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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 사랑받는 운명입니다 (208)화 (209/258)

Chapter 208 - 208. 속전

 

 

심상 세계 안쪽에서, 발카서스가 걱정스럽다는 기색으로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괜찮겠나?”

 

“뭐가요?”

 

“...”

 

 

옆에 앉아서 완전히 관람할 준비를 마친 칼리반을 본 발카서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애초에 이런 상황이 오도록 꾸민 게 이쪽인데, 본인은 그야말로 유유자적한 태도다.

 

 

“...저 남자가 그렇게나 걱정하던 일 아닌가. 지금 저 여자들이 이렇게 한 군데에 모이는 건.”

 

 

저렇게 만신창이가 되면서까지, 다우드 캠벨은 모든 악마의 그릇을 최대한 이번 사태에서 엮이지 않게 하려고 만드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사태가 격화되는 와중에도, 그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붉은 악마의 그릇이 존재하는 곳에는 결코 가까이 가게 하지 않으려고 했던가.

 

 

“...마기와 마기는 대단히 격하게 반응하지.”

 

 

발카서스가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단순히 이능 두 개가 충돌하는 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마기’ 두 개가 충돌하는 건 대단히 큰 문제다.

 

지배자들끼리의 충돌은, 일대 전역에 파장을 일으킬만큼

 

 

“만약 여기서 저들이 붉은 악마와 싸움을 벌여 그 마기가 충돌하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근처에 펴져 있는 치천사의 결계가 깨질 수 도 있단 소리네.”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이전에, 선각자가 유물을 사용해 치천사의 결계에 아주 조그마한 ‘균열’ 하나만 만들었을 때.

 

공허 지대 안에 있는 것들이 어떤 식으로 반응했는지

 

 

“그러면 악마의 그릇들과 본체가 그대로 접촉할 수도 있다는 얘기고.”

 

 

그리고, 그건.

 

그대로 세계 멸망 시나리오와 직결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저 남자도 그걸 아니까 저렇게 필사적으로 그걸 막아서려 한 거겠지.

 

 

“여기서, 뭣들 하시는...!”

 

 

당장 식겁한 목소리로 그런 말을 꺼내는 다우드의 모습만 해도 그렇다.

 

당신들은 여기에 있으면 안 된다. 그런 기색이 물씬 담긴.

 

이 남자로서는 극히 드문, 거의 겁에 질린 것 같은 목소리다.

 

잘못해서, 이쪽이 다치기라도 하는 걸 미치도록 걱정하는 것처럼.

 

하지만.

 

 

“아까도 말했지만, 세상 혼자 사는 거 아닙니다.”

 

 

칼리반이 피식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그 좋은 머리 뒀다가 어디에 써요. 자기 주변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뭐라고?”

 

“쟤가 강해지는 동안 나머지는 다 손가락만 빨면서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거란 소리죠.”

 

 

그렇게 말을 이어가는 사이, 일행의 가장 선두에 서 있던 엘노어가 다우드에게 뚜벅뚜벅 다가갔다.

 

그리고.

 

 

-!

 

 

격렬하게 그의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동작이야 어린이를 훈계하는 것처럼 가볍게 때리는 거였지만, 그걸 얻아맞은 다우드의 머리통이 바닥에 부딪힐만큼 담긴 힘은 어마어마했다.

 

 

“...?”

 

 

물론 위기 상황마다 능력이 뻥튀기되는 남자답게 그걸 얻어맞고도 멀쩡하게 고개를 들어올리긴 했지만.

 

눈에는 혼란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아마 자신이 이쪽에게 어떤 식으로든 맞을 거란 상상은 티끌만큼도 하지 못한 모습이겠지.

 

 

“정신 좀 차리라고 한 짓이네. 요즘 하도 답답해서.”

 

 

엘노어가 무표정하게 말을 이었다.

 

 

“이렇게 혼자서 고생하는 것 좀 그만하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하지 않았나. 슬슬 깨달을 때도 됐을 텐데.”

 

 

평소답지 않게 표정을 잔뜩 찌푸린 게 진짜로 화가 난 기색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우드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렇게 말하는 엘노어의 시선이 헬 가드에게 돌아갔다.

 

 

“이렇게 ‘손쉬운’ 녀석한테 애먹을 거면, 그런 짓은 애당초에 시작하지도 말게나.”

 

“...”

 

 

아니.

 

상대가 헬 가드인데.

 

어딜 어떻게 봐도 그런 말을 붙일 수 있는 상대는 아닐 것이다.

 

이어진 모습만 봐도 그러했다.

 

 

-...

-...!!

 

 

방금 전 그들이 등장하는 모습에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잠깐 동작을 멈추더니, 이내 그 온몸에서 붉은색 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엘노어가 얕은 숨을 내쉬며 검을 집어넣었다.

 

아마 보통 사람이라면 이건 전투를 포기하겠다는 선언이겠지만, 그녀에겐 있어서 조금 다른 의미다.

 

‘검’을 제외한 다른 전투 수단을 끌어낸단 의미니까.

 

그 몸에서 회색 기운이 올라왔다.

 

 

“잠깐, 안 됩니...!”

 

 

그 모습을 본 다우드가 식겁해서 입을 열었다.

 

이대로 저 마기가 충돌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재앙에 가까운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 그런 경각심이 담긴 목소리였지만.

 

이내 다시 그 눈이 휘둥그레졌다.

 

 

-!

-!!

 

 

마기와 마기가 충돌했음에도.

 

원래 있어야 할 ‘공명 현상’은 어디에도 없다.

 

 

“...뭐.”

 

 

다우드의 입에서 대단히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회색 위에 이내 다른 색깔의 기운들도 하나씩 얹어진다. 유리아의 흰색, 리루의 푸른색, 심지어는 이걸 어떻게 쓰는지도 몰라서 대단히 어색하게 마기를 발하고 있는 세라스까지.

 

회색. 흰색. 자색. 청색. 네 개의 마기가 한데 ‘어우러져’, 헬 가드가 뿜어내고 있는 붉은색의 마기를 억누르고 있었다.

 

애초에 아무리 헬 가드라지만, 근본은 붉은 악마에게 이끌려 그 기운을 하사받은 것에 불과한 판데모니엄의 존재다. 악마 넷의 기운이 뒤섞인 것과 경쟁한다면 그대로 짓눌릴 수밖에 없지.

 

발한 붉은 마기가 제대로 뻗어나가기도 전에 완전히 몸 근처에서 굳더니, 이내 옴짝달싹도 못하게 굳어버리는 걸 보니 틀림없이 그렇다.

 

 

“어떻게...?”

 

 

이건.

 

적어도 그가 알고 있는 ‘지식’ 한도 내에서는 결코 없었던 일이 분명했다.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일이라는 게 분명한 분위기일 것이다.

 

 

“훈련했지.”

 

 

그 모습을 조용히 보고 있던 엘노어가 담담하게 말을 받았다.

 

 

“...뭐?”

 

“...예?”

 

 

심상 세계 안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발카서스와 다우드의 입에서 동시에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다우드.”

 

 

엘노어가 그 여러 색깔이 뭉친 기운을 ‘통제’하며 말을 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처럼 보이는 것이라도, 사실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되는 게 대부분이네.”

 

“...”

 

“이런... 색깔을 띈 기운들이 부딪히면 공명 현상이 일어난다. 그리고 위기 상황에서 그런 게 잘못 발생하면 대단히 위험하다. 그대라면 틀림없이 그런 걸 경계할 거라 생각했네.”

 

 

그런 설명이 담담하게 흘러나왔다.

 

 

“이전에 나와 그 재수 없는 여자가 싸울 때도, 그대가 식겁을 하던 반응은 분명히 기억하거든.”

 

 

설리번 재상과 그녀가 싸우려고 했을 때. 황금색과 회색 기운이 충돌하려고 했을 때.

 

다우드가 전에 없을 정도로 당황하면서 뭔가 조치를 취하려고 했던 건 똑똑하게 기억이 남아있다. 마치 이런 기운끼리 충돌하는 건 결코 있어서는 안 될 모습이란 것처럼.

 

그래서.

 

이런 기운을 뿜어낼 수 있는 다른 인간들과 함께, 부딪혀도 ‘큰일’이 일어나지 않을만한 방법을 어떻게든 모색했다. 그게 전부지.

 

 

“...”

 

 

다우드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런 사실들을 전부 기억해뒀다가, 이런 상황에 맞춰서 이런 기술을 ‘준비’해왔다는 건.

 

오직 한 가지 사실을 시사하고 있었으니까.

 

 

“...”

 

 

굳이 그가 뭘 하려고 하지 않아도.

 

이 여자들은, 그를 위해 그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속해서 노력하고 있었다는 거다.

 

그가 그들을 지키려는 것처럼. 그녀들도 그를 지키려고.

 

 

“왜. 그대가 우리를 살리겠다고 그렇게 노력하는 건 상관 없고. 우리가 그대에게 도움이 되겠다고 뒤에서 따로 노력하는 건 안 되나?”

 

 

표정 수습이 안 되는 다우드에게, 엘노어의 놀리는 것 같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하나 확실히 알아두게, 다우드.”

 

 

마기가 짓눌리는 바람에,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 하는 헬 가드를 향해 엘노어가 천천히 움직였다.

 

이어서, 그녀가 그쪽의 머리를 내리쳤다.

 

방금 그녀가 다우드의 머리를 후려치는 것과 비슷한 동작이다. 안쪽에 담긴 물리력은 훨씬 살벌했지만.

 

 

-!

-!!

-!!!!!

 

 

폭발하는 것 같은 일격에 헬 가드의 위쪽 갑주가 찌그러지고, 그 몸이 바닥에 박히듯이 틀어박히는 것과 동시에, 그 움직임이 일거에 멎었다.

 

한 방 얻어맞자마자 정신을 잃어버리기라도 한 것 같은 모양새다.

 

일전에 그녀가 ‘손쉽다’고 말한 것처럼.

 

다우드 혼자서는 상대조차 하지 못할 상대를, 정말로 그렇게.

 

미리 그렇게 준비해온 방법으로, 어렵지도 않게.

 

 

“우리는.”

 

 

다우드 캠벨이라는 인간의 개입 없이도, 완벽하게.

 

 

“장기말이 아닐세, 그대. 진열장 안에 세워진 인형들도 아니고.”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다우드에게, 엘노어가 뚜벅뚜벅 다가왔다.

 

 

“우리를 지키겠다고? 혼자서? 전부 다 뒤집어 쓰고, 모든 책임을 짊어지며?”

 

 

엘노어가 다우드의 턱을 붙잡고, 그 고개를 확 들어올렸다.

 

시선이 맞춰진다. 유리를 연상시킬 만큼, 눈이 시리도록 깨끗한 눈동자가 다우드의 눈을 들여보았다.

 

지금 말하는 걸 똑똑히 들으라는 듯.

 

 

“웃기지 말게.”

 

“...”

 

“그 정도로 그대에게 부하를 걸만큼, 우리는 얼간이가 아니네. 그대는 우리한테 사랑받고, 베품 받고, 행복한 미래를 영위해야 할 의무가 있어.”

 

 

다우드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그 모습을 본 엘노어가 피식 웃으며 그의 턱을 놓아주었다.

 

 

“...혼자만 멀리 떠나려고 하지 말게나. 아직 그대는 받아야 할 게 많이 남았으니.”

 

“...”

 

 

할 말을 잃은 다우드가 가만히 입을 다무는 사이.

 

심상 세계 안에서는 격렬한 환호성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이야, 공녀님 잘하네. 저게 첫 번째로 함락당한 사람의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

 

“...이게.”

 

 

헛소리를 줄줄 늘어놓으려던 칼리반의 목소리를, 혼란이 가득한 발카서스의 말이 자르고 들어왔다.

 

 

“어떻게 가능한...?”

 

 

마기의 통제를, 그것도 각기 다른 마기를 ‘섞어서’ 운용하는 걸 해내다니.

 

이게, 어떻게 훈련으로 되는 일이란 말인가.

 

물건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걸 노력을 통해 극복해냈다는 것만큼이나 이상한 소리다.

 

“당신이나 저 녀석이나, 공통점이 뭔지 알아요?”

 

 

그 모습을 칼리반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는 게 많을수록 겁을 내. 사실 막상 해보면 어떻게든 되는 문제인데.”

 

“...”

 

“그러니까, 제가 계획 짤 때부터 말 했잖아요.”

 

 

칼리반이, 낄낄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든 된다니까?”

 

“...”

 

 

도저히 반박을 할 수가 없는 장면이었다.

 

 

 

 

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숨을 내쉰다.

 

뭔가.

 

요근래 계속 격렬하게 펄펄 끓던 머리가, 처음으로 냉정해진 느낌이다.

 

 

“...고마워요, 엘노어.”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그렇게 말한다.

 

 

“제가 정신 못 차릴 때마다, 항상 당신이 도와주시는 느낌이네요.”

 

 

이전에, 소년왕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이 사람한텐 항상 결정적일 때 도움을 받는 기분이다.

 

 

“...”

 

 

그 말에.

 

엘노어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확 붉어졌다.

 

이어서 헛기침이 연신 흘러나왔다.

 

코를 쓱쓱 비비며 늘 쓰고 다니는 제복 모자를 푹 눌러쓴다.

 

 

“...이걸로 50점.”

 

 

이어서 흘러나오는 말을 듣자마자 내 눈이 가늘어졌지만.

 

 

“그건 무슨 점수인데요?”

 

“그런 게 있네. 그대한테 처음으로 감사를 받는 사람이 가장 높은 점수를 받기로 되어있-”

 

“...그건 일단 됐고. 설명은 나중에 듣죠.”

 

 

아직 적야 사태가 한창 진행중인 와중에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말을 돌린다.

 

 

“세라스.”

 

“...어, 네? 저요?”

 

“그래, 너.”

 

 

어색하게 손을 들어올리는 세라스를 보고 한숨을 내쉰다.

 

 

“한 군데에 연락 좀 넣어줘. 네가 가장 빠르게 가능할 것 같은데.”

 

“...어디로요?”

 

“수신인은 루미놀 대주교.”

 

 

여기 오기 전에, 그쪽이랑 담판 지어놓은 게 있었지.

 

그걸 써먹을 때다.

 

 

“...”

 

 

이것도, 분명히.

 

품 안에 숨겨둔 사자 흉갑을 만지작거린다.

 

원래대로는, 엘리야를 저 앞에 보내두고 힘겹게 이것저것 몸을 비틀어야했을 것이다.

 

‘피치 못하게’ 희생해야 할 것들도 분명 있었을 거고.

 

지금, 다른 그릇들의 도움으로, 이걸 ‘뒷탈 없이’ 끝낼 실마리를 얻어낸 느낌이다.

 

그러니.

 

목적은 단 하나.

 

가진 걸 전부 쏟아부어서.

 

 

“일거에 끝냅니다.”

 

 

예상치 못한 든든한 원군도 얻었겠다.

 

후딱 끝내지 않을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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