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91 - 191. 사교회 (3)
●
장로회에 소속되어 있는 귀족들은, 좋게 말하면 품위와 격식을 따지는 전통있는 명문가 자제들이고.
나쁘게 말하면 진성 엘리트주의에 찌든 차별주의자들이다.
당장 어느 한 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대화만 들어봐도 그리 할 것이다.
“보거트 후작께서 이번에 직접 초대하신 남자의 이름이 뭐라고 했는 지 아시나요, 경?”
“잘은 기억이 안나지만... 캠벨, 이라고 하던가요? 그런 가문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가문이군요. 혹시 작위가...?”
“자작가라고 들었습니다.”
품위는 간신히 지켰지만, 숨길 수 없는 비웃음이 대화를 나누던 남자들의 얼굴로 떠올랐다.
테이블 근처에 앉아있던 다른 명문가의 자제들도 저마다의 방법으로 조소를 드러냈고.
개중에는 거의 경멸에 가까운 감정을 드러내는 이조차 있었다.
“자작가라면... 농업이나 광업 같은 산업에 종사하는 가문 출신이겠군요. 사교계는... 익숙하지 않겠습니다.”
누군가가 그런 말을 흘렸다.
물론, 얼굴에는 걱정하는 투로 내뱉은 문장에 어울리지 않게 비릿한 웃음이 걸려있었다.
시골 촌뜨기 주제에 분수도 모르고 이런 곳에 발을 들이면 무슨 꼴을 당할지 보여주겠다는 것처럼.
“그런 예법도 모르는 이를 초대하신 보거트 경도 참 너무하십니다. 망신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텐데요. 걱정되는군요.”
“사람은 시련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남자 중 한 명이 부드럽게 말을 받았다.
이어지는 문장은, 간신히 지키던 품위조차 걷어찬 문장이었다.
“자작가 출신임에도 분수를 모르고 폐하나 재상님과 어울리고 다니니, 본인이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보지요.”
“...어쩐지 분하다는 어투십니다, 그래?”
“글쎄요. 정치적 식견이라면 폐하나 재상님과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생각도 자주 들지만... 두 분 다 인간적으로서는 흠모하고 있습니다. 제국을 떠받치고 계신 두 분의 여성 아니십니까.”
“그건... 부정할 수가 없군요. 두 분의 아름다움도 가히 경국지색의 경지에 닿으셨지요.”
“폐하께서는 절벽 위에 핀 한 떨기 장미 같은 아름다움을 품고 계시고, 재상께서는 언제나 당차고 냉철한 얼음 조각상 같은 고고함을 품고 계시는-”
화제가 재상과 황제 쪽으로 옮겨가자,다 큰 남정네들끼리 모여서 마치 첫사랑 얘기라도 하는 것처럼 분위기가 순식간에 변질되었다.
아무래도 방금 그들이 말한 ‘흠모하고 있다’라는 말은 정말 거짓말이 아닌 분위기겠지.
두 명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대화는 그렇게 쭉 이어졌다.
그 자작가의 자제가.
유사 이래로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권력을 향유하고 있는 여자 두 명을 양팔에 끼고 나타나기 전까지는.
“...”
“...”
“...”
황제와, 재상.
그 두 명이.
남자 한 명에게 매달려 있다.
주변에 빼앗기지 않겠다는 것처럼.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듯이.
“...폐하?”
“...재상님?”
그런 목소리 툭툭 떨어졌다. 믿기지 않는단 기색으로.
방금 전에 황제와 재상의 아름다움과 그 고결한 순수성에 대해 열변을 토해놓던 그룹이었으니 더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언제나 무표정한 유리 인형처럼 고고한 분위기를 뿜어내던 황제가, 지금은 상기된 얼굴로 남자의 팔에 매달려 있었다.
방금 전까지 그들이 압도적인 미美라고 칭송하던 두 명의 여성이.
남자 한 명에개 앞다투어 달라붙어 있다.
조금이라도 환심을 사려는 것처럼.
“...”
“...”
뭔지 모를 패배감에 남자들의 표정이 굳는 사이.
“잘 지내고 계신가, 장로회 여러분들.”
누군가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마저 천둥처럼 울려 퍼질 것 같은 적막 속으로, 음성 합성기를 통해 만들어진 황제의 목소리가 나긋나긋하게 주변으로 울려퍼졌다.
“내 ‘절친한’ 남자가 처음으로 사교계를 데뷔한다고 해서 찾아와봤네. 괜한 격식은 필요 없으니, 좋은 저녁을 즐겨 주시게나.”
“...”
“...”
절, 뭐?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발언에 다시 주변이 침묵으로 가득 찼다.
결혼 적령기의 여황제가, 이성을 향해 ‘절친’하다는 표현을 쓰는 건 대단히 많은 사실을 시사한다.
사실상의 ‘국서 후보’라고 주변에 공표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였으니.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끼어든 것도 그런 영향이었으리라.
“...폐하.”
볼에 참을 수 없는 경련이 찾아온 설리번이 뭔가를 꾹꾹 억누르는 것 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단어를 좀 골라주시지요. 부탁드리겠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설리번?”
“이 상황 자체가 문제입니다.”
누가 보아도,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먼저 ‘점 찍어놓은’ 사람이 전데, 그런 말은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지 않습니까.”
주변으로 다시 경악이 퍼져나갔다.
재상까지?
점 찍어놨다고?
“...흐음.”
그 말을 들은 황제가, 턱을 잠시 쓰다듬었다.
“무슨 오해의 소지 말인가?”
“...”
“그대가 들은 그대로의 의미가 맞네, 설리번. 이 남자는 나와 절친한 사이야.”
설리번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어지는 것과 동시에.
주변으로는 얼굴이 새파래지기 시작한 사람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모두의 머릿속으로는 한 가지 문장이 떠오르고 있었다.
황제와.
재상이.
한 남자를 두고.
‘...쟁탈전?’
틀림없이.
제국 사교계와 정치계가 발칵 뒤집힐 화두였다.
●
“...”
“...”
“...”
주변에서 말 한마디도 꺼내놓지 않고 날아와 꽂히는 시선들이 대단히 부담스럽다.
확대된 동공, 다물어지지 않는 입, 개중에는 아예 본인이 꿈을 꾸고 있나 싶어서 뺨을 찰싹 때리는 인간도 있다.
전원 장로회에 소속된 귀족들이다.
소기의 목적이었던 ‘기선 제압’은 넘치도록 잘 먹혀드는 것 같은 모습이다.
문제는.
“...정말 이렇게 하셔야겠습니까?”
내 왼쪽 팔을 점령하고 있는 황제 폐하에게 먼저 그렇게 질문한다.
솔직히, 식은땀이 흘러나온다.
팔을 붙들고 있는 모양새가 끌어안고 있는 수준이 아니라 거의 매달리는 모양새다.
어깨 위에 머리까지 기대고 있는 걸 보면 데이트 나온 연인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지.
“먼저 하자고 한 건 자네가 아닌가?”
“...”
“뭘 이 정도 가지고 그러나. 기념해야 할 첫 ‘명령’인데.”
“...”
새삼 느끼는 거지만.
이 사람, 은근히 나를 골리면서 내가 난처해 하는 걸 즐기는 것 같다.
“...재상님. 재상님이라도 좀...”
“안 됩니다.”
“...”
1초도 걸리지 않고 돌아오는 대답에 다시 입을 다문다.
그렇게 대답하는 와중에도 눈에 쌍심지를 켜고 황제를 노려보고 있는 걸 보면 더더욱 말하는 게 의미가 없을 거란 생각이 드니까.
사실,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둘 다 이 수준은 아니었다.
‘나는 그냥 좀 위엄 있게 등장하는 게 목표였는데...’
원래는 황제와 재상이 앞서서 입장하면, 그 뒤에 따라붙거나 옆자리에 붙어서 ‘둘 다 아는 사람’ 정도의 포지션을 취하고 싶었는데.
처음에는 다들 그냥 내 옆에 나란히 서서 걷는 게 전부였지.
처음은 황제가 내 손을 슬쩍 잡는 것에서 시작했다.
-...폐하.
-뭔가, 설리번?
-그게 무슨 짓이십니까.
-손이 차서 말이네. 몸 상태가 이러면 사람의 온기가 그리운 법이야.
-...
그에 뒤따라서 재상님도 질 수 없다는 듯 손을 잡고.
황제는 한 술 더 떠서 팔짱을 끼고. 재상님도 따라오고.
그렇게 점점 발전하다가, 종국에 이르러서는 아예 찰싹 달라붙어서 떨어질 생각조차 안 한다.
이건 이미 내 의도에서 한참 멀어진 모습이다.
위엄있고 자시고.
이건 그냥.
[여자 후리는 귀신이지. 국가 수반들까지 홀리는.]
‘...아저씨.’
[반박해 보던가.]
‘...’
할 말이 없군.
칼리반에게 논파 당해서 입 다물고 있는 사이,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하나 둘씩 올라왔다.
“...귀축...”
“...교수형감...”
“...미친 쓰레기... 국가의 암적 존재...”
“...”
어쩌지.
숨만 쉬고 있는데 적이 하나둘씩 늘어나는 느낌이다.
“사실, 겉으로만 보면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겠지.”
황제도 그 분위기를 알고 있는 모양인지, 입에 물고 있는 파이프 담배에서 연기를 피워올리며 말했다.
“조만간 정말로 그대를 헤하려고 하는 자가 나올지도 모르겠어.”
“...”
입을 다물고 있자니, 황제가 씩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걱정 말게. 그때는 짐이 지켜줄 테니. 그리하면 그대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을 수 있-”
말을 이어가려던 황제가 입을 다물었다.
아마 나도 느끼고 있는 걸 본인도 느꼈기 때문이겠지.
황제의 반대편에서 줄기줄기 흘러나오는 이 기운 말이다.
“...설리번. 농담이네. 그렇게 살기를 내뿜을 필요까진 없지 않겠나.”
“농담, 맞으십니까. 폐하?”
“...”
대답하지 않고 씩 웃으며 다시 파이프에서 연기만 피워 올리는 황제의 모습에, 설리번의 표정이 더욱 구겨졌다.
혼란하다.
혼란해.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연회장 안쪽으로 걸어 들어간다.
정확하게 한 테이블을
그리고, 그 안쪽에는.
“역시, 당신입니다! 제가 1호 팬이 될만 합니다!”
이 모든 아수라장에도 불구하고.
표정 하나 안 바뀌고 박수를 치고 있는 보거트 후작이 있었다.
“...”
당황한 기색조차 없다.
마치, ‘이 정도는 당연히 할 거라’ 예상했다는 것처럼.
“허나 이런 귀빈들까지 입장한 상황에서는 죄송하지만-”
보거트 후작의 눈이 황제와 재상에게 각각 머물렀다. 이어서 내쪽으로.
이 두 명보다, 더 중요한 건 나라는 듯이.
“지금은, 단둘이 하고픈 이야기가 있는데. 혹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
“...”
보거트 후작이 윙크를 하며 내뱉은 말에, 설리번과 황제의 표정이 동시에 진지해졌다.
무슨 꿍꿍이 속인지 계산해내려는 모습이겠지만.
“...폐하. 재상님.”
내가 먼저 그쪽을 제지한다.
“괜찮아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 녀석이랑, 꼭 독대해야만 한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 녀석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그런 확신에 가까운 감각이 전달되고 있었으니.
●
“이야, 이거 놀랐습니다!”
테라스 바깥으로 나오자, 그런 말이 제일 먼저 흘러나왔다.
“두 분은 또 언제 후리신 겁니까, 다우드 캠벨! 참으로 무시무시한 ”
“...할 이야기가 뭡니까, 보거트 후작.”
쾌활하게 말하려는 녀석의 문장을 자르고 그런 말을 내뱉는다.
슬슬 느껴진다.
이 녀석, 황제가 전부터 나에게 계속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소리야 전해 들었지만.
그것 이상으로, 뭔가 걸린다.
기묘한 불안감이 계속 든다. 마치 나는 모르는 걸 이 녀석은 알고 있는 것처럼.
“아하하, 너무 정 없이 본론부터 꺼내면 좀 그렇지 않겠습니까. 자질구레한 신변잡기부터 좀 풀어내고-”
“...이상한 이야기 할 거면 그냥 가겠습니다.”
그러니.
계속해서 그 속내를 토해내지 않는다면, 상대할 가치가 없다.
휙 돌려서 다시 연회장 안쪽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내 최대한의 강경한 의사 표시다.
하지만.
“...아르민은, 잘 지내고 있습니까?”
그런 말에.
발걸음이 멈춘다.
“...”
이 녀석.
지금 뭐라고 했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렇게 발한 보거트 후작을 바라본다.
이번이 겨우 두 번째 만남이지만, 얼굴을 보고 있는 내내 걸고 있던 싱글거리는 웃음은 얼굴에서 떨어진 상태였다.
대신 그 얼굴에 걸려있는 건, 자애롭기까지 한 미소다.
‘즐거운 추억’을 떠올리고 있는 것처럼.
“...당신.”
하지만.
그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등골에 섬찟한 기운이 흐른다.
나도 모르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아버지를 알고 있습니까?”
“알다 마다요.”
보거트 후작이 씩 웃었다.
“세상에서 제일 친애하는 내 친우를, 어떻게 잊겠습니까.”
그런 문장이.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경쟁한 연적인데.”
이어서 떨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