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07 - 207. 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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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위기는 지금까지 수도 없이 넘어왔다.
그걸 감안하면 이건 솔직히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야 정상이겠지만.
“...”
아.
존나 아프네.
숨을 몰아쉬며 몸을 내려다본다.
거의 잘게 저며지듯이 온 몸이 난도질 당했다. 엘리야를 저 앞에 ‘보내놓고’ 나 혼자 버티려고 한 결과물이 이거다.
[굳이 이렇게까지 미련하게 해야할까 싶긴 하지만.]
“...”
대답하지 않고 한숨만 내쉰다.
아니, 어쩔 수가 없다니까.
어차피 지금 나나 엘리야 스펙에 저거 이기는 건 불가능하고, 차라리 녀석만 먼저 보내둔 다음 내가 담판을 보는 쪽이 좀 더 가능성이 높다.
그런 면에서, 앞쪽에서 엘리야가 페이놀과 담판을 지을 동안 내가 최대한 시간을 끌어줘야 하는데...
“...칼리반.”
[왜.]
“몇 분 정도 지났어요?”
[2분.]
“...”
그거밖에 안 지났나.
꽤 오래 싸운 것 같은데, 지난 건 찰나라고 불러도 좋은 시간뿐이다.
사전에 미리 알고 있긴 했지만, 헬 가드는 대단히 강력한 상대다.
판데모니엄 안에서도 손 닿는 거리에서 싸우는 근접 전투로는 거의 적수가 없는 수준의 상대니까.
-!
다시, 일합이 교환된다.
성검은 엘리야에게 들려 보냈으니까 나에게 남은 건 예비용으로 가지고 있던 검과, 이전에 부족 연합에서 만들어 온 인피니티 건틀렛뿐이다.
-!!!!
헬가드가 내지른 검이 착용 중인 권갑의 겉면에 주르륵 미끄러진다.
만능에 가까운 성능을 자랑하는 물건이고, 온갖 특수 효과를 덕지덕지 달고 있는 장비지만, 이 녀석 상대로는 그렇게 큰 효용성이 없다.
헬 가드의 강점은 한 가지로 요약되니까.
단순무식하기 그지 없는 장점이지만, 내가 가진 모든 수단에 정면으로 대응가능한 요소다.
초월적인 스펙.
빠르고, 강하고, 단단하다.
절체절명을 EX급으로 적용받고 있는 내 상태로도 따라가는 게 고작일 정도로.
-!
-!!
일격에 튕겨나간 몸이 다시 바닥을 구른다. 보통 절체절명과 맞부딪힌 상대방이 이렇게 되는 게 일반적인 양상이었는데, 이 놈 상대로는 도저히 대화가 안 통한다.
법술도 익히고, 스텟 올려서 이전에 비해 내 스펙 자체도 엄청나게 올라왔음에도 상대가 안 된다. 계란으로 바위치는 격이지.
그동안 나한테 일격에 작살났던 놈들 대부분이 이런 기분이었을 것이다. 이게 역지사지인가.
몸 성한 상태로 상대해도 승리는커녕 생존도 똑바로 감당할 수 없는 상대인데, 이런 상태로는 전투를 이어가는 것 자체가 고행이다.
“...하아.”
한숨을 내쉬며 몸을 정비한다.
“...”
아파.
아프다.
고통은 수도 없이 겪어봤지만, 이 세계관에서 한 손가락 안에 꼽히는 성물을 편법에 가까운 방법으로 남용한 거다. 부하가 가벼울 리가 없지.
그 상태에서 이런 적과 대치하면서 오랫동안 싸웠으니, 몸이 성할 리가 없다.
그래도, 아직.
아직은 아니야.
할 일이 남아있으니까.
[...할 일이 남아있다는 건 동의해.]
소울 링커 안에서, 문득 그런 말이 날아왔다.
[그런데, 이 상태로 계속 할 수는 있겠냐? 혼자서는 못할 것 같은데.]
“...”
그래도 혼자 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는 없으니.
[도와줄 사람이 없어? 정말로?]
뭐, 누구.
악마의 그릇들?
그쪽한테 도움을 바랄 수는 없다.
당장 이 근처에서 그쪽에게 위험을 무릎쓰게 했다간 어떤 돌발 변수가 또 발생할지 모른다. 내가 전부 다 할 수 있도록 처리해야-
[이름으로 불러라.]
“...예?”
[너, 어느 순간부터 그쪽을 그냥 악마의 그릇으로 묶어서만 부르더라고.]
“...”
[트리스탄 공녀, 대족장 따님, 성황국의 암살자, 사회성 부족한 호문쿨루스... 전부 다 인격체 가진 인간들이야. 네가 마냥 지켜줘야 하는 ‘대상’들이 아니라.]
“...”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에 그쪽의 본질을 까먹으면 그건 주객전도라고. 알아?]
멍하니 소울 링커를 바라본다.
[내가 가디언들 전부 부리는 자리에 올라갔을 때, 가장 고생했던 게 뭔지 알아?]
“...예?”
뜬금없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멍하니 반문하고 있자니, 칼리반이 피식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정의를 위해 싸운다는 거창한 목표에, 정신 똑바로 박히고 재주 있는 놈들만 선발하면 걔네가 흔히 착각하는 게 있지.]
“당신, 갑자기 무슨 소릴...”
[주변에 있는 모든 놈을 자신이 지켜야 하는 대상이라 인식한다고.]
칼리반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근데 그거 존나 건방진 소리인데. 주변 모든 인물들 다 자기 아래라고 깔보는 거잖아.]
“...”
무슨 소릴 하는 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에 멍하니 소울 링커를 바라본다.
[뭐든 혼자 하려고 하지 마라, 멍청아. 사람들이 다 네 손바닥 위에서 노는 바보들이 아니니까.]
“...”
[네가 그쪽을 지키고 싶어하는 것만큼, 그쪽도 너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분명한 거라고.]
이윽고, 칼리반이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그대 말이지.”
눈앞으로.
익숙한 ‘기운’이 피어오른다.
“또 혼자서 이런 짓을 하고 있었나.”
틀림없이, 여기서 들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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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의 이름을 똑바로 아는 이는 판데모니엄 안에서도 많지 않다.
그거야, 이전에는 판데모니엄의 가장 밑바닥에 존재하는 생명체에 불과했으니까.
오물과
그럼에도 그 조그마한
군주들에 대한 ‘동경심’.
판데모니엄을 다스리는 일곱 군주. 이면에 깃든 천상도, 정령들이 거주하는 거울 세계도, 풍요로운 생명들의 기척이 넘쳐나는 물질계도. 감히 범접하지 못하는 모든 차원의 절대자들.
판데모니엄에 주기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일식’에서는, 그 모든 군주들의 색깔이 판데모니엄 전역에 번져나가는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무채색에, 서로 죽고 죽이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도, 그날만큼은 모두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보곤 하고.
개중에서는.
그 모습에 마음과 영혼을 모조리 뺏겨, 꼭 그 근처에 닿겠다고 다짐한 하급 악마도 있기 마련이고.
물론 대다수는 그저 다짐에서 끝난다.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이름없는 재로 돌아가 역사에서 사라지지.
하지만, 가끔은.
그 실낱같은 확률을 뚫고.
비정상적으로 강해지는 개체도 있기 마련이다.
철저한 포식의 역사를 통해.
악착같이 살아남아서, 먹어치우고, 강해지고, 끝에 끝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여 성장한다.
그런 기적의 기적같은 가능성이 겹쳐지고 겹쳐져, 판데모니엄의 가장 비천한 생명체가 강해질 수 있는 최종 진화 단계가 바로 지금의 헬 가드라 불리는 생명체다.
그 지옥의 ‘근위병’이, 유황 섞인 숨결을 뿜으며 검을 갈무리했다.
눈앞에는 그의 검에 만신창이로 당한 남자가 얕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
사실, 좀 짜증이 났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감히.
이렇게나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 경배해야 할 군주들의 기척을 그 보잘 것 없는 몸에 품고 있다니.
난데없이 물질계로 향하는 문이 열려, 그
자신은 그런 기운에 닿기 위해 어떤 고행을 겪어왔는지, 이 남자는 감히 알지도 못 할 것이다.
-...
죽여주마.
뜯어먹어서 그대로 이 세상에서 그 존재 자체를 지워주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누군가 그의 앞을 가로막기 전까지는.
“또 혼자서 이런 짓을 하고 있었나.”
그리고,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상대가 누구인지 보자마자.
헬 가드는 그대로 할 말을 잃어버렸다.
-...!
회색.
모든 군주 중 최강.
그런 존재의 기척을 몸에 담은 여자가, 방금 저기 쓰러진 남자를 향해 달려드려던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 옆에 조용히 그를 노려보고 있는 조그마한 여자에서도 마찬가지로 군주의 기운이 느껴진다.
백색의 군주.
그뿐만이 아니다.
뒤이어 달려드는 인간들도 있었다.
“야, 얌마! 너 괜찮냐! 아주 곤죽이 되어가지곤...!”
“선배! 세상에, 이건 빨리 치료해야...!”
청색, 자색.
군주의 기척이 두 개나 더.
청색 군주의 기운을 담은 인간이 자색의 기운을 담은 인간을 노려보는 사이, 헬 가드가 충격에 비틀거렸다.
“...야. 동물녀. 선배는 또 뭔데? 일부러 야앙떠는 거냐?”
“2학군이시니까 그냥 그렇게 부르는 건데. 불만이라도 있어? 아니면 뭐, 이성 관계에서 자신감 하나 없는 불쌍한 여자라서 그렇게 사사건건 선배 관련된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모든 맥락을 자세하게 짚을 수는 없었지만.
저기 군주 두 명이, 저기 쓰러진 남자 두 명을 ‘걱정’하고, 서로를 ‘견제’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잘 알겠다.
마치, 두 명 모두. 저 남자를 ‘독점’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는 것처럼.
대단히 깊은 호의를 품은 것 마냥.
-...
그리고 그 모습을 보자마자.
헬 가드의 분노가 정신을 새하얗게 불살랐다.
자신은.
자신은, 저쪽의 시선이라도 한 번 받기 위해. 그냥 그 근처에 서고 싶어서. 충직하게 그들을 섬기고 싶어서.
그 지옥에서 끝도 없이 죽이고, 먹어치우고, 끔찍한 전투와 피로 점철된 길을 걸어서 마침내 여기까지 강해졌는데.
저 빌어먹을 놈은, 대체 뭘 했다고 그냥 숨쉬듯 저들의 호의를 독차지하는...!
-...!
살면서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격한 분노에 그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자니, 눈앞으로 다시 누군가가 턱 걸어왔다.
“그대가 다우드를 저렇게 만든 존재인가.”
회색의 군주.
판데모니엄 만신전의 주인.
그런 기척을 품고 있는 여자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검을 뽑아들었다.
그 옆에서 하얀 군주를 몸에 품은 여자 역시 조용히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고.
“뭐야. 너희들만 재미 보려고?”
“...하여간 야만인 출신 아니랄까봐 누구 팰 각만 보이면 기가 막히게-”
“닥쳐, 짐승녀.”
뒤이어 자색에 청색까지 가세한다.
저 남자에게 부상을 입힌 자신을 손 봐주려는 기색이 만만이다.
-...
헬 가드.
지옥 군주들의 근위병. 판데모니엄에서 손꼽히게 강력한 존재.
오직 그들에게 닿기 위해 영겁의 가까운 세월동안 스스로를 단련하는데 매진했던 존재.
그는 지금.
남자 한 번 잘못 건드렸다가, 그가 섬기는 존재들에 의해 직접 린치당하기 직전이었다.
-...
아마, 그가 인간의 언어를 낼 수 있었다면.
거친 욕지거리를 허탈하게 중얼거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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