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89 - 189. 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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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어떻게든 설명은 끝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어색한 분위기가 풀릴 기색은 티끌만치도 없어 보였다.
테이블 주변에 죽 둘러앉은 인간들이 다 같이 입을 다물었다.
나를 ‘국서’로 쓰겠다는 계획을 쭉 늘어놓은 황제는 입에 물고 있는 파이프로 연기를 뻑뻑 피워올리고 있었지만.
‘...담배?’
루시엔 성녀님도 가끔 태우긴 했지만, 저 사람은 아주 화려하게도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세계관 안에서도 손 꼽히는 저주에 걸린 사람치고는 대단히 용감한 행동이라 해야겠지.
“...괜찮으신겁니까, 폐하.”
“음?”
그리고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닌 지, 엘노어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런 말을 꺼내들었다.
정작 그런 말을 들은 황제의 눈은 무슨 소리냐는 기색이었지만.
“...아, 이것 말인가?”
황제가 피식 웃으며 파이프를 잠깐 입에서 떼었다.
“걱정하지 말게.”
“...예?”
“오히려 안 피우면 죽네.”
“...”
그렇게 말하며 다시 파이프를 입에 무는 황제를 본 엘노어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기색이다.
드물게도, 이 사람이 남에게 두통을 선사하는 게 아니라 본인이 고통받는 것 같은 모습이다.
역시 제국의 절대자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거에서 위엄을 느껴도 되는 거야?]
칼리반이 그렇게 투덜거렸지만, 농담이 아니라 실제로 황제의 위엄을 드러내는 단면이라 생각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리번 재상과도 맞먹으려 드는 사실상 천상천하 유아독존에 가까운 엘노어가 유일하게 한 수 물러주는 대상이니까.
세실리아 11세가 아직 ‘황녀’이던 시절에 같이 자라며 쌓은 친분이 큰 역할을 하는 것이리라.
“...”
물론, 그만큼.
수도 없이 이야기했지만, 저쪽의 죽음은 엘노어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시나리오 전체에 대격변을 일으키는 급의 영향을.
“...그보다, 사냥을 하신다고 하셨습니까.”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사이, 엘노어가 힘겹게 그런 말을 꺼내 들었다.
엘리야와 다르게, 엘노어는 황제 본인과 꽤 면식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지금 아예 ‘그거 맞아?’라는 표정으로 얼굴을 가득 채웠지만 한 마디도 못하는 엘리야와 다르게 뭐라고 질문이라도 꺼내 드는 걸 보니 그렇다.
“그렇네만. 궁금한 점이라도?”
“...정말로, 안전한 겁니까?”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첫 번째로는 지금 제국의 상황에서 그런 제스처를 취하는 게 맞는 지에 대한 것과.
‘내 안부’에 대한 것이다.
이 사람, 지금 내가 미끼 역할로 쓰이는 걸 걱정하고 있다.
“...흐음.”
황제가 연기를 깊숙하게 뿜어내며 잠시 말을 골랐다.
갈색 홍채가 담긴 탁한 눈동자가 이내 엘노어에게 똑바로 고정된다.
“솔직하게 말하지. 확신은 못 하네.”
“...”
엘노어의 눈이 조용히 감겼다.
“...폐하께서는 쓸모없는 이유로 남의 생명을 거실 분이 아니지요.”
이어서,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문장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저 남자만큼은-”
“일단 인생 헛살았다는 느낌은 아닌 평가는 고맙네만, 엘노어.”
황제가 연개를 뭉게뭉게 피워올리며 말했다.
“저 남자는, 굳이 내가 거두지 않더라도 이미 일에 휘말렸네.”
“...예?”
“설리번 재상이 저 남자를 주목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나의 시선도 같이 쏠렸고, 그렇다는 말은 장로회도 저 남자를 주시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단 소리네.”
황제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쪽에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진 모르겠지만, 내 결코 이 남자의 신변에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건 확언하지. 그쪽을 분쇄하는 게 나나 이 남자에게 모두 좋은 일이야.”
“...”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엘노어에게, 황제의 말이 다시 툭 떨어졌다.
“하물며 거기 수장을 맡고 있는 놈은... 개인적으로도 이 남자에게 상당한 관심을 가진 모양이고.”
그게 그렇게 되나.
하긴, 이전까지만 해도 ‘악마 관련’ 해서는 독보적일 정도의 연관성을 가진 데다가 최근엔 용사 선발 시련으로 더 주목받기까지 하고 있다.
국서니 뭐니까지 안 가더라도 이미 충분히 눈에 띄고 있단 소리지. 위협에 노출되었단 소리다.
“그러니 웬만하면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하네만...”
황제의 시선이 힐끔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만족스러운 기색이 보인다는 건, 다른 이유도 있어 보이는군.”
“...”
“질투는 접어둬도 좋을 걸세.”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엘노어에게, 세실리아 11세가 그렇게 말했다.
이번엔 말없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엘리야까지 시선에 담으며 꺼내든 문장이었다.
“뺏을 생각은 없네. 이 남자가 그대들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건 장님이어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니까.”
“...”
엘노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황제를 바라보는 사이, 세실리아 11세의 얼굴에 쓴웃음이 걸렸다.
“...애초에 내게 허락된 시간도 얼마 안 남아서 말이지.”
“그게 무슨-”
엘노어가 뭐라고 질문을 하기 전에, 그 문장을 끊고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안에 게십니까.”
익숙한 목소리다. 검성의 목소리지.
“오, 라드. 어쩐 일인가?”
“...제발 사용인도 안 데리고 외부 인원의 숙소에 출입하는 건 그만둬주시겠습니까. 몇 명이 곤란해하는지 좀 감안 부탁드리겠습니다.”
“그치들은 좀 곤란해 해도 되네. 평소에 잔소리를 어찌나 많이 하는 지.”
“...”
이게... 황제...?
이 철면피가...?
“...아무튼, 숙소 안에 있는 남자에게 용건이 있어 왔습니다.”
검성이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장로회에서 접촉입니다. 다우드 캠벨과의 대면을 원하고 있어요.”
“...”
“...”
절묘하게 날아온 문장에, 방 안에 있는 전원이 침묵했다.
“...그거 보게.”
세실리아 11세가 파이프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를 빨아들이며 씩 웃었다.
“바로 입질이 오지 않나.”
기다리고 있었다는 기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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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회는 제국 2대 대귀족인 트리스탄 공작가와 켄드리드 변경백을 제외한 명망 있는 가문들을 위주로 설립된 가문들이다.
황제나 재상과 비교하면 비록 그 위세는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이들 역시 국정에서 큰 목소리를 낼 정도로는 규합된 세력이지.
간단하게 말해서.
황제를 지지하는 제국의 2대 대귀족의 권위, 그리고 재상이 실권을 꽉 틀어잡고 있는 관료들과 실무진,
‘...설정 존나 대충 짰네.’
사실 말이 안 되잖아.
황제니 재상이니 그렇게 으리으리한 인간들이 정권과 실권을 각각 꽉 잡고 있는데 그 외의 귀족들이 양쪽 라인을 잘 타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제3 세력으로 규합하다니.
누가 보아도 이상한 상황이다.
하지만, 그런 구멍투성이 쓰레기 설정조차 개연성에 부여하는 인간이 있기 마련이다.
“당신이 그 다우드 캠벨입니까?!”
눈을 반짝거리며 내 손을 부여잡는 남자의 모습에 애써 미소를 짓는다.
단정하게 자른 검은색 머리. 눈동자에 깃든 깊은 지성. 궁중 예법에 맞게 빈틈없이 여며 입은 정장. 하지만 그 정장으로도 가리지 못 한 탄탄하게 단련된 육체.
솔직히, 귀족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자기 관리 열심히 한 젊은 운동 선수같은 인상이지.
“이야, 예전부터 꼭 한 번 뵙고 싶었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용사 선발 시련에서의 활약, 잘 봤습니다! 사실 그 전부터도 잘 봤습니다! 법황을 상대로 무도하게 도발을 날리던 그 때부터!”
하지만, 지금 눈을 번쩍번쩍 거리며 나에게 그런 말을 쏟아내는 사람은, 틀림없이 제국 굴지의 대귀족 중 하나다.
보거트 후작.
통칭 ‘사자심’.
마수와 이교도, 그리고 타국과의 분쟁에서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다고 하는 전쟁 영웅.
“...”
제국 최고의 방패라는 켄드리드 변경백조차, 누군과의 싸움에서 패배라는 건 겪어봤을 거다. 기드온도. 심지어는 소울 링커 안에 잠들어 있는 칼리반까지도.
하지만, 이 남자는.
지금까지 자신이 싸워온 모든 상대를 이겼다. 천재라고 불려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 할 압도적인 역량 차이로.
물론 검성 수준의 최상위권 강자와는 애초에 충돌 자체가 없었지만, 그건 오히려 싸우는 게 문제다. 그렇게 되는 순간 곧바로 내전이니까.
제국의 모든 젊은 귀족 중에서도 가장 촉망받는 사내다.
‘...게임 안에서도.’
몇 가지 ‘제약’만 없었다면 현 세대에서 최초로 성검을 잡는 건 이 남자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떠돌 정도지.
그 정도의 ‘재능’을 가진 인간이다.
그 몇 가지 제약이라는 게 좀 치명적이라서 그렇지.
“황궁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언제 입궁하셨습니까? 식사는 하셨습니까? 숙소는 어디로 배정받으셨습니까?”
“...저기.”
정신도 못 차리고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난처하다는 미소를 짓는다.
게임 안에서도 정신 없기로는 손에 꼽히는 놈이었지만, 직접 앞에 두니 더하다.
“...저, 후작님. 손님께서 곤란해하십니다.”
그를 수행하던 인간 중 하나가 쓴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끼어들자, 보거트 후작이 활짝 웃으며 스스로의 이마를 탁 쳐올렸다.
연극이라고 느껴질만큼 과장된 몸짓이었다.
“
[...겉보기에는 그냥 조금 정신없어 보이지, 뭔가 나쁜 놈처럼은 안 보이는데?]
‘...그게 문제에요.’
[뭐?]
‘이런 괴짜여서 속내를 알아내기가 더 어려우니까.’
사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원작에서 5 챕터의 제국 대분란을 일으키는 건 황제와 첨예하게 대립하는 설리번이 주축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하지만, 지금 설리번은 장로회와 그 어떠한 접점도 없어 보이는 상태다.
원래대로면 설리번의 움직임에 맞춰 본인도 정치적 공세를 퍼부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할 세실리아 11세도 지금은 얌전히 나에게 집중하고 있는 모양새고.
뭔가 내가 기억하는 5 챕터처첨 ‘대분란’까지 가기에는 한참 모자란 배경 조건이다.
“...”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이 세계에 빙의한 이후로 배운 건, 일어나기로 되어있는 안 좋은 일은 하나도 빠짐없이 반드시 일어났다는 거다.
‘...내전은 일어나. 정해진 일이니까.’
문제는.
‘누가’ 그걸 하냐는 거다.
원작에서의 후보인 황제와 설리번은 모두 가능성이 낮은 모습이다. 둘 다 악마의 그릇이고, 둘 다 나에게만 집중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 상황에서 황제와 설리번을 다 지우고 난다면.
남은 후보군은 저 녀석 하나로 압축된다.
“죄송합니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군요! 당신을 부른 건 다름이 아니고 이것 때문입니다!”
정신없이 와다다 쏟아지는 문장과 함께, 눈앞으로 밀랍으로 봉인된 서신 한 장이 휙 날아왔다.
“...이건?”
“초대장입니다! 곧 황궁 안에서 장로회를 주축으로 사교 행사가 열립니다!”
녀석이 서신을 내 손에 꼭 쥐여주며 그렇게 말했다.
눈이 번쩍거린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열렬한 시선이 내게 똑바로 꽂힌다.
“저는, 다우드 캠벨의 1호 팬입니다. 꼭, 꼭 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이만!”
“...”
참으로 정신 없는 남자다.
자기 할 말만 와다다 쏟아내놓고 휙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는 것만 봐도 그렇다.
“...”
사용인들이 모두 당황해서 보거트 후작의 뒤를 쫒아나가는 사이, 내 손에 들린 서신을 바라본다.
앞서 말한 보거트 후작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이 초대장은 단순한 의미로 받아들일 순 없다.
내가 여기서 어떤 행동을 취하냐에 따라 후에 무슨 나비 효과가 굴러갈지 알 수가 없으니까.
“...사교회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애초에 전 남작가, 현 자작가인 입장에서 그런 고위 귀족들의 전유물에 나갈 이유가 있나.
다만.
‘...파격적으로 등장하라니.’
이쪽에 오기 전에 들은 말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쉰다.
-아마 보거트는 그대에게 황궁에서 열리는 사교회의 초대권을 줄 걸세. 이전부터 그대에게 관심이 있던 기색이 역력했으니.
황제가 연기를 뻑뻑 피워 올리며 그렇게 말했었지.
-그렇다면, 최대한 한 번 파격적으로 등장해보는 게 어떻겠나.
-...예?
-내 생각엔 꼭 필요한 일일세.
-...어째서입니까?
-장로회 놈들은 고지식한 명문가들을 중심으로 결집한 놈들일세. 사교회는 그들에게 있어서 단순히 행사 이상이야. 얼마나 눈에 띄는 지에 따라 그쪽이 그대에게 비춰지는 인상 자체가 달라질 걸세. ‘수집’할 수 있는 정보의 폭도 더 늘어날 거고.
황제가 씩 웃으며 답변한 기억이 난다.
그럴듯한... 말이다. 납득했지.
하지만, 그걸 어떻게 하냐고.
자작가의 자제가 어마어마한 신분의 귀족들이 모이는 행사에서 이목을 끌어모으기란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다.
[아니, 좋은 생각이 있는데.]
칼리반이 문득 그런 말을 꺼내 들었다.
[폐하랑, 셋이서 다 같이 입장해버리는 건 어때?]
“...”
[쓰레기 짓이야 니가 제일 잘하는 거잖아. 주목 받는 것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될 것 같은데?]
칼리반이 낄낄거리며 그런 말을 꺼내놓았다. 나를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한 문장이다.
뭐, 현 용사 후보랑, 제국의 지배자랑, 트리스탄 공녀를 주렁주렁 매달고 입장하라고?
그건 단순히 주목받는 걸 넘어서 미친놈이라고 자랑하는 꼴 밖에 더 되냐.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그렇게 반박하려다.
그대로 입을 다문다.
“...”
[...]
“...”
[...왜 조용해지냐?]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고민에 잠긴다.
진지한 표정으로 한참동안 생각에 잠긴다.
[...]
“...”
[...]
“...”
[...야.]
“...”
[아니지?]
있잖아.
그거 말이야.
“칼리반.”
[안 돼, 미친 새끼야.]
“...”
[안 된다고.]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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