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 사랑받는 운명입니다-241화 (242/258)

Chapter 241 - 241. 야밤의 밀회 (3)

세라스 에바트리체의 인생은 꽤 굴곡 많고 험난한 경험의 연속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자라난 수인 일족은 태생부터 암습을 통한 전투를 생업으로 삼는 이들이 대부분인 곳이었다. 치열한 훈련과 찰나의 순간마다 생사를 가르는 순간에서 살아남기 위한 극한 체험.

하지만, 그 어떤 경험을 가져오더라도.

지금 그녀가 겪고 있는 ‘난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가능성이 높다.

“...저, 서, 선배...”

잠복해서 며칠 동안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서 버티는 극한 훈련도 이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해주진 못할 것이다.

그녀가 팽글팽글 돌아가는 눈동자를 주체하지 못하는 상태로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저, 저희, 이런 짓을 해도 되는 사이였던가요...?”

저도 모르게 그런 질문이 나올 만큼 급작스러운 상황인 건 틀림없었다.

다짜고짜 이 늦은 시각에 자신의 개인실에 찾아온 선배님과 ‘이런 짓’이라니...!

“이게 뭐.”

하지만, 상대방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을 받았다.

“고생하는 후배님을 위해 이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것 아니야?”

그런 말과 함께 몸 안쪽으로 찾아오는 ‘압박감’에, 세라스가 다시 늘어지는 신음소리를 흘렸다.

온몸에 전기가 찌릿찌릿 통하는 느낌이다. 긴장을 풀면 저도 모르게 입가에 침이 줄줄 흐를 것만 같은 쾌감이 흐른다.

“하, 하지만...”

세라스가 간신히 정신을 붙든 것 같은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안마 기술은 어디서 배워 오셨어요?”

배를 바닥에 깔고 침대에 누워있자니, 팔다리를 꾹꾹 지압하는 다우드의 손길이 더 잘 느껴지는 것 같다.

처음에 근육이 뭉친 곳을 진단해야겠다며 거의 와락 끌어안을 땐 키스라도 당하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랬던가.

“예전에 이런저런 일들을 많이 해봤거든.”

사창가에서 태어나 버려진 아이라면 살기 위해서 무슨 기술이든 닥치는 대로 익혀야 하기 마련이다.

지금 그녀에게 다우드가 해주고 있는 ‘시술’은 그때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쳤던 경험의 편린이고.

거의 전신의 감각을 유린하는데 가까운 끈적함은 그런 영향이 짙겠지.

“...”

아무튼.

아래에 깔린 세라스가 온몸이 오싹거리는 게 분명한 신음 소리를 연신 흘리는 사이, 다우드가 그녀의 용태를 주의 깊게 살피기 시작했다.

안마를 조금 더 끈적하고 자극적으로 할수록, 이전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자색 기운이 그녀의 몸을 조금씩 휘감고 있다.

마치 세라스만 이것에 영향을 받는 게 아니라, 자색 악마도 똑같이 헤롱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으로 기운이 유동한다.

이어서, 그가 가늘게 뜬눈으로 눈앞의 창을 노려보았다.

< System Message >

[ ‘자색 악마’의 기척이 느껴집니다! ] [ 타천의 인장이 반응합니다! ] [ 대상의 기분이 급속도로 좋아지고 있습니다! ]

‘...역시.’

이전에 유리아 안에 깃든 하얀 악마에게 목줄을 채우고 굴리니까 본인이 더 좋아했던 경험에서 얻어낸 가설 하나.

악마는, 그 숙주인 그릇과 감각을 공유한다.

정확히는 악마가 받는 감각은 그릇에게 전달되지 않지만, 그릇에게 전달되는 감각은 악마에게도 그대로 전달된다.

이전에는 그리하지 않았지만 타천의 인장이 강화되면서 그런 특징이 ‘추가’된 느낌.

“...”

이상한 일이다.

분명히 회색 악마가 심어놓은 의미 불명의 능력이었는데, 마치 악마들 전체가 그의 영향을 받는 것 같지 않은가.

정도 이상으로.

존재 자체가 마치 다우드라는 인간에 의해 ‘정의’되는 것처럼.

방을 가득 메울 정도로 뭉게뭉게 번져나가는 자색 악마의 마기만 봐도 그렇다. 아무리 그와 맞닿기만 해도 좋아 죽는 자색 악마라 할지라도 이건 좀 과하지 않은가.

아마 세라스가 그의 손놀림 앞에서 점점 긴장의 끈이 느슨해지는 것 또한 그런 현상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었겠지.

‘...뭐.’

그리고, 아마도.

이쯤이면 되었을 것이다.

다우드가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세라스.”

“네에에...?”

완전히 끈적끈적하게 녹아서 제정신을 못 차리는 목소리가 대답으로 돌아왔다. 예상대로.

“그런데, 빅토리아 말이야. 여동생이라고 했던가?”

원래대로는 질문을 하자마자 날이 잔뜩 곤두설만한 주제다.

하지만 지금은 순순히 대답이 돌아온다. 안마도 안마고 그로 인해 일어난 마기 때문에 정신이 많이 흐려진 덕분이겠지.

“네에, 오래 전에 헤어졌어요오...”

척수 반사로 나오는 대답이다.

누가 들어도 정상이 아닌 상태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걸 내뱉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확연히 멍한 모습이다.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그리고, 그런 상태는 아마.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누군가’에게도 확실하게 주지가 되겠지.

“...다시 만나서, 정말, 정말 다행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그런 말이 이어서 흘러나오자마자.

건물 근처에서 누군가 움찔하는 기색이 느껴진다.

마치 전혀 예상하지 못한 흐름이라는 듯.

자신을 죽이겠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는 말을 들었음에도 꺼내기에는 대단히 이상한 말이긴 하지.

다우드가 속으로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애는 널 죽이겠다고 하던데.”

그가 일으키려는 건, ‘균열’이다.

이 자매 사이는 아주 복잡하게 배배 꼬인 매듭 같은 것이다.

다만, 그걸 풀어주기 위한 첫걸음은 이렇게 속에 감추고 있는 진담을 풀어주는 거지.

단박에 설득당하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누군가의 단단히 굳은 증오에 조그마한 파문을 일으킬만한 아주 작은 ‘계기’로만 기능해줘도 충분하다.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해요. 빅토리아는, 아무 이유도 없이 저한테 그럴 아이가 아니니까... 그렇게나 착한 아이였으니까...”

건물 바깥에서 누군가가 움찔하는 기색이 더욱 강해진다.

이를 바드득 가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하다.

“이유가 어찌 되었건, 널 죽인다잖아. 그건 좀 너무하지 않아? 혈육이잖아.”

“...아뇨.”

멍한 목소리로. 초점이 풀린 눈동자로.

“죽어줄 수 있어요.”

하지만 고민이라고는 일체 담겨있지 않은 단호한 기색으로. 대답이 곧바로 돌아왔다.

별것도 아니라는 듯이.

그쪽에 자기 목숨을 바치는 건 당연한 일이란 것처럼.

“전 그냥, 그 아이랑 사이좋게 지내고 싶은 게 전부-”

그리고, 다음 순간.

단단히 닫혀있던 창문으로, 누군가가 ‘스며들 듯이’ 침투해 들어왔다.

마치 어둠 속에 녹아든 그림자가 일어나듯이, 솟아오르는 것처럼 모습을 드러낸 빅토리아였다.

“저 들으라고 하는 짓거리입니까, 이거.”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다.

그녀가 수인족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꽤 정확한 감상일 것이다.

빅토리아의 시선에 깃든 살기가 장난이 아니다. 마치 자신이 농락당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모습이다.

< System Message >

[ ‘자색 악마’의 기척이 느껴집니다! ] [ 타천의 인장이 반응합니다! ] [ 대상의 기분이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습니다! ]

아까 전에 내게 떠오른 것과 똑같은 메시지다.

다만, 이번에는 세라스가 아니라 빅토리아가 대상이고, 세라스와 반대로 기분이 굉장히 안 좋아지고 있다는 게 차이점이지.

“글쎄.”

그러거나 말거나.

그쪽에 담담하게 말을 얹는다.

“난 그냥, 이 녀석이 솔직하게 말하도록 유도했을 뿐인데.”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하는 진 모르겠지만, 같잖은 장난질은 그만두시죠. 승부는 아직 유효합니다.”

빅토리아가 다시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어느 순간 마법처럼 모습을 드러낸 쌍수 단검이 녀석의 손아귀 안에서 한 바퀴 휘리릭 회전한다.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이겠습니다. 헛소리를 늘어놓는 걸 보니 이제 아예 목소리도 듣고 싶지 않네요.”

암살자의 방식은 아니다.

상대방의 역량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패퇴할 가능성이 낮지 않은 상황에서 암습도 아니고 정면으로 승부를 걸다니.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화가 난 모습이다. 정확히는, 대단히 ‘동요’한 모습이지.

굳이 세라스에게 이런 일을 시킨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이 녀석, 이제 세라스가 자신에게 어느 정도의 ‘애정’을 품고 있는지 알게 됐다. 이후의 선택에 영향이 안 갈 리가 없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게 그렇게 쉽게 될 리가 없잖아.”

당장 이 자리에서 세라스에게 덤빈다고 해 봐야, 진짜로 이쪽을 죽이는 데 성공할 리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네 언니도 너와 똑같은 최고의 암살자-”

문득.

그렇게 말하려던 입이 딱 다물린다.

등골을 타고 불안감이 쭉 미끄러진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감각이 엄습한다.

그리고 그런 감각이 가장 잘 전달되는 근원은 세라스의 상태에서 비롯된다.

‘...어.’

이 녀석.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여전히 최면에 걸린 것처럼 헤롱헤롱하다. 생각 이상으로 이성이 ‘너무 많이’ 날아가 있는 상태다.

[...안마를 얼마나 잘하길래 애가 이 꼴이 되냐?]

‘...’

[나중에 침대 싸움에서 너랑 이길 여자 거의 없겠네. 아주 전희로만 사람을 죽일 수도 있-]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지만, 이런 상태로 뭔가 온전한 전투력을 기대하는 건 무리다.

급한 시선으로 단검을 뽑아든 빅토리아와 세라스를 번갈아 가며 바라본다.

이거.

잘못하면 진짜 사단 나겠는데?

세라스, 빅토리아.

둘 다 이미 이어질 메인 퀘스트의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사전에 고지된 인물들이다. 여기서 싸움 잘못 붙어서 어느 한쪽이 크게 다치거나 죽기라도 하는 건 최악의 상황이다.

그리고 퀘스트 쪽에 뭔가 문제가 생기는 건, 내 목숨이 날아갈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소리나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둘 다 여기서 상처 없이 넘어가는 게 베스트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무슨 방법으로 무기 뽑고 달려드는 그랜드 어쌔신을 맨손으로 제압하나. 절체절명이 켜진 상태라도 그건 대단히 많은 위험성을 수반한다.

치고받고 싸우는 건 몰라도, 둘다 상처없이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이 어디 있-

“...”

-있다.

생각해보면 있긴 있다.

‘칼리반.’

[뭐.]

‘세라스가 죽는 것보단 그냥 제가 쓰레기가 되는 게 낫겠죠?’

[...]

칼리반이 잠시 침묵했다.

내 말에서 뭔가 대단히 불길한 뭔가를 감지했다는 기색이다.

[여태 항상 그래왔다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일단 물어는 봐주마. 무슨 소리야?]

‘...제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할건데? 둘 다 그랜드 어쌔신에 몸에 악마의 조각까지 있는데. 네가 중재할 깜냥이 될 것 같진-]

‘됩니다.’

눈을 질끈 감고 말을 이어간다.

‘수단이 있어요.’

[뭐?]

‘자색 악마의 그릇들이잖아요.’

다행히도.

둘 다 자색 악마의 조각을 가지고 있다. 가장 ‘애완동물’에 가까운 것들.

내 말을 듣게 만들 수 있는 수단이야 있다는 거다.

[그러니까 그게 뭔 소리-]

‘조교하면 됩니다. 둘 다.’

[...]

한참을 침묵하던 칼리반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말을 하는 본인도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단 기색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자매 두 명을 동시에 그... 하겠다고?]

‘...요약하자면 그렇죠?’

[...]

‘...’

칼리반이 심호흡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씨발아.]

‘...’

나도 할 말 없긴 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