
검성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답지 않게 대단히 감정적이십니다.”
“...”
“인도적인 면에서는 몰라도 적합성 면에서는 흠잡을 부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애초에 누가 봐도 문제가 있는 방식이었다면 타국의 수뇌부 역시 제지했을 겁니다.”
“...”
확실히.
지금 그녀가 행하는 일은 근거가 부족하다.
철혈 재상이란 명성에 걸맞지 않게 감정적인 대처인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저 남자라면, 분명히.’
엘리야 크리사낙스라는 인간에게 용사라는 타이틀을 쥐여주기 위해 또 스스로의 목숨을 무릅쓸 것이 뻔하다.
항상 그래왔으니.
겉으로는 항상 난봉꾼에 쓰레기처럼 보이지만, 그 속을 뜯어보면 주변에 있는 인간들에게 바보처럼 보일 정도로 헌신적이다.
예전 그녀의 기억에도 똑똑히 남아있듯이.
“...”
설리번이 테이블 아래로 손을 꾸욱 쥐었다.
그러니.
그를 예상 외의 ‘변수’에 내던지는 게 싫다.
어떤 방식으로든, 다우드 캠벨이.
자신이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이 싫다.
적어도, 지금 이 시련의 진행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대단히 제한되니까.
황제가 이미 시련의 진행자로 낙점된 이상, 그녀가 거기에 끼어들 방법은 굉장히 까다로워진다.
‘...방심하고 있었어.’
설마하니 황제가 직접적으로 이렇게 일을 벌일 줄은 몰랐다.
황제는 어디까지나 그 남자에겐 철저하게 무관심. 서로 엮일 일 자체가 없었으니까.
그녀가 겪은 ‘이전 회차’에서는 결코 없던 일이었지.
‘무슨 의도로, 이런 일을 벌이는 거지.’
여태까지 서로 부딪힐 일이 있다면 알아서 눈치껏 피해가는 게 보통인 사이였다.
아마 ‘굳이 권력 싸움을 통해 제국을 개판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는 이해관계가 일치했으니까 일어난 일이겠지. 황제가 스스로 굳이 눈에 띄려고 노력하지 않는단 것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면에서, 느닷없이 이런 일을 벌이는 건 완전히 예상 밖의 일이다.
“재상, 혹시 그 남자 때문입니까?”
“...예?”
“다우드 캠벨이란 인간 말입니다.”
느닷없이 날아온 검성의 말에, 설리번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어서, 그녀의 이성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쪽이 그걸 이미 알고 있었다면,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는 건지 대략적으로 압축이 가능해지니까.
“...폐하.”
이어서, 그녀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일부러, 꾸미신 일이군요?”
희미한 분노마저 담긴 목소리였다.
“그 남자를 빌미로 저한테 압력이라도 넣을 생각이셨습니까?”
“틀렸네, 설리번.”
이번에는, 검성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가냘프고, 온 신경을 다 집중해야 들릴 수 있을 만큼 희미하지만.
분명히, 황제가 직접 입을 열어 말하는 내용이었다.
“그대에게 압박을 주려는 건 결코 아니었네. 굳이 그대와 사이가 틀어질 이유도 없고. 그대가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에 관심이 생겨 짐이 그 남자를 접하게 된 건 사실이네만.”
“...”
설리번의 눈가가 살짝 꿈틀거렸다.
황제가 본인의 ‘목소리’를 써서 말을 하는 걸 본 게 대체 얼마만의 일이란 말인가.
이 소녀에게 걸려있는 제약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용혈의 저주.
제국 황가에 흐른다고 알려지는 ‘용’의 인자를 물려받은 자에게 극히 낮은 확률로 일어나는 희귀병.
현 제국의 황제는, 아마 스스로 목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조차 몸에 부하가 오는 행동일만큼 속이 곯아있을 확률이 대단히 높은 인간이다.
바꿔말하면.
그런 상태에서도 굳이 목소리를 꺼낼 만큼, 지금 이 일에 진심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그저,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정보를 조금 더 얻기 위함이네. 그대가 걱정할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도록 할 테니 걱정하지 말게나.”
“...주의 깊게 보고 있다는 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
설리번이 여전히 가늘어진 눈으로 그렇게 질문했다.
애초에 황제가 그쪽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뭐란 말인가.
다우드 캠벨은 분명히 지금까지 걸어온 행보만 봐도 대륙구 수준의 촉망받는 인재인 건 맞지만, 이미 검증된 인간을 주변에 수두룩하게 늘어놓은 황제 입장에서 집중적으로 살필 대상은 결코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별것 아닐세. 반쯤 흥미 본위지.”
웃음기 섞인, 농담조로 내뱉는 문장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거기에 섞인 ‘분위기’를 느끼자.
그 기저에 깔려있는, 아주 희미한 ‘기척’을 감지하자마자.
“...운명적인 교감이 느껴졌다고 해야 하나. 그런 시덥잖은 이유네.”
설리번의 눈이 경악으로 치켜 떠졌다.
“...”
그녀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자제심을 잃지 않기 위한 최대한의 노력이었다.
아주 티끌 만한 느낌이지만.
스쳐 지나가는 순간 그대로 잊어버릴만큼 미약한 직감이지만.
잊어버릴 수가 없는 감각이다.
수도 없이 곱씹었던 악몽을, 그녀에게 선사해주었던 감각이니.
“...”
가빠진 호흡을 진정시키며, 설리번이 간신히 표정을 뚫고 나오려는 경악을 내리눌렀다.
“왜 그러나, 설리번?”
“...아무것도 아닙니다, 폐하.”
그녀 또한 ‘악마’의 기운을 다룰 수 있는 이기 때문에 민감하게 느껴진다.
‘갈색.’
그녀가 떨리는 손을 꽉 틀어쥐며 그런 단어를 뇌까렸다.
물론 그녀는 모든 악마를 싫어한다.
그녀가 겪어온 모든 경험 중, 제멋대로의 이유로 다우드 캠벨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으니까.
빈도수가 적고 많고의 차이는 있지만, 다우드 캠벨은 모든 악마에게 다 한 번씩의 죽음을 경험할 가능성이 있다.
적어도, 그녀가 ‘봐 온’ 것들이 그러했다.
“...”
하지만.
갈색은, 그중에서도 가장... ‘예외’의 존재다.
어떤 의미에서는 회색 악마보다도 더.
‘...황제가, 갈색 악마의 그릇이라고.’
상상도 하기 싫은 가정이다.
그나마 저마다의 이유로 다우드 캠벨에게 접근하는 것을 참거나, 우회하거나, 아니면 그 남자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 안에 있는 다른 그릇과는 달리.
이쪽은, 설리번 자신과 더불어 제국 제일의 권력자다.
스스로의 감정만을 앞세우기만 해도 그 남자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파괴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단 소리다.
하물며.
다른 놈도 아니고 그 갈색 악마라면.
판데모니엄을 지배하는 여섯 권좌의 마지막 주인.
갈색 악마.
천사들의 사생아. 가장 비천한 악마.
‘모든 세계선’에서 다우드 캠벨을 가장 많이 죽인 그 악마라면.
“...”
또다시, 기억난다.
자신을 죽여달라 청하던 다우드 캠벨의 모습이.
의식을 뚫고 튀어 오르는 끔찍한 장면에, 재상이 재빠르게 얼굴을 숙였다.
창백해진 얼굴을 상대방에게 굳이 보여주고 싶진 않았으니까.
“...설리번? 그대, 괜찮나?”
전부.
이 여자가 품고 있는 악마 때문에 ‘일어났던’ 일이다.
“...”
설리번이 표정을 뚫고 나오려는 살의를 간신히 억눌렀다.
지금 당장이라도.
상대를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버리고 싶다. 죽여버리고 싶다. 영혼을 부숴서 사방에 흩뿌리고 싶다.
하지만.
아직은.
아직은 아니다.
이 정도 기척이라면, 아직 첫 번째 조각조차 각성하려면 한참 남은 수준이다.
악마의 조각은 그 숙주인 그릇의 정신 상태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다. 굳이 자극 시켜 일찍 깨울 필요는 없다.
불멸에 가까운 그들의 특성을 감안하면, 애초에 죽이는 것조차 불가능하고.
그보다는, 당장은 최대한 그 시간을 ‘유예’시키는 게 먼저다.
“...예, 폐하. 괜찮습니다.”
설리번이 언제나의 무표정을 걸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머릿속으로는 온갖 계획과, 대비책들과, 권모술수가 꿈틀거리고 있었지만.
당장 티 낼 일은 아니다.
확연하게, 후에 ‘적수’가 될 자에게 자기 의중을 드러내는 건 얼간이나 하는 짓이다.
다만.
“...하지만, 폐하. 제가 탐내고 있다는 걸 알고도 그런 일을 저지르셨다면, 책임 정도는 져 주셔야겠습니다.”
이 정도 불쾌감 정도는 드러내도 괜찮겠지.
“책임이라니?”
“그 남자가 티끌만큼이라도 다친다면.”
설리번의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빛났다.
“대가를 치루셔야 할 겁니다, 폐하.”
“...”
재상이 황제에게 하는 발언으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강도의 하극상이겠지만.
이 방 안에 있는 아무도 거기에 나서서 제지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우수한 인원들이었으니까.
지금 이 자리가 제국을 ‘양분’하고 있는 인간들의 자리라는 걸 명확하게 깨닫고 있다는 뜻이었다.
즉.
혹시라도 누군가 잘못 나서서 상황이 격화되어 최악으로 치달았다간.
대륙 전체가 혼란에 빠질만한 수준의 개판이 일어난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두 명의 여자는, 그 정도 위치에 있는 거물들이다.
어느 한쪽이 격렬하게 터져 나오지 않는 이상, 그들은 투명 인간 역할을 하는 것이 제일 현명하겠지.
‘...그 다우드 캠벨이란 새끼가 대체 누구길래...!’
물론, 그런 여자들 두 명이 고작 남자 한 명으로 이런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사실에 저주 정도는 토해내고 있는 게 분명했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고 하지 않았나.”
주변인들이 긴장감에 땀을 뻘뻘 흘리는 사이.
막상 당사자인 황제는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휘휘 내저을 뿐이었다.
그런 동작에 맞춰,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 중 한 명이 잽싸게 수정 구슬 하나를 들고 왔다.
“시련이 진행되는 장소의 화상 화면일세. 지금부터 곧바로 관찰하며 혹시라도 그 남자가 무슨 위기에 처한다면 곧바로 라드를 파견하도록 하지.”
그렇게 말하며 황제가 다시 손짓을 취하자, 시종이 고개를 숙이며 수정 구슬을 작동시켰다.
이윽고, 안쪽에서 실시간 영상이 전송되었다.
그리고 거기엔.
“살살 죽여줘, 새끼들아---!!!”
무력화장이 깔린 곳 한 가운데서.
아무 능력도 없는 상태로.
맨몸으로 대형 마수들에게 돌진하는 다우드 캠벨의 모습이 있었다.
심지어는 상하의 마저 전부 탈의하고 속옷 한 장만 달랑 걸친 모습으로.
“...”
“...”
“...”
모두가 그걸 보고 침묵했다.
아무도 말을 꺼내 놓지 못했다.
아무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