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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 사랑받는 운명입니다-233화 (234/258)

Chapter 233 - 233. 심사

“...동아리 창설은 승인됐네요.”

다 무너져 가는 폐건물 안쪽에서, 엘리야가 이쪽으로 발송된 공문을 다시 봉투 안으로 집어넣으며 말했다.

“...”

“...”

불행히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음에도 그걸 기뻐하는 사람은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예이.”

엘리야가 소심하게 손을 들면서 자축하려고 했지만, 주변에서 뿜어져 나오는 끔찍하게 우울한 아우라에 곧바로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사실, 나와 리루는 멀쩡하다.

지금 이 분위기를 조성되고 있는 이유의 9할은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허공을 쳐다보고 있는 세라스에게서 기인한다.

“...그, 그럴수도 있죠, 세라스 씨. 여동생이라면서요. 가족이니까 그런 건 이해해줄 수도 있- 아얏, 아얏, 서, 선생님? 왜요?”

그렇게 말을 이어가려는 엘리야의 팔을 찰싹찰싹 때려서 입을 다물게 한다.

지금 이 녀석이 건드리려는 건, 세라스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역린 중 하나니까. 언급하는 것 자체가 지뢰다.

기억을 조금 뒤져보면, 세라스 관련되어 떠오른 시스템창 중에서는 분명 이런 게 있었거든.

< Quset Info >

< 특수 퀘스트: 최고의 흑막! >

[ ‘세라스 에바트리체’ 관련 퀘스트가 개방됩니다! ] [ 클리어 시 대상이 당신에게 복종합니다! ] [ 클리어 시 메인 시나리오에 막대한 혜택이 주어집니다! ] [ 클리어 시 ‘초승달의 서약’의 주인이 됩니다! ]

분명, 발카서스와 싸울 때 만난 퇴마사 비즐라를 통해 이 녀석과 처음 접촉할 때 떠올랐던 창이다.

그 때 내가 했던 말도 같이 떠올려본다면…

-그쪽이 찾는 물건의 소재, 내가 알고 있다고.

...뭐 대충 그런 소리도 같이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거기서 말하는 ‘찾는 물건’이라는 게 전에 만난 빅토리아다.

10년 전에 생이별한 동생. 세라스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혈육.

당장 내가 비즐라에게 여기에 대한 소재를 대충 알고 있다는 말만 슬쩍 흘렸음에도 대번에 협력을 얻어냈을 정도다.

저 녀석 측근에 있는 사람들은 세라스가 저기에 얼마나 집착하고 있는 지 거의 다 알고 있단 소리지.

[...그렇게 설명하면 할 수록 니가 더 악질이 되는 건 알지?]

“...”

[그렇게 소중한 사람 앞에서 그 꼴을 보여줬다는 것 아니야.]

뭐라고 반박을 못 하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고 있자니, 엘리야가 문득 손뼉을 짝짝 치면서 주의를 돌렸다.

“우, 우리 이러지 말고! 내일 다시 이 시간에 만나는 걸로 할까요? 어차피 동아리 활동 본격적으로 하는 건 내일부터니까!”

누가 봐도 그냥 빠르게 자리를 파하자는 의도였지만, 이 자리에 앉아서 다같이 우울함을 만끽하자는 것보단 더 나은 선택지가 틀림 없겠지.

결국 모두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리루는 흘끔흘끔 세라스의 눈치를 보면서, 세라스는 여전히 영혼이 빠져나간 기색으로 각각 건물 바깥으로 걸음을 돌린다.

“...그럼.”

나도 그런 말을 남기고 동아리실 바깥으로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문득, 내 팔을 엘리야가 급하게 붙들었다.

“저기, 선생님은 저하고 단 둘이서 이야기 좀 해요!”

“...”

여느 때처럼 또 이상한 건가 싶어서 눈을 가늘게 뜨고 녀석을 노려보았지만, 기색이 이상할 정도로 다급해 보인다.

평소처럼 또 끈적하게 달라붙을 때와 비교하면 천양지차인 모습에, 결국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자리에 앉는다.

“...뭐냐?”

머리를 긁적이며 엘리야에게 질문하자, 녀석이 입을 오물거리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엘판테에서 동아리를 얼마나 중요하게 취급하는 지는 알고 계시죠?”

“그러니까 우리가 그 난리를 피운 것 아니냐.”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기색으로 그렇게 답한다.

그러니까 학칙 상에서도 필수로 박아놨지. 학원 안에서 인맥 잘 형성해서 나가라고.

“...그, 그런데요...”

엘리야가 답지 않게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힘겹게 문장을 이어갔다.

“그, 그것 관련해서, 엘판테 안에서 자체적으로 지원하는 기능이 있거든요...”

“...”

이런 녀석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무슨 말이 나올지 대충 예상이 간다.

“맞춰보자.”

한숨을 내쉬며 녀석의 말 중간에 끼어든다.

“후원한다는 사람들이 있다고?”

어떻게 알았냐는듯 엘리야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모습을 보니, 잘 찍은 모양이다.

‘...안 오는 게 더 이상하지.’

동아리를 후원한다는 건, 말 그대로 후견인을 자처하는 거다. 우리가 당신들 활동에 필요한 자원을 제공해줄테니, 나중에 너희들도 우리에게 활동을 통해 만들어낸 ‘성과’를 공유해달라 그런 의미다.

엘판테 정도 되면 실제로 동아리 안에서 실전에서도 쓸만한 장비나 인재가 발굴되는 경우도 심심찮으니까 이상한 제도라고 보기는 힘들지.

그리고 이 퇴마부는 그런 점에서 꽤 노리기 좋은 곳일 것이다.

아무리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해도, 용사인 엘리야가 포함되어있다. 그 수준으로 인지도가 높진 않더라도 내 존재감 역시 그렇게 무시받을 정도는 아니고.

귀가 밝고 눈이 좋은 인간들은 어디에도 널려있다. 나하고 엘리야가 이런 걸 만들겠다고 복작거릴 때부터 침을 발라놨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아직까진 그냥저냥 쳐낼 수 있는 사람들 아니야? 적당히 예의 바르게 거절해서 돌려보낼 수 있도록-”

“...그게, 있잖아요...”

엘리야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나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동아리 창설을 승인하는 공문과 함께 발송된 건데요, 하, 한번 읽어보시겠어요?”

“...?”

녀석이 내민 서류를 받아서 쭉 훑어본다.

후원자를 희망하는 사람들의 명단이다.

그리고 문득, 그걸 받자마자 눈앞으로 창이 떠오른다.

< System Message >

[ ‘동아리’의 창설을 확인합니다! ] [ 해당 집단에 특별한 수준의 관심이 쏠리는 것을 확인합니다! ] [ 어떤 방식으로 동아리를 운영하냐에 따라서, 앞으로 다가올 메인 퀘스트- 5챕터, ‘제국 대분란’의 진행 방식이 결정됩니다! ]

“...”

뭐냐.

아직 뭐가 적혀있는지 확인도 안 했는데 불길한 메시지 투성이다.

특별한 수준의 관심이 쏠린다느니, 어떻게 운영하냐에 따라 5챕터의 진행 방식이 결정된다느니.

“...”

생각만 해서는 알 수가 없지.

일단 확인해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엘리야가 내민 서류를 쭉 읽어내린다.

“...빠지는 데가 없네, 이 사람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맨 윗장에 올라와 있는 황가의 도장이 찍힌 서류를 치운다.

이상할 건 없겠지. 당장 동아리 발표에서 가장 앞줄에서 직관한 게 황제니까.

다행히, 이거야 어떻게든 잘 설득해서 조정하면 될 일이다. 그쪽, 아무튼 나한테는 꽤 협력을 잘 해주는 편이니까.

그리고 그 다음은...

“...이 인간들 여기서 뭐 해.”

트리스탄 공작. 켄드리드 변경백.

여기까지...도, 조금 과하기는 하지만. 아주 이해 못 할 수준은 아니다.

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람들 아닌가. 여기도 어떻게든 말로 해결할 수 있는 레벨이다.

하지만, 이 다음에 있는 것들이.

“부족 연합의 족장들…?”

“...네.”

카사가 보낸 거라면 몰라도, 오히려 그쪽은 잠잠한데 나랑 별 일면식도 없는 족장들이 보낸 거다.

마치 자신들이 개인적으로 우리들과 안면을 트고 싶다는 것처럼.

거기에 제안하고 있는 것들 수준이…

“...최근 2년간 연구 성과를 전부 공유해주겠다고?”

“...예.”

엘리야가 살짝 혼이 나간 것 같은 기색으로 답했다.

“예전에, 제국에서 영지 하나를 통째로 걸고 요청했을 때도 무시당했었죠.”

“...”

“그걸 그냥 동아리에 후원하겠다고 넘겨주겠대요...”

마지막 말을 할때쯤엔 거의 울상으로 목소리가 변해있었고, 나도 십분 공감할 만한 상황이 분명했다.

이쯤되면, 누가 봐도 명백하게 이상하다.

아무리 내가 여기저기에서 괴물같은 성과를 올렸고, 동아리원중에 엘리야까지 껴 있다고 해도, 이런 거물들이 이렇게까지 열렬하게 달려들 정도는 절대 아니다.

까놓고 아직 동아리 이름도, 목적도, 무슨 성과를 낼 지도 발표된 게 아무도 없는 상황이다. 이럴 이유는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전혀 없지.

그리고 그런 의심은, 다음 장에 이르러 확신으로 바뀌었다.

“...”

내가 이거 진짜냐는 눈길로 엘리야를 바라보자, 녀석이 여전히 울상인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법황?”

“...예.”

“...성황국의 그 법황?”

“...예.”

“...”

넌 진짜로 여기서 뭐 하는데, 이 새끼야.

니가 나한테 후원을 왜 해.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관자놀이가 압축되는 느낌이다.

거기서 끝나는 것도 아니다. 다음 장에 적혀있는 집단의 이름을 보자마자, 이제 내 얼굴까지 끔찍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엘리야.”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연다.

“내가 보고 있는 게 맞냐?”

“...네.”

“...”

현기증이 핑 돈다.

“마탑이 마지막으로 외부 집단과 접촉한 게 언제였지?”

서류에 찍혀있는 마탑의 인장을 보며, 신음하듯이 그렇게 중얼거린다.

단일 세력으로는 이 세계관 최강, 최악, 최흉의 집단.

부족 연합조차 못 비비는 이 세계 기술력의 총본산.

다른 나라들은 다 중세~근대에서 놀고 있는데, 이쪽은 혼자 SF를 찍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놈들이다.

‘...정보가 바깥으로 샌 것 같은데.’

그런 게 아니고서야, 이 미친 폐쇄도착증 환자들까지 우리한테 이런 걸 보낼 이유가 없다.

‘악마’ 관련된 힘을 마음대로 다를 수 있는 ‘권한’이라면, 월터 학장이 말한대로 대륙의 모든 집단이 침을 질질 흘릴만한 능력이다.

정확하게 그 정도까지 정보가 흐른 건지는 몰라도, 그쪽과 아주 티끌만큼만 관련이 있다고 정보가 흘렀다면 이런 관심이 쏟아질 수도 있지.

“...보류하겠다고 해. 시간을 좀 벌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일단 그렇게 말한다.

당장은 솔직히 이게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정도면 말로 거절한다고 해서 포기할만한 수준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디를 확실하게 고르기에는 당장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메인 퀘스트와 연동되어 있다고 창까지 떠오른 참이다. 함부로 결정할 수는 없지.

“그게요, 후원 요청은 확실히 선생님 말대로 보류를 할 수가 있는데요...”

“...뭐가 더 있냐?”

이제는 몸까지 부들부들 떨면서 그런 말을 꺼내는 엘리야에게, 황망한 목소리로 답변한다.

“...그, 모든 동아리는 필수적으로 부원을 모집해야 하거든요. 동아리장과 서기는 입부를 희망하는 학생들을 심사할 의무가 있구요...”

엘리야가 눈을 질끈감고 학칙에 적혀있는 내용을 줄줄 읊었다.

“...그거야 당연하지. 그런데 그게 왜-”

말을 하려다가, 문득 등골을 타고 내리꽂히는 섬뜩함에 입을 다문다.

내 기억이 맞으면.

지금 이 동아리의 부장은 나로 되어 있고, 서기는 엘리야거든.

그렇다는 말은 우리 동아리에 들어오겠다는 녀석들을 이 녀석하고 내가 심사해야 한다는 건데.

“...”

간단한 추론을 하나 해보자.

방금 전에 그냥 ‘후원’만으로도 이렇게 어마어마한 거물들이 아주 목숨을 걸고 달려들었다.

그런데.

내부에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부원’ 같은 경우에는, 대체 어디까지 손을 썼을까.

“...이런 게 왔거든요.”

엘리야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내게 뭔가 내밀었다.

“...”

척 봐도 머리가 아찔해지는 수준으로 두꺼운 종이뭉치를 보며, 심호흡을 한다.

아니, 종이 뭉치라고 해야할까.

저거 술식을 통해 몇 겹이고 압축해놓은 게 눈에 훤히 보인다. 실제로 꺼내놓으면 종이 다발로 이 공간이 꽉 차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지.

“...몇 명이냐?”

“...”

“첫 장에 적혀있을 것 아니야. 입부 신청한 사람 총 몇 명인지. 어느 정도야.”

엘리야가 핏기가 가신 얼굴로, 양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1만 명, 좀, 넘는데요...”

“...”

“저, 저희가, 다, 그 사람들, 심사해야 하는데요...”

“...”

숫자만 1만 명이다.

그 중에 왜 이 인간이 이런 곳에 있는 지 이해가 안 가는 ‘거물’이 몇 명일지는, 상상도 하기 싫은 수준이겠지.

“...”

아.

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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