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결단2021.03.08.
“황후 폐하, 그간 건강히 잘 지내셨는지요?”
맥켄나가 궁전에 돌아왔다. 하인리가 실종된 후, 그를 찾기 위해서 새대가리 종족들이 대거 투입되었는데, 맥켄나 역시 그중 하나였으니 정말 오랜만이었다. 해야 할 일이 많지만, 그래도 맥켄나는 하인리가 가장 우선이라 생각했는지, 일거리를 나와 재상에게 맡기고서 그를 찾아 떠나갔지. 그런데 이제 돌아왔다는 건…….
“하인리는 찾았나요?”
황급히 그에게 물었으나 돌아온 표정은 어두웠다. 아직 찾지 못했구나. 맥켄나는 시무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무어라 말을 꺼내기 전. 그는 내 어깨너머를 보더니 깜짝 놀라 외쳤다.
“어이쿠! 하인리 폐하인 줄 알았습니다.”
돌아보자 탁자 위에 에인젤이 주고 간 새장이 놓여 있었다. 안에는 금빛 깃털을 가진 새가 꾸벅꾸벅 졸고 있고. 이윽고 놀란 게 가셨는지, 맥켄나는 동정심 가득한 눈길로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황후 폐하. 하인리 폐하가 무척 보고 싶으신 모양이군요. 저런 가짜를 곁에 두시고…….”
내가 하인리를 그리워해서 저 새를 가져다 놨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보고 싶어요.”
틀린 말은 아니어서 순순히 인정했다. 저 새는 하인리도 아니고, 내가 데려온 새도 아니지만, 하인리가 보고 싶으면 요즘은 저 새를 보고 있긴 하지.
“하지만 하인리가 그리워서 가져다 둔 새는 아닙니다. 저 새를 가져온 건 초국적 기사단 4기사단 단장이에요.”
“그자가요? 설마, 뭔가 알고서……!”
“내 생각엔, 그자가 새가 된 하인리를 데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맥켄나는 몹시 당황해서 허둥거렸다.
“폐하께서 어느 종인지 알게 된 걸까요?”
“그건 아닌 눈치였습니다.”
그렇다면 좀 더 뻔뻔하고 다앙하게 나왔겠지.
“하인리를 ‘하인리가 기르는 새’ 정도로 생각한 것 같아요. 그래서 나를 떠보기 위해 일부러 이 새를 선물한 것 같고.”
맥켄나는 펄쩍 뛰었다.
“그러면 당장 폐하를 구출하러 가야지요!”
하지만 자기가 말을 해 놓고도 바로 시무룩해졌다. 대놓고 그쪽을 습격해 새를 구해오면, 에인젤이 더욱 의아하게 여기게 될 거란 생각을 한 모양이다. 게다가 새를 구하기 위해 기사들을 투입하다가 전면전으로 치닫는 건, 이쪽 역시 피해야 했다. 그림자 기사단을 정식으로 공격했다가, 정말로 월대륙 연합에 선전 포고를 한 것처럼 될지도 모르니. 그렇게 되면 서대제국이 횡포를 휘두른다고 생각한 다른 나라들이 자기들끼리 똘똘 뭉칠 수도 있지. 이득을 미끼삼아 그들을 분열시킬 수 없을 정도로. 나는 맥켄나가 좀 진정하길 기다렸다가, 에인젤이 다녀간 후 내내 생각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신년제에 직접 가볼까 싶습니다.”
맥켄나는 내 말을 듣자마자 놀라서 버럭 소리쳤다.
“위험합니다! 혹시 함정을 팠을지도 모르는데……!”
“그렇다고 이대로 하인리를 계속 그들에게 잡혀 있게 둘 수는 없어요.”
에인젤이 새를 잘 데리고 있더라도, 하인리는 에인젤에게 오래 잡혀 있을수록 위험했다. 그는 벌레를 무서워하니까. 에인젤이 예전에 내가 한 것처럼 모이로 벌레를 준다면, 하인리는 끔찍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될지도 몰랐다.
“내가 새 종족들을 시종과 호위들 틈에 섞어 데려가겠습니다. 이후 시선을 끌 테니, 그대들은 자연스럽게 잠입해서 하인리를 찾아봐요.”
맥켄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초조하게 손을 깍지 끼고서 문질렀다. 위험하다고 말리고 싶은데. 그 역시 하인리를 빨리 되찾아야 된단 걸 알기에 반대하지 못하는 듯했다. 한참을 고민한 후에야 맥켄나는 내 의견을 받아들인 후, 흩어진 종족들을 모아 오겠다며 다시 궁전을 떠났다. 이후 나는 재상을 불러서 지시했다.
“나와 하인리, 둘 다 참석하겠단 답서를 보내줘요.”
* * * 하인리가 ‘퀸’ 모습으로 에인젤에게 붙들려 있을 가능성도 생각했고. 신년제에 가겠다고 답서를 썼지만…….
‘그래도 웬만하면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랐는데.’
내 짐작이 다 틀리더라도 그 편이 나으니까. 하지만 하인리는 결국 신년제에 참석하기 위해 출발해야 할 날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연락이 없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소비에슈. 그 역시 답서를 보내지 않았다. 소비에슈라면 분명 내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확신했는데. 아직 황태자 시절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상태인가? 그래서 생각하는 게 좀 다른 건가? 하지만 거절을 하더라도 거절하는 답서를 가지고 왔어야 하는데, 왜 아직도 아무 대답이 없는 거지? 아직까지 의논하는 중인가?
“황후 폐하, 이제 출발하셔야 합니다.”
고민하느라 마차에 타지 않은 채 계속 근처만 서성거리자, 기다리다 못한 랑드레 자작이 나를 불렀다. 결국 생각을 마치지 못한 채 마차에 올라탔다. 그러나 마차가 출발하자 머리는 더욱 복잡하고 어지러워졌다. 혹시라도 하인리가 돌아왔는데 길이 어긋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 에인젤이 ‘퀸’을 데리고 있을 거란 게 내 오판이면 어쩌나 하는 걱정. 온통 다 걱정거리다. 라리와 카이 둘만 놔두고 떠나온 것도 염려되었다. 맥켄나에게 부탁해서 하인리의 유모를 데려와 라리와 카이가 아가새일 때 챙겨 달라고 맡기긴 했지만, 역시 너무 어린 아기들이라……. 연합 본부가 서대제국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진 않지만, 아기들은 하루만 엄마 아빠와 떨어져 있어도 괴롭지 않을까? 둥지 안에서 오들오들 서로를 끌어안고 빽빽거릴 아가새들, 손싸개 발싸개를 하고 버둥거릴 아가들을 떠올리자 심장이 아파왔다.
‘라리. 카이. 엄마가 아빠 찾아서 데려갈게.’
* * * 그 시각. 소비에슈는 최측근 비서진들만을 모아둔 채 동대제국 대사가 전한 나비에의 제안에 관해 토론하는 중이었다. 대사가 날씨 문제로 원래 일정보다 좀 더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이제야 토론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폐하께서 제대로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나쁘지 않은 제안입니다. 동대제국과 서대제국이 모두 연합에서 탈퇴해버린다면, 동대제국과 서대제국, 연합이 균형을 맞출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폐하께서 가끔 정신이…… 정신을…… 흠. 이런 상황인데 균형을 제대로 맞출 수 있을까요? 원래의 폐하에겐 쉬운 일이지만 지금은 정신이…… 크흠흠. 송구합니다, 폐하.”
“괜찮으니 계속 말하라. 나도 내 상태는 알고 있으니.”
그러나 비서들이 말을 하다 말고 자꾸 눈치를 살피느라 진도가 잘 나가지 않자, 소비에슈는 덤덤하게 수긍하고서 신경 쓰지 말고 토론이나 진행하라 지시했다. 소비에슈 역시 자신이 종종 환청과 환상에 휩쓸린다는 걸 스스로도 알았다. 그 사실을 떠올리면 체면이 상했으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나라를 말아먹을 수는 없었다. 그는 병을 당장 고칠 수 없다면, 차라리 인정하고서 대안을 찾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소비에슈가 허락하자 다시 토론이 계속되었다.
“저도 피르누 백작의 말에 동의합니다, 폐하. 서대제국은 이미 동대제국을 노렸던 전적이 있습니다. 이리를 피하려다 호랑이굴에 들어가는 상황이 될 수도 있으니, 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연합이 서대제국에 저런 제안을 했지만, 사실은 어느 쪽과 손을 잡아도 상관없을 겁니다. 이미 우리 측에 먼저 손을 잡잔 제안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카를 후작께서도 서대제국과 손을 잡아선 안 된다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니. 그렇기 때문에 연합을 경계해야 합니다, 폐하. 나비에 님의 말처럼 장기적으로는 두 나라 모두 연합의 목표일 테니까요.”
소비에슈는 입을 열지 않고서 비서들이 주고받는 팽팽한 의견을 들었다.
“연합이나 서대제국이나 똑같은 승냥이들입니다. 하지만 마력 감소 현상에 대해 알아내려 하는 연합보다 실제로 알고 실행까지 시켰던 서대제국 쪽이 당연히 더 위험합니다. 그런데 서대제국과 손을 잡자고요?”
“연합과 손을 잡아 서대제국을 누르고, 연합이 비밀을 알아내기 전에 바로 연합을 쳐버리는 건 어떨까요?”
“그 일을 진두지휘할 폐하께서 가끔 정신이…….”
“…….”
그러나 소비에슈가 아무리 귀를 기울여 듣고 비서들이 열심히 의견을 내밀어도, 결론을 내려고 보면 도돌이표였다. 돌고 돌아서 결론은 결국 소비에슈의 현재 건강 상태로 귀결되었다. 비서들은 소비에슈 앞에서 ‘황제 폐하가 약간 미쳤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마지막에는 얼버무리는 걸로 다들 이야기를 끝냈다. 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회의를 하는 와중에도 황제는 두 번이나 허공을 쳐다보면서 딴소리를 했으니까. 대사가 서대제국에서 나비에의 제안을 전달하기 전에는, 실제로 그들 모두 대외적 활동만이라도 소비에슈를 대리할 방계 황족을 찾아야 하지 않느냐는 문제로 계속 소란스러웠고. 소비에슈는 눈을 감고 눈두덩이를 눌렀다. 괜찮으니 마음대로 말하라고 해도 비서들이 내내 자기 눈치를 살핀다는 걸,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결국 한참 고민한 후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지.”
내내 침묵하던 황제가 말을 꺼내자 모두 조용해졌다. 다들 입을 다물고 소비에슈를 쳐다보았다. 그들이 어떤 의견을 내밀건 결국 결정을 내리는 건 소비에슈였다. 그의 정신 상태가 어떠하든.
“제안은 받아들이겠다고 전해라.”
그 말에, 제안을 받아들이자 주장했던 비서진들은 다행이란 표정을 지었으나, 서대제국을 더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비서진들은 우려하는 표정을 지었다.
“단.”
그러나 소비에슈의 다음 말을 듣자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 * * 연합에서 신년제를 벌이기로 한 곳은 서대제국과 많이 멀지 않았기에, 오래 지나지 않아서 초대장에 써진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차 창문 너머로 보니 각양각색의 마차들이 한곳으로 몰려드는 게 보였다. 마차에 매단 국기 역시 다양했다. 그 마차를 둘러싼 호위들도 일반적인 파티 때보다 훨씬 많았고. 각국의 왕과 왕비들이 모이는 축제이기 때문이었다. 추억을 되짚자, 동대제국 황태자비이던 시절 이곳에 온 일이 떠올랐다. 그때는 옆에 소비에슈가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혼자 있다. 이 사실을 인식하자마자 허리를 곧게 폈다.
“왜 그러십니까, 폐하?”
그 모습이 이상했나. 맞은편에 앉아 골똘히 혼자 중얼중얼 거리던 맥켄나가 놀라서 물었다. 내가 갑자기 허리를 빳빳하게 세우자 의아한 눈치였다.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 허리를 폈단 말을 하긴 민망하니까.
“후. 폐하께서는 괜찮아 보이시네요. 전 긴장 되어서 죽겠습니다.”
그래 보인다. 꽉 쥔 주먹, 꾹 다문 입술, 힘이 들어간 눈꺼풀 등을 보면 맥켄나가 얼마나 경직되어 있는지 훤히 알 수 있다. 그럴 수밖에. 신년제가 열리는 저 큰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이제 맥켄나는 남들의 시선을 피해서 하인리를 찾아야 하니까. 긴장될 수밖에 없지. 마침내 마차가 멎었다.
“후!”
맥켄나는 한 번 더 숨을 빠르게 뱉었다. 그에게 말을 걸 새도 없이 마차 문이 열렸다. 문을 연 사람은 랑드레 자작이었다. 내가 나가려 하자 그가 손을 내밀어 에스코트를 해주었다. 하지만 랑드레 자작도 긴장되긴 마찬가지인지, 평소보다 표정이 어두웠다. 아니. 오늘 유달리 심하긴 하지만 사실 그는 요 며칠 내내 저랬다. 니안과 또 싸웠나, 걱정이 되어서 물어보았지만 이번에는 아니라 하고……. 걱정스럽지만 지금은 하인리가 우선이다, 나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랑드레 자작의 손을 놓고, 옷매무새를 가볍게 정리하면서 턱을 치켜들었다. 다른 마차에서 내린 다른 귀족들 왕족들이 나를 힐긋거렸다. 그게 내가 최초의 재혼 황후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서대제국 황후이기 때문인지는 모른다. 어느 쪽이든 만만하게 보여선 안 되지만.
“가지요.”
뒤따라 마차에서 나온 맥켄나에게 말하자, 맥켄나와 랑드레 자작이 내 좌우로 비스듬히 뒤에 섰다. 오늘은 신년제 당일이 아니지만, 연합 본부 안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이미 조명이 환했다. 빛을 잘 반사하는 하얀 조약돌은 그 자체로 또 다른 조명처럼 반짝거렸다. 그 사이를 뚫고 나는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서대제국 황후 폐하.”
하지만 과도하게 어깨에 준 힘은,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다가온 사람 때문에 주르륵 빠지고 말았다. 나는 평소처럼 서서 내게 다가오는 낯익은 얼굴을 쳐다보았다.
“에인젤 경.”
이름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4기사단 단장이었다. 출발하기 전에 그는 연합본부가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갔단 이야기를 들었는데. 언제 이쪽으로 돌아온 거지?
“방으로 가십니까?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얼떨떨한 기분을 숨기고 있자니, 에인젤이 손을 내밀었다. 되었다고 말하려다가 주위를 보니, 다른 손님들도 각기 초국적 기사단 소속 기사의 안내를 받아 자기들 방으로 찾아가고 있었다. 이 와중에 혼자 거절할 수도 없어서, 나는 알겠다 대답하고서 그를 뒤따랐다.
“하인리 폐하와 함께 오신다더니. 웬일로 혼자만 오셨군요?”
“폐하께서는 잠시 다른 일이 생겨서, 내게 먼저 가 있으라 하였습니다.”
“그렇습니까?”
에인젤과 랑드레 자작이 조용히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정확히는 에인젤이 랑드레 자작을 향해 눈을 찡긋하자, 랑드레 자작이 인상을 구긴 거지만. 혹시 요 며칠 내내 랑드레 자작이 시름에 잠겨 있던 건 에인젤 때문일까?
“신년제에는 처음 오시는 거지요?”
“…….”
“아아. 죄송합니다. 예전에 오신 적이 있다고 기록에서 봤습니다. 지금과는 다른 국기를 가지고 오셨지만요.”
말을 참…….
“안심하셔도 됩니다. 동대제국 황제 폐하께서는 신년제에 참가할 수 없다고 알려주셨는지라. 혹시 두 분이 마주치게 되면 곤란할 텐데, 다행한 일 아닙니까?”
짜증나게 하는 사람이네. 하지만 소비에슈가 신년제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한 건 의외네. 그 역시도 신년제에 참가해서 분위기를 한 번 살피고, 다른 나라 왕족들에겐 동대제국의 위엄을 자랑할 거라 여겼는데. 기억이 황태자 시절에 머물러서 그런가? 혹시라도 들킬까 봐? 하지만 다른 나라 왕족들은 소비에슈의 기억이 황태자 시절에 머무르는지 아닌지 알 수 없지 않나? 그런데 생각하면서 걸어가다 보니, 멀지 않은 곳에 낯익은 새가 보였다. 황금빛 새. 보라색 눈. 커다란 날개. 소중한 덩치. 나의 하인리였다. 새장 안에 갇힌 하인리. 젠장, 보라색 리본은 왜 하인리한테까지 감아둔 거야?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던 하인리가 내 쪽을 보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나도 모르게 달려갈 뻔한 걸 꾹 참고 에인젤을 살폈다. 에인젤은 어느새 걸음을 멈추고서 나를 빤히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