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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좋아해요 (5/118)

5. 좋아해요2021.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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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딜 가? 란델과 실비아는 의아함에 나란히 눈을 깜박였다. 그러자 기사들은 저들끼리 시선을 주고받더니 결연한 얼굴로 그들을 의무실 밖으로 밀어냈다.

16558804848975.jpg“여기는 저희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요, 얼른 돌아가 쉬십시오.”

16558804848975.jpg“맞아요. 오늘은 두 분의 결혼식 날이라고요.”

16558804848975.jpg“델마 하녀장님 성격 몰라요? 지금 신성한 결혼식 날에 기사 나부랭이 때문에 30분이나 낭비하신 거냐고 곡소리를 내실 분이잖아요.”

16558804848988.jpg“어서 가세요!”

제프리마저 거들었다. 란델과 실비아는 어어, 하다가 의무실 밖으로 쫓겨나듯 나왔다. 문밖에 선 그들은 나란히 눈을 깜박였다가, 서로를 한 번 쳐다봤다가, 다시 앞을 봤다. 의무실 밖에는 사용인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아까 제프리의 부상 탓에 절차대로 주인 부부를 맞이하지 못한 한을 풀겠다는 듯, 그들은 구레나룻 하나까지 각이 맞춰져 있는 상태였다. 사용인들의 가장 앞에 서 있던 집사와 하녀장이 깍듯이 허리를 굽혔다.

16558804848975.jpg“처음 뵙겠습니다, 마님. 집사인 윌콧이라고 합니다.”

16558804848975.jpg“처음 뵙겠습니다. 하녀장인 델마라고 합니다, 마님.”

윌콧과 델마는 예법에 완벽하게 맞춘 인사를 올리고는 허리를 폈다.

16558804849001.jpg“잘 부탁드립니다, 마님!”

16558804849001.jpg“환영합니다, 마님!”

이어서 줄지어 늘어서 있던 사용인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우렁찬 목소리로 실비아를 향해 인사했다.

16558804849001.jpg‘해냈다!’

16558804849001.jpg‘해냈어!’

그들의 얼굴에는 주인이 던진 공을 물어와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 같은 뿌듯함이 그득 떠올라 있었다. 그 앞에 선 란델은 부끄러움에 잠시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1655880487756.jpg‘다 좋은데 의무실 앞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이지.’

굳이 의무실 앞에서 이래야 했을까? 자신이 실비아와 함께 홀로 갈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던 걸까……? 어쩐지 벨포르 공작성에는 순박함과 참을성을 조금씩 맞바꾼 사람들밖에 없는 것 같았다. 다행히 실비아는 그간 온갖 일들을 다 보고 살아왔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고 웃었다.

16558804877569.jpg“실비아 플로레트 벨포르네. 앞으로 잘 부탁해.”

윌콧과 델마는 아주 오만하지도, 그렇다고 자신을 낮추지도 않은, 모범적인 주인의 태도를 보이는 실비아에 감명받은 눈을 했다. 하지만 이내 감동의 기색을 지워낸 그들이 정색하며 각각 란델과 실비아의 앞에 섰다.

16558804848975.jpg“본래 계획된 것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서두르시죠.”

16558804848975.jpg“가시죠.”

란델과 실비아는 무어라 인사를 나눌 틈도 없이 그들의 손에 이끌려 제각기 다른 방으로 찢어졌다. 하녀장 델마는 제프리의 예상대로 ‘하이고 저런 기사 나부랭이 때문에 이 귀한 결혼식 날을’이라는 한탄을 줄줄 늘어놓다가 방문을 열어주었다.

16558804848975.jpg“이곳이 앞으로 마님께서 지내게 되실 곳입니다. 선대 공작 부인께서도 이 방을 쓰셨답니다.”

실비아는 델마의 설명을 들으며 찬찬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선대 공작 부인의 취향인 듯, 방 안은 전체적으로 환하고 따스한 분위기였다. 이런 방에서 죽음을 맞으면 퍽 비극적으로 보이겠다고 생각하던 실비아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붙박였다. 눈치가 빠른 델마가 조용히 말했다.

16558804848975.jpg“선대 공작 부부와 현 공작님의 초상화입니다. 이제는 주인님과 마님의 초상화를 새로 그려 걸어야겠지요.”

섬세히 붓질 되어 있는 초상화에는 온화한 인상의 선대 공작 부부, 수줍게 웃고 있는 어린 란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델마는 실비아가 란델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긴 줄 알고 ‘우리 주인님이 좀 귀여우셨지’하고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실제로 어린 시절의 란델은 커다란 맹수 같은 지금과 달리,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하지만 실비아의 시선은 내내 선대 공작 부부의 얼굴에 붙박여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뜻밖이라는 표정이 떠올랐다.

16558804877569.jpg‘이 사람들이 공작 부부라고?’

남들에겐 말할 수 없겠지만, 실비아는 선대 공작 부부와 실낱같은 인연이 있었다. 더 정확히는 직전 생에서의 그녀지만.

16558804848975.jpg-거기, 괜찮으신가?

  ‘실비아 플로레트’로 태어나기 바로 전의 생에서, 실비아는 이리저리 떠도는 도망자 신세였다.

16558804848975.jpg-괴, 괴물이다!

  반복되는 환생에 지친 나머지, 그녀는 안 될 것을 알면서도 매 생에서 끊임없이 자살을 시도했다.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우연히 들킨 것이 문제였다. 분명 목숨이 끊어졌어야 할 실비아가 다시 살아난 것을 본 사람들은 그녀를 괴물이라 칭하며 잡아 죽이려 했다. 처음에는 혹시 싶어 잡혀 죽어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또다시 되살아났다. 원래 운명대로라면 실비아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운명에 맞지 않는 죽음이라면 죽어도 되살아난다지만 죽을 때의 고통마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실비아는 그 사람들에게 반복해 죽임당할 고통을 견딜 수 없었고, 그곳을 탈출해 북부까지 쫓겨왔다. 그때 외진 숲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마물들에 둘러싸여 있던 한 부부를 도와준 적이 있었다.

16558804848975.jpg-기, 기다리시오! 이름을 말해주면!

16558804848975.jpg-괜히 다른 사람들에게 날 봤다는 말이나 하지 마시오.

16558804848975.jpg-잠시만……!

  비록 수적 열세였다지만, 검을 쓰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던 남녀. 차림새는 허름했으나 얼굴만은 분명히 기억했다. 실비아는 혹시 몰라 델마에게 물었다.

16558804877569.jpg“혹 선대 공작 부부께서 바깥나들이를 즐기셨나?”

16558804848975.jpg“어머, 어떻게 아셨대요? 사람이 매일 피가 튀는 곳에서 지내면 정서에 좋지 않다며, 종종 근교로 나들이를 나가곤 하셨지요. 호위도 따돌리고 다니셔서 늘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요.”

델마가 혀를 끌끌 찼다. 이로써 자신이 전생에서 도와준 부부가 란델의 부모였음을 확신하게 된 실비아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죽으려는 자신. 이제는 자신의 남편이 된 란델 벨포르. 신의 장난이라면 고약하고, 우연이라면 이만한 기연이 없었다. 실비아는 오래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욕실로 향했다. 난생처음 혹사당한 몸을 따뜻한 물에 담그자 알게 모르게 긴장되어 있던 어깨며 허리 같은 곳이 사르르 풀어졌다. 델마를 비롯한 하녀 몇은 향유를 묻힌 손으로 뭉친 근육을 풀어주며 그녀를 칭찬하기 바빴다.

16558804848975.jpg“너무 아름다우세요, 마님…….”

16558804848975.jpg“진심으로요. 사실 처음 뵀을 때 서큐버스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린 편인 하녀들은 볼을 붉게 물들인 채 몽롱하게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칭찬은 빈말이 아니었다. 북부의 사람들이니만큼, 그들은 서큐버스를 비롯해 인간을 매혹한다는 마족을 꽤 자주 접한 이들이었다. 하지만 실비아의 외모는 서큐버스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길게 늘어진 흰빛의 은발. 맑고 투명한 금안. 새하얀 피부와 그린 듯한 이목구비. 솔직히 실비아는 처음 만났을 때 넋을 놓는 게 당연할 정도의 미인이었다. 게다가 북부는 생존이 중요시되는 곳이니만큼, 남녀 모두 풍채가 좋은 편이었다. 그런 곳에서 실비아의 몸은 특히나 가녀려 보였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민들레 홀씨 같았다. 가녀린 체구와 꿈결 같은 외모. 그것들에 실비아 본인의 무던한 성격이 합쳐져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실비아는 농담하듯 설핏 웃으며 하녀들에게 말했다.

16558804877569.jpg“너희 줄까?”

16558804848975.jpg“어머, 마님. 농담도요!”

16558804848975.jpg“하루라도 그런 얼굴로 살아봤으면 소원이 없긴 하겠네요.”

하녀들은 재미있는 농담을 들은 양 꺄르르 웃고는 다시 일에 집중했다. 실비아는 눈을 도르륵 굴렸다.

16558804877569.jpg‘진담이었는데.’

그녀도 본인이 눈에 띄게 아름답다는 사실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 관심이 없었을 뿐이지. 어차피 죽을 거, 저보다는 오래 살 사람이 쓰는 게 이롭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던진 농담이었는데.

16558804877569.jpg‘아. 아니다.’

생각해보니 짧게나마 부부로 지낼 란델에게는 잘된 일인 것 같았다. 실비아는 란델을 위해서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 외모를 조금 더 열심히 가꾸기로 마음먹었다.

16558804877569.jpg‘그런데 잠자리에서 변태인 건…… 아니겠지.’

돌연 떠오른 가능성에 실비아가 심각한 얼굴을 했다. 그녀가 수많은 생을 살아오며 본 사람 중에는, 대외적으로는 완벽하지만 정작 잠자리에서 변태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실비아 자신이 보았던 란델의 말과 행동, 사용인들의 평판을 보면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16558804877569.jpg‘음, 여차하면 때려눕히고…… 그다음부터는 잠자리하지 않으면 되니까. 변태인 남편과 사이좋게 지내면 그게 더 이상해 보이겠지?’

앗, 그렇게 되면 귀찮은 일을 덜 수 있을지도? 실비아는 내심 란델이 변태여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가 알았다면 통곡했을 일이었다. 이윽고 델마와 하녀들은 실비아의 몸에서 물기를 닦아내고 검은 실크 가운을 입혀 주었다. ‘우리 주인님이 목석처럼 굴어도 이해해주시라, 마님을 제외하고 여자라고는 만나 보질 않으신 분이라 그렇다’라는 델마의 염려를 듣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부부침실 앞이었다.

16558804849001.jpg“그럼 저흰 이만…….”

델마와 하녀들은 그녀를 부부침실 앞에 두고 뒷걸음질로 사라졌다. 실비아는 졸음으로 인해 무거워진 눈꺼풀을 한 번 깜빡였다. 솜씨 좋은 사용인들의 마사지에 온몸이 녹진녹진했다. 이대로 쓰러져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고지가 코앞이었다.

16558804877569.jpg‘한 시간 내로 해치우고 잔다.’

이번 생에서 처음으로 실비아의 눈에 아주 미약하나마 ‘의욕’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플로레트 백작 부부가 알았다면 눈물을 머금고 쓰러졌을 광경이었다. 실비아는 별다른 망설임 없이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희미한 촛불만이 밝혀져 어두웠다. 중앙에 커다란 침대 하나, 그리고 한쪽에 작은 소파가 놓여 있었다.

16558804877569.jpg“란델?”

실비아는 소파의 한쪽 구석에서 꾸물대는 그림자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 부름에 커다란 그림자가 움찔 떨렸다.

1655880487756.jpg“……실비아.”

란델은 실비아가 입고 있는 것과 같은 검은색 실크 가운을 입고 있었다. 은은한 촛불에 벌어진 가운 틈으로 탄탄한 몸이 언뜻 비쳤다.

16558804877569.jpg‘몸 좋네.’

예복을 갖춰 입었을 때도 참 좋은 몸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렇게 얇은 가운 한 장만 걸치고 있자니 그 윤곽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실비아는 가운 사이로 보이는 란델의 몸을 저도 모르게 빤히 바라보았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 시선을 느낀 란델은 달아오른 얼굴로 허둥지둥 가운을 단단히 여몄다. 그리고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1655880487756.jpg“부인.”

16558804877569.jpg“네.”

1655880487756.jpg“그…… 잠시 할 이야기가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16558804877569.jpg“좋아요. 앉아서 이야기하는 게 어떨까요?”

실비아는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침대에 걸터앉아 옆자리를 손짓했다. 잠시 망설이는 듯했던 란델은 이윽고 실비아의 옆에 거리를 두고 앉았다. 그가 작게 심호흡을 했다.

1655880487756.jpg‘오늘 그런 일도 겪었는데, 쉬게 해 주는 게 맞겠지.’

원래라면 오늘 밤 초야를 치러야 하지만, 그는 낮에 벨포르 공작령에 입성하자마자 마물의 습격을 당한 실비아가 걱정되었다. 게다가 아무리 황제의 명에 따라 한 결혼이라고 해도, 란델은 작고한 부모님처럼 그와 그녀가 서로를 진심으로 원할 때 초야를 치르고 싶었다. 영주로서 영지를 지키기 위해 소망은 포기했다지만, 그것만은 란델이 아직 버리지 못한 신념이었다. 게다가 아직 의심을 다 거두지도 못했는데 그런…… 일을 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그는 입 안으로 몇 번 말을 고르다가 어렵사리 입술을 열었다.

1655880487756.jpg“실비아.”

16558804877569.jpg“네, 말씀하세요.”

1655880487756.jpg“나는…… 아니, 잠깐.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란델은 말을 하다가 말고 가운이 어깨를 타고 스르륵 흘러내리는 느낌에 기겁하며 옷깃을 붙들었다. 능숙한 손길로 란델의 가운 끈을 풀어 내리던 실비아는 무구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16558804877569.jpg“말씀하세요. 저는 벗겨드리고 있을게요.”

1655880487756.jpg“아니, 그, 뭘 벗기겠다는 겁니까?”

16558804877569.jpg“……? 옷이죠?”

1655880487756.jpg“그러니까 옷을 왜!”

16558804877569.jpg“부부의 의무니까요?”

태연히 이어지는 대답에 란델은 이마를 짚고 앓는 소리를 흘렸다. 그는 그 와중에도 착실히 가운 속으로 파고들려는 실비아의 손을 피해 침대 헤드 쪽으로 주춤주춤 물러나며 말했다.

1655880487756.jpg“실비아, 잠시만 기다려봐요. 나는 당신이 의무라는 말에 짓눌려 이런…… 이런 일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16558804877569.jpg“짓눌리진 않았어요. 마땅한 제 할 일이라고 생각할 뿐이죠.”

1655880487756.jpg“그러니까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당신은 저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16558804877569.jpg“좋아해요.”

그에 반박을 늘어놓던 란델은 찰나 숨을 멈췄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을 틈타 제 위로 올라타는 실비아에 기겁하며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1655880487756.jpg“실비아!”

16558804877569.jpg“시간이 늦었어요. 이 이상 체력을 낭비하면 저는 쓰러져 잠들지도 몰라요. 어머, 마침 음악도 나오네요.”

1655880487756.jpg“아니, 이게 무슨…… 윌콧!”

란델은 설상가상으로 방 밖에서 은은하게 흘러드는 오케스트라 소리에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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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쩐지 ‘시간이 늦었다’라며 환복을 서두른다 싶더니, 이걸 위해서였나. 지금쯤 저 멀리에서 코밑을 문지르며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을 델마와 윌콧의 얼굴이 눈앞에 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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