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87 - 187. 황명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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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물과 기름 같은 인간들이 꼭 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여러번 마주쳐도, ‘이 사람은 도저히 못 어울리겠구나’하는 느낌이 직관적으로 오는 조합.
엘리야와 엘노어가 서로를 바라보며 느끼는 건 아마 그런 감정일 가능성이 대단히 농후하겠지.
“...”
“...”
역시, 불편하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엘리야와 엘노어가 거의 동시에 그런 감상을 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친해지려면 얼마든지 친해질 수 있는 사이일 것이다. 서로 공통점이 꽤 많으니까.
어린 나이부터 검을 잡으며 컸다는 점도 그렇고, 검술과 신체 단련에 대단히 관심이 많다는 점도 그렇고, 주변에서 우러러 보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교우 관계가 쉽게 확장되지 않는다는 점도 그렇다.
문제는, 그렇게 있는 공통점 중에.
이 두 명은, 서로가 ‘같은 남자’에게 호감을 품고 있다는 게 치명적이지.
‘...리루는 몰라도, 이 사람은 좀...’
그래도 이리저리 부대끼며 사람 됨됨이는 알게 된 리루와 달리, 엘리야는 기본적으로 아직 트리스탄 공작가에 대한 불호가 걷히지 않은 상태다.
절친한 사이라도 사이가 순식간에 나빠지기에 충분한 이유일 텐데, 애초에 서로 사이가 처음부터 좋지도 않았던 두 명이 화기애애 해질 리가 없다.
“...그래서.”
엘리야가 결국 쭉 이어지던 침묵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느닷없이 황궁엔 왜 가는 건데요?”
황궁을 가는 것 자체는 별로 거부감이 없다.
엘리야 본인이 제국에서 손꼽히는 대귀족인 켄드리드 변경백의 양녀인 이상, 황궁을 방문하는 건 사실상 연례 행사처럼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일정 느낌이었으니까.
그건 트리스탄 공녀인 엘노어도 마찬가지겠지.
문제는, 아무리 그렇다 해도 거기가 룰루랄라 소풍갈만한 기분으로 방문할 곳이 아니라는 것도 당연한 사실이라는 거다.
당장 평소에는 거의 반 짐승이나 다름없는 켄드리드 변경백조차 황궁에서 유순하고 얌전하게 구는 걸 보고 어찌나 충격받았던가.
-여긴 아귀들의 각축장이란다, 엘리야.
날 선 목소리로 주입받았던 경고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절대로 책잡힐 짓을 하지 말거라. 절대로. 눈에 띄지도 말고.
“...”
제국에서 제일 가는 대귀족 중 한 명조차 그렇게 말할 정도다.
안쪽에 도사리고 있는 위협이 어느 정도인지는 굳이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
“이유야 그대도 짐작하는 것이네.”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자니, 엘노어가 담담한 목소리로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다우드가 거기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으니까.”
“...”
그래. 그럴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엘노어가 이상할 정도로 추진력이 충만한 모습을 보일 때는 열의 아홉은 그 남자가 엮일 때의 경우니까.
“...어쩐지 갑자기 사라지긴 하셨죠.”
두 번째 시련이 끝난 이후로, 축하 파티라도 할까 해서 다우드의 개인실에 술 한 병 들고 저녁에 찾아갔는데 아무도 없어서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그랬는데 갑자기 황궁에 불려 갔다는 내막이-
“아니, 잠깐.”
엘노어가 눈을 가늘게 뜬 상태로 그녀의 말을 잘랐다.
“...한밤중에 술 한 병을 싸들고 혼자서 그 남자의 개인실로 찾아갔다고?”
“...”
“정말로 축하 파티를 위해서 간 것 맞나?”
“...”
엘리야가 볼을 긁적이며 시선을 슬쩍 피했다.
이어서, 애써 지어낸 친근한 웃음과 함께 말을 잇는다.
“...회장님이 이상한 생각하시는 게 아닐까요? 진짜로 축하 파티만 하려고 했는데.”
“...”
아무래도 이 변명은 안 통한 모양이다.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대단히 싸늘하다.
그럼 남는 건 애써 화제를 돌리는 것뿐이지.
“...그, 그래서, 학생회장님은 왜 선생님이 황궁에 불려 가셨는진 아나요?”
“...”
다행히, 한 번 넘어가기로 해준 모양이다.
자신을 노려보던 시선을 거둬들이며 한숨을 내쉬는 모습을 보니 그렇다.
“...알 수 없네. 들은 건 폐하께서 그 남자를 직접 지명하셨다는 것 정도.”
“...”
엘리야의 표정이 찌그러졌다.
황제가 그 남자를 직접 지명했다고?
대체 왜?
“...이유는 나도 모르네. 폐하께서는 다 생각이 있겠지. 그쪽은 크게 걱정하지 않네.”
“...”
“문제는, 그 엿 같은 장로들이지.”
엘리야가 피식 웃으며 침묵으로 수긍했다.
엘노어가 이렇게 대놓고 욕설을 내뱉는 건 처음보지만, 그걸 들어먹는 상대방은 그런 말을 들어도 싼 인간들이니까.
대공과 변경백이라는 대귀족 두 명은 둘이 합쳐 정치 지분의 3할에서 4할을 갈라서 먹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위세를 자랑하지만, 그럼에도 제국 정세의 과반을 차지하고 있는 건 ‘장로’로 대표되는 오래된 귀족 가문들이다.
대귀족 바로 아래턱에 위치한 5개의 명문가들.
황제와 재상 양쪽에 달라붙어 스스로의 잇속을 불릴 생각으로 가득 찬 인간들.
켄드리드 변경백의 표현을 빌리자면, 뱀의 심장을 가진 이들이다.
“그러니, 그대와 내가 함께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 올 걸세.”
엘노어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안쪽에서 다우드가 그쪽에게 공격당할 만한 일을 막아줘야 하니. 변경백 가문과 대공 가문의 힘을 합치면 어렵진 않을 걸세.”
“...”
어찌보면, 이런 점은 존경할 만 하다.
엘노어 본인도 엘리야가 그렇게 달갑진 않을 텐데, 다우드가 엮이는 순간 그런 개인 감정은 바로 내팽개쳐 버리고 이렇게 협력해달라고 손을 벌리다니.
“...원래대로라면, 그냥 거절했겠지만요.”
그러니.
그런 열의에 걸맞는 성의 정도는 보여줘야 할 것이다.
“...이번 한 번은 도와드릴게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선생님이 얽힌 일이니까.”
“고맙군.”
“단.”
엘리야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더 도움 되는 쪽한테 뭐 하나 ‘양보’하기 하실래요?”
“...”
이건, 기억에 남아있다.
이전에, 방학 때.
두 명이서 영지 하나를 뒤집어 엎을 때 했던 내기였던가.
“...그거 나쁘지 않군.”
엘노어가 씩 웃으며 답했다.
“그때 내기의 결착을 보자는 건가.”
“뭐, 질 생각 없다구요?”
그런 말과 함께 엘노어와 엘리야가 서로 사나운 웃음을 교환했다.
그렇게 서로간에 결연한 의지를 다지며 황궁에 도착한 두 명은.
“...폐하의 침소로 들어갔단 말인가? 다우드가? 이 시간에?”
“그렇다고 들었습니다만?”
“...”
황궁 안에 있던 트리스탄 공작가의 정보원에게 그런 말을 듣자마자.
동시에 표정을 경악으로 물들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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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해서.
난 지금 황제의 침실 바로 앞이다.
“...”
여기에 오기까지, 당장 입에서 불이라도 뿜어낼 기세의 재상님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 검성조차 진땀을 뺏던 기억이 난다.
“이거 전쟁하자는 겁니까, 뭡니까! 제가 지금 당장 폐하를 직접 뵈야겠-!”
“...전쟁이라는 말을 함부로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설리번 재상. 당신이 말하면 빈말처럼 안 들리니까.”
그렇게 나눴던 대화에는 나도 어느 정도 공감이 되는 부분이 있다.
재상님이 그런 말을 하면 도저히 빈말로 들을 수가 없거든.
‘...무서웠지.’
농담이 아니고 진짜로 황제랑 싸움 붙을 기색이라서 더 그랬다.
게임 안에서도 항상 냉철한 모습만 유지하던 인간이, 얼마나 이성을 잃었으면 거기까지 말이 튀어나올까 싶긴 한데.
아무튼 검성 본인이 ‘당신이 화낼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거다’라고 수십 차례 확언하고 나서야, 간신히 재상님이 진정했었지.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반드시 누르라고 비상 연락용 마석을 강제로 넘기긴 했지만.
-무슨 일이 있다면 반드시 누르셔야 합니다, 다우드.
끝까지 절대 내키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황명이라는 데 어떻게 하나. 안 지키면 그대로 내전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
나도 그러니까 고분고분 끌려왔고.
“폐하는 안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검성이 정중하게 머리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처음 방문하시는 걸 감안한다면, 예법을 차리는 건 폐하 본인도 신경 쓰지 않으실 겁니다. 편히 있다 가시지요.”
“...감사합니다.”
빈말이라도 고맙다.
진짜로 안 지키란 소린 아니겠지만.
“진심입니다.”
“...예?”
검성이 얼굴에 여전히 온화한 웃음을 띄운채로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직접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황가의 명예를 걸고, 예법을 이유로 그대를 처벌할 일은 없을 거라고. 편하게 본인을 대하라고 말입니다.”
뭐?
왜?
“...감, 사합니다...?‘
간신히 그런 답을 꺼내놓긴 했지만.
이해가 안 갈 정도의 특례다.
기껏해야 자작가 소속 인간이 황제 앞에서 ‘편하게’ 있다 가라고? 황가의 명예까지 들먹이면서 강조할 정도로?
난 저쪽이 마음만 먹으면 손짓 하나로 목을 날릴 수 있는 인간인데?
‘...뭐냐, 대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이해가 안 간다.
그렇게 생각하며 안내에 따라 황제의 침실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서자마자.
“...어서 오게, 다우드 캠벨.”
전라의 황제가 나한테 그리 말하고 있었다.
“...”
뭐야 씨발.
이거 뭔데.
“늦은 시간인데, 초대에 응해주어 고맙네.”
그렇게 낮게 조곤조곤 속삭이는 것 같은 목소리와 함께, 눈앞으로 창 하나가 떠올랐다.
< System Message >
[ 악마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
[ ‘타천의 인장’이 반응합니다! ]
“...”
현기증이 순간 핑 돈다.
물론 남은 악마 하나가 있다는 건 전부터 잘 알고 있던 사실이다.
갈색 악마. 탐욕의 악마.
황제가, 그 그릇이라고?
“...”
악마의 그릇과, 단 둘이 침실?
하물며 상대방은 내가 도저히 거절할 수도 없는 권력가?
이거 완전...!
“...격식 있는 모습은 아니네만, 양해를 좀 구하지.”
그런 생각을 하는 내 쪽으로, 목소리가 이어서 날아왔다.
침대에 누워 수건으로 몸을 닦고 있는 황제가 쿡쿡거리며 꺼내든 말이었다.
어.
어라.
느낌이, 바로 ‘잡아먹힐’ 느낌은 아닌 것 같다.
“...”
희미한 촛불이 드넓은 침실 안을 밝히는 유일한 조명이었고, 덕분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 창백한 달빛 아래에 드러나는 모습은 더욱 몽환적으로 비춰졌다.
솔직하게 말해서, 나신에 가까운 여자의 몸을 보는 건 이번이 태어나서 처음이다.
정신이 아찔할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다.
세실리아 11세는 평균적으로 외모 수준이 대단히 높은 세라 주연들 중에서도 특히나 ‘비인간적으로’ 아름답다는 묘사가 많이 나오는 인간이다.
몸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미려한 곡선. 세공된 유리를 연상시킬 만큼 새하얀 피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 같은 조각상이 연상되는 몸이다.
하지만, 그렇게 미려한 몸 안으로는.
전신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용혈’ 때문에, 온 몸의 핏줄이 시꺼멓게 괴사하고 있는 것도 눈에 들어온다.
마치 몸에 검은색 피가 흐르는 것 같은 모습으로.
“...”
용혈의 저주.
실제로 보니까 더 끔찍하게 생기긴 했다.
유리아의 몸을 파먹는 단절의 저주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가까이 와주겠나. 시력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라 말일세.”
“...알겠습니다, 폐하.”
침대에 가까이 다가가자, 세실리아 11세가 천천히 내 얼굴로 손을 뻗었다.
음미하듯이, 천천히.
탁한 눈빛으로 내 얼굴을 천천히 더듬어간다.
“...그래서, 이게.”
이어서, 쿡쿡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황제의 말이 흘러나왔다.
“엘판테에서 제일 가는 여심 폭격기의 얼굴이로군. 재미있게 생겼구만, 자네.”
“...”
뇌정지가 올만한 단어가 순간 귀를 타고 흘러들었다.
“...음? 그 반응은 뭔가. 설마 부정하고 싶은 겐가? 내가 잠시 그대를 살피는 동안에도 몇 명이나 그대에게 달라붙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였는데.”
“아닙니다.”
내 입으로 내가 미친 난봉꾼 새끼라고 확정짓는 순간이었지만, 그래도 황제가 그렇다는데 뭐 어쩌겠나.
까라면 까야지.
“그렇게까지 예의 차릴 필요는 없는데 말이지. 신분 차이가 너무 나니 긴장하는 건 이해가 가네만.”
황제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런 말을 뱉었다.
“나는 그대의 ‘평소 모습’을 알아야 하니까. 오히려 이렇게 격식을 차리면 내가 안 좋네.”
“...평소 모습, 말입니까?”
“음. 그래야 다른 이들을 납득시키기 더 편할 테니 말이지.”
“...”
납득시키다니.
뭘?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사이, 황제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국제 정세에 대해서 제법 해박하다고 들었네만, 다우드 캠벨.”
그 사이, 말이 다시 이어졌다.
“지금 제국의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
평소의 모습을 보여달라, 고 했으니 눈 가리고 아웅은 의미 없겠지만.
그렇다고 곧이 곧대로 말할 수는 없는 질문이다.
왜냐고?
‘솔직히 개판이니까.’
재상님과 황제가 있는 힘껏 안 부딪히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도 아래 귀족들은 편 갈라서 패싸움 벌이기에 바쁜 게 현재 상황이다.
위쪽 인간들이 개념 똑바로 박힌 맑은 물인데 아랫물은 죄다 썩어있는 기묘한 상황이지.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인지 알겠군.”
황제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확실히, 제국은 지금 혼란스러운 상황이지. 그나마 나와 설리번이 애를 써서 틀어막으며 평행을 유지하고 있네만. 이런 가짜 평화가 얼마나 갈지는 아무도 몰라.”
황제가 쓰게 웃으며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렇다면, 상상해보게.”
용혈의 저주로, 시시각각 파먹히고 있는 자신의 몸을.
죽음에서 그렇게 멀어 보이지 않는 파리한 육체를.
“지금 상황에서 옥좌가 빈다면, 어느 정도의 혼란이 일어나겠나?”
“...”
“...짐도, 이 몸으로는 얼마나 버틸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라네.”
“...”
침묵하고 있는 나에게, 황제의 말이 이어서 툭 떨어졌다.
“그래서 거기가 필요한 게 자네지.”
“제가, 말입니까?”
“음. 그대를 보고 있으니 조금 좋은 생각이 떠올랐거든. 이런 상황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될 방법 말이네.”
황제가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원래대로는 용사 후보인 엘리야 크리사낙스를 불러야겠지만... 아무래도 그쪽은 결격 사유가 좀 있으니까.”
“...결격 사유라고 하셨습니까?”
“여자 아닌가. 그쪽은.”
“...”
불길함이 등골을 타고 쭉 내려온다.
상대는 ‘악마의 그릇’이고, 그런 인간이 ‘여자’를 쳐내고 ‘남자’인 나에게 용건이 있는 거라면.
경험상 절대 좋은 미래를 떠올릴 수가 없다.
“다우드 캠벨. ”
황제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한 달 정도만, 내 국서가 되어주겠나?”
“...”
잠깐만.
타임.
“...폐하.”
성대를 쥐어짜내듯 간신히 목소리를 꺼낸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십니까?”
“간단하게 말해서, 한달동안 내 남편이 되라 그거네.”
“...”
“이해하기 어려웠나? 그러니까, 여황제의 반려자로서 한달만 같이 살면서-”
아가씨.
왜 그러는 건지 이유를 설명 하라고.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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