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54 - 254. 감금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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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리아 11세의 몸을 만져볼 수 있는 자들은 극히 드물다.
그도 그럴 것이, 황제의 몸을 말하는 옥체라는 단어가 따로 존재할 정도로 그녀의 몸과 건강은 그 자체로 중대사항이다.
의원이나 그녀를 모시게 되어있는 시녀들을 제외하곤 그 털끝조차 건드릴 기회가 없는 건 당연하지.
그러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에게 뚜벅뚜벅 다가와 턱을 손가락 끝으로 들어올리는 이 남자는 대단한 폭거를 저지르고 있는 게 틀림없단 소리다.
그리고 세실리아 11세가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그 손짓에 순응하는 것 또한 이상 사태란 소리고.
‘...아...’
다우드 캠벨과 눈이 마주친 황제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냉엄한 눈빛이다. 명백하게 ‘상위’ 입장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는’ 입장이라는 걸 드러내고 있다는 게 절절이 느껴진다.
오만하다고 느껴야 한다. 무엄하다고 느껴야 한다. 그녀는 그런 위치에서 태어나 그렇게 자라온 인간이다.
하지만, 그 대신에.
“...”
다리가 후들거린다. 전신에 열감이 후끈후끈 솟아오른다.
그 기저에 깔린 것은, 그녀 본인으로서도 인정하기 싫지만.
만족감.
지금 이 남자가 자신을 이렇게 ‘다루는 것에’ 소름이 쭉 끼친다. 전신을 타고 닭살이 오소소 돋아난다.
하지만, 싫은 느낌은 아니다. 찌릿거리는 쾌감마저 느껴진다.
그 사이, 다우드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로 입을 가져갔다.
“무슨 생각으로.”
독을 녹인 것같이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서 떨어졌다.
비단 사이로 달콤한 냄새가 섞여 든 것 같다.
마약같다. 유해하다는 건 분명히 알고 있지만, 도저히 멀리할 수가 없다.
“이 자리에, 페이놀과 함께 오셨습니까?”
“...”
“저속한 욕망을 품고 오셨나요?”
“...”
“대답.”
서늘한 목소리에, 황제가 움찔움찔 떨면서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니라고는, 못 하겠군.”
황제가, 결국 눈을 질끈 감고 시인했다.
부끄럽다. 애간장이 녹아서 줄줄 흘러내리는 것 같다.
그렇지만.
이런 눈빛을 마주하고 있다면, 진심을 토해내는 것 말고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까지 와서 거짓을 고하는 것도 의미가 없을 테고.
하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녀가 이런 부끄러운 말을 토해냈음에도 놓아줄 생각이라곤 티끌만큼도 없어 보였다.
황제가 떨군 시선을, 다시 턱을 붙잡은 손을 이용해 자신의 눈과 마주치도록 확 끌어온다.
“황제 폐하께서, 전 제국민을 보듬으셔야 할 만인의 어머니가. 고작 남자 한 명에게 이리 함부로 다뤄지길 ‘기대’하면서 오셨다구요.”
“...”
“대답.”
“...그, 그렇... 그...”
잔뜩 붉어진 얼굴로 부들부들 떨며 시인하는 모습에, 다우드가 입꼬리가 조금 더 비틀렸다.
“품위 없게.”
차마 이어지지도 못하는 문장 사이로, 그런 냉소섞인 문장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다리의 힘이 풀린 황제가 침대 위로 풀썩 주저앉았지만, 이 남자는 조금도 멈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공식 선상에서는 항상 청초한 척, 가련한 척, 자애로운 척이란 척은 다 하시지 않습니까.”
“...으, 응...”
“그런데, 그런 분이.”
눈동자가 가까이 다가온다.
황제는 그만 숨이 멎을 것만 같은 느낌에 헐떡거릴 수밖에 없었다.
“저같은 놈팽이한테, 이렇게 막 다뤄지면서.”
“...그, 그대-”
“이렇게나 ‘기분 좋아 보이는’ 표정인 건, 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그런 말과 함께, 다우드가 그녀의 고개를 옆쪽으로 휙 돌렸다.
마침 거기에 있던 거울이 그녀의 얼굴을 그대로 비춰지고 있었다.
“...”
이게.
내 얼굴이라고?
열감으로 가득 찬 이성 사이로 그런 문장이 황제의 머릿속을 가로질렀다.
틀림없이.
이런 너무한 취급을 당하는 와중에도.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이다.
내면에 있는 뭔가가 만족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 이상’을 바라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지금, 뭘 상상하고 계십니까?”
“...”
“대답하세요, 폐하.”
황제가 이를 악물었다.
뇌가 펄펄 끓는 것 같다. 그것 이상으로 뜨거운 몸은 어느 정도의 열기가 도는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하복부도 알 수 없는 이유로 계속해서 움찔거린다.
그런 상태에서.
다음 문장은,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자각도 못 하는 상태에서 이어졌다.
“...끝까지 가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네-”
황제가 거의 애원하는 것 같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런 목소리로 말해본 기억이 스스로도 있나- 싶을 정도로 간절한 목소리였다.
“부디, 부디, 내가, 조금이라도, 그대를 품을 수 있도록, 온정을 베풀어 주지 않겠나-”
제국의 지배자가.
말 한 마디 한 마디로 대륙에 격동을 일으킬 수 있는 인간이.
기껏해야 남자 한 명에게, 자신을 품어달라 애원하고 있다.
거기까지 들은 다우드의 입꼬리가 더더욱 찢어졌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이어서, 그 고개가 천천히 숙여진다.
눈망울이 흔들리던 황제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어질 ‘격렬한 접촉’을 열심히 상상하며.
하지만.
-쪽.
“...어?”
황제가 저도 모르게 그런 의문성을 흘렸다.
가벼운 입술의 접촉.
이마 위에.
“안 돼요.”
“...”
“몸을 소중히 여기시죠, 폐하.”
멍하니 눈을 끔뻑거린다.
옆에 다리 풀려서 주저앉아있는 페이놀은 하다못해 질척하고 끈적한 키스라도 했다.
그런데, 자신은.
이마 위에 키스가 다라고?
진짜?
“그대, 그대 진짜 너무한...!”
“아니. 그거야.”
황제의 눈물기 섞인 문장이 다 나오기도 전에, 다우드가 씩 웃으며 뒤쪽을 가리켰다.
평소에 늘 보던, ‘치사한 짓’을 저지를 때 짓는 득의양앙한 웃음이었다.
그 손가락 끝에 걸려있는 것은, 아예 활짝 열려버린 문이다.
입술 키스 한 방과 이마 키스 한 방에 그대로 격침되어 버린 두 명의 여자가 ‘격렬한 성적 접촉’에서나 얻을 수 있는 쾌감을 느껴버렸단 증거였다...
“더 해드릴 이유도 없고.”
“...”
“...”
페이놀-황제 듀오.
승부에서 개같이 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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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상한 방에서 탈출하고, 복도를 좀 걷길 한참.
살짝 주변을 둘러보며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다.
그리고.
“...하아아아...”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대로 무너져내린다.
“살았다아아...”
사실 지금까지 그런 위기가 꽤 많아서 나도 조금씩 무덤덤해지는 감이 없잖아 있기는 한데.
‘동침’은 그야말로 지금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는 그릇들과의 관계를 통째로 뒤집어엎을 수 있는 최후의 폭탄이다.
물론 회색 녀석한테 강제로 빼앗기긴 했지만, 웬만해서는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녀석 특성상 남한테 떠벌리고 다닐 것 같지도 않고.
‘제발, 제발 그만 좀 달려들어...!’
이러다가 회색 녀석 이외의 다른 악마와 본격적으로 한 번 ‘해버리는’ 순간, 세계 멸망은 확정인 대 악마 대전의 신호탄이 되어버릴 수 있으니까...!
[...그나저나, 방금은 기가 막혔다. 바람둥이 노릇도 계속 하다보니까 짬밥이 쌓이나보네.]
“...”
하나도 안 기뻐.
그렇게 생각하며 소울 링커를 노려보고 있자니, 눈앞으로 느닷없이 기분 나쁜 창 하나가 떠올랐다.
기억을 좀 뒤져보면.
분명히, 내 능력 중에는 이런 게 있다.
< System Message >
[ 전설적인 여심 녹이기! ] [ ‘칭호: 난봉꾼’의 숙련도가 올라갑니다! ]
“...”
뭐냐 이거.
기억을 좀 뒤져보면, 분명히 나한테 이런 능력이 있긴 했지.
< System Log >
[ 현재 당신에게 부여된 칭호는 ‘난봉꾼’입니다! ] [ 당신이 여성에게 꼬리를 칠 때 이전보다 더 능숙하고 다재다능하며 능수능란한 테크닉들이 가능해집니다! ] [ 칭호에서 파생된 능력 이상으로 당신의 테크닉이 대단했습니다! ] [ 당신이 홀딱 빠지게 만든 감정의 깊이만큼 보너스 숙련도가 칭호에 가산됩니다! ]
즉.
해석해보면, 칭호가 도와주는 것보다 내 방금 여자 후리기가 대단했으니 칭호도 업그레이드 해 준단 뜻이다.
“...”
화나네?
아니, 뭐.
내가 지금까지 악마의 그릇들이랑 엮이면서 얻은 교훈 한 가지는.
이렇게 선을 넘어 밀고 들어오는 인간들일수록, 내가 역으로 각 잡고 한 번 밀어주면 오히려 생각보다 쉽게 넘어진다는 거다.
오히려 아예 숨죽이고 멀리서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는 쪽이 훨씬 더 무섭다. 왜, 무는 개는 안 짖는다고 하지 않는가.
이제 나도 온갖 수라장을 겪으면서 밀고 당기기 실력이 꽤 올라온 덕분에, 이런 허접들의 기습 정도는 금방 공략 가능한-
[역겹네...]
“...”
[이제는 아주 본인이 폭격기 비슷한 뭔가인걸 부정하려는 생각도 없-]
닥쳐, 좀.
폭격기는 대체 또 뭔 소리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요, 칼리반.”
그렇게 생각하며 눈앞의 창을 노려본다.
이 기분 나쁜 창은 그렇다 치고, 이상한 점이 한 개 있다.
< System Log >
[ 악마의 그릇과 대단히 밀접한 접촉을 확인합니다. ] [ 대상의 마기가 ‘타천의 인장’에 충전됩니다! ] [ 대상 ‘붉은 악마’의 마기가 차오릅니다! ]
여기까진 이상할 것도 없다. 늘 보던거니까.
이상한 점이라면.
‘...왜 다른 건 안 모이지?’
갈색 악마의 마기는 전혀 미동도 없다.
정확히는,
아예 내 ‘치명적인 매력’ 스킬에 감응조차 하지 않는다는 듯이.
붉은 악마의 경우도 나한테 호감도가 안 쌓이긴 했지만, 이 녀석의 경우는 조금 궤가 다르다.
페이놀의 경우는 아예 나한테 관심을 잘 안 가지는 쪽에 가까웠다면, 갈색 악마의 경우는 뭐라고 해야 하나.
“...피하는 것 같은데요?”
[뭐?]
“왜, 그런 느낌 있잖아요. 분위기만 봐도...”
말하기에 앞서 말을 좀 삼킨다.
내가 생각해도 조금 이상하기 짝이 없는 문장이었으니까.
“...나를 싫어하는 사람의 느낌이 물씬 나는데.”
[...뭐?]
칼리반도 어이가 없다는 목소리로 내 말을 받는다.
세상에. 나를 싫어하는 악마의 그릇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어이가 없는 가정이다...
[...개역겹네.]
“...”
어쩌라고.
지금까지 한 번도 반례가 없었으니까 나도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사실 그냥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아주 음험한 냄새가 나긴 한다.
상대를 싫어하는 감정 중에서도, 아주 악질적으로.
기회만 나오면 상대방에게 피해를 끼칠 생각이 만만인, 그런 시꺼먼 악의가 응축된 종류의 싫어함이다.
‘...갈색 악마는, 글쎄.’
최소한 ‘내가 알고 있는’ 게임 안에서의 설정을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나쁜 놈은 아닐 텐데.
환경이 성격 비뚤어지기 딱 좋은 환경이긴 했다만.
[그러면, 어떻게 하려고?]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사이, 칼리반이 소울 링커 안에서 그런 말을 던져왔다.
[당장 학예회는 며칠 뒤야. 아무리 최소로 잡아도 마기가 3종류는 필요하다며? 하나는 무조건 더 구해야지.]
“...어떻게 하고 자시고, 이제 하나밖에 없잖아요.”
한숨을 내쉬며 답한다.
리루를 또 불러서 마기를 충전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그것보다는 더 ‘마음에 걸리는’ 쪽이 있거든.
여기까지 다른 여자들이 저돌적으로 돌격하는데 여태 조용히 있던 사람 말이야. 원래는 그 돌격의 최선두에 있었어도 안 이상한 사람인데.
즉, 이제 남은 건.
비유적인 의미든, 직설적인 의미든 어느 쪽으로든 통용되는.
“...엘노어한테 가 봅시다.”
최종 보스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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