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17 - 217. 방문을 환영합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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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주님.”
벨라가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확실히, 처음 보는 사람한테 느닷없이 죽이니 뭐니 하는 건 저 사람이 보기에도 좀 이상한 일이었나보다.
역시 아무리 트리스탄 공작가라고 해도 정의와 상식은 살아있는 게 분명-
“뭐지, 벨라.”
“마음은 십분 이해하지만, 분명히 아가씨께서...”
이어서, 두 명이 나한테 들리지 않는 정도의 데시벨로 둘이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
마음은 십분 이해하는구나.
엘노어랑 좀 친한 사이인게 저 둘한테는 당장 쳐죽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중죄구나.
“...흠.”
대체 세상이 어쩌다가 이렇게 각박한 곳이 되었는지에 대한 고민을 곱씹고 있자니, 벨라아 한참을 쑥덕거리던 레오니드가 콧숨을 내쉬며 나를 바라보았다.
얼굴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이지만, 아무튼 손님이 왔으니 가주로서의 본분은 해야겠다는 분위기다.
서랍을 열어 뭔가를 집어드는 것만 봐도 그렇다.
“받게.”
방의 열쇠다.
“...솔직히 말하지. 나는 경을 좋아할 수가 없는 입장이네.”
“...”
면전에 대놓고 내가 탐탁치 않다는 문장이 스트레이트로 꽂힌다.
실제로 날 보자마자 그런 티를 줄줄 내긴 했지만, 이런 말을 들을 정도면 나도 물어보지 않고선 못 배기겠다.
“...혹,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내 말을 들은 레오니드가 가열차게 코웃음을 쳤다.
“근처에 경을 졸졸 따라다니는 여자의 숫자를 절반 정도는 줄이고 질문해보지 그러나.”
“...”
“개인적으로 조사를 할 것도 없더군. 이미 엘판테 내에서 그대에 대한 평판이 자자했으니.”
“...”
“하나뿐인 손녀딸이 경 같은 희대의 난봉꾼을 데리고 왔다 생각해보게. 가족된 입장에서 어찌 보이겠나?”
[이건 반박할 수가 없군...]
“...”
칼리반.
당신 누구 편이야.
‘...그래도 뭐.’
이 정도면 생각보다 납득은 가능한 이유다.
나는 또 뭐 내가 모르는 해괴한 걸로 미움을 산 줄 알았는데.
‘...이 사람 좀 심각할 정도로 손녀 바보라서.’
여러 가지 이유로, 이 사람은 엘노어를 눈에 넣어도 안 아파하는 사람이다.
기드온에게 어릴 적부터 가열찰 정도로 무시당하던 엘노어가 그래도 생각보다 삐뚤어지지 않게 자란 건 이 사람이 지극정성으로 그쪽을 보살폈다는 부연까지 붙어있을 정도니까.
그런 사람이니까 나 부를 때 걱정을 좀 많이 했거든.
왜, 혹시 나를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엿 먹이려 하는 거면 좀 곤란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 정도면 대단히 상식적으로 손녀딸을 걱정하는 범주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레오니드가 어서 가져가라는 듯 내앞으로 열쇠를 짤랑였다.
“경이 묵을 숙소는 그쪽이다. 자기 집처럼 편하지는 않겠지만, 최대한 그리 여기도록 노력해보게.”
편하지 않을 거라는 건 나도 동의한다.
어쩐지 트리스탄 공작령 들어올 때부터 쉽지 않을 거란 분위기는 물씬 풍겼거든.
“...감사합니다.”
그렇게 답하며 군말없이 열쇠를 받아들려고 하니.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익숙한 사람이다. 나도 모르게 멍한 목소리를 흘릴만큼.
“...엘노어?”
처음 보는 차림이라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다. 내가 기억하는 이 사람은 항상 모자를 포함한 제복을 빡빡하게 입고 다니던 사람이라.
검은색 프릴이 잔뜩 달린 오프 숄더 드레스. 머리 장식으로 기품 있게 틀어 묶은 장발. 머리부터 발끝까지 귀족 영애의 표본이라고 할만한 차림이다. 고급품이 아닌 게 하나도 없지.
그리고 그런 것들을 사치라고 느껴지게 만들지 않는 점은.
그걸 몸에 두르고 있는 인간이 그런 것들을 한낮 ‘치장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분위기를 내뿜고 있기 때문이겠지.
가장 ‘고귀한 것’을 장식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 물건은 필요하다는 것처럼. 그 정도의 물건들을 그저 ‘어울리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격의 차이가.
“...”
귀기가 감돈다 느낄 정도로. 등골이 섬칫할 정도로.
아름답다.
나도 모르게 멍하니 엘노어의 모습을 바라본다.
[...너 지금 넋이 나간거냐?]
“...”
거의 공포마저 느껴지는 칼리반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다.
아니, 왜 또.
저 정도로 이쁘면 사람이 정신 좀 못 차릴 수도 있지.
[아니, 니가 여자를 보고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고...?]
“...”
[성 불구자는 아니었구나, 우리 다우드,..!]
이 사람은 주기적으로 헛소리를 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병이라도 있나보다.
그렇게 생각하며 볼을 긁적이고 있자니, 내쪽으로 터벅터벅 다가온 엘노어가 내 손목을 턱 붙잡았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벨라와 레오니드가 동시에 꿈틀했다. 마치 들키면 안 되는 걸 들킨 사람처럼.
엘노어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대단히 열이 받은 게 분명한 모습이다.
“할아버님.”
이어서,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뉴월에도 서리를 내리게 할 수 있을 정도의 기색이다.
“이거, 분명히 별채의 열쇠지요.”
“...얘야.”
“영지 내 기사단의 주둔지 근처에 있는 건물 말입니다.”
“...”
“사람 하나 가둬놓고 아무와도 접촉하지 못 하게 하기에는 아주 최적의 장소지 않습니까. 할아버님.”
“...”
레오니드와 벨라가 동시에 침묵했다.
그 사이에, 내 손에서 열쇠를 잡아챈 엘노어가 레오니드 앞으로 뚜벅뚜벅 다가가 그걸 책상 위에 턱, 내려놓았다.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심상치 않다.
“할아버님.”
그 눈동자가 레오니드에게 고정된다. 붉은색 홍채가 거의 핏빛처럼 느껴질 정도로 위험한 빛을 담아 번쩍거린다.
“무슨 짓을 하셔도 자유지만, 다우드와 제가 같이 있는 걸 방해할만한 짓은 절대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당부드렸을 텐데요.”
“...엘노어. 저 남자에 대해서는 나도 할 말이-”
“듣지 않겠습니다.”
레오니드가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 전에 엘노어가 먼저 말을 턱 끊었다.
반론을 들을 이유조차 없다는 기색이다.
“할아버님, 벨라.”
이어서.
엘노어가 엄숙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미워.”
“...”
“당분간 안 만나줄 거야.”
“...”
어쩐지 말 끝에 흥칫뿡중에 하나만 붙여도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이다.
[...저거 맞냐?]
칼리반이 어이가 없다는 목소리로 질문할 만큼, 그렇게 분위기 잡던 것치고는 깜찍하기 그지없는 선언이었지만.
반응은 극적이었다.
레오니드와 벨라의 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엘노어와 오래 지내면서 숙련된 나의 무표정 감식안에는 잘 보인다.
대단히 충격받아서 꿈틀거리는 볼근육이라거나, 도저히 감출 수가 없는 손과 팔의 떨림이라거나.
어쩐지 아까보다 수염이 더 축 늘어져 보이기도 한다.
“...얘야. 그게 대체 무슨-”
“말 그대로야, 할아버지.”
말투도 격식을 차리던 아까 전에 비하면 훨씬 가벼워진 모습이다.
하지만, 그 모습에 벨라와 레오니드의 얼굴은 조금씩 핏기가 가시고 있었다.
마치 이런 말투를 하고 있을 때의 엘노어는 협상의 여지조차 없다는 것처럼.
“다우드를 나에게서 뺏어가려고 한 죄야.”
실제로.
그런 말을 하는 엘노어의 모습은, 이빨이 들어갈 여지조차 없이 단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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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례했군, 그대.”
복도로 나오자, 엘노어가 헛기침을 하며 그런 말을 꺼내들었다.
“할아버님께서는 유난히 나와 관련된 일이라면 극성이라서 말이야.”
“...아뇨, 뭐.”
나도 멋쩍게 답하며 볼을 긁적인다.
레오니드가 저런 사람인 건 대충은 알고 있었다. 굳이 이런 일을 당한다고 해서 별다른 감상이 생기지도 않지.
하지만 내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다 여겼는지, 엘노어가 한숨과 함께 변명같은 문장을 꺼내놓았다.
“특히 최근에는 장로회가 트리스탄 공작가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대는 모양새라서 말이지. 현 공작이 부재한 상황에서 할아버님이 어떻게든 대처하려고 예민해저 계시니-”
그리고 그런 말을 이어가던 엘노어가 말을 뚝 멈췄다.
이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쪽으로 몇 걸음 다가온다.
“얼굴이 좀 붉지 않은가? 아픈 곳이라도?”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멀쩡합니다.”
손사래를 친다.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기도 한다.
핏기가 얼굴로 더 확 올라오는걸 감추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됐네만.”
다시 고개를 갸웃거린 엘노어가 뒤로 몇 바자국 물러선다.
거기에 맞춰 나도 가슴을 쓸어내린다.
‘아니, 나 진짜 왜 이러냐.’
엘노어 본 게 원투 데이도 아니고, 옷 좀 꾸며입은 것 좀 봤다고 사춘기 남자애처럼 심장이 방망이질 치는 건 좀 아니지 싶은데.
‘...진짜로, 왜?’
나도 내 상태가 이해가 안 간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도 어리둥절해 하고 있자니, 앞쪽에서 쭉 걷고 있던 엘노어가 걸음을 멈춰섰다.
“도착했네. 여기가 그대가 묵을 곳이지.”
그 말에 정신을 차리고 눈 앞을 바라본다.
거대한 별관. 엘판테의 학관동 하나를 통째러 떼어온 것 같은 어마어마한 크기다.
60층 빌딩을 옆으로 눕혀둔 수준의 위용이라고 하면 이해가 갈까.
크기만 큰 게 아니고, 솔직히 황궁 안에 있는 건물이라 해도 신뢰가 갈만큼 어마어마하게 화려하기도 하다.
딱 봐도 트리스탄 공작령 안에서도 가장 비싼 건물 중 하나일 느낌이지.
“...되도록 작은 방으로 부탁드립니다.”
쓴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한다.
척 봐도 이렇게 호화스러운 건물의 방이라면 나같이 서민적인 감각의 인간은 솔직히 부담스러워서 잠도 못 잘 것 같다.
하지만 내 말을 들은 엘노어가 오히려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예?”
“이 건물이 통째로 그대 것이네만.”
“...”
건물을 보고, 엘노어를 보고.
다시 그쪽을 보고, 엘노어를 본다.
“예?”
“사용인들에겐 이미 이야기를 끝내놓았네. 본인 것이라 생각하고 마음대로 사용하게나. 여자 사용인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것만 아니라면 내가 뭐든지 봐주겠네.”
“...”
“익숙해지게. 앞으로도 그대 것일 가능성이 높으니.”
할 말을 잃고 가만히 서 있자니, 소울 링커 안에서 칼리반이 피식 웃었다.
[통도 크셔. 혼수품을 벌써부터 장만해두네.]
‘...’
[축하한다, 야. 기둥 서방 노릇만 해도 먹고 살 걱정은 없-]
‘닥쳐요, 좀.’
그렇게 면박을 주며, 다시 걷기 시작한 엘노어를 따라간다.
별관의 입구처럼 보이는 커다란 문에 도착하자, 그 옆으로는 이전에 이 건물의 주인이었던 것 같은 사람의 그림이 크게 그려져 있었다.
“...”
엘노어가 잠시 멈춰서서 그 그림을 올려다보았다.
그리움. 애정. 회한. 후회.
어느 걸로 가져다 붙여도 설명이 될 것 같은, 그런 애틋한 눈빛이다.
‘...이거.’
나도 말없이 그 모습을 올려다 본다.
나는 조금 다른 이유이긴 하지만.
‘꽤 익숙한데.’
회색 악마.
그림에 그려져 있는 여성의 모습은, 나도 모르게 그런 단어를 떠올릴 만큼 그쪽과 똑 닮아있었으니까.
공통점이라면, 둘 다 엘노어의 모습을 조금 더 성숙하게 만든 버전이라고 해야겠지.
“...아이리스 리네아 라 트리스탄.”
그림 아래에 적혀있는 글자를 쭉 읽은 엘노어가, 살짝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내 어머니일세. 그분이 지내시던 건물이지.”
“...자당의 생가에 저를 들이셔도 괜찮으시겠어요?”
진지한 목소리로 그렇게 질문하자, 엘노어가 내쪽으로 몸을 빙글 돌렸다.
이어서, 즉답이 흘러나온다.
“물론.”
엘노어가 살짝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그대는 그만큼 나에게 소중한 존재이니 말일세.”
“...”
콱, 하고 가슴에 틀어박히는 말이다.
새삼, 이 사람 참 심줄도 굵다.
어떻게 이 정도로 낯 뜨거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퍼부을 수 있을까.
“조만간 더 소중해질 예정이고.”
“...예?”
“다우드.”
내 앞으로 다시 다가온 엘노어가, 내 코를 손가락 끝으로 쿡 찔렀다.
이어서.
쿡쿡거리면서 웃는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웃음이었다.
“옷 갈아입고 나오게. 식사나 같이하지.”
“...”
“단둘이서.”
“...”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엘노어가 윙크하며 말을 이었다.
“할 이야기가, 서로 많지 않겠나. 밤은 기니 말일세.”
그런 말에 이어서.
곧바로 소울 링커 안에서 비명 같은 외침이 흘러나왔다.
[가자아아아아아---!!!]
“...”
진짜 몇 번째 말하는 건지 나도 모르겠는데.
아저씨.
닥쳐,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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