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일이 자꾸 꼬인다2021.05.03.
어느덧 가신들이 성에 도착할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전까지 실비아가 신경 쓸 일은 비단 연회장의 재정비뿐이 아니었다. 작게는 연회에서 손님들이 먹고 마실 술과 음식부터, 크게는 휴게실과 손님방의 설비 수리까지. 델마와 사용인들은 ‘마님의 첫 연회!’라며 화르륵 의욕을 불태웠고, 그 곁의 실비아는 졸지에 같이 타는 중이었다. 앗, 뜨거. 또한 연회 준비에는 가주와 그 부인의 차림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성만 가꾸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였다.
“공작 부인, 본 연회 때는 이 드레스를 입는 게 어떠실지요? 공작님의 연회용 예복도 은회색이라 하셨으니…….”
드레스 디자이너가 조심스레 권했다. 실비아는 감흥 없는 얼굴로 거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어차피 예쁠 텐데.’
재수 없다고 들릴 법한 말이었지만 당사자가 실비아인 이상 반박할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그녀의 예상대로 델마와 하녀들이 감격한 얼굴로 조용히 박수를 보냈다. 우리 마님 얼굴이 곧 벨포르 공작성 복지다.
‘괜찮네.’
거울에 비친 것은 자잘하게 반짝이는 은회색 드레스였다. 전체적으로 몸의 선을 따라 유려하게 흘러내려 답답하지 않으면서도 우아한 멋이 있었다. 무엇보다 란델의 예복과 같은 색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속사정이야 어떻든 겉으로는 사이좋게 보일 테니까.
“조금 춥다 싶으시면 이 숄을 두르셔도 되고요.”
디자이너가 덧붙였다.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인 후 사용인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 일상복으로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더 할 일이 남았나?”
“추가로 지시하실 일은 없습니다. 손님방 정리도 마무리되어 가니 전체적으로 한 번만 둘러보시면 될 듯합니다.”
‘만세.’
실비아는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드디어 이 고단한 일정의 끝이 보이는 듯했다. 사실 끝이라고 하기에는 손님맞이와 본 연회가 남아 있었으나 어쨌든 큰 산은 넘었다는 뜻이었다. 이 일만 끝나면 꼭 바깥으로 나돌다가 비명횡사하리. 실비아는 퍽 섬뜩한 생각을 하며 성을 한 바퀴 둘러보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홀과 손님방을 둘러보고, 정원과 후원을 살펴보기 위해 밖으로 나섰을 때였다. 실비아는 성의 모퉁이를 돌다가 말고 눈에 들어온 광경에 흠칫 굳었다.
‘……시체?’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후원. 정원사들이 솜씨 좋게 다듬어 놓은 잔디 위에 사람이 엎어져 있었다. 그 주위로 뭔가 빽빽하게 적힌 종이가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실비아가 심각한 얼굴을 하며 델마에게 물었다.
“델마.”
“예, 마님.”
“설마 저거…… 사람인가?”
“사람이요?”
델마가 어리둥절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잔디 위에 널브러져 있는 인영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그리로 다가갔다.
“에그머니! 저게 뭐람!”
“잠깐, 델마…….”
실비아가 당황해 델마를 불렀다. 나이가 있는 그녀가 시신을 직접 확인했다가는 건강에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어진 광경은 실비아의 예상과는 한참 동떨어진 것이었다.
“이 망할 인간! 내가 그렇게! 아무 데나! 드러눕지 말라고 했는데! 못 살아! 우리 마님 놀라셨잖수!”
“끄아악!”
델마가 말의 강세에 맞추어 시체의 등을 찰싹찰싹 내리쳤다. 그러자 죽은 것처럼 보였던 사람의 몸뚱이가 펄떡거리며 살아났다. 실비아는 그제야 그가 오스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 씁! 하여간 할망구가 힘만 좋아서는! 좀 곱게 깨우면 어디 덧납니까?”
“허구한 날 아무 데나 엎어져서 사람 놀라게 하는 인간한테 곱게는 무슨.”
“‘아무 데나’라니? 나처럼 섬세하고 까다로운 사람이 아무 데서나 잘 것 같소? 모두 철저히 계산된…….”
“어련하시겠수.”
델마는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익숙하게 코웃음을 쳤다. 오스턴은 오만상을 구긴 채로 구시렁거리며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종이를 깔고 누워 있었는지 부스럭대는 소리가 울렸다. 델마가 오스턴을 대할 때와는 달리 깍듯한 태도로 실비아에게 친절히 웃어 보였다.
“가시지요, 마님. 이건 제가 치워두겠습니다.”
“무, 뭐? 이거? 사람 보고 이거?”
“……잠깐.”
오스턴이 발끈했다. 그사이, 실비아는 무언가 가늠하듯 가느스름한 눈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이 조명, 온도, 습도…….
‘완벽해.’
실비아는 소리 없이 감탄했다. 오스턴이 쓰러져 있던 자리는 그야말로 잠들기 완벽한 명당이었다. 따갑지 않은 햇빛. 선선한 바람. 적당한 나무 그늘까지. 왜 오스턴이 시체처럼 쓰러져 잠들었는지 이해가 갔다.
‘하지만 저기에 침대를 가져다 놓자고 하면 다들 기겁하겠지.’
고심하던 실비아는 침대를 저곳으로 옮기는 것을 포기했다. 그 대신 잠깐이라도 저 자리에서 쉬다가 가겠다는 마음으로 빙긋 웃었다.
“오랜만이로군.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잠시 옆에 앉아 있다가 가도 되겠나? 하던 일이 있다면 방해하지는 않겠네.”
“……뭐, 그러시든지요. 어차피 이곳이 제 소유인 것도 아니니까요.”
오스턴은 약간의 비아냥을 섞어 말을 뱉고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실비아가 갑자기 반가운 척을 하는 것이 영 꺼림칙했으나 지금은 일에 집중할 때였다. 오스턴이 땅바닥에 흩어져 있던 종이들을 끌어모으고는 바로 옆의 나무 아래에 털썩 등을 기대고 앉았다. 실비아는 양산과 돗자리를 가져오겠다는 델마에게 고개를 저어 보이고는 잔디 위에 앉았다. 오스턴은 종이에 공식을 끼적이다 말고 그 광경을 힐긋 돌아보았다.
‘……의외로군. 질색할 줄 알았는데.’
갈색 눈이 경계심으로 가늘어졌다. 플로레트 백작가 정도면 나름 알아주는 명문가였다. 태어났을 때부터 호화롭고 고급스러운 물건들에만 둘러싸여 자랐을 귀족 영애치고는 꽤 소탈한 태도였다. 오스턴은 경계하는 눈으로 실비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구경하렴…….’
실비아는 그 시선을 느꼈으나 반쯤 숙면의 세계로 빠져들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뭐, 실비아 플로레트의 외모가 감상하기 좋은 건 사실이니까. 넓게 보면 인류의 평화와 심신의 안정에 도움이 되는 얼굴이었다. 그사이, 한쪽 눈으로는 실비아를 경계하고, 다른 눈으로는 종이에 공식을 적어 내리던 오스턴의 손이 일순 미끄러졌다. 정돈된 글자들 위로 선 하나를 비죽 그었다는 것을 한발 늦게 눈치챈 그가 비명을 질렀다.
“끄아악!”
“……?”
“이러면 새로 써야 하는데…… 이럴 순 없어…… 나의 시간과 돈…….”
공식을 개량하느라 며칠 밤을 꼬박 새운 오스턴이 반쯤 넋 나간 태도로 중얼거렸다. 다른 곳에 정신을 팔고 있던 데다가, 숫자를 하도 빽빽이 써놓은 탓에 어디에 선이 그어진 것인지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물론 계산을 다시 해 보면 어디가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있을 테지만, 그는 며칠 새 같은 일을 스물일곱 번째 반복하는 중이었다. 거기에 그가 직전에 쓰던 종이는 총 공식의 서른세 번째 페이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틀린 부분을 찾기 위해서는 열댓 장의 공식을 처음부터 다시 풀어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자고로 인간을 무너트리는 것은 사소한 불행의 반복. 오스턴 도슬러를 무너트리는 것은 얼마 남지 않은 마감과 그로 인한 추가 수당의 증발…….
“다 틀렸어, 인류에게 남은 건 멸망뿐이다…….”
오스턴이 급기야 세계 멸망을 예언하자 실비아는 뭔가 싶어 그가 손에 들고 있는 종이로 시선을 옮겼다. 종이 뒷면까지 빼곡히 차 있는 공식을 본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결계 마법 공식인가?’
어딘지 형태가 익숙하다 했더니 그녀가 개발했던 결계 마법을 기반으로 한 공식 같았다.
‘아무래도 결계를 강화하려는 것 같은데.’
실비아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며칠 전, 칙 헤틀라가 찾아왔을 당시에는 울컥한 마음에 은근슬쩍 결계를 강화하고 상단의 호위 인력을 확보할까도 싶었다. 하지만 이미 며칠이 지났다. 그때의 마음은 사라졌고, 실비아는 냉정한 마음–쉬겠다는 의지-을 되찾은 상태였다. 오스턴이 결계 강화에 성공하면, 비틀림에 관한 기사들의 반응이 빨라진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자신이 사고사로 죽을 가능성 또한 낮아진다!
‘막자.’
간단명료한 결론을 내린 실비아는 생긋 웃으며 넋 나간 오스턴의 손에서 종이 뭉치를 빼앗아 들었다. 초점 없는 눈으로 세상을 비관하던 오스턴이 흠칫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실비아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한번 보지.”
“……마님께서요?”
“왜, 못 미덥나? 이래 보여도 내 아버지가 엘바레스 아카데미의 부학장이시네.”
“마님께서는 아카데미에 다니신 적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요.”
“플로레트 저택에 널린 것이 아카데미의 서적들이었네. 수업을 듣지 않았어도 보고 들은 게 없는 건 아니라는 소리야. 내가 좀 천재라서.”
실비아는 사실에 가까운, 하지만 남이 보기에는 굉장히 재수 없는 태도로 핑계를 대고는 잔디 위를 구르던 펜을 집어 들며 종이를 눈으로 훑었다. 직후 그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미 별로인데?’
오스턴이 보지 않을 때 은근슬쩍 계산을 복잡하게 만들어 놓을 생각이었는데. 종이에 적힌 공식들은 어딘가 미묘하게 핵심을 비껴나가 있었다. 게다가 중간중간 쓸모없는 계산을 추가해 그가 알아서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기까지.
‘델마의 말로는 오스턴이 나 다음으로 유일하게 대마법사의 호칭을 달 수 있는 마법사가 될 거라고 평가받는다던가.’
한참은 멀었다, 멀었어. 실비아는 혀를 끌끌 차다가 무의식중에 쓸모없는 계산식들에 죽죽 가위표를 그었다.
‘……아, 여기가 아닌데.’
알리사였을 때 동료들의 연구 자료를 뒤엎어주던 게 습관이 되어서 그만. 실비아가 한발 늦게 움찔 놀라는 사이, 오스턴이 비명을 지르며 그녀의 손에서 종이를 홱 빼앗았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절반이라도 살려야 하는데!”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마구잡이로 줄을 긋는 것으로만 보였다. 오스턴이 허둥지둥 종이를 확인했다. 숫자들이 몇 줄 보이지 않게 되었을지언정 나머지라도 살려야 했다. 하지만 앞장부터 빠르게 계산을 이어가던 그가 눈을 끔벅였다.
‘어라?’
분명 실비아가 줄을 그어놓은 부분의 위아래는 계산이 맞지 않아야 하는데. 그녀가 지운 부분을 제외하고도 계산은 매끄럽게 이어졌다. 당황한 그가 종이를 휙휙 넘기며 다른 부분도 확인했으나 마찬가지였다.
‘이건……!’
오스턴은 알리사만큼의 천재는 아니었으나 분명 천재의 반열에 든 이였다. 실비아가 가위표를 친 부분을 모두 제외하자 공식의 장수가 절반으로 줄었다. 게다가 쓸데없는 부분을 쳐내고 나니 자신이 무얼 잘못하고 있었는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까지 명확해졌다. 오스턴이 종이 뭉치를 양팔로 끌어안은 채 잔디 위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의 눈은 실비아에 대한 고마움과 존경으로 그득해져 있었다.
“마님…….”
“역시 뭘 모르는 사람이 섣불리 손을 대면 안 될 것 같군. 이만 가보지.”
불길함을 느낀 실비아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오스턴의 눈에는 그것이 겸양으로 보였다.
“……그리고 웬만해서는 내가 손을 댔다고 이야기하지 말게. 알았나?”
그녀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로 일어날 생각이 없는 오스턴을 불안하게 힐끔거리고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오스턴의 눈에는 그것이 굉장히 엄청난 겸양으로 보였다. 결계 마법의 개량에 성공했다는 것은 마법사(史)에 한 획을 그을 만큼 대단한 일이었다. 그런 일을 자신이 도왔노라 으스대도 충분히 이해할 법한데, 그녀는 자신이 무얼 했냐는 듯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경계하고 의심하기 바빴는데도……!
“마님-!”
오스턴이 땅바닥 위로 엎드려 감격에 통곡했다. 실비아는 등 뒤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방으로 도망쳤다. * * * 그날 저녁.
“……오스턴.”
“예?”
“……얼굴이 왜 그러나?”
란델은 해괴한 얼굴을 한 채 오스턴에게 물었다. 보고서를 제출하러 온 오스턴의 양 뺨은 누군가에게 맞은 것처럼 퉁퉁 부어 있었다. 그러나 오스턴은 태연히 답했다.
“아, 별일 아닙니다. 검토 부탁드립니다.”
“아니, 별일 맞는 것 같은데…….”
“아닙니다.”
오스턴이 재차 부정하자 란델은 떨떠름히 수긍하곤 보고서로 시선을 내렸다. 오스턴은 란델이 보고서의 내용을 살펴보는 사이 속으로 자기 자신을 향해 중얼거렸다.
‘미친놈아. 네가 아무리 돈에 눈이 멀었기로서니 그 여자는 플로레트란 말이다. 현 국왕이 가장 신임하는 가문이라고. 그런데 어떻게 이 일을 사방에 자랑하지 않을 수가 있지? 천사인가?’
찰싹. 생각이 또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려 하자 오스턴은 손을 들어 제 뺨을 내리쳤다. 그에 놀란 란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주치의! 오스턴이 미쳤다!’라며 소리를 지른 탓에 약간의 소란이 일긴 했지만. 오스턴은 그 이후로 며칠 내내 양 뺨이 퉁퉁 부은 채로 성을 돌아다녀야 했다. 란델은 성에 이상한 사람이 또 늘었다며 한숨을 감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