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졌다2021.04.29.
바깥에서의 일을 수습한 란델은 저녁 늦게 성으로 돌아왔다. 성으로 돌아와서도 일은 끊이지 않았다. 급하게 가신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집무실에서 간단한 저녁을 챙긴 후 평소 하던 일까지 끝마치니 어느덧 밤이 깊었다. 란델은 그제야 낮에 있었던 일을 윌콧에게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칙 헤틀라는?”
“가진 걸 처분해 지난 거래에서 과하게 올려 받은 금액을 돌려줬습니다. 상단의 존속 자체가 위태로울 지경이라 아예 북부를 떠난다고 하더군요.”
“그걸 실비아가?”
“예.”
윌콧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란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검지로 책상을 톡톡 치며 생각에 잠겼다. 윌콧에게 전해 들은 실비아의 모습에선 또다시 위화감이 들었다.
‘……묘하단 말이지.’
피로연에서 그러했듯, 실비아는 이따금 노련한 귀부인에게서나 느껴져야 할 연륜을 내보였다. 그 점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실비아와 플로레트 가문이 왕의 첩자가 아니라는 쪽에 생각이 기우나 경계를 완전히 내려놓을 수 없는 이유였다.
‘하지만 고맙다는 말은 별개니까.’
그러나 실비아가 행한 일이 결과적으로 벨포르 공작가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어둠 벌레 수색, 결계석 증설 등 예산이 들어가야 할 곳이 많은데 체르빌 상단에서 돈을 돌려받은 덕에 일을 빠르게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이유로든 도움을 받았다면 반드시 감사 인사를 할 것. 그것이 선대 공작 부부의 가르침이었다. 란델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부부침실로 걸음을 옮기며 그가 윌콧에게 물었다.
“그 후로는 뭘 했다던가?”
“누워 계셨답니다.”
“……?”
* * *
‘이럴 수가…….’
늦은 오후. 칙을 내쫓은 후, 윌콧에게 반환 요구서를 작성하라는 명까지 내린 실비아는 침대에 누워 충격에 빠졌다.
‘……어제보다 부지런하게 지냈어.’
지난 22년간 게으름을 피우며 그에 익숙해졌던 그녀에겐 충격인 일이었다. 이게 관성이라는 건가. 하긴, 몇백 년 동안 몸과 정신에 각인된 행동들이 고작 22년 쉬었다고 사라질 리는 없었다.
‘나이를 헛먹었어…….’
마음 약한 사용인들의 모습에 순간적으로 울컥해버렸다. 웬만한 일에는 동요하지 않는 그녀였지만, 저렇듯 바보 같은 사람들을 보면 첫 번째 생에서의 자신을 보는 듯해 마음이 울렁거렸다. 실비아는 아까의 일을 반성하며 깊게 숨을 들이쉬어 마음을 다스렸다. 이윽고 충격을 지워낸 그녀의 눈이 평소처럼 무심한 빛을 되찾았다.
‘거래고 뭐고, 빨리 초야만 해치우고 멀리하는 게 낫겠어. 비틀림이 자주 발생하는 곳에 가본다거나.’
제 딴에는 나름 란델을 배려하는 겸 제안한 거래였지만, 그러다 보니 자꾸만 본 목적을 망각하는 기분이었다. 실비아는 이곳에 죽으러 온 것이지, 이렇게 부지런해지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니까. 아무래도 최소한의 의무만 다하고 나면 적당히 피해 다니는 게 나을 것 같다.
‘자는 척을 하고 있다가, 란델이 돌아오면 붙잡아서 한 번 더 시도를 해봐야…….’
그녀는 비양심적인 사람답게 하루 만에 거래를 때려치우기로 하고 자는 척을 했다. 그러다가 체력이 부족해 정말로 기절하듯 잠들어버렸다. 실비아가 정신을 차린 것은 작게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을 때였다.
‘란델……?’
그녀가 잠에서 빠져나와 차츰 정신을 되찾는 사이, 숨죽인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침대가 작게 흔들렸다. 란델이 자리를 잡고 눕는 듯 이불 아래로 서늘한 공기가 밀려들었다. 찬 공기를 느낀 실비아의 정신이 완전히 돌아왔다.
‘잠들었나?’
그 후로 실비아는 한동안 잠든 척을 이어가다가 슬쩍 등 뒤의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란델의 숨소리는 규칙적이었다. 그가 잠들었다고 확신한 그녀는 조심조심 이불 아래에서 몸을 돌렸다.
‘……몸 좋네.’
실비아는 검은 실크 가운에 휩싸인 넓은 등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고정했다. 참 볼 때마다 감탄을 자아내는 몸이었다. 란델의 기척을 살피던 실비아는 슬그머니 손을 뻗었다. 그녀가 그의 가운을 여미고 있는 끈의 끝을 손에 쥔 순간이었다. 휙!
“……!”
순식간에 시야가 뒤바뀌었다. 그야말로 눈을 한 번 깜박였다가 뜬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잠들었다고 생각했던 란델이 이불로 그녀의 몸을 단단히 감싼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부인.”
나지막이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놀란 나머지 마법을 쓸 뻔했던 실비아가 움찔했다.
“실비아.”
“……네.”
그가 다시 한번 이름을 부르자 실비아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이불 너머로 란델의 팔이 실비아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분명 지난 생까지 합한다면 그녀보다 한참은 어린 청년인데, 지금은 어째서인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뭐 하십니까.”
“…….”
“밤이라고 해서 저희 거래가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닐 텐데.”
“…….”
“부인?”
할 말이 없어진 실비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곧 울컥했다. 아니, 사람이 바르고 곧은 것도 정도가 있지. 대체 이거 한 번이 뭐 그리 어렵다고! 모름지기 주변 환경이 갑자기 변하면 고양이는 스트레스를 받아 포악해지기 마련이다. 실비아가 딱 그 모양이었다. 모처럼 죽을 방법을 찾을 수 있겠다는 희망에 차서 북부행을 택했는데. 정작 잘 지내는 것처럼 보여야 할 남편은 목석이지, 영영 쉴 수 있기는커녕 몇 배로 바빠지지. 자꾸만 생각했던 것과 반대로 일이 흘러가자 짜증이 솟구쳤다.
“일단 이것 좀 풀어요.”
“부인께서 진정하신다면.”
“아니, 내가 매일 하자는 것도 아니고. 부부끼리 한 번 하자는 게 뭐 그리 별일이라고!”
결국 실비아가 성을 내며 외쳤다. 그녀가 이불 속에서 버둥거렸으나 단단한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 부인께선 많이…… 개방적이시군.’
란델은 애써 침착했다. 실비아가 먼저 거래를 어기려 한 것은 조금 실망이었으나, 오늘 그녀에게 큰 은혜를 입은 것 또한 사실이었다. 란델은 고민 끝에 실비아의 팔만 이불 밖으로 빼내어 그녀의 손에 제 손을 쥐여주었다.
“자.”
“……?”
“이것으로 만족하고 주무십시오.”
“뭐…….”
“오늘은 특별히 제가 대가 없이 양보하겠습니다.”
“아니, 필요 없는데…….”
실비아가 떨떠름하게 대꾸했으나 란델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주무십시오. 밤이 늦었습니다.”
황당해진 실비아는 눈만 끔벅이며 란델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눈을 감고 일정한 박자로 그녀의 등을 토닥일 뿐이었다.
‘……내가 졌다.’
실비아는 조금 허탈해졌다. 그래, 원래 바보와는 논쟁하지 않는 법이라고 했다. 이렇게 된 이상 조금 귀찮아도 천천히 가는 수밖에.
‘물론 틈이 보이면 일단 덮쳐 봐야겠지만.’
그녀는 자포자기하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잡힌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 일정하게 제 등을 쓸어주는 손길에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이윽고 실비아는 첫날밤 그랬던 것처럼 까무룩 잠에 빠졌다. 실비아가 잠들기를 기다리고 있던 란델이 슬쩍 눈을 떠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는 픽 웃었다. 하여간 그의 부인 된 사람은 참 신기하고…… 체력이 약한 사람이었다.
‘애초에 이런 몸으로 뭘 하자고 그러는 건지.’
그 점이 떨떠름하기보단 그저 웃음이 나왔다, 신기하게도. 란델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띤 채, 이불을 풀어 실비아가 잠들기 편하도록 자리를 정리했다. 그는 스스로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 * * 벨포르 공작가 소속 마법사, 오스턴 도슬러는 요즘 심기가 불편했다. 아무래도 그의 주인이 조금 이상해진 것 같았다.
‘또 저러시네.’
비틀림이 자주 발생하는 지역의 결계석 상태를 조사하여 보고를 올리러 왔는데. 란델은 자신이 올린 보고서를 읽다가 말고 또 무얼 떠올린 것인지 피식거리며 웃고 있었다. 란델은 원래도 상당히 자애로운 주인인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 웃는 주인은 아니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저렇게 웃을 때마다 뭐랄까. 조금 많이…….
‘개 같네.’
……대형견 같았다. 결국 상관의 정신 이상을 두고 보지 못한 오스턴이 입을 열었다.
“주군. 설령 미치셨더라도 제 월급 주는 건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건 그렇고 대체 왜 자꾸 웃으시는 겁니까?”
“……응? 아아.”
란델은 그제야 자신이 웃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러다가 말고 아침의 일이 떠올라 또 웃어버렸다.
‘표정이 너무…….’
몇 시간 전, 실비아와 함께한 아침 식사 자리에서 란델은 슬그머니 그녀의 앞으로 보양식 접시를 밀었다.
-…….
-…….
찰나 멈칫했던 실비아는 곧장 말없이 손을 뻗어 접시를 밀어냈다. 실비아가 접시를 되돌려놓으면 란델이 다시 그녀의 앞에 가져다 놓기를 반복했다. 결국 무언의 싸움을 이어가던 실비아가 질색하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거래도 없었잖아요.
-손을 내어드리겠습니다.
-됐어요.
-그럼 포옹이라도 해드릴까요.
-…….
그 말을 듣자마자 입을 닫고 심각하게 고민에 잠긴다는 게 웃겼다. 결국 얼굴을 찌푸리고 보양식을 절반 정도 해치운 실비아는 이 대가는 밤에 톡톡히 받아낼 거라며 으르렁대고 사라졌다.
‘……어쩌면 초야가 뭔지 정확히 모르는 게 아닐까.’
밤에 대가를 받아낼 거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것도 그렇고, 결혼식에서 아무렇지 않게 입을 맞춰왔던 것도 그렇고. 그 행동에 담기는 의미와 무게를 모르니 그렇게 겁이 없는 건가?
“확실히 나이도 어리고 하니…….”
“주군.”
“……그런데 왜 하필 그런 부분에서만 제 나이처럼 보이는 거지?”
“주군!”
“아.”
또다시 실비아의 생각에 잠겨 중얼대던 란델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이제는 정말 못 볼 꼴을 본다는 듯 표정을 구긴 오스턴이 공격적으로 물었다.
“정말 왜 그러십니까? 만약 마님께서 정말 왕과 내통하는 자라면 어쩌시려고요.”
“……생각은 자유라지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말을 조심해라, 오스턴.”
그 말에 란델의 얼굴이 급격히 가라앉았다. 창문을 등진 연녹색 눈이 서슬 퍼렇게 빛났다. 그에 자신이 실수했음을 인지한 오스턴이 한 걸음 물러나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실언했습니다.”
“안다면 됐다. 그보다, 결계석의 공식을 개량해야 할 것 같다고.”
“예. 아무래도 현재 북부에서 수도로 이어지는 길은 실력 좋은 용병 없이 다니기 힘드니…….”
오스턴이 말끝을 흐렸다. 그간 북부에서 사기를 치던 칙 헤틀라의 상단이 아예 사라졌다. 보통 이런 경우 수많은 상단이 그 빈자리를 탐내며 몰려오기 마련이지만, 이곳은 북부. 오가는 비용이 목숨이 될지도 모르는 곳이었다. 하여 현재 북부에는 상단의 발길이 뚝 끊어진 상태였다. 이대로 가다간 영지의 경제가 크게 흔들릴 테고, 끝내는 존속마저 위태롭게 될 가능성이 컸다. 문제는 현재 왕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기본적인 결계의 형태를 초대 대마법사가 고안했다는 점이었다. 초대이자 현재까지 역사상 유일한 대마법사 알리사. 당시 마족과의 전투에서 불행히도 실종됐다고 알려진 그녀는 모든 마법사의 스승이나 다름없었다. 특히나 알리사가 죽기 전까지 연구했다고 알려진 결계 마법 기본 공식의 경우, 현재까지도 그보다 나은 효율의 공식이 개발되지 않았을 정도로 그녀의 공식은 완벽에 가까웠다. 하여 오스턴도 그간은 알리사의 기본 공식을 토대로 벨포르 공작령에 설치해둔 결계석을 만들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고, 그보다 한층 강화된 결계가 필요해졌음은 여실했다. 오스턴은 야근을 할 생각에 괴로워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추가 근무 수당을 챙길 생각에 몸의 괴로움은 안중에도 없었다. 어차피 죽으면 썩어 없어질 몸! 살아 있을 때 열심히 굴려서 돈이나 벌자! ……라는 것이 오스턴의 신조였다.
“제 수준에 자문할 마법사도 없고, 아무래도 힘들겠네요. 추가 수당은 두둑이 챙겨주셔야 합니다.”
“……부탁하지.”
“맡겨만 주십시오!”
오스턴이 상큼하게 답했다. 자본주의로 빛나는 미소도 함께였다. * * * 그리고 그 시각.
“……?”
사용인들, 그리고 성 밖에서 부른 기술자들을 지휘하던 실비아가 아리송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누가 내 칭찬을 하나? 어쩐지 귀가 간지럽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