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아름다운2021.05.06.
어둠 벌레들과 관련해 란델이 추가 지시를 내린 탓에, 가신들 대부분은 예정보다는 조금 늦게, 연회 당일에 맞추어 성에 도착했다. 그렇게 찾아온 연회 당일. 실비아는 꼭두새벽부터 성을 한 바퀴 돌아본 후에 그대로 하녀들의 손에 붙잡혔다.
“말리지 마세요, 마님. 저희는 오늘 끝장을 볼 거니까!”
“말릴 생각은 없었는데, 그 말을 듣고 보니 말려야 할 것 같네…….”
“저희만 믿으세요!”
본디 안주인의 머리카락을 비롯해 외모 관리에 관련된 것은 암묵적으로 하녀들의 권한이나 다름없다…… 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실비아는 눈에서 불을 뿜을 것처럼 구는 하녀들에게 잡혀 얌전히 욕실로 끌려 들어갔다. 예의상 한 번은 말렸지만, 솔직히 적성에 좀 맞는 것 같았다. 주변인이 모든 걸 대신해주는 삶이란 얼마나 편안한지! 실비아는 훌륭한 게으름뱅이였고, 벨포르 공작성의 사용인들은 유능했다. 반쯤 잠든 상태로 멍하니 늘어져 있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채비가 끝나 있었다.
“이제 눈 뜨셔도 돼요! 아니, 잠깐! 저 마음의 준비 좀 하고요!”
“저도, 저도요!”
실비아는 한동안 꺅꺅대는 사용인들의 목소리를 들어준 후 눈을 떴다.
“하아…….”
“됐어, 난 이번 생에서 다 이뤘다…….”
“어머, 세상에! 루제! 정신 차려! 지금 죽으면 안 돼! 주인님과 마님의 2세는 보고 가야지!”
“헛.”
사용인들은 실비아가 눈을 깜박일 때마다 자지러지다가 동료의 외침에 급히 정신을 부여잡았다. 실비아는 며칠 새 그들의 반응이 처음보다 격해진 것 같다고 생각하며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잘했네.’
지금 공작성에 있는 하녀들은 대개 전 벨포르 공작 부인의 서거 이후 근무하기 시작한 이들이었다. 해서 하녀장 델마가 아이들이 여주인을 모셔본 경험이 없다며 약간의 우려를 표했었는데, 실비아가 보기에 이만하면 훌륭했다. 구석구석 꼼꼼히 치장을 마치고 나니 어느덧 창밖은 보랏빛으로 변해 있었다. 저녁의 벨포르 공작성은 계절과 관계없이 쌀쌀한 편이었기에 실비아는 숄을 두르며 물었다.
“손님들은?”
“모두 연회장에 도착하셨답니다. 가져오신 짐들은 저희가 손님방에 각각 풀어두었습니다.”
“다들 고생이 많네. 수고했어.”
그 담백한 치하에 사용인들은 저마다 조용히 미소 지었다. 사람의 성격, 인품 등은 생각보다 사소한 부분에서 드러난다. 사용인들은 저마다 정당한 급료를 받고 공작성에서 근무하는 것이긴 하지만, 결국 그들 또한 사람. 사소한 일에도 주위 사람의 노고를 알아주는 이에게 마음을 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정하신 분.’
델마는 부드럽게 웃으며 생각했다. 처음 공작 부인이 이곳에 온 날. 사용인들은 그녀의 외모에 호감을 품긴 했지만 내심 경계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란델을 견제하는 왕이 밀어붙인 결혼이다. 그 상대가 어떤 사람일 줄 알고 섣불리 마음을 놓는단 말인가. 하지만 하루 대부분을 실비아의 옆에 붙어 있는 델마와 하녀들은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델마. 칙 헤틀라가 지금까지 과하게 금액을 부풀린 거래가 몇 번이나 되는지 알아오게.
그저 공작가에 대한 무례라 치부하고 잊었어도 될 일을 굳이 과거의 피해까지 살피고.
-괜찮네. 어차피 자네들이 지금 가서 돗자리를 가져오기도 번거로울 테니 그냥 앉지.
사실상 사용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임에도 스스럼없이 그들을 배려하고.
-다들 고생이 많네. 수고했어.
다른 사람들의 미숙함도 너그러이 감싸주는 사람. 그런 배려가, 몸에 배어 있는 사람.
‘이런 분이 북부에 해가 될 일을 할 리는 없다.’
델마와 하녀들은 그런 마음으로 조용히 허리를 굽혀 그녀에게 경의를 표했다.
“가시지요, 마님. 모시겠습니다.”
* * * 이른 새벽, 성 근처의 마을에서 비틀림이 발생해 급하게 마물을 처치하고 돌아왔던 란델은 윌콧의 손에 붙들려 실비아와 비슷한 일을 겪었다.
“이러다가 부인을 기다리게 하는 몹쓸 남편이 되겠어.”
“걱정하지 마시지요. 제가 하녀장에게 마님의 치장이 끝나갈 때쯤 사람을 보내달라 했습니다.”
콧은 주도면밀했다. 그 말에 란델은 이른 탈출을 포기하고 그를 내버려 두었다. 그 덕이라고 해야 할지, 머리를 깔끔히 빗어 넘겨 이마를 드러내고 은회색 예복을 차려입은 란델은 가히 감탄할 만큼 아름다웠다.
“됐습니다! 이만하면 마님의 곁에 당당히 서 계셔도 될 것 같군요.”
윌콧이 만족한 얼굴로 손을 뗐다. 란델은 그 말에 심술궂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제까지 누군가의 외모에 묻힐까 봐 치장해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이제는 승자의 관을 내려놓으실 때가 됐습니다, 주인님.”
“이런. 이제 물러나 줄 때가 온 건가. 슬슬 새로운 승자를 모시러 가야겠군.”
장난스럽게 대꾸한 그가 방을 나서 공작 부인의 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용인에게 듣자 하니 실비아는 아직 치장 중이라는 듯했다. 치장이 끝나기 전에 들어가는 건 부부 사이라도 예의가 아니었으므로 란델은 방문 앞에서 얌전히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방문이 열리고 실비아가 사용인들과 함께 나타났다.
“아, 기다리고 있었어요?”
실비아는 문 앞에 서 있던 란델을 발견하고는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란델은 찰나 그 손을 잡을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결혼식에서 처음 실비아를 보았을 때, 란델은 그녀의 외모에 감탄하기보다는 왕의 의도를 읽기 위해 날이 서 있었다. 하지만 지난 시간 동안 그녀와 함께하며 의심이 많이 누그러진 상태로 마주하니…….
“란델?”
그녀는 정말이지 무척이나,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눈 내린 듯 흰빛의 긴 은발. 바닥이 들여다보일 것처럼 맑고 투명한 금안. 자신의 옷과 색을 맞춘 은회색 드레스가 움직임에 따라 자잘하게 빛났다. 그 빛에 정신을 차린 란델은 뒤늦게 표정을 가다듬으며 실비아의 손을 맞잡았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덧붙였다.
“……아름답습니다.”
실비아는 동요의 기색조차 없이 태연히 답했다.
“고마워요. 마음에 들면 연회가 끝나고 침실로 돌아갈 때도 이 차림 그대로 갈까요?”
“실비아.”
은근한 의도가 담긴 말에, 란델이 사용인들을 의식해 책망하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그의 귀 끝은 살짝 달아올라 있었다.
‘안 통하네.’
진심 반 장난 반으로 란델을 떠보았던 실비아는 속으로 혀를 차며 그와 함께 연회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에 란델이 가볍게 새벽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며 운을 뗐다.
“최근 일이 많아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앞으로는 어딜 가든 제프리와 함께 움직이십시오.”
“시더스 경의 부상이 회복되었나 보죠?”
“이제는 너무 쌩쌩해서 문제입니다. 사실 호위에 최적화된 인재는 아니라 후보에서 제외하려 했는데, 호위를 선발하기 위한 경합에서 그 녀석이 선배들을 다 때려눕혀 버리는 바람에.”
란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실비아는 제프리답다는 생각에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설픈 호위여야 사고가 생겼을 때 따돌리기도 쉬울 테니까. 오히려 시더스 경이 호위라서 다행이네.’
검은 속내와는 정반대의 무구한 웃음이었다. 란델은 실비아가 호위를 붙인다는 데도 불쾌해하는 기색이 없어 의심을 조금 더 거두게 되었다.
‘만약 왕과 비밀리에 내통한다면 호위가 붙는 게 불편할 법도 한데. 전혀 그런 기색이 없군.’
그들이 각자 다른 생각에 잠긴 사이 일행은 연회장 앞에 도착했다. 실비아와 란델은 표정을 갈무리하고 자세를 바로 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새로 정비한 연회장은 화사하면서도 우아했다. 실비아와 란델이 계단 위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음악이 멈췄다. 연회를 즐기던 사람들이 곧장 허리를 숙여 예를 갖췄다.
“벨포르의 주인을 뵙습니다.”
두 사람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이윽고 사람들 앞에 선 란델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모두 고개를 들라.”
사람들은 그 말에 호기심 반, 경계 반을 담아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직후 너나 할 것 없이 숨을 멈추었다.
“세상에…….”
고요한 가운데 누군가 체통도 잊고 작게 탄식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나무랄 생각조차 못 하고 눈앞의 인영에 시선을 빼앗겼다. 속사정이야 어떻든, 지금 그들 앞에 있는 것은 너무도 완벽한 모습의 한 쌍이었다.
란델이야 원래부터 인물이 훤하기로 북부에서 소문이 자자했으니 그렇다고 쳐도. 왕이 억지로 밀어붙인 결혼의 당사자라고 하기에 실비아는 너무도 빛나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무심한 금빛 눈이 사람들을 한번 훑었다. 그 눈에 담긴 특유의 무던함이 그녀의 분위기를 더욱 기묘하게 만들었다. 숨 막히는 침묵을 깬 것은 란델의 무심한 목소리였다.
“사정이 여의치 않았음에도 이렇게나마 혼인을 축하해주러 온 그대들에게 감사를 표하네. 이쪽은 실비아 플로레트 벨포르. 내 아내이자 앞으로 그대들이 나와 동등하게 섬겨야 할, 벨포르 공작성의 주인일세.”
란델이 실비아를 소개하자 그녀가 빙긋이 웃으며 완벽하게 예를 갖췄다.
“실비아 플로레트 벨포르네. 혼인을 축하해주어 영광이고, 머무는 동안 모쪼록 즐겁고 평안하기를.”
그 말에 잠시간 넋을 놓고 있던 이들이 이성을 되찾고 눈치를 보며 박수를 쳤다. 란델과 실비아는 박수 소리를 배경으로 손을 맞잡고 연회장의 중간으로 향했다. 전통적으로 연회의 첫 춤은 주최자 부부가 시작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란델과 실비아는 단둘이 춤을 시작했다. 그 자태가 참으로 다정하고 고와 보여 사람들은 저마다 감탄을 흘렸다.
“생각보다…… 사이가 좋아 보이시는데요?”
“그러게요. 공작님께서 웃음이 박한 분은 아니시지만, 저런 웃음은 또 처음…….”
사람들이 저마다의 생각으로 숙덕거리고 있을 때였다. 실비아는 란델의 몸에 익은 배려 덕에 춤추기가 참 편하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장난을 치느라 화답이 조금 늦었네요. 당신도 멋있어요, 오늘 모습.”
몸에 딱 맞는 은회색 예복을 갖춰 입은 란델은 참으로 근사했다. 저도 모르게 판판한 상체에 손을 가져다 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란델은 그 말에 픽 웃음을 흘렸다.
“윌콧은 내게 이미 지나간 시대의 승자라고 하던데요. 새 시대의 승자는 당신이라면서.”
“어쩜. 맞는 말만 골라서 했군요.”
“보통 이럴 때는 그렇지 않다며 겸양하지 않습니까?”
“애석하게도 제가 거짓말을 못 하는 성격이라. 사람 보는 눈은 객관적이랍니다.”
실비아의 능청에 란델이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분위기가 풀어지자 실비아는 그 틈을 타 은근슬쩍 손끝으로 그의 목덜미를 쓸었다. 그가 움찔하는 사이 그녀가 은근하게 속삭였다.
“그건 그렇지만 당신은 역시 검은 가운이 제일 잘 어울려요.”
란델은 실비아와 맞잡은 손에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가려는 것을 애써 자제했다. 그가 표정을 굳히고 물었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입니까?”
“그저 솔직한 감상일 뿐이에요.”
“부인.”
“정말 아무 의도 없었다니까요? 사실 당신이 나랑 하고 싶은 거 아니에요?”
“실비아!”
첫 번째 부름은 난감함을 담아서, 두 번째 부름은 약간의 나무람이 담긴 것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실비아는 속으로만 ‘또 안 통하네’ 하며 방긋 웃었다. 그때 음악이 끝났다. 두 사람은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에게 인사한 후 상석으로 가서 앉았다. 그때부터가 연회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사람들은 차례로 단상 위에 올라와 란델과 실비아에게 인사했다. 부부는 미리 준비해둔 술을 따라주며 그들의 인사에 화답했다. 공작과 공작 부인의 의자는 양쪽으로 상당히 떨어져 있었기에, 그들의 앞으로는 각각 줄이 이어져 있었다.
‘예상보다도…… 잘하는군.’
란델은 중간중간 실비아 쪽을 힐끔힐끔 돌아보았다. 그녀가 누군가를 통해 왕과 내통하려 할지 모른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가신들이 충성심 탓에 그녀에게 지나치게 무례하게 굴까 걱정된 탓이었다. 하지만 실비아는 예상보다도 훨씬 태연한 태도로 가신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란델은 그 모습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조금 심란해졌다. 그녀는 저와 함께 있을 때 잠자리 등에만 신경을 기울이지, 자신과의 대화를 중요시하는 느낌은 아니었으니까. 딱히 ‘인간적인 관계’를 쌓고 싶어 하는 모습은 아니라고 해야 할까.
‘잠자리에 대한 집착을 제외하면…… 내게 달리 관심은 없는 것 같았지.’
란델이 복잡한 마음에 미간을 찌푸릴 때였다. 그와 함께 실비아가 다른 이를 통해 왕과 내통하려 들지는 않을지 감시하던 오스턴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마님께서는 정말 국왕의 내통자가 아니신 걸까요.”
“……알 수 없지. 아직은.”
타인의 입으로 저 말을 들으니 정신이 조금은 명료해지는 기분이다. 란델은 나지막이 한숨을 삼키며 복잡함을 갈무리했다.
‘하여간 국왕도, 왕세자도 도통 믿을 수가 없는 족속들이라 쉽게 마음을 놓을 수가 없군. 실비아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고 흘리는 말을 이용하려 들지도 모르는 거니까.’
왕세자. 그를 생각하자 란델의 얼굴이 반사적으로 굳어졌다.
-고작 너 따위를 지키자고 목숨을 내버렸을 이들이 안타깝군. 완전히 개죽음이잖나?
빈정대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지자 팔걸이를 잡고 있던 손에 핏줄이 불거졌다. 우드득, 하는 불길한 소리에 오스턴이 “그거 얼마짜린 줄 아십니까!”하고 기겁하던 때였다. 익숙한 음성이 그들의 귓전을 울렸다.
“그 무지막지한 힘은 여전하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