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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 사랑받는 운명입니다-221화 (222/258)

Chapter 221 - 221. 수라장

※ 19금 회차는 안 읽어도 스토리 전개에 지장이 없게 구성된 챕터입니다. 미성년자 분들은 이용에 참고 부탁드립니다.

텅 빈 마요네즈 통이 된 기분이다.

뭔가 좀 이상한 비유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당장 생각나는 단어가 그것밖에 없다.

정지된 세계 속에서 어느 정도로 시간이 흘렀는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정신과 신체가 전부 다 탈진감에 젖어있다는 건 확실하다.

태어나서 이렇게 쥐어짜였다는 느낌이 들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그렇게 생각하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걸고 있는 얼굴로 머리 위에 둥둥 떠 있는 회색 악마를 바라본다.

“...만족했냐.”

[응.]

아직 시간은 멈춰있는 상태 그대로였지만, 이 녀석의 행동만큼은 생동감이 넘쳐나는 것 같은 모양새다.

몸짓 하나하나에 세상 행복한 분위기가 뭉게뭉게 풍겨 나오는 느낌.

“...”

언제나처럼, 천진난만한 모습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짐승처럼 나를 지지고 볶던 모습과는 천지 차이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

문득, 녀석이 그런 단말마를 내뱉었다.

슬슬 그 몸이 흐릿해져 가고 있다. 아마 엘노어의 몸에서 빠져나와 물질계에 존재할 수 있는 시간 효력이 다 한 모양이지.

‘...그런데, 꽤 오래갔네.’

처음 이 녀석과 만났을 땐 겨우 몇 마디 나누고 헤어졌던 게 전부인 것 같은데, 지금은 현실에 실체화가 가능한 시간이 꽤 길다.

[인장이 C¾ð 더 진화해서 C¾ð 그런 거야.]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 같은 말이 대답으로 돌아왔다.

[이제, 본격적으로 ¡Á ‘우리’가 당신과 ¡Á 엮일 수 있다는 의미고,]

“...”

그러고 보니까, 분명히...

< Skill Info >

[ 타천의 인장 – 개改 ]

< !NEW! >

[ 당신의 영향으로, 이제 대상들이 ‘그릇’들과 보다 직접적인 소통이 원활해집니다! ]

[ 그 영향으로 모든 그릇들에게 특수한 능력이 개방됩니다! ]

챕터 3을 클리어 하는 것과 동시에, 이런 창이 날아왔던 걸로 기억한다.

설명만 들어서는 그냥 그릇들이 조금 더 강해지는 걸로 끝나는 것처럼 적혀 있던데, 이 녀석 말하는 걸 보니까 뭔가 숨겨진 기능이 더 있는 느낌이긴 하지.

[그래서.]

그런 창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회색 악마가 그 사이로 불쑥 뚫고 들어오며 내 근처로 가까이 날아왔다.

“...”

마치, 내가 그걸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나온 행동이다.

의도적으로 방해하려는 것처럼.

[나도, 일부러 ¡Á 당신의 정을 받은 거기도 ¡Á .]

“...무슨 소리야, 그게?”

방금 전에 나를 미친 듯이 쥐어짜낸 것에, 뭔가 다른 목적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런 기색에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질문하니.

[곧, 본격적으로 C¾ 시작될 거란 C¾ 거야.]

또 다른 두루뭉술한 대답만이 이어 돌아왔다.

“무슨 말이냐니까.”

[...]

녀석이 대답하는 대신 생긋 미소 지었다.

언제나처럼 애틋함이 담긴 미소인 건 똑같지만.

곧바로 이어진 문장은, 평소에 풍기던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강해져야 C¾ 해. 당신.]

그렇게 말한 녀석이, 이내 내게 가까이 다가와 내 가슴팍에 얼굴을 포갰다.

바로 얼마 전에, 엘노어가 다우드 성분을 보충한다 어쩐다하면서 얼굴을 파묻던 것과 비슷한 모습이지만.

이 녀석의 몸짓에는.

[이번에는.]

마치.

처연함마저 느껴지는, 그런.

수도 없이 곱씹은 것처럼 느껴지는 슬픔이 녹아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죽지 말아야 해?]

그런 문장과 함께 사라지는 녀석의 표정은.

틀림없이.

마치, 곧바로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르민 캠벨이 당혹스럽다는 듯 눈을 끔뻑거렸다.

물론 헤르만과 함께 트리스탄 공작령 안에 들어온 이후로는 한 번도 당황하지 않은 적이 없긴 했지.

이상할 정도로 자신을 열렬하게 환영해주는 영지민들도 그렇고, 기껏해야 자작에 불과한 자신에게 공작가에서 직접 사용인을 붙여 극진히 대우해주는 것도 그렇고.

하지만.

그런 모든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결코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얼굴을 마주치는 것보단 덜했다.

“...보거트?”

그가 충격받은 목소리로 그런 말을 꺼내놓자,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있던 남자도 씩 웃으며 응수했다.

“아르민.”

“...”

아르민이 충격받은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트리스탄 공작가의 사저로 들어가자마자 느닷없이 응접실로 안내받을 땐 이게 대체 뭔가 싶긴 했었다.

이런 으리으리한 공작령에서 자신과 굳이 만나고 싶어할 인간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상대방이 이 녀석이라면 얼마든지 납득이 가능하다.

“오랜만이야. 몇 년 만인지도 기억이 안 나네.”

보거트 후작이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었다.

기억에 남아있는 표정이다.

학창 시절 이후로는 아주 오랜 세월동안 못 보기는 했지만, 아르민은 한 번도 이 웃음을 잊은 적이 없었다.

“...엘판테 졸업 이후로 한참이지. 네가 후작위를 물려받은 이후로는 아예 못 봤으니까.”

아르민이 여전히 당혹스럽다는 기색을 지우지 못한 상태로 말을 받았다.

“왜, 그동안 아무 연락도 없다가 갑자기 나타난 거야. 내가 그동안 네 얼굴이라도 한 번 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아?”

“...”

“...물론 난 기껏해야 남작위를 계승할 무지렁이었고, 넌 장로회의 핵심인 후작가를 물려받기로 한 도련님이었지. 계층 차이가 확실하다는 건 학생 때부터 알고 있었어. 하지만.”

아르민이 보거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마.

그 목소리에 살짝 원망기가 섞여있는 건 기분탓만이 아닐 것이다.

“친구인 줄 알았는데. 너랑 나는.”

“...그건 지금도 유효해, 아르민.”

보거트가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답했다.

근처에서 그를 모시던 다른 이들도 전부 다 당혹스럽다는 기색이었다.

아마, 그들도 처음 보는 것이니 나오는 기색일 테다.

평소에 그 광대에 가까운 과장된 행동거지는 하나도 없이, 이렇게나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진지한 보거트 후작의 모습은.

“그러니까, 인사를 하러 왔어.”

“...인사?”

“그래.”

그런 말과 함께, 보거트 후작이 아르민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조그마한 목걸이형 로켓. 안쪽의 수납함에는 사진이 담겨 있다.

“...”

아르민이 말없이 그걸 바라보았다.

틀림없이, 그의 기억에도 남아있는 물건이니까.

“내게 마지막으로 남은 아스트리드의 물건이야.”

보거트가 담담한 목소리로 그런 말을 이어갔다.

“네가 맡아줬으면 좋겠어서.”

“...”

여전히, 아르민이 대답하지 않고 그걸 집어들었다.

세 명의 남녀가 찍힌 사진이 안쪽에 담겨있었다. 서로 환하게 웃으며 어깨 동무를 하고 있다.

아르민, 보거트, 그리고-

“...”

마지막에 떠올라 있는 얼굴을 본 순간.

아르민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슬픔, 회한, 후회, 그리움, 기쁨, 통곡, 비탄.

어쩌면 그 모든 걸 다 섞어놓은 것 같은.

“...이걸.”

한참을 침묵하던 아르민이 그런 말을 꺼내들었다.

“왜 나한테 주는 건데, 보거트.”

“네 아들을 만나봤어.”

보거트 후작이 똑바로 대답을 하는 대신, 무표정하게 그런 말을 이어갔다.

“닮았던데. 아스트리드랑. 특히 눈이.”

“...”

“제국은 곧 바뀔 거야, 아르민. 아니, 대륙 전체가 곧 바뀌겠지.”

보거트 후작이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소리야?”

“많은 일들이 일어날 거란 뜻이야. 주로 네 아들 주변에서.”

아르민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보거트.”

악다문 이 사이로, 아르민의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다우드한테 무슨 일이라도 꾸미고 있는 거면-”

“내가 꾸미지 않아도, 생길 일은 생기게 되어 있거든.”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아르민에게, 보거트가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었다.

“세계가 그렇게 만들어져 있어. 이제 곧 시작이지.”

“그게 대체 무슨-”

“그러니까, 부탁 하나 하자.”

뭐라고 설명하는 대신.

보거트가 이어서 로켓을 쥐고 있는 아르민에게 손을 뻗어, 그 주먹을 더욱 확실하게 잡아주었다.

“...가족을 소중히 해 줘, 아르민. 내 친구.”

“...”

마치, 절대로 놓치지 말라는 것처럼.

“그 아이에겐, 조만간 반드시 그런 도움이 필요할 테니.”

그런 말과 함께.

보거트 후작이 말 없이 응접실을 벗어났다.

할 말은, 그걸로 충분하다는 듯.

[야, 아침이야! 일어나!]

흐릿한 정신 사이로 그런 말이 들려온다.

실제로 창문 바깥으로 햇살과 함께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진짜로 아침이긴 한가 보지.

[뭐냐, 너? 어제 갑자기 말하다가 쓰러져서 잠들어 놓고서는. 해가 중천인데 아직까지 정신을 못 차리다니.]

“...당신한테는 그게 그렇게 보였습니까.”

[뭐?]

이쪽은 밤새도록 악마한테 쥐어짜인 참이다. 너무 심하게 갈구진 말아줬으면 한다.

눈가를 비벼 그쪽에 남아있는 피곤함을 털어낸다.

침대 근처 탁상에는 시종이 준비해놓고 간 것이 분명한 물병이 놓여있었다.

그걸 마셔서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고 있자니, 문득 근처에 깔려있는 편지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기침하면 내 방으로 오게. 가야 할 곳이 있으니.]

“...”

어째 자기 영지에 들인 이상 한순간도 자기 옆에서 떨어트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리스크가 적은 것도 아닐 텐데.

레오니드도 그렇고 벨라도 그렇고, 어쩐지 하나같이 다 나를 탐탁치 않아하는 기색이라서 말이야.

‘...당장 나도.’

솔직히 어젯밤 일이 있어서 얼굴 똑바로 들고 엘노어랑 있기 힘들 느낌이라, 조금 거북하긴 하다.

하지만, 뭐.

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뭐 잠깐 같이 어울리는 정도야.’

최근 내가 겪은 일 중에서 이 정도면 가장 평화로운 축에 들어가는 일 아닌가.

설마 무슨 큰일이야 있겠-

[병신아.]

“...”

왜 다짜고짜 욕이야.

얼굴을 찌푸리며 소울 링커를 노려보고 있자니, 가열찬 한숨이 그쪽에서 흘러나왔다.

[아직까지도 못 깨닫는 게 너무 답답해서 그런다, 왜. 이 병신아.]

“...뭔데요, 또.”

[네가 입을 터는 순간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긴다는 걸 아직까지도 모르겠니?]

그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개인실의 문을 누군가 쾅, 쾅, 쾅, 하고 두들기는 소리가 들린다.

시종은 절대 아닌 게, 엄청나게 화가 난 기색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아마 나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지.

“...”

[봤지?]

“...예.”

어쩔 도리 없이 수긍하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어기적거리면서 그 앞으로 걸어가니, 내가 손을 대기도 전에 바깥쪽에서 거의 부서지듯이 문이 개방되었다.

“...”

그리고, 그 앞쪽에는.

흉물스러운 기색을 전신으로 줄기줄기 흘리는 엘리야가 있었다.

“...”

새삼, 칼리반의 말에 다시 긍정한다.

이 녀석, 딱 봐도 뭔가 평화롭게 하하호호 거리면서 얘기나 나눌 기색은 아니거든.

“...여기서 뭐하고 있어. 바쁠 때 아니야?”

정식으로 용사 칭호를 수여 받았으면, 진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라. 일단 그쪽으로 화제를 돌린다.

무슨 용건으로 찾아온 건진 모르게씨만, 어떻게든 이 녀석을 설득할 실마리를 발견할 거란 희망을 품으며.

“선생님.”

“음?”

하지만.

“했죠?”

거의 폐부를 찌르고 들어오는 질문이 직설적으로 날아들었다.

일순 말문이 턱 막힌다.

“...어?”

“했죠? 이제 처음 아니죠?”

“...”

엘리야야.

그게 대체 무슨 소리니.

그렇게 생각하며 엘리야를 내려다본다.

“저, 감 진짜 좋거든요. 그걸로 진리의 눈이라는 능력까지 얻을 정도고.”

“...”

“보자마자 알겠네요. 선생님 한 거.”

그리고 내가 대답할 새도 없이 그런 말을 와다다 쏘아붙인 엘리야가, 이내 그 눈을 흉폭하게 번들거리며 말을 이었다.

“...학생회장님, 지금 어디에 있어요?”

“...”

칼리반.

당신, 대체 어디까지 내다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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