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침대 위?2021.04.08.
란델은 자신이 했던 장난 같은 입맞춤이 아닌, 깊숙이 파고드는 실비아의 입맞춤에 당황해 눈을 크게 떴다.
부드럽고 따뜻한 것이 입술을 한번 훑고, 이어서 안으로 파고들었다. 움찔 놀라자 달래듯 쓰다듬고 감싼다. 하지만 그가 정신을 차리고 실비아의 어깨를 잡아채기 직전, 실비아는 언제 다가왔냐는 듯 뒤로 한 발 물러나며 입술을 떼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실비아는 무심히 생각했다. 신의 눈이 항시 닿아 있는 것을 안 이상, 그녀는 조금 더 조심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남편과 최대한 ‘사이좋게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야 죽겠다는 마음 따위는 품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일 터. 조금 전의 입맞춤도 그런 의미에서였다. 란델이 차마 입맞춤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접촉만을 하고 떨어지려 하기에, 그녀는 이 결혼식에 최대한 충실히 임하는 것처럼 보이려 했을 뿐이었다.
“……!”
하지만 그녀의 속내를 모르는 란델은 크게 당황한 듯 입술만 달싹였다. 부케가 가리고 있던 탓에 그들 사이의 미묘한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한 하객들의 박수 소리가 홀을 크게 울렸다. 실비아는 결혼식의 끝을 알리며 흩날리는 꽃잎들 틈으로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그 말에 란델의 목덜미가 뒤늦게 확 달아올랐다. * * * 결혼식이 끝난 이후 피로연은 물 흐르듯 이어졌다. 사람들은 연회장 곳곳에 무리 지어 쉼 없이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들었다. 개중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화젯거리는 단연 실비아 플로레트의 미모였다.
“세상에, 정말 사람일까요?”
“저 정도면 서큐버스(*인간을 유혹하는 종류의 마족)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아요.”
“그동안 플로레트 영애에게 문제가 있다느니 어쩌니 떠들었던 사람들은 한동안 파티에 얼굴을 못 내밀겠군요.”
“자업자득이지요.”
사람들은 가벼운 복식으로 갈아입고 연회장의 중앙에서 춤을 추고 있는 란델과 실비아를 흘끔거렸다. 두 사람은 케이크 위에 올려두는 장식 인형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완벽한 한 쌍이었다. 샹들리에 불빛 아래에 선 실비아는 말할 것도 없었고, 란델 또한 수도에서는 보기 드문 분위기의 미남이었다. 수도의 남성 귀족들은 대체로 곱상한, 곱게 자란 도련님 이미지에 가까웠다. 하지만 란델은 전장을 누빈 시간이 고스란히 축적되어 있는 단단한 몸, 그을린 피부색을 지닌 야성적인 향기가 진한 미남이었다. 거기에 금색과 갈색이 오묘하게 뒤섞인 머리카락에, 어딘가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연녹색 눈까지. 지금도 몇몇 귀부인과 영애들은 부채 너머로 란델의 팔뚝을 훔쳐보며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만큼 그림 같은 한 쌍이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제각기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빨리 초야나 치르러 가는 편이 마음은 편하겠네.’
슬슬 체력이 바닥나는 중인 실비아는 란델이 알았다면 기겁할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하며 눈을 깜박였다. 곧 피로연이 끝난다. 그러면 왕성 마법사들이 열어준 이동 마법진을 타고 공작령 부근까지 이동해서, 다시 마차를 타고 공작성에 입성하기까지는 약 1시간 정도.
‘조금만 더 참자.’
지난 99번의 환생 동안 갈고 닦은 인내심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나이를 헛먹지 않았다. 실비아는 그 생각만을 되뇌며 발을 움직였다. 왼쪽, 오른쪽, 다시 왼쪽.
‘이 사람은 대체…….’
그사이, 란델은 티 나지 않게 실비아를 살피며 심각한 얼굴을 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입맞춤 당시에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굳어 있었던지라 달리 생각이라는 것을 할 틈이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결혼식 후 몇 시간 동안 이어진 피로연. 이곳에서 란델은 실비아를 충분히 관찰할 시간을 얻었다. 기나긴 관찰 끝에 나온 결론은 ‘이상하다’였다.
‘정말 스물두 살이 맞나?’
지난 22년간 플로레트 저택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는 귀족 영애. 하지만 실비아가 피로연 내내 내비친 태도는 평생을 사교계에서 지낸 귀부인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것이었다. 시선, 말투, 목소리,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까지. 그 모든 것에서 결코 숨길 수 없는 세월의 무게가 느껴졌다. 란델은 그에 관해 물어봐도 되는 건지 잠시 고민했다.
‘그나저나 어떻게 불러야…….’
“실비아.”
“음?”
“그냥 이름으로 부르세요. 고민하시는 것처럼 보여서.”
“그…….”
“내키지 않으시면 부인, 여보, 자기. 이 중에 편한 대로 골라 부르셔도 될 것 같고.”
실비아는 태연히, 언뜻 무미건조한 태도로 호칭들을 늘어놓으며 빙글 돌았다. 그에 반해 란델은 몸에 익은 대로 그녀를 한 바퀴 돌리면서도 넋 나간 얼굴이었다.
‘……방금, 무슨?’
분명 속을 고스란히 읽힌 것 같은데?
‘내가 얼굴에 할 말을 써놓는 타입은 아니지 않은가?’
외려 가만히 있으면 무섭다고들 하는 인상인데. 거기에 더해서 엄청난 호칭들이 지나간 것 같은데, 아무래도 기분 탓이려니 했다. 란델은 연이은 공격에 혼란에 빠졌으나, 실비아의 입장에서는 그녀의 부모가 매일 서로를 부르는 호칭을 꺼내놓았을 뿐이었다. 어쨌거나 그들도 이제는 부부였으니까. 그런 호칭이 더 자연스럽지 않나 해서. 물론 란델은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한동안 심란한 얼굴을 하다가, 이내 한숨처럼 말했다.
“……란델이라고 부르십시오. 말을 편하게 해도 좋고. 홀로 하대하는 취미는 없어서.”
그 말에, 이번에는 실비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선할 것 같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사소한 부분에서까지 바른 사람이다. 이렇게 건실한 사람은 지난 99번의 생을 통틀어 보아도 찾기 힘들었다.
“좋은 분이시네요.”
“……글쎄.”
아무리 영주의 의무라 하지만, 아내 된 사람을 호시탐탐 경계하기만 하는 자신이 썩 좋은 이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란델은 씁쓸한 웃음을 삼켰다. 실비아가 왕의 첩자이건 아니건, 어쨌든 그녀는 이제 그의 아내였다. 그러니 적어도 ‘남편’ 된 도리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는 책임을 다해야겠지.
‘실비아가 정말로 저택을 벗어난 적이 없는지는…… 백작과 인사를 나누며 묻는 편이 낫겠군.’
그 김에 실비아가 좋아하는 음식과 싫어하는 음식에 대해서도 물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따라왔다. 무의식이었다. 그때 타이밍 좋게 곡이 끝났다. 한쪽에서 대기하던 왕성의 시녀들이 실비아의 곁으로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이제 준비하셔야 합니다. 환복 후 곧장 출발하실 수 있게 해뒀습니다.”
실비아는 그 말에 란델을 돌아보았다. 란델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놓아주었다.
“다녀오십시오.”
“네, 잠시 후에 뵈어요.”
실비아는 살짝 웃고는 시녀들과 함께 이동에 편한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사라졌다. 란델은 슬슬 제 주변으로 모여드는 부하들 틈에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이윽고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는 플로레트 백작 내외를 발견한 그가 걸음을 떼었다.
“플로레트 백.”
“어머, 벨포르 공작님.”
백작 부인은 저들에게로 다가오는 란델의 모습에 몰래 백작의 등을 찰싹찰싹 두드렸다. 그에 훌쩍거리다가 말고 다급하게 눈물을 훔친 백작이 표정을 가다듬었다. 란델은 그들 앞에 다가서자마자 우선 허리를 깊이 굽혔다.
“모자라나마 따님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니 혹 부족한 점이 보인다 싶거든 부디 가감 없이 꾸짖어주십시오.”
그 말에 플로레트 백작 내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리 장인과 장모라고 할지언정, 왕족 다음가는 신분의 란델이 이렇게까지 공손한 태도를 보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실비아에 대한, 또 그녀의 부모님에 대한 예의로 자신을 낮추고 있었다. 그에 이제나저제나 딸 걱정뿐이었던 백작 내외는 불안하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크흠 헛기침을 한 백작이 진심을 그득 담아 내뱉었다.
“우리 딸, 잘 부탁합니다.”
“염려 마십시오. 한데 떠나기 전에 몇 가지 여쭐 것이 있습니다만.”
“무얼 말씀이십니까?”
“따님께서 정말로 스물두 해 동안 저택 내에만 계셨던 것이 맞습니까?”
“예?”
백작은 순간 의외의 말을 들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이내 심각하게 얼굴을 굳혔다.
“벨포르 공.”
“말씀하십시오.”
“제 말이 이상하게 들릴 거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부디 들어주십시오.”
“무슨 말씀이시기에…….”
란델은 덩달아 심각해졌다. 혹시 실비아에게 숨겨진 지병이라도 있는 건가? 그러나 이어진 말에 그는 드물게도 말을 잃었다.
“제 딸은…… 사실 저택이 아니라 침대에서 벗어난 적이 거의 없습니다.”
“……?”
란델의 머리 위로 보이지 않는 물음표가 가득 떠올랐다. * * *
-천성이 워낙 무기력한 아이인지라…….
-가끔 하루 넘게 잠들어 있을 때도 있으니, 너무 놀라진 마십시오. 죽은 게 아니라 그냥 잠든 것뿐이니까.
-한 번은 삼 일 내내 미동도 안 하길래, 저희도 어찌나 놀랐는데요, 호호!
결국 란델은 백작 부부와 대화를 시작하기 전보다 늘어난 의문을 한가득 안고 물러나야 했다. 그가 알아낸 것이라고는 실비아가 그의 생각보다 훨씬 더 방구석 폐인 같은 삶을 살아왔다는 것. 또 무언가를 입에 넣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던지라 딱히 음식에 대한 호불호를 알 수 없다는 것 정도였다.
‘침대 밑으로 내려와 본 적이 거의 없다니…….’
정말 최소한의 숨쉬기 운동만 하며 살아왔으니 그렇게 근육이라고는 하나 없는 몸이 된 것이 아닌가. 란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북부로 가서는 하루에 한 번씩, 짧게나마 산책이라도 시켜야겠다고 다짐했다. 실비아가 알았다면 오싹함을 느꼈을 생각이었다. 란델 일행은 플로레트 백작 부부와 함께 정문 앞으로 내려왔다. 그러자 이동 마법진을 준비하고 있던 왕성 마법사 세 사람과 왕, 실비아가 그들을 맞이했다.
“오셨어요?”
“끄흡끅.”
“또 우시네.”
실비아는 자신을 보자마자 또다시 왈칵 눈물을 터트리는 백작을 달랬다. 그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왕이 란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잘 살게.”
“감사합니다.”
란델은 실비아와 백작 부부를 대할 때와 다르게 소름 끼치게 무감해진 목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였다. 왕 또한 인사치레로 건넨 말이었기에 가볍게 고개만 까딱하고 뒤로 물러났다.
“갈까요, ……부인.”
란델은 머뭇거림 끝에 실비아가 권했던 호칭 중 하나를 넌지시 덧붙였다. 그 짧은 망설임을 알아챈 실비아는 저도 모르게 입술 새로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귀엽네.’
잊어버렸어도 될 만큼 사소한 말이었는데, 굳이 기억해서 들어준다는 점이. 보면 볼수록 참 바르고 참한 청년이었다. 그래서 조금 미안해졌다. 자신은 어떻게 하면 신의 눈을 속이고 죽을 수 있을지 궁리나 하고 있었으니. 그러나 죄책감은 잠시였다.
‘……뭐, 저 정도 사람한테는 사별 후에도 혼담이 밀려들 테니까.’
실비아에게는 오늘 처음 만난 남자에게 느끼는 미안함보다 본인이 느끼는 피로감이 더 컸다. 란델은 누가 뭐라고 해도 엘바레스 왕국의 일등 신랑감이었다. 실비아가 사고사에 성공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란델은 적어도 그녀보다는 훨씬 오래 살 것이다. 북부의 주인, 왕국의 방패라는 명예로운 칭호. 공작이라는 지위. 거기에 더없이 훌륭한 용모와 인품까지. 저 완벽한 남자에게 부인과 사별했다는 것쯤이야 흠조차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되도록 빠르게 마지막 생을 끝내겠다는 그녀의 의지는 여전히 변함없었다. 실비아가 백작 부부와 인사를 나눈 후 마차에 오르고, 란델은 수도까지 동행했던 수하들과 함께 말에 올랐다. 정문 너머의 허공에는 거대한 마법진이 너울거리고 있었다. 란델이 말고삐를 쥐며 목소리를 높였다.
“전원, 출발한다!”
그의 목소리를 기점으로 말들이 땅을 박찼다. 밝게 빛나는 마법진을 통과하는 순간, 온몸이 허공으로 훅 끌려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듯한 느낌에 실비아는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눈 깜짝할 새에 시야와 공기가 뒤바뀌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