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이게 신혼인가?2021.04.22.
“그렇다면 거래할까요?”
실비아는 무해함을 내보이듯 일부러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란델은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약간의 경계심이 섞인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거래 말입니까?”
“네. 당신이 마음에 없는 사람과는 초야를 치르지 못하겠다고 하니…….”
그녀는 빙긋이 웃었다. 태연자약한 웃음이었다.
“좋아하도록 노력해야죠. 당신도 저도.”
“큽.”
란델은 놀란 나머지 조금 콜록거렸다. 그가 가까스로 숨을 가다듬자 실비아가 이어서 말했다.
“우선은 닿는 데 익숙해져야겠죠? 제가 원할 때 손을 잡을 수 있는 조건으로, 그때마다 당신이 원하는 한 가지를 들어줄게요. 굳이 닿는 게 아니어도 괜찮아요.”
실비아는 그리 말하며 수프를 한 숟가락 떠먹었다. 이어서는 샐러드에 섞인 과일만 포크로 골라내 먹었다. 란델은 조금 묘한 기분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렇게까지 매몰찬 사람으로 보였나.’
란델은 아무리 정략결혼이라지만 부인이 손을 잡고 싶다는 데 거절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것은 남편의 도리가 아니니까. 하지만 굳이 오해를 정정할 필요는 없었다. 란델은 실비아가 왕과 관계가 있는지 티 나지 않게 살펴야 했고, 그녀가 때마침 제시한 거래는 적절한 구실이었다.
‘양심에는 조금 찔리지만.’
란델은 그저 한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영주’였으니 이 역시 감내해야 했다. 그리고 연애결혼에는 실패했다지만, 부부 사이가 좋아져서 나쁠 건 없었다. 어쨌거나 실비아는 이제 그의 부인이었고, 그가 책임을 다해야 할 사람이었으니까. 이윽고 생각을 정리한 그는 신중히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받아들이죠.”
“정말요?”
“예.”
실비아는 그 말에 조금 놀라 눈을 깜박였다. 그녀는 란델이 초야를 격하게 거부했던 것처럼, 이 거래를 받아들이게 하는 데도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일이 잘 풀릴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상쾌한 기분으로 물었다.
“생각보다는 빠른 결정이네요. 뭐 원하는 거라도 있어요?”
말해놓고 보니 그럴듯했다. 혹시 나한테 바라는 게 있었나? 그때 란델이 식탁 위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테이블 가운데 놓여 있던 보양식 접시를 들더니 실비아의 앞에 내려놓았다.
“…….”
설마. 실비아는 정말이지 드물게도 떨리는 눈으로 란델을 바라보았다. 설마, 아니지? 당신이 이렇게 잔인한 사람일 리 없어. 분명 건실한 청년이었……잖아? 하지만 그는 그 기대를 짓밟듯,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조금 짓궂게 웃었다.
“다 드십시오. 그게 제 첫 조건입니다.”
거래고 뭐고 그냥 엎을까? 실비아는 그 순간 다시없이 진지하게 고민했다.
* * *
“크흡.”
“그만 웃죠?”
“아, 미안합니다.”
“…….”
“큽.”
실비아는 결국 걸음을 멈추고 란델을 한껏 노려보았다. 그가 뒤늦게 표정을 수습하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발을 뗐다. 그들은 현재 손을 잡은 채 정원을 산책하는 중이었다. 본래의 실비아라면 몸을 움직인다는 점에서 대번에 질색했을 테지만, 보양식과 한바탕 사투를 벌인 그녀는 찬 공기를 쐴 필요를 느꼈다. 하여 거래의 대가를 받아낼 겸 란델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온 것인데. 정작 그는 잡힌 손 말고 다른 데 정신이 팔린 것 같았다.
‘미치겠군.’
란델은 실비아가 식당에서 오만상을 찌푸리던 것이 떠올라 또 한 번 위기를 맞았다. 그렇게 세상 풍파를 모두 겪은 듯 초연하고 흔들림 없던 사람이 보양식 앞에서 무너질 줄이야. 턱에 주름이 잡히도록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보양식을 찔끔찔끔 집어 먹던 모습에 자꾸 웃음이 나려 했다. 하지만 그가 이번에도 웃었다간 그의 부인이 거래 자체를 없던 일로 하자고 말할 것 같아 꾹 참았다. 란델은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실비아의 모습을 떨치려 화제를 돌렸다.
“아마 이르면 사흘 후부터 가신들이 도착할 겁니다.”
실비아와 란델의 결혼식은 왕의 주관하에 굉장히 빠르게 치러진 편이었다. 본래라면 벨포르 공작가의 모든 가신이 왕성에서 열린 결혼식에 참석해야 했지만, 북부와 수도 사이의 거리는 상당히 멀었다. 게다가 수도와 북부로 이어지는 유일한 길에는 마물의 출몰이 잦아 굉장히 위험했다. 란델과 기사들처럼 이동 마법진을 통해 움직이는 방법도 있긴 했다. 하지만 마법사는 대륙 전체를 통틀어 손에 꼽을 정도로 귀했고, 이동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를 구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오스턴이 이동시킬 수 있는 인원에도 한계가 있었기에, 란델은 부득이하게 기사들과 일부 식솔만을 데리고 결혼식을 치렀다. 하지만 이 혼사는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무려 벨포르령의 새로운 안주인을 맞이하는 결혼. 공작 부인이 된 실비아가 가신들과 정식으로 인사조차 나누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실비아 또한 어느 정도는 예상했기에 새삼스레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사흘 후라는 부분이 조금 의외였다.
“생각보다는 빠르네요.”
“……다들 성격이 급해서 그렇습니다. 첫날에도 보았잖습니까.”
란델은 에둘러 설명했다. 하지만 실상은, 왕이 막무가내로 란델의 곁에 붙여놓은 여자가 누구인지 어디 보자며 눈에 불을 켜고 달려오는 것이었다. 이걸 충심이 깊다고 해야 할지, 오지랖이 넓다고 해야 할지. 사실 후자에 가까웠다. 속으로 혀를 쯧 찬 그가 말을 이었다.
“규모가 큰 연회는 아니니, 그리 고생할 일은 없을 겁니다. 델마가 옆에 붙어 도울 거고, 필요한 게 있다면 윌콧에게 말씀하십시오. 구해 줄 겁니다.”
“최선을 다할게요.”
연회의 준비와 주최는 안주인의 일이다. 사실 실비아야 이전 생들에서 겪은 이러저러한 일들로 연회 준비쯤이야 손쉽게 할 수 있었지만, 현재의 실비아는 연회 주최 경험이라고는 한 번도 없는 귀족 영애였다. 그런 그녀가 능숙히 연회를 준비한다면 외려 이상하게 비치리라. 그리고 어찌 보면 더 중요한 이유.
‘귀찮아.’
실비아는 솔직히 란델을 이렇게 신경 쓰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았다. 물론 란델은 좋은 사람의 축에 속했지만, 그렇다고 그게 편하다는 것과 같은 뜻은 아니었다. 신이 내린 벌에 따라 남들보다 고단한 생을 여러 차례 겪은 나머지, 그녀는 혼자인 것이 차라리 편해졌다. 누군가를 헤아리고, 그 기분을 살피고, 마음을 쓰고 하는 건 지금의 그녀에겐 너무 힘든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번 생에 들어 나태함에까지 길들어진 몸과 정신은 관성처럼 침대를 찾았다. 안 그래도 북부는 플로레트 영지보다 추워서 빨리 피곤해지는데, 연회 준비에까지 손을 대면 과로로 쓰러질 것이 뻔했다. 어차피 델마와 윌콧 같은 숙련된 사용인들이 있으니 적당히 감독하는 척만 하면 되겠지. 그녀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태연히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지 않은가. 최소한의 관여는 할 생각이었으니까. 그사이 두 사람은 정원을 한 바퀴 돌아 저택의 정문 앞으로 돌아왔다. 란델은 실비아를 계단 앞까지 데려다주고 손을 놓아주었다. 내내 맞닿아 있던 손이 떨어지자 묘하게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괜스레 손을 쥐락펴락하다가 짓궂게 물었다.
“다음 거래는 언제입니까?”
“……일단 오늘은 아니에요.”
실비아는 란델의 말에 다시금 보양식의 맛을 떠올린 듯 몸을 부르르 떨며 인상을 썼다. 그에 가볍게 웃음을 터트린 란델이 실비아의 숄을 단단히 여며주고는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럼 저녁에 뵙겠습니다, 부인.”
“다녀와요, 여보.”
갑작스레 들려온 호칭에 란델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것으로 보양식에 대한 소소한 복수를 마친 실비아는 샐쭉 웃고는 몸을 돌려 계단을 올랐다.
“…….”
란델은 잠시 계단 아래에 서 있었다. 손을 들어 붉어진 목덜미를 몇 번 쓸던 그는 곧 머쓱한 얼굴로 몸을 돌려 저택을 나섰다. 그 광경을 소리 없이 지켜보던 사용인들은 흐뭇하게 생각했다. 신혼이시구나. * * * 란델은 실비아와 헤어진 후 기사들과 함께 마을로 나왔다. 하루 전, 영지 외곽의 숲에 들어왔다가 마물의 습격을 받을 뻔한 아이들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와아! 영주님이다!”
아이들답다고 해야 할지, 하루 전만 해도 꺼이꺼이 울던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밖으로 나와 놀고 있었다. 란델을 발견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그에게 매달렸다.
“안아주세요!”
“목마! 목마 탈래!”
“이놈들. 영주님께 이러면 못 써요.”
기사들은 짓궂게 말하며 아이들을 제 몸에 태우고 놀아주었다. 그사이, 란델은 아이들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소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가 아이와 시선을 맞춘 채로 나직이 타일렀다.
“무사해서 다행이긴 하다만, 또 이런 일이 없으리란 보장은 없다. 그 숲에는 오스턴의 결계도 없잖으냐. 되도록 결계가 있는 곳에서만 놀거라.”
말 끝에 란델이 설핏 웃었다. 적의 앞에서는 그 누구보다 살벌한 얼굴이지만, 제 사람들 앞에서는 누구보다 자상해지는 것이 란델 벨포르였다. 발그레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소녀가 문득 시무룩하게 입을 우물거렸다.
“저희도 원래는 그 숲에서 안 놀아요.”
“그럼 어제는 왜?”
“엄마 아빠가 원래 다니던 숲에서 자꾸 약초밭이 망가진다고 속상해하셔서, 다른 숲에 있는 약초라도 뽑아오려고 한 건데…….”
소녀는 말을 하다 보니 감정이 북받쳤는지 눈물을 글썽였다.
“이런, 몰라줘서 미안하다. 착한 아이로구나.”
란델은 아이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 달래 주고 기사들과 놀라며 보내주었다.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서늘히 가라앉았다.
‘마을 근처의 숲인데도 약초밭이 그렇게 자주 망가진다고?’
척박한 북부에서는 숲이 매우 중요한 자원 중 하나였기 때문에, 마을 근처의 숲은 기사들이 주기적으로 짐승을 사냥해 없애곤 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밭이 망가진다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설마 마물인가? 하지만…….’
북부는 마족의 땅 ‘켈베티아’와 경계가 맞닿아 있는 곳이다. 단순히 땅이 아닌, ‘공간’ 자체가 맞닿아 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이 세계의 공간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이따금 비틀린다. 비틀림이 일어나면 그 부분에 일시적으로 켈베티아와 인간의 땅을 잇는 틈이 생겨난다. 그 사이를 비집고 마물과 마족이 나타나는 것이다. 공간의 비틀림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곤 했기 때문에, 북부에서 비틀림이 유독 자주 발생하는 곳이나 마을 주변에는 오스턴의 감지, 방어 결계가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란델은 최근 이 부근에서 마물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들은 적이 없었다. 고민하던 란델은 결국 아이의 부모를 찾아가 숲의 위치를 묻고 기사들과 함께 그곳으로 향했다. 숲에 들어가기 직전 란델이 기사들을 멈춰 세웠다. 섬뜩하리만치 시린 얼굴의 그가 말했다.
“숲에 마물이 서식하고 있을 수도 있다. 결계석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전까지는 모두 무기를 내리지 마라.”
“존명.”
“진입한다.”
짧은 손짓에 따라 기사들이 대열을 맞추어 숲 안으로 진입했다. 최근 약초밭이 빈번히 망가지는 탓에 마을 사람들의 발길이 줄어서인지, 숲은 적막했다. 이 숲에 설치되어 있는 결계석은 총 다섯 개. 란델과 기사들은 우선 주위를 경계하며 상대적으로 숲 외곽에 있는 4개의 결계석부터 살폈다.
“이상 없습니다.”
“이쪽도요.”
기사들이 굳은 얼굴로 보고했다. 오스턴이 툴툴거리며 설치했던, 육각기둥처럼 생긴 유색의 보석은 본래의 위치에 얌전히 박혀 있었다. 남은 건 숲의 중앙 부근에 자리한 결계석이었다. 란델은 이전보다 더욱 경계를 높이라 명령하고는 앞장서 숲을 헤쳐 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 앞에 결계석 설치를 위해 치워둔, 동그란 모양의 작은 공터가 보였다.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지자 란델은 눈을 가늘게 떴다. 공터의 중앙. 흰 선으로 그려진 마법진 한가운데에 박혀 있는……. 반으로 잘린 결계석.
“피해!”
란델이 거칠게 외친 직후, 짙은 인간의 냄새에 나뭇가지를 타고 나타난 뱀 형태의 마물들이 기사들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