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유독 긴 밤2021.04.19.
솜씨 좋은 악사들이 연주하는 선율은 아름다웠다. 듣는 것만으로도 피로와 긴장을 풀어줄 법한 음악이 방 안 가득 울려 퍼졌다. 델마와 윌콧의 의도도 본래는 그것이었을 것이다. 국왕의 명에 의해 결혼하게 된 자신을 걱정하면서도, 진심으로 축하해주었으니까. 란델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란델은 제 위를 차지한 낭창한 몸 때문에 조금 울고 싶었다. 동시에 플로레트 백작 부부에 대한 원망도 약간 자라났다. 대체 딸을 어떻게 키우면 이런…… 이렇게 되지? 욕이 아니라 순수한 의문이었다.
“실비아, 이러다가 당신이 다칩니다.”
란델은 실비아의 손을 너무 세게 그러쥐지 않으려 애쓰며 설득하는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태도는 완강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멍해 보이던 사람이 왜 갑자기 저렇듯 선명한 눈을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럼 손을 놓아주시면 되죠.”
“……우선 내려가십시오. 지금 이 자세는 좀.”
“아, 제가 위에 있는 게 부끄러우신 거면 위치를 바꿀까요?”
“제발…….”
끝내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한 란델의 목덜미와 귀 끝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것이 수치스러운 듯 그가 비스듬히 시선을 피하자 잔뜩 굳어 있는 턱이 눈에 들어왔다. 어지간히 긴장했는지 목 근육이 바짝 두드러져 있었다.
‘어머.’
그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보던 실비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곧 이어서 심각한 얼굴을 했다. 나 방금 좀 진심으로 혹한 것 같은데? 이게 미인계인가? 심지어 무자각?
‘일단은 너무 당황한 것 같으니까 떨어질까.’
바른 사람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런 면에서까지 지나치게 건실한 신념을 가진 사람일 줄은 미처 몰랐다. 예상 밖의 일이었고, 그녀에게는 썩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래도 마음이 없다면 초야를 치를 수 없다는 이 남자를 설득하는 게 쉽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실비아는 혹한 자신도, 금방이라도 졸도할 것처럼 보이는 란델도 진정시킬 겸 그에게 붙잡힌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알았어요. 아무 짓도 안 할게요. 일단 손을 놔줘야…….”
실비아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태연히 내뱉다가 돌연 멈칫했다. 경계심을 잔뜩 세우고 있던 란델은 갑작스럽게 말이 끊기자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가 무어라 말하려던 순간, 그녀가 눈을 몇 번 깜박인다 싶더니 그대로 란델의 몸 위에 털썩 엎어졌다.
“실비아!”
화들짝 놀란 란델은 섣불리 몸도 일으키지 못하고 급하게 실비아를 살폈다.
‘젠장, 여기 와서 뭔갈 먹은 적은 없으니 아까 마물과 마주쳤을 때의 후유증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
란델의 얼굴이 조금 전과는 다르게 사납게 일그러졌다. 실비아는 지금껏 플로레트 저택과 왕궁을 제외한 다른 곳에 들린 적이 없다. 그러니 마물도, 란델과 기사들이 마물을 학살하는 장면도 오늘 처음 보았을 터. 잘 훈련받은 건장한 기사조차 한바탕 전투를 치르고 나면 심심찮게 구역질을 한다. 하물며 실비아는 그간 험한 꼴이라고는 본 적 없던 귀족 영애가 아닌가. 분명 아까의 광경이 충격적이었을 텐데, 제프리가 부상을 입었고, 그녀 본인이 너무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기에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안일했다. 자책으로 이를 악문 그가 결국 목소리를 높여 사용인들을 부르려던 차였다. 벌어진 가운 사이, 고스란히 드러난 가슴팍에 자그마한 숨결이 나비처럼 내려앉았다.
“……!”
그 간질거리는 감각에 란델은 흠칫 굳어졌다. 저도 모르는 새에 상체가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실비아?”
란델은 속삭이듯 목소리를 내며 붙잡고 있던 손을 떼어냈다. 상체를 조금 들어 올려 실비아를 살피자 그녀는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호흡은 고르고 규칙적이었다.
“하…….”
그제야 실비아가 단지 피로함에 졸도하듯 잠들었다는 걸 깨달은 란델은 탄식했다. 긴장이 턱 풀렸다. 굳었던 몸이 풀어지며 상체가 침대 위로 털썩 안착했다. 그는 제 눈을 가리듯 오른팔을 얼굴에 얹고 헛웃음을 지었다. 이상하게 허탈한 기분이었다.
“진짜로 쓰러져 잠든 거였나.”
역시 실비아의 체력은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형편없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의욕적이던 사람이 저렇게 바람 빠진 자루처럼 픽 쓰러지는데 오죽할까. 당장 내일 아침 식사부터 제대로 먹여야겠다고 다짐한 란델이 슬그머니 몸을 움직였다. 당황이 한결 가시고 나니 자세가 심히 의식되었다. 두 사람은 초야를 위해 검은색 실크 가운만을 입고 있는 상태였고, 가운은 옷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얇았다. 지금처럼 몸의 굴곡이 하나하나 느껴질 만큼 밀착하기에는 좋은 옷차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어차피 실비아도 이대로 엎드려 자기에는 불편할 것이다. 란델은 자꾸만 자기주장을 하려 드는 신체 부위를 애써 무시하며 그녀를 옆자리에 누이려 했다. 하지만 실비아는 제 몸이 란델에게서 떨어지려는 순간 그의 가운 자락을 움켜쥐었다.
‘……깼나?’
란델은 숨마저 멈추고 긴장했다. 마족을 마주할 때도 지금처럼 긴장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으음, 하고 작게 신음한 실비아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실비아의 호흡이 고르게 변한 것을 확인한 란델이 안도의 숨을 삼켰다. 전보다 더 신중한 눈을 한 그가 재차 그녀의 몸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실비아는 미간을 찡그리며 란델의 가운 자락을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조금씩 움직이던 그녀의 얼굴이 종내에는 그의 가슴팍 한가운데에 자리 잡게 됐다.
‘……잠은 다 잤군.’
결국 란델은 모든 걸 내려놓았다. 보면 볼수록 이런 사람이 왕의 첩자일 리는 없지 않은가, 싶었지만 실비아가 그의 품에 뺨을 비빌 때는 고단수의 첩자가 아닐까 싶었다. 그는 실비아의 숨결이 닿을 때마다 움찔 몸을 굳혔다가, 또 어쩔 때는 신을 찾았다가 하며 밤을 꼬박 지새웠다. 오늘따라 밤은 유난히 길고 고단했다. * * *
“으음.”
실비아는 눈꺼풀 위로 따갑게 쏟아지는 빛에 미간을 찌푸렸다.
‘커튼이 걷힌 건가…….’
플로레트 백작저에 있는 그녀의 방은 늘 어둑한 편이었다. 방의 주인이 침대를 벗어나는 일이 드물고, 하루를 대개 잠으로 보내니 기실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가끔 실비아의 건강을 걱정한 백작 부인이 아침 일찍 방에 찾아와 커튼을 걷는 경우가 있었다. 주기적으로 화초에 햇빛을 쐬어 주는 것과 같은 행동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잠을 깨우는 햇빛에 괴로워하면서도 나름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침대가 이렇게 따뜻, 아니, 딱딱한 건 익숙하지 않은데? 거기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실비아가 눈을 반짝 떴다. 낯선 창문, 그 너머로 더 낯선 후원의 풍경이 보였다. 이어서 머릿속으로 잠들기 직전의 기억이 밀려들었다.
-제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붉게 달아오른 란델의 목덜미였다.
‘……확실히 인상적인 광경이긴 했지.’
자신이 초야를 치르려다가 체력 부족으로 기절했음을 곧장 눈치챈 실비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손을 올려 침대를 짚던 그녀는 움찔하고 말았다. 그녀가 짚은 것은 침대가 아니라 란델의 몸이었다.
“일어났습니까.”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놀란 실비아가 고개를 돌리자 어쩐지 하룻밤 사이에 초췌해진 듯한 란델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가 잠시 말을 잃은 사이,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디 불편한 곳은?”
“네?”
“갑자기 쓰러지길래 몸이 안 좋은 건지 걱정했습니다. 달리 불편한 곳이 없다면 우선 옆으로 옮겨 오십시오.”
실비아는 그 말에 눈을 굴려 자신이 올라타 있는 란델의 몸을 한 번, 앞섶이 거의 다 풀어헤쳐져 있는 그의 가운을 한 번 쳐다보았다. 자못 진지한 얼굴로 고민에 잠겼던 그녀가 물었다.
“우리…….”
“…….”
“했나요?”
“나는 잠든 사람에게 손을 대는 무뢰한이 아닙니다!”
란델은 펄쩍 뛰려다가 실비아가 아직 제 몸 위에 있음을 자각하고 얼굴만 일그러트렸다. 실비아는 생각보다 격한 부정에 조금 당황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제가 손을 댔을까 봐 그런 건데요.”
그녀의 정신은 여러 번의 삶으로 단련되어 있었으므로 무의식중에라도 목표를 이루려 했을 가능성이 컸다. 혹시 자신이 이 바른, 솔직히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바른 신념을 가진 청년을 덮친 건 아닐까? 실비아의 입장에서는 썩 합리적이고 타당한 의심이었다.
“…….”
그러니까, 실비아의 입장에서만 타당했다.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하던 란델은 아예 양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이 여자 진짜 뭐지. * * * 우여곡절 끝에 몸을 뗀 두 사람은 각자의 방에서 매무새를 정리한 후 식당에서 다시 만났다. 두 사람의 시중을 드는 윌콧과 델마의 표정은 퍽 대조되었다. 란델에게 간밤에 무슨 짓을 한 거냐며 한 소리 들은 윌콧은 슬퍼했고, 음악이 참 좋더라며 곡명까지 물어보던 실비아의 환복을 도운 델마는 싱글벙글했다.
“식사를 올리겠습니다.”
윌콧이 간밤의 실수를 만회하겠다는 듯 비장하게 허리를 굽혔다. 란델은 잠잠히 고개를 끄덕이며 실비아의 의자를 빼주고, 그녀가 앉은 후에 맞은편으로 가서 앉았다. 란델은 실비아와 떨어져 매무새를 다듬는 사이 당황스러움과 심란함을 많이 수습한 상태였다. 알게 모르게 풀어졌던 그의 연녹색 눈은 다시 서늘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야말로 영주의 눈이었다. 한편, 가볍게 감사를 표하며 자리에 앉은 실비아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작게 하품을 했다. 아직 어제의 피로가 다 가시지 않은 것인지 몸이 전체적으로 무거웠다.
‘체하지는 않겠지.’
눈을 몇 번 깜박인 실비아는 조금 멍한 기분으로 사용인들이 음식을 나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플로레트 저택에서, 실비아는 대개 하루에 한 끼를 챙길까 말까 했다. 그 한 끼도 보통 침대 위에서 때웠다. 해서 이렇게 식당까지 내려와, 정시에 맞추어 아침을 먹는 것은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조금 걱정되긴 했으나, 실비아는 본인의 몸 상태에 대한 미묘한 확신이 있었다. 그러니까,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익힌 감각으로 제 몸 상태가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자신의 몸은 아직 가벼운 아침 식사를 소화시키지 못할 만큼 나빠지진 않았다. 신의 눈을 의식해 적당히,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만 몸을 혹사해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 그러니 분명 가벼운 아침 식사 정도는…….
“……?”
이상함을 감지한 것은 그때였다. 실비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사용인들의 행렬이 어쩐지 끊이질 않는 것 같았다. 그녀의 미간이 서서히 좁아지더니, 마침내 모든 음식이 테이블 위에 올랐을 때는 작은 골을 형성했다. 실비아는 드물게 미간을 구긴 채로, 작은 나이프를 들어 눈앞에 놓인 음식을 쿡 찔러 보았다. 고기였다. 그것도 원형을 유지한 채 통째로 구워낸 돼지고기.
“란델.”
“말씀하십시오.”
“이게 다…… 뭐죠?”
실비아의 앞에 놓인 것을 비롯해, 식탁에는 아침에 먹기에는 꽤 과한 음식들이 줄줄이 올라와 있었다. 중간에 달팽이처럼 생긴 음식도 본 듯했다. 잘못 본 것이길 바라며 지긋이 노려보았으나 그건 분명 달팽이였다. 그것도 무척 큰. 하지만 란델은 덤덤히 실비아의 앞에 놓인 고기를 가져가 썰어주며 말했다.
“어제 종일 피로했을 테니, 몸에 좋은 것들로 올리라 일렀습니다. 드십시오.”
우리가 뭘…… 했나요? 안 한 것 같은데? 뭔가 시작하기도 전에 내가 잠들었던 것 같은데? 물론 피곤하긴 하지만, 정작 힘쓸 일은 하지도 않았는데 보양식이 웬 말이죠? 황당해하던 실비아는 말이 나온 김에 그를 한 번 더 설득해보기로 했다. 손짓으로 사용인들을 물린 그녀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란델.”
“예, 부인.”
“어젯밤에 못 치른 초야는 언제 치를까요?”
란델은 이 대화가 간밤의 연장선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작게 한숨을 삼킨 그가 담담히 확언했다.
“실비아. 말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당신이 의무에 짓눌려 마음에도 없는 나와 그런 일을 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초야도 못 치른 공작 부인이라는 말에 시달리겠죠.”
“북부에 그런 것으로 입을 놀릴 만큼 인품이 덜된 사람은 없습니다. 장담할 수 있습니다.”
란델은 단호히 말했다. 하지만 그 단호함은 실비아에게 조금 우습게 느껴졌다.
‘바르지만, 확실히 아직 어리네.’
그녀는 물잔을 기울여 입가를 가리고는 입술을 길게 늘였다. 조소였다. 오로지 인간의 번영을 위해 헌신했던 ‘알리사’조차 저버린 것이 인간이다. 그런 와중에 ‘정상적인’ 부부라면 당연히 치렀어야 할 초야조차 치르지 못한 자신을, 아무도 헐뜯지 않을 거라고? 좋게 말하면 순진했고, 나쁘게 말하면 어리석었다. 하지만 실비아는 그런 속내를 꾹 내리눌렀다. 어쨌거나 란델은 그녀의 남편이고, 그녀는 신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라도 그와 잘 지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란델의 의지가 저렇게 확고한 상태에서 초야 이야기를 계속 디밀어봤자 경계심만 높일 뿐이었다. 거기에 이런 식으로 실랑이를 반복하다 보면 사이가 안 좋아 보일 위험도 있었고. 그러니 시작은 작은 것부터.
“그렇다면 거래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