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01 - 201. 적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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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니 눈을 끔뻑이며 선각자를 바라본다.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뭐?”
“트리스탄 공녀 몸 안에 있는 거 죽이자구요. 당신한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텐데요?”
“...”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걸 보니 내가 잘못 들은 것도 아닌 모양이다.
“무슨 생각으로 하는 소리냐?”
“...”
악마가 뭔지 모르는 녀석이 이런 말을 꺼낸다면 그저 무지해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녀석이 악마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다. 지금까지 저지른 일만 봐도 분명하지.
“...”
오히려.
게임 지식으로만 악마에 대해서 알고 있는 나보다, 훨씬 더 그쪽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느낌을 줄 때가 더 많다.
마치, 본인이 직접 ‘경험’이라도 해 본 것처럼.
“악마는 죽일 수 있어요. 당신도 알잖아요?”
“...”
이런 말까지 하는 것만 봐도 그렇지.
맞는 말이긴 하다. 당장 세라에서의 최종 보스가 회색 악마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그쪽은 ‘클리어’가 가능한 존재다.
조건만 맞추면 죽이는 것도 가능하단 거지..
조용히 녀석을 노려보고 있으니, 녀석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을 이었다.
“당신이 지키려고 하는 건 당신 근처에 있는 악마의 ‘그릇’들이지, 악마가 아니잖아?”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건드린다.
내가 왜 이렇게 매번 몸을 비틀면서 다가오는 사건에 대비하려고 하는 지, 그 핵심적인 행동 원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악마 자체는 그쪽에 들러붙은 기생충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시는 게? 궁극적으로 그쪽은 물질계에 악영향만 미칠 거고.”
“...”
“당신 때문에... 그 그릇도, 용사도, 전부 당신이 생각한 대로 안 굴러가잖아요.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방향대로 이야기의 ‘전개’를 굴릴 선택지를 드리는거구요. 고마워 하시는 게?”
한참을 말없이 녀석을 바라본다.
그러다가, 한숨과 함께 다시 입을 연다.
“...왜 회색 악마를 죽이려고 하는 건데?”
생각해보면, 이 녀석은 유독 엘노어한테 집착하는 경향이 강했던가.
투쟁의 용광로에서는 아예 챕터 보스 전체를 내 주의를 돌려서 엘노어를 죽이는 데 써먹으려고 했을 정도니.
“이유를 알아서 어디에 쓰시게요?”
내 말에, 녀석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어차피 네가 이 상황에 뭘 할 수 있는데?’라는 비아냥이 진하게 섞인 웃음이다.
“성검은 못 쓰고, 악마의 그릇들도 완벽하게 당신을 도와주진 못하고, 상대는 조각 세 개짜리 그릇인데. 거래를 받아들이는 거 말고 그쪽에 선택지가 있기는-”
“나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녀석의 말을 끊는다.
“네가 ‘왜’ 악마를 죽이고 싶어하는지 물었어.”
“...”
“이상하잖아. 다른 녀석도 아니고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건.”
내 말에 선각자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 여유로운 태도로 일관하던 녀석의 분위기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긴다.
“나 때문에 다른 녀석들이 변했다고 했었지.”
이 녀석 말이야.
내가 일으킨 나비 효과 때문에 엘리야도, 엘노어도, 다른 녀석들도 전부 영향을 받았다고 이야기 하는데.
“아무리 봐도 그건 너도 마찬가지거든.”
“...”
침묵하는 녀석에게 말을 이어간다.
사실 지금까지의 이 녀석의 행보를 보면 꽤 이상한 점이 많다.
이름부터가 악마 ‘숭배자’들의 수장이다. 게임 원작에서의 행보는 순전히 그들을 부활시키려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뒤에서 암약하고 다니는 음흉한 성향인 건 똑같지만, 지금 나한테 대놓고 악마를 죽이자고 꼬시는 것만 봐도 원작의 선각자와는 그 성향이 천지차이로 벌어져 있지.
그리고, 내 생각이 맞으면.
그런 차이가 벌어지는 아주 간단하고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너.”
담담하게 말을 잇는다.
“원래는 ‘선각자’가 아니지?”
녀석의 호흡이 일순 멈추는 게 느껴진다.
내가 말한 내용에 정곡을 찔렸다는 게 눈에 훤히 들어오는 모습이다.
“네가 어떻게 그 자리에 앉아있는지, 거기까진 나도 모르겠어. 가능한 시나리오가 너무 많아서. 하지만.”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을 것이 가면 아래로도 그려진다.
그 정도로 당황한 게 분위기로, 공기로, 피부로 느껴진다.
“하지만, 너. ‘원본’은 아니지?”
“...”
어떤 방식으로든, 이 녀석은 이 세계에 있던 ‘원래 선각자’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앉은 녀석이다.
처음부터 이 세계에 존재하던 놈이 아니라, 내가 이쪽 세계에 빙의함으로써 바뀐 요소들 중 하나지.
“...”
그리고, 높은 확률로.
이 녀석은, 내가 아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아직 그게 누군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일단 악마를 죽이자고 하는 이야긴 거절이야.”
“...어째서요? 지금 이 상황을 타파할 방법이 있긴 하신가요?”
“솔직히, 없어.”
왜 그런 제안을 하는 지도 대충은 알 것 같고.
아마.
미래에 내가 악마 중 하나 때문에 험한 꼴을 당하는 건 확실하다.
설리번도 그렇고, 이 녀석도 그렇고.
병적으로 ‘다른 악마’들을 경계하는 모습은 이미 여러 차례 보여줬으니.
다만.
“너, 아까 전에 내가 지키고 싶어 하는 건 ‘그릇’뿐이라 그랬지? 악마들 본인이 아니라.”
놈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물질계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맞는 말이다.
그 존재가 너무 강대한 나머지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세계가 뒤틀리는 놈들이다. 조각 두 개짜리 엘노어가 무슨 짓을 할 수 있었는지 떠올린다면 그거만큼 맞는 말이 없다.
하지만.
“악마들도, 인격을 가지고 있지?”
“...예?”
황망하게 답하는 선각자에게, 담담히 말을 잇는다.
“생각을 하고, 기억을 가지고 있고, 감정을 느끼고. 사람처럼 행동하잖아. 그렇지?”
“...”
“그런 녀석들이, 한놈도 빠짐없이 날 좋아한다 그러더라고.”
그렇다면.
할 말도 정해져 있다.
“그러면 그쪽도 다 내 여자야.”
“...”
선각자가 어이가 없어서 입을 쩍 벌리는 게 여기까지 느껴진다.
그쪽에 씩 웃으면서 말을 얹는다.
“그러니까, 건드리지 마. 죽여버린다?”
침묵이.
침묵이 쭉 이어진다.
선각자가 말없이 나를 바라본다. 황당하거나 화가 난다거나 그런 것도 없이 순수하게 얼이 빠진 모습이다.
[어이. 소년왕. 아저씨. 일어나!]
[어, 어, 어어? 뭐, 뭔가?]
[같이 박수칠 타이밍이야! 이 새끼 바람둥이 수치가 정점을 찍고 있어!]
“...”
칼리반.
제발.
닥쳐.
“...그러니까.”
얼빠진 선각자를 내버려 두고, 눈앞으로 떠오르는 창을 바라본다.
슬슬, 시간이 다 됐으니까.
< System Message >
[ 메인 퀘스트를 갱신합니다! ]
[ 챕터 최종 분기로 접어듭니다! ]
< Quest Info >
[ 메인 퀘스트 ]〖 챕터 4 - 적야 〗
[ ‘붉은 악마’의 폭주를 저지하세요! ]
“당장은, 어떻게든 해야지.”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언제나 그랬듯, 몸을 비틀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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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엘리야가 어색하게 입을 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꽤 의기소침한 상태였다.
성검에게 주인으로 선택받지 못한 바람에 우울감에 젖어 하루 종일 숙소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제는 그럴 여유도 없어진 참이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다들 뭐하러 오셨대요...?”
그녀가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지만, 제대로 그녀의 말에 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엘노어. 리루. 세라스...
하나하나가 다 어디선가 본 듯한 면면이다.
‘...전원 악마의 그릇...!’
그런 인간들이 다들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 긴장된 표정으로 방 안에 모여있는 바람에, 공기가 굉장히 무겁다.
“다들 무슨 말이라도...!”
“뭐, 다들 준비하고 있는 걸 테니 너무 뭐라고 하진 말게나.”
소파에 걸터앉아 검을 닦고 있는 엘노어에게서 그런 말이 날아들었다.
그나마 좀 여유가 있어보이지만, 이쪽도 뭔가 딱딱하게 경직된 것처럼 보이는 건 매한가지다.
“...준비해요? 뭘요?”
“...그대한테는 유령이 안 왔나?”
유령?
뭔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리야?
엘리야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니, 엘노어도 어깨만 으쓱하며 답했다.
“뭐, 모르면 됐네. 경쟁자는 한 명이라도 제거하는 편이 더 유리하니.”
“...”
근처에 있는 다른 여자들도 말은 안 했지만 동의하는 기색이다.
다들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그렇다.
“아니, 그런데 왜 제 방에 쳐들어와서...!”
“...그건 아마 다들 그나마 편한 상대가 그대밖에 없어서 그런 것 같네만. 시간을 떄울 장소는 여기밖에 없다고 생각한 모양일세.”
“...예?”
“면면들을 둘러보게. 같은 학년에 친구 하나 없는 괴멸적인 사회성을 자랑하는 이들 뿐이네.”
“...”
“그나마 편하게 말을 붙일 상대라고는 그대밖에 없는 이들이지.”
“...”
진짜네.
악마의 그릇의 조건에는 사교성이 떨어져야 한다는 게 포함되어 있는 건가.
“진짜 뭐가 뭔지...”
물론, 그렇다고 다들 아무 설명도 안 해주고 이런 짓을 하는 건 이해가 안 간다.
특히.
이 중에서도, 특히 상태가 심각해 보이는 사람도 있고.
“...”
엘리야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방 한구석에 조용히 앉아있는 유리아를 바라보았다.
이전에 다우드가 이쪽에게 휘말려 정신을 잃은 뒤로는, 사실상 처음 마주치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보인다. 언제나처럼, 조용히.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주변의 눈치만 보고 있다.
하지만.
진리의 눈을 가진 그녀에겐.
대상의 가진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그녀에겐.
지금 그녀의 정확한 상태가 눈에 보인다.
‘...거의 자살하기 직전이잖아.’
텅 비어있다.
예전에는 그래도 소심하게나마 세상을 똑바로 살아가고 있던 소녀가, 지금은 마치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위태하다.
“...”
그러면, 더욱 궁금해지는 거다.
이런 상태의 소녀까지 튀어나와서 대체 뭘 ‘기다리고’ 있는 건가?
“하다못해 저한테 힌트라도-”
엘리야가 그렇게 말을 이으려고 했지만.
그 설명을 끝까지 들을 필요는 없어보였다.
그 문장을 끝마치기도 전에.
-!!
-!!!!!!!!!!!!
-!!!!!!!!!!!!!!!!!!!!!!!!!!!!!!!
거대한 화염과 함께.
밤을 통째로 찢어버리는 것 같은 굉음이 사방으로 울려퍼졌으니까.
“시작이군.”
엘노어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엘리야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창문 바깥으로 피어오르는 불기둥을 노려보았다.
틀림없이.
이전에 본 기억이 있는 장면이다.
“...적야?”
밤하늘이.
화염으로 붉게 물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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