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88 - 188. 황명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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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황제 폐하께서는 아예 인정머리가 꽉 막힌 분은 아닌 모양이었다.
내가 쩔쩔 메는 모습에 낄낄거리면서도 결국 설명을 이어가 주신 부분이 그렇다.
“국서라고 급작스럽게 말하면 혼란스러울 건 이해하네.”
황제 폐하가 다정다감하게 내 손등을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했다.
당황해서 움찔거리는 내 모습을 귀엽다는 듯 보고 있다.
‘...게임에서 보던 거랑은 느낌이 좀 다르네.’
이 사람, 이렇게 장난스러운 성격이었던가?
원작에서 세실리아 11세의 모습은 거의 부각되지 않는다. 그냥 가끔씩 튀어나와서 엘노어와 상호 작용하는 게 전부지.
그래서 내가 아는 모습도 딱딱한 모습으로 공적인 업무를 진행하는 것밖에 기억이 없다.
그보다는 메인 퀘스트 진행 도중에 거하게 사고 치는 이미지가 더 강하지.
“...”
이번 4 챕터의 보스인 페이놀과 다르게, 이쪽은 아예 나중에 사망이 확정된 인간이다.
루트도 다양하다. 용혈의 저주에 대한 치료제를 못 찾아서 죽거나, 권력 파워 게임에서 패배해서 곧바로 어딘가에 유폐되거나. 아예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그 중 최악이라면, 그거지.
‘...내전. 이어지는 쿠데타.’
트리스탄 공작가와 켄드리드 변경백을 제외한 명문가들로 구성된 ‘장로회’를 주축으로 벌어지는 국가 분란. 전쟁.
종국에는 기드온과 이 사람이 동시에 사망하는 이벤트.
5 챕터, ‘제국 대분란’의 시나리오 중에서도 가장 최악의 분기다.
4 챕터 마지막의 ‘클라이맥스’에서 선택지 몇 개를 잘못 타고 들어가면 나오는 즉사기급 이벤트기도 하다.
“한 가지 묻겠네, 자네.”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사이, 황제님이 문득 그런 문장을 꺼내 들었다.
“용사 선발의 두 번째 시련에서 보인 행동, 무슨 생각으로 그리했나?”
“...예?”
“아무렇지도 않게 스스로를 죽음 근처로 내몬 것 말일세.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머뭇거리지도 않고 바로 그런 짓을 저지르더군.”
황제가 살짝 가라앉은 눈동자로 그렇게 말했다.
“시험이라고 생각하고 진지하게 답하게. 어째서 그런 일을 저질렀나?”
“...”
갑작스럽게 진지한 어투로 날아오는 목소리에, 나도 입을 다문다.
느닷없이 시험이라고 하니까, 글쎄.
뭐라고 대답해야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내가 꺼내놓을 수 있는 솔직한 답변은 한 가지밖에 없다.
“그게 최선이었으니까요.”
“최선이라고?”
“다치는 건 나밖에 없고, 그런 상황에서 살아나오는 건 수도 없이 해봤으니까요.”
“...”
“할 수 있으니까 했습니다. 확신이 있었으니까.”
“...요컨대.”
세실리아 11세가 빙긋 미소 지었다.
“스스로가 상황을 해결하기에 가장 적합한 ‘도구’라 냉철히 생각했다는 거군.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도 확실히 해낼 수 있을 거라 확신하는 배짱도 있고.”
마치, 그 말이 정답이라는 것처럼.
“...그런 인간일 거라고 생각하긴 했네. 쭉 지켜보니, 참으로 기상천외한 방법을 배짱 있게도 꺼내놓더군.”
황제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내게는, 지금 그대 같은 이가 필요하네.”
“...필요하다고 하심은.”
“난 사냥을 할 걸세, 다우드 캠벨.”
담담한 목소리로 문장이 이어졌다.
“...그대의 생각대로, 지금 제국은 거대한 불씨를 품고 있네. 설리번과 나는 그나마 원만한 편이지만, 장로회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는 소리가 굉장히 자주 들리거든.”
그렇기는... 할 거다.
5 챕터의 진행을 생각하면 한창 그쪽에서 뭔가 작당을 하고 있을 테니까.
“...지금 상황에서 제국 안에서 분란이 벌어진다면... 재앙이지. 성황국의 법황도 마찬가지로 무슨 거대한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게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말이네.”
“...”
정확한 걱정이다.
이 사람 말대로, 5 챕터의 제국 대분란은 곧바로 6 챕터의 성황국 배경의 메인 퀘스트 진행으로 이어지니까.
즉.
지금 이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은.
“난 그대를 ‘사용’해서, 그런 일을 막고 싶다는 거네.”
세실리아 11세가 그런 말을 꺼내들었다.
“자세한 계획은 얘기해 줄 수 없지만... 그대라면 할 수 있을 것 같거든. 장로회를 상대로 일망타진할 기회를 잡게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어떻게, 말씀이십니까?”
“그대가 제일 잘 하는 것으로.”
황제가 살풋 웃으며 말했다.
“살아남아주게.”
“...”
“미끼 역할일세. 자네는. 국서라는 것도 그래서 앉히는 것이고.”
국서.
여황제의 반려.
현재 황제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식도 없다. 만약 내가 그런 자리에 들어간다면 황위 승권자의 적통에 가장 가까운 위치에 놓이게 되는 거지.
기반도 없이, 아무런 전조도 없이, 느닷없이 자작가의 자제가 여황제의 국서로.
권력에 눈멀어 내란을 일으키려는 자들에게, 나만큼 ‘눈에 띄는’ 공격 대상은 없을 것이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황제는 그런 상황을 통해 장로회를 일망타진할 계획을 수립한 모양이고.
“한 달이면 되네. 내가 생각하는 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그 이상으로 자네가 귀찮아질 일은 결코 없을 거야. 내 장담하지.”
담담하게.
황제가 그런 말을 꺼내놓았다.
“...물론, 맨입으로 이런 명령을 내리는 것만한 추태도 없겠지. 그대에게 목숨을 걸기를 강요하는 선택지니 말일세.”
침묵하고 있는 나에게, 황제가 그런 말을 꺼내놓았다.
“그대도 만족할만한 보수를 주겠네.”
“...보수, 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이어서 아무렇지도 않게.
“나의 모든 것을 주지.”
그런 문장이 툭 떨어졌다.
“...예?”
순간적으로 사고가 턱 멈출만한 말에, 그런 대답을 간신히 꺼내놓는다.
하지만, 황제에게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기색으로 다시 말이 이어졌다.
“세실리아 아크 베일리 디외도네. 제국의 황제. 혹은 세실리아 11세. ‘나’의 모든 것을 그대에게 바치겠네. 한 달 동안 좋을 대로 쓰시게나. 몸도, 마음도, 전부.”
“...”
말문이 턱 막힌다.
이 사람이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뭐, 몸?
마음?
“...”
본인의 손짓 한 번으로 목을 날려버릴 수 있는 자작가의 무지렁이한테.
제국의 지배자가.
지금, 뭐라고?
“심심풀이 삼아서 때려도 좋네.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인형으로 써먹는 것도 그대 맘일세. 몸이 이 모양이라서 너무 과격한 건 힘들 수도 있겠네만, 뭐든 그대의 취향껏 하게나.”
“...아니, 폐하, 그게 무슨-”
“내가 그대에게 내놓을 수 있는 ‘보상’은 이것뿐이네.”
황제가 씁쓸하게 웃으며 내 말을 턱 잘랐다.
반론의 여지마저 차단시키는 모습이었다.
“...선택은 자네에게 맡기도록 하지.”
이미, 본인은 각오를 끝냈다는 목소리였다.
이후는, 전적으로 나한테 달렸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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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질어질하네.’
황제와의 대담을 끝내고 나오자마자 제일 먼저 든 생각이었다.
[...솔직하게 말 해줄까?]
“아니요.”
[...]
“그냥 위로해주세요.”
팩트는 지금 필요 없다.
개 같은 상황에 둘러싸여 있다는 건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
[너 지금 좆된 것 같은데?]
“...”
그럼에도 꿋꿋하게 소신 발언을 꺼내놓는 모습에 말 없이 소울 링커를 바라본다.
[...너도 솔직히, 이해가 안 간다고 생각 중이지?]
“...”
그럼.
당연하지.
황제가 모종의 ‘계략’에 나를 미끼로 써먹으려는 심산인건 알겠다.
하지만, 그 보수가.
-나의 모든 것을 주지.
사실상, 노예 선언이다.
황제가 스스로의 ‘인권’을 포기하고 내 ‘소유물’이 되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이 정도로 기괴한 상황이니, 자연스럽게도 공포에 가까운 불가해한 감정이 먼저 몰려온다.
‘...왜?’
이유가 뭘까.
악마의 그릇들에게 다짜고짜 호의를 받아본 기억은 많다.
하지만, 그래도.
엘노어도, 유리아도, 세라스도, 리루도, 심지어는 페이놀까지도 이렇게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작스럽게 나에 대한 호감을 내비추진 않았다.
적어도 얼굴을 보고, 무슨 일을 겪고, 서로 간의 무슨 교류가 생긴 뒤에나 스킬이 터지면서 그런 감정적 접점이 생겼지.
일면식 하나 없는데 이 정도로 어지러운 말을 꺼내놓는건 저 사람이 처음이다.
하물며, 본인의 위치를 생각하면 어떤 이유를 붙여서라도 나한테 그런 역할을 ‘강요’할 수 있다.
스스로가 저런 어지러운 ‘보수’를 내걸 필요가 전혀 없다 그거지.
‘...기프트가 발동했던 흔적도 없는데.’
시스템 로그를 아무리 뒤져도, 황제를 상대로 내 스킬이 터진 흔적조차 없다.
이해할 수 있는 이유가 하나도 없단 거지.
[...분명히 뭔가 숨겨져 있다고.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동의합니다.’
그렇게 답하며, 시종이 안내해준 내 숙소의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방 안에 들어가자마자.
“...”
“...”
도끼눈을 뜨고 나를 노려보고 있는 엘노어와 엘리야의 시선을 동시에 마주쳤다.
“...”
“...”
당신들 누구야.
누군데 내 방에 쳐들어왔어.
“여기 와서 앉아보게, 다우드.”
마치 자식이 잘못했다는 정보를 미리 입수한 어머니에게 혼나는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그런 문장이 휙 날아들었다.
눈동자에 서늘한 빛을 품고 있는 엘노어였다.
“...황제 폐하와 독대했다고 들었네. 맞나.”
“...”
정보 참 빠르다.
나도 방금 나왔는데.
“...안쪽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말 해주게.”
“솔직히요, 선생님. 화 안 낼 테니까요.”
웃기시네.
화낼 거잖아.
잘근잘근 씹어먹어서 뼛가루도 안 남을 때까지 씹을 계획이잖아...!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두 명을 번갈아가며 바라보고 있자니, 등 뒤에서 느닷없이 다른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런 거라면 그쪽이 아니라 내 쪽에 물어보는 게 더 빠르지 않겠나.”
방 안에 있는 일동이 식겁하여 그쪽을 돌아보았다.
“애꿎은 사람 너무 괴롭히지 마시게나, 엘노어. 내가 말한 것을 들어주었을 뿐이니.”
황제 폐하의 목소리였다.
지팡이 비슷한 것을 짚은 상태로 방 앞에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
아니.
이 사람은 여기 또 왜 왔어.
시기를 생각하면 내가 방을 나서자마자 거의 바로 따라붙은 거다.
“...폐...”
엘리야가 아예 입도 쩍 벌리고 굳어있는 사이, 엘노어가 기절초풍하기 직전의 기색으로 간신히 문장을 이었다.
“폐하...?!”
“오, 엘노어. 오랜만이군 그래. 잘 지냈나?”
황제가 그렇게 말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마공학으로 만들어진 ‘음성 합성기’다. 사용자의 의사에 반응해서 대상의 목소리를 대신 내주는 장치.
“...”
그걸 보는 순간 깨닫는다.
이 사람.
지금까지 내 앞에서는 항상 본인의 ‘진짜 목소리’로 대화했다.
마치, 나를 특별 취급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대도, 다우드. 방금 봤지만 다시 반갑네.”
아니나 다를까.
나를 향해서는 음성 합성기가 아닌 본인의 목소리로 말한다.
가냘프고, 불안정하지만, 본인이 그렇게 하고 싶다는 것처럼.
“...”
“...”
실제로, 엘리야와 엘노어가 경악한 눈으로 나와 황제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둘이서 대체 무슨 사이냐는 의문이 가득 담긴 표정이었다.
“음.”
그 사이, 황제가 아무렇지도 않게 방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들어와 소파 위에 털썩 걸터앉았다.
그 모습에 엘리야와 엘노어가 화들짝 놀라 동시에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서.”
거동도 불편한 사람이라 어색한 동작이었지만, 그 분위기만큼은 틀림없이 경쾌했다. 기분이 좋기라도 하다는 것처럼.
이어지는 말을 꺼낼 때까지도 그런 분위기였다.
“오늘은 나에게 뭐부터 시킬 예정인가, 다우드?”
문장이 나오자마자 방 안의 분위기는 산산조각 났지만.
“...”
묵직한 침묵이 깔렸다. 모두가 멍하니 그런 말을 꺼낸 황제를 바라볼 뿐이었다.
물론 거기엔 나도 포함이고.
‘...뭔 소리야?’
선택은 내가 하라며.
결정하면 알려달란 소리잖아.
왜 이미 내가 국서 되는 거랑 본인이 내 ‘소유물’이 되는 게 이미 확정인 것처럼 말하고 있냐.
“아, 오해하지 말게. 선택을 그대에게 넘기겠다는 건 아직도 유효하다네.”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황제 폐하가 그런 말을 꺼내 들었다.
“다만, 내가 말만 번지르르하게 꺼내놓고 안 지킬거라는 의심을 할 수도 있지 않나. 그러니, 그대에게 확신을 좀 주려고 하네. 시키기고 싶은 건 맘껏 시키게나.”
“...”
“...”
더 놀랄 건덕지도 없어 보이는 엘리야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창백한 걸 넘어서 새파래진다.
물론 그걸 넘어서, 엘노어의 모습은 한층 더 심하다. 거의 안색이 거무죽죽해진 채로, 엘노어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시키다니요, 폐하, 그게, 무슨-”
“뭐, 그런 계약을 저 남자랑 하기로 해서.”
“계약...이라고 하셨습니까...?”
“음.”
황제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 선물 지급이라 생각하게. 결정은 저 남자가 하는 거지만.”
“...”
“뭐든지 시키게나. 야한 거라도 상관없네. 몸이랑 얼굴이 괜찮다는 소리야 예전부터 많이 들었네만?”
“...”
엘리야가 거의 호흡 곤란에 시달리기 직전이었다.
엘노어의 상황도 그리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도 엄습하는 현기증에 비틀거리는 중이었고.
당신 암살자지.
선각자가 나 죽이라고 보냈지.
그런 게 아니면,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
엘노어와 엘리야의 시선이 나에게 돌아왔다.
기름칠 되지 않은 기계처럼 삐걱거리는 몸짓으로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었지만, 그 부자연스러운 몸짓 때문에 오히려 더 무섭게 보인다.
“...설명.”
“...빨리.”
이어서.
살기가 가득 담긴 목소리 두 개가 연이어 떨어졌다.
“...”
개.
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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