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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 사랑받는 운명입니다 (185)화 (186/258)

Chapter 185 - 185. 황명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

 

 

훌쩍거리는 다우드를 본 엘리야가 마침내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 동안 폭풍처럼 상대방을 털어대니 그래도 기분이 좀 나아지는 느낌이다.

 

 

“다시는 그런 일 하지 마세요. 아시겠어요?”

 

“...그래.”

 

 

그런 확답을 받아낸 엘리야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물러섰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 정도로 심한 말을 연속으로 쏟아낸 건 처음이지만, 상대방은 그래도 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원래도 본인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정도가 좀 심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 때가 많다.

 

어쩌면, 이 사람이 ‘변화’하는 정도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찾아오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로.

 

그런 생각을 곱씹는 사이, 뒷짐을 진 페이놀이 종종걸음으로 다우드에게 접근했다.

 

 

“잔뜩 혼나셨네요, 다우드 씨?”

 

“...시끄러워.”

 

 

놀리듯이 던지는 말에 걸맞게, 얼굴에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안심했다, 는 분위기가 절절하게 전달된다.

 

 

“...”

 

 

생각해보면, 방금 전에 다우드가 죽으려고 할 때 자신보다 더 한 패닉 반응을 보인 게 이쪽이다.

 

 

-지금 당장 저쪽을 지원해야 합니다!

 

-잠깐, 선생님이 아직 기다리라고 했어요...!

 

-이대로라면 저 남자가 죽는단 말입니다-!!

 

 

반쯤 절규하듯이 그런 소리를 내놓던 것을 똑똑하게 기억한다.

 

평소에는 감정이라고 할 만한 것을 꺼내놓는 일이 거의 전무한 인간이 한 일이라 훨씬 더 뇌리에 깊게 박혔지.

 

무슨 말을 하거나 표정을 지어도 항상 가면을 쓴 인상밖에 못 주던 여자였는데, 그런 말을 꺼낼 때만큼은 틀림없이 진심이었으리라.

 

 

“...”

 

 

그런 면에서.

 

방금 전에 마수들을 쓸어 담을 때 이 여자가 쓴 그 붉은색 화염은 특기할만하다.

 

어찌나 급했는지, 웬만해서는 남들 앞에서 안 쓰는 걸 ‘억지로 꺼내쓰는’ 느낌이 절절하게 들었으니까.

 

문제는.

 

그 화염.

 

어디선가 본 색깔이다.

 

 

‘...붉은색.’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는 날의 기억.

 

검은 밤하늘을 새빨갛게 불사르던, 천지를 통째로 태우는 것 같은 화염의 기둥이 머릿 속으로 떠오른다.

 

아버지. 어머니. 친구들.

 

전부 잿더미로 돌아간 그 날의 기억.

 

적야 사태.

 

붉은 악마가 그녀의 가족을 송두리째 앗아간 그 날.

 

 

“...엘리야? 왜 그래?”

 

 

그녀가 그런 기억을 곱씹고 있자니, 근처에 있던 탈리온이 의아하다는 기색으로 그런 말을 던져왔다.

 

척 보기에도 안색이 창백해진 엘리야의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기 때문이겠지.

 

 

“...아니, 아무것도.”

 

 

이에, 엘리야가 애써 그런 말을 뱉으며 평소의 웃음을 띄워올렸다.

 

물론, 속으로는 저주받은 이름을 곱씹고 있었지만.

 

 

‘...붉은 악마.’

 

 

악마라는 것들에 대해서 그렇게 큰 관심을 가지는 편은 아니지만.

 

붉은 악마만큼은 예외다.

 

자신의 과거를 통째로 불사른 그 저주받은 존재만큼은.

 

 

“...”

 

 

그리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지금 그녀가 마주한 이 페이놀 라이펙이란 인간은, 그런 존재의 향취가 물씬 난다.

 

그녀가 가진 ‘진리의 눈’으로 살펴봐도 명확하게 감지되지 않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

 

 

엘리야가 말없이 페이놀을 계속 바라보았다.

 

석연치 않은 감정이 적나라하게 담긴 눈빛이었다.

 

 

 

 

어젯밤은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하루 종일 숲 안에서 울려 퍼진 비명과 피비린내에 머리가 어지러웠을 정도니까.

 

객기를 부리면서 끝까지 버티려다가 치명상을 입은 자도 다수라고 들었다. 아마 사망은 피해 가겠지만, 평생을 따라다닐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리는 건 막을 수 없겠지.

 

물론, 모두 라나 레이 델비움에겐 별로 의미가 없는 말이었다.

 

후유증도 뭣도 그녀에겐 별 의미 없는 말이다. 간밤에 늑대들에게 미친 듯이 물어 뜯기느라 옷이 좀 너덜너덜하긴 했지만, 그거 외에 신경 쓰이는 점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아마 ‘오랫동안 생존하라’는 과제에 있어서 그녀보다 높은 점수를 받은 인간은 없겠지.

 

이 인간 빼고.

 

 

“...으으음.”

 

 

라나 레이 델비움이 턱을 쓰다듬으며 근처를 바라보았다.

 

다우드와 그 동료들이 끙차끙차 열심히 운반해둔 마수들의 사체가 그득하게 쌓여있었다.

 

 

“...이걸 전부 죽이셨습니까?”

 

“응.”

 

“...”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오는 대답에, 라나가 할 말을 잃고 다우드를 바라보았다.

 

무력화장 안에서, 사냥과 추적이 특기인 마수를 역으로 전부 죽였다고.

 

자신 정도면 그래도 최고점을 노려볼만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상대가 이래서야.

 

아마 채점 단계에서 압도적 선두를 달릴 건 분명 이 사람과 엘리야겠지.

 

 

“...진짜 다우드 씨는 어디서 튀어나온 괴물인지 모르겠슴다. 성검은 엘리야 씨가 아니라 당신이 쥐어야 하는 거 아님까?”

 

“...그건 제가 못 쥐죠.”

 

 

하지만 그런 점에서는 또 칼같이 끊어내는 부분이 이상하다.

 

마치 당연하게 그쪽에게 그걸 쥐여줘야 한다는 것처럼.

 

정도 이상의 능력을 보여주는 건 명백하게 용사 후보인 엘리야가 아니라 이쪽 같은데.

 

 

“...그런데, 그 사람들은 뭡니까?”

 

 

그녀가 이어서 그런 질문을 꺼내들었다.

 

다우드 근처에 멍하니 서 있는 건장한 성인 남성 여러 명을 보고 꺼내든 질문이었다.

 

마치 약이라도 한 사발씩 들이킨 것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계속 보고 있는 게 조금 무서울 정도다.

 

애초에, 용사 선발 시련에 이런 사람들이 들어올 건덕지가 있었던가?

 

 

“아뇨, 뭐.”

 

 

그녀의 질문에 다우드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받았다.

 

 

“...루미놀 대주교님에게 보내는 선물 같은 거라서요.”

 

“아버님에게 말임까?”

 

 

라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동자에 초점이 풀려있는 인간들을 여기저기 훑어보았다.

 

척 봐도 험한 일을 여러 번 해온 게 분명한 사람들의 무리다.

 

이게 어떻게 ‘선물’로 활용된다는 거지?

 

 

“...노파심에 묻습니다만, 아버님한테 이 사람들로 안 좋은 일이라도 하실 계획이십니까?”

 

“...그랬으면 제가 당신 앞에서 이런 걸 훤히 보여주겠습니까, 라나.”

 

 

그거야 그렇지.

 

하지만, 그런 것도 아니라면 대체 뭘 하겠단 의미지?

 

라나가 그런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분명히 좋아하실 겁니다.”

 

 

다우드가 피식 웃으며 말을 받았다.

 

 

“마지막 시련 시작할 즈음이면, 분명히 그러실 거에요.”

 

“...”

 

 

겉으로는 별다른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눈치가 둔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던 라나조차도 섬칫한 느낌을 받을 만큼, 시꺼먼 속내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채점은, 당연히 1위.

 

썩어있는 루미놀 대주교의 표정이 참 볼만했다.

 

 

[...근데 먼저 맞을 짓 한 건 너 아니냐?]

 

“...맞긴 하죠.”

 

 

칼리반의 말에 군말 없이 동의한다.

 

사실 아버지 입장에서 본다면 날 좋게 볼 이유가 없긴 하다.

 

아예 물불 안 가리고 죽이려고 들었다는 점에서 나도 어느 정도 정당방위 요소가 성립하긴 한다만.

 

그러니까 나중에 그 사람에게 저지를 짓도 그다지 죄책감 없이 저지를 예정이다.

 

 

“...으아.”

 

 

그런 생각을 곱씹는 사이, 전신이 욱신거리는 감각에 얕은 비명을 내질렀다.

 

철인 특성 덕분에 통각이 차단되는 건 좋지만, 그래도 부상의 후유증은 그대로 남는다.

 

그쪽 특성으로 사라질만큼 치명적인 통증은 아닌지라 아마 그대로 느껴지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죽도록 아프다.

 

 

“...다음 계획 짜야지...”

 

 

배정된 숙소로 터벅터벅 걸어가며 그런 말을 뇌까린다.

 

첫 번째 시련, 두 번째 시련 모두 종료된 시점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건 성황국 내부에서의 마지막 시련과, 그쪽의 성역 근처에 꽂혀있는 성검의 인계식이지.

 

4챕터 전체의 하이라이트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

 

 

그리고, 아마.

 

거기가 바로 변수 덩어리가 될 확률이 높다.

 

 

‘선각자.’

 

 

지금까지, 그쪽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던 녀석의 이름을 떠올린다.

 

첫 번째 시련에서도, 두 번째 시련에서도 모두 녀석이 부린 수작질은 제로에 가까웠다.

 

심지어 첫 번째 시련에서는 언령술사를 파견해서 나를 도우려고까지 했지.

 

그 의중을 짐작할 수가 없지만, 이번에야말로 그쪽에서 뭔가 저지를 타이밍이라는 건 피부로 느껴진다.

 

그러니, 마지막까지 엘리야가 성검을 잡고 용사로 발돋움 할 수 있도록 확실하게 모든 요소를 점검해야 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복도를 걷고 있자니.

 

생각지도 못한 사람과 마주치게 되었다.

 

 

“...어라. 각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벽에 기대어 서 있던 황금색의 재상님이 천천히 눈을 밀어올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수행원이나 경호원조차 없다. 덩그러니 혼자다.

 

 

“시련에서의 괄목할만한 성과, 축하드립니다. 대단하시더군요, 다우드.”

 

“...감사합니다.”

 

 

그래. 축하해주는 건 고마운데.

 

그거 하나 해주려고 제국 제일 가는 권력자가 경호원도 없이 혼자 행차했을 리가 없을 텐데.

 

 

“마지막 시련은 일주일 뒤에 치러집니다. 그 사이에 당신에게 전달된 게 있어서 온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다가온 설리번이, 품에서 서신 하나를 꺼내들어 나에게 내밀었다.

 

 

“-황궁에서의 초대입니다.”

 

“...예?”

 

“세실리아 11세가, 당신과의 독대를 요청했습니다.”

 

 

씹어서 내뱉는 것 같은 재상님의 문장을 들으며, 눈앞으로 전달되는 서신을 바라본다.

 

서신 겉봉에 박혀 있는 건 제국 황가의 인장이 새겨진 짙은 갈색의 인장이다.

 

 

‘...뭐?’

 

 

황제?

 

세실리아 11세?

 

그 사람이 나한테 왜?

 

 

“...”

 

 

전부터 나에게 관심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황명’을 통해 나를 직접 황궁으로 불러들이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다른 것도 아니고 황제의 지시다. 안 지키면 그대로 교수대에 목이 메달려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의 강제력을 가진다.

 

 

‘...아니, 진짜로 왜?’

 

 

혼란스러운 머리로 생각을 가속 시킨다.

 

이렇게까지 해서 나를 급하게 보고 싶어 할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황제와 지금 대면하는 건, 솔직히 그렇게 달가운 일은 아니다.

 

세실리아 11세.

 

기드온과 더불어 엘노어 타락의 가장 큰 지분을 가지고 있는 인간.

 

엘노어의 타락이 본인의 멘탈이 바스러지는 시점에서 이루어진다는 걸 생각하면, 이 인간도 결코 그쪽에게 정신적으로 좋은 영향을 끼치진 않는다는 걸 쉬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우드.”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 나에게, 설리번이 조용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내키지 않는다면 거절하셔도 좋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내 귀를 의심하며 상대방을 바라본다.

 

 

“예?”

 

“제가 전력을 다해서라도 당신을 보호하겠습니다. 무슨 수단을 동원해서라도요.”

 

 

직감적으로 깨닫는다.

 

아무리 황가의 서신이라고 해도, 왜 설리번이 직접 이걸 전달하려고 왔는 지.

 

이 사람.

 

나를 독대한 상태에서 이런 말을 하려고 찾아온 거다.

 

 

“...”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상대방을 바라본다.

 

내가 지금 똑바로 들은 게 맞는 지 모르겠는데.

 

이 인간, 지금 ‘황명’을 거부해도 좋다고 말하는 거다.

 

정치적으로 그게 어느 수준의 강제력을 가지고 있는지 감안한다면.

 

제국 전체를 양분하는 권력을 가진 인간이 그런 말을 한다는 건, 오싹할 정도의 뜻을 내포한다.

 

재상이 앞장 서서 황명을 ‘거부’한다는 건, 그쪽의 지배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으니까.

 

즉.

 

이 사람.

 

나를 위해, 제국 전체.

 

더 나아가서는 대륙 전체를 혼란의 불구덩이로 몰아넣겠다는 말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만을 위해.

 

수십, 수백, 수천, 수만의 인간이 죽더라도 괜찮다고.

 

그 죗값은 본인이 전부 뒤집어 쓰겠다고.

 

 

“...”

 

 

그런 사실을 전부 이해하고, 뻣뻣하게 굳은 모습으로 재상님을 바라보고 있자니.

 

설리번이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마치.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다우드.”

 

 

‘이어질’ 일에 비교한다면, 그 정도야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는 태도였다.

 

 

“부디.”

 

 

틀림없이.

 

 

“이번에는, 제 곁을 떠나지 말아주세요.”

 

 

간절함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