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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 사랑받는 운명입니다-238화 (239/258)

Chapter 238 - 238. 정면 승부 (3)

“아하하하하-!”

보거트 후작이 배를 잡고 웃었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그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모습은 그런 반응을 보여줄만한 가치가 있었다.

“세상에, 검성께서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는 모습이라니. 다른 성황국에 있는 창의 성인이나 부족 연합의 권의 성인이 본다면 다들 기막혀 할 겁니다!”

“...비웃으러 오셨습니까, 사자심.”

라드가 초췌해진 인상으로 그렇게 답했다.

황제가 자기도 학생 노릇이 하고 있다며 그에게 공무를 전부 내던지고 홀연듯 사라진 게 바로 얼마 전이다.

“호위가 걱정이긴 합니다만...”

“그 ‘불멸자’ 아탈란테가 있는 곳입니다. 아무리 최악의 상대라 할지라도 적어도 당신이 출동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는 것 정도는 넘치도록 할 수 있겠죠?”

“...그렇긴 합니다.”

바꿔 말하면, 그 정도로 강력한 영속자조차 자신이 그곳에 당도할 때까지의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밖에 안 된다는 뜻이겠지.

오만하다고 욕을 먹어도 심하게 먹겠지만, 보거트 후작도, 라드 본인도 그 말에서 별달리 이상한 점을 발견하진 못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검성 본인은 제국 최강의 무인이다. 이런 말을 거리낌 없이 꺼내들 정도는 되지.

“그런데, 이건 보셨습니까?”

하지만 그런 최강의 무인도 행정 업무의 무시무시함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특히 뒷감당이라곤 생각치도 않고 온갖 일을 저지르는 제국 수뇌부 인원들가 엮이는 일이라면 더더욱.

당장 보거트 후작이 내민 서류가 그런 사실을 무엇보다 잘 증명해주고 있기도 했고.

“곧 있을 엘판테 학예회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도 있었죠.”

보거트 후작이 자신에게 격의 없이 뭔가를 턱 내미는 모습에, 라드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아무리 그래도 장로회와 황제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내밀 깜냥은 안 될 텐데. 이 남자가 행하는 짓은 하나하나가 항상 상식을 벗어나는 느낌이다.

그리고 거기 적혀있는 내용은 더욱 더 상식을 벗어나는 느낌이고.

“...”

라드가 새파래진 얼굴로 거기 적혀 있는 안건을 주르륵 읽어내렸다.

“...이거 진짜입니까?”

“그럼 가짜겠습니까!”

화들짝 웃으며 돌아오는 대답은 여전히 쾌활하지만, 그걸 본 검성의 얼굴은 더욱 더 구겨졌다.

“...이만한 인간들이 꼴랑 학예회 하나 보자고 학원에 삼삼오오 모여든단 말입니까.”

신음처럼 흘러나온 라드의 말에 설득력이 실릴 정도로 무게가 있는 이름이다.

성황국 쪽.

루미놀 대주교, 그 딸인 라나 레이 델비움.

부족 연합 쪽.

족장 두 명.

여기까지만 해도 정상회담이라도 하나 싶은 라인업인데, 제국 쪽에서 모여드는 인간들은 더욱 얼탱이가 없다.

켄드리드 변경백, 트리스탄 대공, 설리번 재상.

거기에 더해.

“저도 엘판테로 갑니다!”

“...제발 좀 봐주십시오, 후작.”

라드가 신음처럼 그런 말을 꺼내들었다.

라인업만 봐도 사실상 국가를 지탱한다고 봐도 좋을 인간들이다. 황제 본인이 지금 엘판테에 적을 두고 있다는 것까지 감안한다면, 사실상 나라의 수뇌부 전체가 그쪽에 모이는 것이다.

거기에, 그거로도 모자라서.

“바깥 세상에 그렇게 관심을 안 두는 마탑에서 ‘학자’까지 한 명까지 내려온다지 않습니까. 이건 너무 과분한-”

그렇게 말하려던 라드가 흠칫했다.

그 이름을 듣자마자, 곧바로 보거트의 얼굴 위로 떠오른 표정을 봤으니까.

그걸 뭐라고 해야할까.

적대심, 긴장, 경계, 혐오, 역겨움.

뭐라고 불러도 적절하겠지만.

그 근본에 녹아있는 감정은.

‘...두려움?’

이 남자가.

누군가를 무서워한다는 건,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마치 거기에 뭔가를 ‘빼앗겨 본’ 경험이 있는 것처럼.

“그건 안 되겠습니다, 검성!”

하지만, 다음 문장을 꺼낼 때 보거트의 얼굴은 평소대로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마치 라드가 방금 본 것이 신기루처럼 느껴질 정도로 재빠르게.

“그 다우드 캠벨의 동아리가 발표회를 하는 행사 아닙니까. 저 말고도 대륙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널렸을 테니, 딱히 저 하나 간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을 겁니다!”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라드가 신음처럼 그런 말을 흘렸지만, 여전히 장난스러운 목소리의 문장만이 돌아왔다.

“변명이 아닙니다, 검성!”

-아니.

아니다.

표정이야 평소처럼 장난스럽다. 어투도 마찬가지로 경박하다.

하지만, 라드는 문득 지금의 모습과 평소의 모습이 어떤 게 다른 지 느끼자마자 등골이 쭈뼛 솟아올랐다.

“미리 대비하시지요.”

애초에 이 남자는.

이 자리에, 자신에게 ‘경고’하러 온 것이다.

정확히는.

황제의 대리인 역할을 맡고 있는 자신을 통해, 황제에게 이 말을 전달하려는 것이겠지.

“변화가 올 겁니다. 그 남자의 손 끝에서 빚어지는 결과물로 인해. 대륙 전체에 영향이 올 만한 변화가.”

“...”

“미리 준비해야, 휩쓸리지 않을 테니까요!”

마지막에 가서야 완전히 평소대로 돌아왔지만.

끔찍하게 불길한 울림인 것은, 틀림 없었다.

“...무슨 말인지 조금 더 자세히 여쭈어도-”

“그 남자가 여러 명이랑 동시에 연애를 성공적으로 하도록 빌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

뭔 개소리야.

동아리에 전원을 수용하겠다고 발표한 이후로, 내 학원 생활은 급작스럽게 평화적으로 변했다.

표면적으로는.

보통 하루 걸러 하루로 악마의 그릇들이 찾아와서 뭐가 되었든 분탕을 피우는 게 일상이었는데, 지금은

느닷없이 같이 운동하자면서 아침부터 내 방문 앞에 진을 치던 리루도, 아닌 척 하면서 뒤에서 내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따라붙는 세라스도, 쭈뼛거리면서 같이 ‘산책’시켜달라고 부탁해오는 유리아도 없다.

[...마지막 건 뭐냐. 그 아가씨 너한테 죄책감 있는 것 아니었어?]

‘저번에 트리스탄 공작령에서, 하얀 악마 그 녀석 몸 안에 붙들어두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쪽에도 목줄 채우고, 주인님이니 뭐니 선언하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게 그 녀석한테는 ‘엄청 기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느끼지 않으면 금단 증상이 올 정도로요.’

[...]

‘그래서 죄책감으로도 못 억눌러서 제발 부탁이니 목줄 채우고 산책해주십사, 하고 빌러 오는 모양입니다.’

[...]

‘그래놓고서는 그 잘못을 해놓고 또 이런 걸 부탁하다니, 난 쓰레기야- 하면서 땅을 파더라구요. 제가 최선을 다해서 달래주고 있지만...’

계속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는 모양새다.

다행히 위로해 줄 때마다 그건 또 진심으로 들어주는 모양이라 스트레스는 잘 경감되는 모습이지만, 애초에 그런 걸 느끼면서도 버릇이라도 든 것 마냥 ‘야외 산책’을 시켜달라고 찾아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덕분에 타천의 인장에 하얀 악마의 마기는 정기적으로 충전되고 있으니 그 능력을 못 써먹을 일은 없겠지만, 그딴 것보다 유리아가 진짜로 이상한 성벽에 눈 뜨는 것 같아서 무섭기 짝이 없다...

[...이미 눈 뜬 것 아니야?]

‘그런 무서운 말씀은 좀 지양해주십쇼.’

[...]

칼리반이 뭐라고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침묵을 견지했다.

모습이 보이진 않지만 아마 두통에 시달리며 머리를 감싸쥐고 있을 것 같은 분위기다.

[...대체 무슨 괴물을 만든 거냐, 너.]

‘...반성하고 있습니다.’

최근 유리아의 상태에 대해서는 나도 그렇게밖에 할 말이 없다.

“-오늘의 수업은 이상입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칼리반과 그렇게 말하고 있는 사이, 강단의 교수가 그렇게 말하며 책을 덮었다.

동시에 주변에 있는 학생들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뭐, 지루하기로 소문난 신성학부의 수업이다. 이런 반응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지.

나 같은 경우야 딱히 그렇지만도 않지만.

[ ‘신성력 운용 기본’에 관련된 지식이 축적됩니다. ] [ 충분한 지식이 축적되고 있습니다. 곧 ‘기적’ 관련된 스킬을 개방시킬 수 있습니다! ]

“...흐음.”

아카데미 수업의 순기능. 나를 강화시킬 수 있다.

쉽게쉽게 증폭시킬 수 있는 기본 스텟이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써먹어보지 못한, ‘직업 특성’에 충실한 능력들 위주로.

최근 들어 사실 나에 대한 스펙 업을 조금 등한시한 경향이 있긴 하지. 이미 내가 축적해온 걸 잘 활용만 해도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 가능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래야 할 이유 정도야 넘치도록 갖춰진 상황이다.

‘...다른 녀석도 아니고 그 녀석이 그랬거든.’

강해져야 한다고. 죽지 말라고. 회색 악마가 나한테 ‘직접적으로’ 충고했다.

그동안 무슨 말을 해도 두리뭉술하게 후려치던 녀석이 그런 말을 했다는 건, 분명히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동아리에서 다 받겠다고 선언한 미친 소리도 그래서 한 거야?]

“예?”

[네 인장, 악마들이랑 부딪힐 때마다 걔네 기운이 충전되잖아. 더 직접적이고 격렬하게 얽힐 수록 더 빠르게 충전되고.]

칼리반이

[승부같은 짓을 하면 네 인장에 모든 악마의 마기를 빠르게 채울 수 있는 기회잖아. 강화로만 따지자면 그게 제일 아니야?]

“그런 셈이죠.”

목적이라고 한다면, 그게 제일 크긴 하다.

그 정도로 급속도로 강해지면, 아마 딱 커트라인에 맞출 수 있겠지.

‘분명히, 학예회 때쯤에...’

예상대로라면, 뭔가 하나 터진다.

시스템 메세지가 없어도 그 정도는 당연히 예측 가능하다. 엘판테 학예회는 원작 게임에서도 온갖 변수가 다 흘러나오는 중요 이벤트였으니까.

그러니 요즘 온갖 변수들 때문에 사방팔방으로 날뛰는 메인 퀘스트의 ‘주도권’을 내쪽으로 가져올 수 있을만큼 날 강화하는 건 필수고.

[아,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물어보자.]

“예. 뭡니까.”

[나 몰래 엘리야랑 무슨 소리했어?]

발걸음이 뚝 멈춘다.

“그런 게 있습니다.”

[너 그때 나 억지로 재웠잖아. 무슨 얘기하려고 그랬냐고.]

“그런 게 있다고요.”

[...나 그때 일어나서 무슨 소리 하나 들으려고 했거든? 그러니까 평소엔 나오지도 않던 발카서스 그 양반이 튀어나와서 다시 안쪽으로 질질 끌고 들어가더라. 제정신이고 싶으면 안 듣는 게 났다고. 무슨 얘기를 했는데-]

“닥쳐요, 좀.”

[...]

정신 사나운 이야기는 좀 나중에 고민하자.

지금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으니까. 응?

제발.

“...그쪽은 나중에 신경 씁시다. 당장은 저한테 각양각색으로 도전하러 올 아가씨들이 신경 쓰이니까요.”

[...그래. 지금은 그쪽이 더 중요하긴 하지.]

일전에 공표한 ‘승부’는 오늘부터가 시작이다.

룰은 간단하지.

각자에게 주어지는 기회는 한 번씩. 도전해올 종목은 본인이 알아서 선택하기.

승리하면 내가 그쪽 말에 복종, 반대로 패배하면 무조건 내 말에 복종한다.

[...그래서 다들 얌전한 거구만? 기회가 한 번밖에 없으니까.]

칼리반이 코웃음을 치며 그런 말을 던져왔다.

왜 그런 기회를 두고도 여태 나한테 달려든 인간이 없었는지 이해가 간다는 기색이다.

[다들 니가 그동안 얼마나 미친 짓거리를 해왔는지 아니까. 종목이 뭐든간에 어지간한 준비로는 상대도 안 될거라는 걸 아나보지.]

“예. 그렇겠죠.”

피식 웃으며 답한다.

확실히, 내가 지금까지 좀 눈에 띄게 활약해오긴 했다. 그만한 인간들도 승부를 걸기 전에 잠시 뜸을 들일 정도로.

다만.

“하지만 그걸 아직 충분히 모를 녀석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뭐?]

아직 나랑 별로 안 부대껴 본 녀석이 있으니까 하는 소리다.

즉.

처음 올 ‘도전’은 무조건 이 녀석이다.

“잠시 시간 되십니까, 다우드 선배님.”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춘다.

누가 말했는지 확인하고, 곧바로 얼굴에 미소를 건다.

그래, 잘 걸렸다.

몸풀기로는 딱 좋은 상대거든.

“물론.”

그렇게 대답하자, 눈앞의 빅토리아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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