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사랑2020.07.20.
소비에슈의 안색이 굳어졌다. 표정은 얼음장 같으나 눈이 흉흉했고,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라스타가 뒤로 주춤 물러나자, 나란히 서 있던 두 사람의 사이가 멀어졌다. 그녀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말도 안 돼요! 폐하, 이건 말도 안 돼요!”
날카로운 침묵 속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던 소비에슈가 가벼운 한숨을 뱉었다.
“말이 안 된다?”
라스타의 말을 한 번 따라 한 그는, 곧 허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네 말처럼 이건 정말 말이 안 되지.”
“그게 아니라…….”
소비에슈는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몹시 화가 나는데, 이 분노를 여기서 풀지 못해 더욱 화가 나 보였다. 실제로도 그는 심란하고 어지러운 건 물론,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모조리 다 솟아나 괴로웠다. 화도 화지만 공주가,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공주가 자신의 딸이 아니라는 것도 만만찮게 괴로웠다. 사람들은 숨도 쉬지 못하고 조용해졌다. 이 초유의 사태에 다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짐작도 하지 못했다. 피를 뽑힌 데 놀란 공주만이 계속해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카를 후작.”
소비에슈가 한참 만에 무뚝뚝한 목소리로 비서를 불렀다.
“예, 폐하.”
상황을 지켜보던 카를 후작이 얼른 앞으로 나섰다. 소비에슈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내가 이 와중에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폐하…….”
그러나 이어지는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자를 데려와라.”
그자라니? 망연자실해 있던 라스타가 의아해서 고개를 들었다. 한 군데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그곳을 보니, 소비에슈의 부하들이 어딘가에서 알렌을 끌어내고 있었다. 알렌이 왜 여기에? 라스타는 기겁해서 ‘폐하!’ 하고 외쳤다.
“신관.”
소비에슈는 대답하지 않고 신관을 불렀다.
“예, 폐하.”
“혹시 공주가 이자의 아이는 아닌지, 다시 검사해 보아라.”
소비에슈의 명령은 덤덤했고 차가웠다. 라스타는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에 놀라 외쳤다.
“폐하, 우리가 다시 검사해요! 말도 안 돼요! 공주는 정말로 우리 딸이에요! 차라리 우리가 다시 검사해요!”
그러나 소비에슈는 다시 그 치욕을 겪고 싶지 않았다. 피를 빼서 검사를 하고, 또다시 자기 딸이 아니란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검사를 다시 해보고 싶은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알렌을 데려오라 한 건데. 라스타가 직접 자신의 피를 다시 달라 조르자 더욱 화가 났다. 아니, 지금 소비에슈는 라스타가 무슨 행동을 하든 좋게 볼 수 없을 정도로 인내심이 얇고 가늘어져 있었다.
“놓, 아주세요, 놓아주세요, 라스타! 라스타!”
알렌은 끌려 나오면서 라스타의 이름을 애타게 외쳤다. 그가 황후의 이름을 대놓고 부르자, 구경 나온 이들이 수군거렸다. 라스타는 알렌을 무시하고 공주에게 달려가려 했다. 분명 누군가 조작을 한 게 틀림없었다.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지만, 조작을 했을 거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결과는 나올 수 없었다. 그녀가 직접 공주를 안고 공주의 피를 빼서 확인한 결과가 아니라면, 절대 믿을 수 없었다.
“폐하, 누군가 조작을 했을 거예요. 아니라면 피를 작게 빼서 그래요. 더 많이 빼면 제대로 결과가 나올 거예요!”
신관은 주춤 뒤로 물러나며 겁먹은 얼굴로 외쳤다.
“적게 빼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더 많이 빼면 아기들이 놀랍니다!”
공주의 비명 같은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소비에슈의 얼굴은 더 굳을 수 없을 만큼 굳어갔다. 귀족들도 질려서 라스타를 쳐다보았다. 저 어린 아기의 피를 더 많이 빼자고 말하는 게, 공주가 공주가 아니라 한들 좋아 보이진 않았다. 이 와중에도 알렌은 겁에 질려서 라스타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검사하라.”
시간을 더 끌면 더욱 우스갯거리가 될 거라 판단한 소비에슈는, 차갑게 신관에게 명령했다.
“예, 예, 폐하.”
신관은 허둥거리며 다시 단상 앞으로 돌아와 라스타에게 말했다.
“황후 폐하. 이쪽으로 서 주십시오.”
그러나 라스타는 더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폐하와 검사하는 게 아니라면 받지 않겠어요! 저 남자와 친자 검사를 하라니! 이건 나에 대한 모욕이에요! 폐하! 정말 아니에요!”
주먹을 꽉 쥐고 이를 드러낸 그녀는 누구든 다가오면 한 대 후려칠 것처럼 보였다. 본인의 주장처럼 그녀는 아직 황후이기에, 격렬하게 거부하며 검사를 받지 않으려고 하자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신관은 쩔쩔매며 소비에슈의 눈치를 살폈다. 소비에슈는 미간을 찡그렸다. 알렌도 황급히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폐하, 저도, 저도 공주님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폐하. 저는 라스타가 폐하의 정부가 된 후에야 다시 만났습니다.”
그 와중에도 그가 꼬박꼬박 라스타를 이름으로 부르자, 라스타는 분노에 차서 알렌의 정강이를 구두로 찍어버렸다. 온 힘을 다해 내려친 것이기에, 정강이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윽.”
알렌은 드디어 그 입을 닥치고는 고통스러워하며 몸을 숙였다. 소비에슈는 그 광경을 한심하다는 듯 보다가, 라스타 주위의 기사 둘에게 눈짓했다. 신호를 받은 기사 두 명은 라스타에게 다가가 그녀의 팔을 잡고 억지로 당겨 단상 앞에 서게 했다. 황후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으나, 귀족들은 다들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라스타는 절대로 황후 자리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얼마나 오래 더 버티느냐, 어떤 식으로 내려오게 되느냐, 황후 자리에서 내려온 뒤 면책되느냐 벌을 받느냐의 문제일 뿐. 라스타가 단상 앞에 서게 되자, 기사 한 명이 라스타를 잡고 다른 한 명은 라스타의 손을 내밀어, 아까 검사를 할 때 낸 상처 부근을 힘주어 눌렀다. 잠시 아물어졌던 상처에서 다시 피가 주르륵 흘러, 새로 올린 접시에 맺혔다.
“놔라! 놓으라고! 난 황후란 말이야! 이럴 수 없어! 폐하, 아직 내가 황후예요! 내가 황후라고요! 이러면 안 돼요!”
라스타가 비참하게 울부짖는 소리에, 몇몇 마음 약한 귀족들이 인상을 찌푸렸으나 대부분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피를 짜낸 후에야 기사 둘은 라스타를 놓아주었다. 라스타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다가, 울면서 기사들을 밀쳐냈다. 하지만 그걸로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자신을 거칠게 대한 기사들을 주먹을 쥐고 마구잡이로 때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직 황후이기에, 기사들은 소비에슈가 별다른 명령을 내리지 않자 순순히 라스타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냈다. 그러나 한 대씩 맞을 때마다 점점 더 표정이 어두워져서, 눈치 좋은 귀족 몇몇은 혀를 찼다. 앞으로 이혼 절차를 밟든 폐위 절차를 밟든 실제로 그녀와 붙어 다니게 될 건 기사들인데. 저렇게 적으로 만드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라스타가 본 이혼 절차는 모두의 동정과 죄책감 속에서 이루어진 나비에의 이혼뿐이었기에, 그녀는 이런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시간을 너무 지체하는구나.”
소비에슈가 차갑게 말하자, 이번에는 다른 기사 두 명이 알렌을 잡고서 단상 앞으로 끌고 갔다. 라스타는 기사 둘을 때리길 멈췄다. 알렌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아까보다 더욱 거칠어서, 보기에도 아찔할 정도였다. 게다가 단상 앞으로 끌고 와 손을 억지로 내밀게 하자마자, 배려 없이 손바닥 중앙을 단도로 그어 버렸다.
“으악!”
알렌이 비명을 지르자, 피가 후드득 접시로 떨어져 내렸다.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는데. 신관은 덜덜 떨면서 피를 받아다가, 아까 특수한 도구로 미리 뽑아둔 공주의 피를 떨어트리고, 거기에 신전의 특수한 액체를 섞었다. 아까처럼 부글부글 거품이 올라왔다. 다른 게 있다면, 이번에는 피가 맑은 색으로 변했단 것이었다.
“공주님은 저자의 아기입니다. 공주님은 저자의 아기가 맞습니다, 폐하!”
신관이 외치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갑자기 확 커졌다. 소비에슈는 손으로 자신의 눈가를 짚었다. 눈가를 가린 손 아래로 눈물이 흐르는 게 보였다. 황제의 눈물에 놀란 사람들은 소비에슈가 알렌과 라스타에게 속았다며 동정했다.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폐하! 난 저자와는 얼굴도 마주하기 싫을 정도예요! 저렇게 증오스러운 놈과 공주를 갖다니요!”
라스타는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며 단상에 놓인 그릇을 확 날려버렸다.
“폐하를 두고 저딴 자와 아기를 가질 리가 없잖아요! 폐하, 공주는 폐하의 아기예요! 폐하의 하나뿐인 딸이라고요!”
그녀는 처절하게 외쳤지만, 구경 온 귀족들은 혀를 차며 더욱 한심하게 여겼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황제 폐하 앞에서 저런 발언이라니.”
“말이 참으로 거칠군요.”
“화려한 옷을 입고 고귀한 자리에 앉아도 피를 맑게 하진 못하는 거겠지요.”
구경꾼들은 라스타의 거친 욕설을 들으면서, 이 사건과는 전혀 관련 없는 점을 두고 흉을 보았다. 조앤슨은 먼발치에서 이 모습을 기사로 작성하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들은 영웅을 좋아하는 동시에 은근히 질시했다. 평가가 아주 좋은 영웅이라면 조금 다르겠지만, 이 평가를 좋게 유지하는 건 힘들었다. 행동에 흠이 없던 나비에 황후조차, 그 점으로 인해 냉정하다, 철 같다, 인간미가 없다고 흠이 잡히지 않았던가. 그런데 라스타의 최근 평가는 그 정도 수준을 훨씬 뛰어넘어 나빴다. 여러 가지 일과 스캔들이 연달아 벌어지면서, 평가는 나날이 곤두박질쳤다. 평민들의 희망이라 추앙받았던 만큼, 평민들은 라스타에게 기대치가 아주 높았다. 그들은 평민 출신이어도 라스타가 나비에 황후보다 훨씬 빼어나서 그들의 자존심을 살려주길 기대했다. 그러나 실제 행보가 이에 미치지 못하고 여러 가지 나쁜 의혹만 줄줄이 생겨나자, 높았던 기대감은 배신감으로 변해 더욱 거칠어졌다. 이 와중에 라스타가 몰락하기 시작한다면, 남몰래 그녀를 부러워했던 이들은 이젠 당당하게 싫어하는 감정을 드러낼 수 있어 재밌어할 터였고,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했던 이들은 높았던 기대와 애정을 날카로운 증오로 바꿀 터였다. 그런데 라스타 신화가 거짓 위에 쌓아 올린 모래성이었단 게 알려진다면……? 조앤슨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걸렸다. 동생의 실종도 실종이지만, 조앤슨 본인이야말로 애정이 증오로 변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라스타에게 실망할수록 그녀를 존경한 자신이 부끄러웠고, 이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더욱 라스타를 험한 말로 모욕했다.
“폐하, 폐하, 정말로 전 저 공주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알렌이 소비에슈에게 매달렸지만, 소비에슈는 가차 없이 그를 밀어냈다. 기사들이 알렌을 걷어차 감히 황제의 곁에 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알렌은 얻어맞은 몸을 끌어안고 훌쩍였지만, 누구도 그를 동정하지 않았다. 동정은커녕, 소비에슈는 목을 뜯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알렌이 증오스러웠다. 저 멍청한 자가 자신을 모욕한 것도 화가 났지만, 저 입으로 그의 딸을 ‘저 공주’라고 가벼이 부르는 것도 화가 났다. 신관은 눈치를 보면서 엎어진 검사 도구를 주섬주섬 도로 챙겨 단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때였다.
“이런. 이미 검사 결과가 다 나왔습니까?”
누구도 부르지 않았던 인물, 구경한다며 처음부터 따라오지도 않았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에르기 공작이었다.
* * *
“갑자기 나타나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샬렛 공주의 예상치 못한 청을 들은 후. 회의는 바로 파했고, 하인리와 나는 둘이서 정원을 산책하게 되었다. 하인리는 자신의 가슴께를 문지르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나타날 때를 생각만 해도 아직 놀랍단 것처럼.
“그렇게 놀랄 일이었나요?”
정말로 정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면 모를까. 아니었잖아? 어리둥절해서 되묻자, 하인리가 대답했다.
“하지만 퀸, 그대가 몹시 화난 얼굴로 들어왔잖아요.”
“그건…….”
“게다가 날 보자마자 바로 시선을 피했습니다. 화를 꾹 참는 모습이었어요.”
그야 그렇지. 좀 오해가 있었다. 아니, 심각하게 오해가 있었다. 난 샬렛 공주가 하인리의 정부가 되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이 때문에 그게 오해란 걸 알게 된 직후부터 지금까지, 정말 고개도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럽다. 특히 엉뚱한 오해를 한 샬렛 공주 본인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나마 최선을 다해 그녀 앞에서 미소를 띤 채 대해서 다행이지.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차가운 모습을 보였더라면, 아마 지금쯤 내가 들어가야 할 커다란 쥐구멍을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그냥…….”
“그냥?”
“좀 놀라서.”
나는 작은 목소리로 힘없이 대답했다. 혼자 오해한 게, 아니, 따지고 보면 혼자 오해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오해를 한 게 부끄럽긴 하지만, 아직도 아까의 일을 떠올리면 심장이 서늘해졌다. 하인리가 다른 사람을 정부로 들일 거란 생각을 하자, 그것만으로도 몹시 괴롭고 심장이 콱 막히던 게 생생했다.
“퀸…….”
어느새 저 남자가 이렇게 가슴 깊숙이 박혀버린 걸까. 완전히 사랑을 받아들이지 말자고, 저 남자를 깊게 사랑하지 말자고, 상처를 받아도 금세 한 발을 뺄 정도로만 사랑하자고, 굳게 다짐을 했는데. 어느새 이렇게 깊숙하게 들어와 버린 건가 모르겠다. 그가 새로 변할 수 있단 걸 알게 됐을 때, 이 남자가 손쉽게 내 울타리를 넘어올 수 있단 것도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이런 내 심정을 알아차렸나.
“퀸.”
조심스럽게 날 부른 하인리가, 두 손으로 내 손을 가져다가 자기 가슴에 대고 꼭 감싸며 말했다.
“안심해도 됩니다. 절대로 코샤르 형님이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하게 하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 정략결혼을 몰아붙이지 않을 테니, 그렇게 놀라지 않아도 됩니다.”
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구나.
“그대는 눈치가 들쑥날쑥하군요.”
“예?”
하인리는 내가 샬렛 공주와 이야기하고 있을 때,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와서는 말을 끊다시피 했는데. 지금 하인리의 말을 듣고 보니, 그는 샬렛 공주가 내 오빠를 달라 한 일로 내가 기분이 상할 거라 걱정해서 급히 다가온 모양이다. 바보.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전 눈치가 아주 좋은 편입니다, 퀸.”
“혹시 누가 그런 말을 해 주었다면, 그 사람의 말은 앞으로 의심하는 게 좋겠어요.”
“퀸도 내게 눈치가 좋단 말을 한 적이 있는데요?”
“……나는 예외예요. 언제나.”
“물론 퀸은 예외입니다. 언제나.”
“내가 예외인 건, 그대가 날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물론입니다.”
“내게도 그대는 예외예요.”
“그렇습니까?”
“그대가 예외인 건, 내가 그대를…….”
뒷말을 생략하고서 몸을 돌렸다. 하인리는 생글거리면서 내 손을 자기 가슴에 대고 있다가, 몸을 움찔했다. 나는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지만, 하인리가 움찔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힐긋 보니, 그는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보라색 눈동자가 ‘방금 내가 뭘 들으려다 만 거지?’ 하는 혼란으로 가득했다.
“퀸, 방금…….”
“방금 뭐요?”
“퀸. 방금 뭐라고 말하려다 만 겁니까?”
“그대는 눈치가 좋다 하지 않았나요? 눈치 좋은 그대가 눈치껏 알아들은 게 맞을 거예요.”
“알아듣긴 했는데, 이건 귀로 직접 들어야 하는 거 같아서요.”
“샬렛 공주에 대한 건 오빠에게 직접 물어볼게요.”
“아니, 갑자기 왜 그 공주 이야깁니까, 퀸!”
“사랑해요.”
“퀸은 너무 화제를 확확…….”
그가 말을 하다 멈추고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손을 뻗어, 그의 턱을 위로 올려 벌어진 입을 닫아주었다. 하인리가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괴상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