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울었다2021.05.13.
벨포르 공작성은 말 그대로 발칵 뒤집혔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일은 비틀림으로 인한 습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어떤 버러지 새끼인지 당장 찾아내야 합니다!”
오스턴은 이를 바득 갈며 길길이 날뛰었다. 이동 마법진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도착할 지점의 정확한 좌표를 알아야 한다. 하지만 벨포르 공작성을 비롯한 주요 거점들은 습격당할 위험이 있기에 그 좌표를 철저히 기밀에 붙였다. 실비아와 란델의 결혼식 날, 국왕이 결혼식을 위해 특별히 알려준 좌표도 지하 감옥과 연결된 것이었다. 혹시라도 벨포르의 사람들이 좌표를 악용할 마음으로 왕궁에 쳐들어오더라도 지하 감옥에 갇히도록. 기분이 나쁘긴 하지만 이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혹시라도 적이 이동 마법을 통해 성에 쳐들어오기라도 하면 큰일이었으니까. 그런데 벨포르 공작성, 그것도 정확히 연회장 내부에서 이동 마법을 이용한 습격이 벌어졌다. 이는 누군가 성의 좌표를 유출했거나, 혹은 이동 마법진을 새겨놓은 보석을 연회장에 반입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인 일인데, 습격으로 인해 벨포르 공작 부인이 등에 큰 부상을 입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오스턴이 곧장 외상을 치료했다지만, 그녀는 원체 몸이 약했던 데다가 습격의 충격 때문인지 쉽사리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실비아가 쓰러진 사이. 벨포르 공작성의 사람들은 참으로 오래간만에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란델은 분명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식과 도덕의 선을 넘지 않는 한에서였다. 이번 일의 범인은 그의 믿음을 저버렸다. 그렇다면 그 또한 더는 영주로서 그를 존중할 필요 따위 없었다.
“누구지?”
란델은 무섭도록 싸늘한 얼굴로 연회장 바닥을 굴러다니던 보석을 주워 들었다. 보석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그것이 누구의 피인지 알기 때문에 그는 이를 바득 갈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등 뒤로는 가신, 사용인을 비롯해 벨포르 성의 모든 사람이 모여 있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낮은 목소리에 사람들이 반사적으로 어깨를 떨었다. 무저갱 같은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공포로 눈앞이 아득해졌다. 지금의 란델은 마물과 마족을 도륙하고 다닐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상태였다. 그 살기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사람들이 손발을 벌벌 떨었다.
“지금 나서서 자백한다면 당사자의 목숨만으로 끝내겠다. 하지만 만약 나서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찾아내 그 가문의 씨를 말릴 것이다. 가족과 함께 사지가 조각나 켈베티아에 던져지고 싶은 게 아니라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나와.”
그 말에 사람들이 충격으로 눈을 부릅떴다. 평생 마물과 마족을 상대하며 살아온 북부의 사람들에게 가장 끔찍한 죽음이란 마물과 마족에게 시신까지 뜯어 먹히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극악한 죄인을 처형할 때 쓰곤 했다지만, 현재에는 너무 잔인하다는 평이 많아 유명무실해진 벌. 지금의 란델은 범인에게 그 벌을 내리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평소 상식과 도덕을 지키려 노력하던 란델답지 않은 결정이었다. 저 말이 그가 현재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누구 하나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소름 끼치는 침묵이 연회장의 공기를 짓눌렀다.
“아무도 없나.”
란델이 분노로 실소하며 물었다. 그 순간, 누군가 입을 열었다.
“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쏠렸다. 란델이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눈을 번득였다.
“그 보석은…… 제 드레스 끝단에 붙어 있었습니다. 레이스에 엉켜서요.”
시선 끝에 있는 사람은 창백한 얼굴의 루베아 글레버였다. * * *
‘이러다가 진짜 죽겠는데.’
실비아는 정신을 잃기 직전 그런 생각을 했다. 등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어마어마했다. 여러 번의 죽음을 겪으며 고통에 단련된 그녀로서도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이 정도로 피를 흘렸으니 살아나기는 어렵지 않을까.’
루베아가 자신을 끌어안고 응급처치를 하는 사이에도 바닥에 시시각각 피가 고이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으니, 이번에는 정말 죽겠지. 실비아는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겉으로는 루베아를 구하려다가 다친 것으로 보일 테니 자신이 죽고자 한다는 사실도 감춰졌을 테고. 여러모로 현명한 판단을 한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란델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그때 문득 의식을 잃기 직전 보았던 란델의 얼굴이 떠올랐다. 온기라고는 한 점 보이지 않는, 당장에라도 누구 하나를 물어뜯을 것처럼 보이는 사나운 얼굴. 실비아는 그것이 꽤 생소하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란델은 그녀의 앞에서 단 한 번도 그런 얼굴을 내보인 적이 없으니까. 오히려…….
‘잘 웃었지.’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가슴 한구석이 싸하게 굳어졌다. 실비아는 어서 의식이 완전히 끊기길 바라며 애써 상념을 지워냈다. 하지만 의식이 끊기기는커녕, 이제는 환청까지 들려왔다.
-……름이 뭐니, 꼬마야?
어디선가 들어본 듯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어디서 들어봤더라, 실비아가 의아함을 느끼는 순간 카랑카랑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리며 시야가 확 밝아졌다.
-저리 가! 안 알려줄 거야!
은발에 자안을 지닌 소년이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소년 앞에 선 여인의 얼굴까지 확인한 순간, 실비아는 벼락을 맞은 듯 깨달았다.
‘내 기억이구나.’
그중에서도 가장 첫 번째 삶, ‘알리사’였을 때의 기억. ‘알리사’가 소년을 향해 계속해서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이름이 뭐냐니까. 마물한테 먹힐 뻔한 걸 구해줬는데 그 정도도 못 알려줘?
-누가 구해달라고 했어? 관심 끄고 갈 길 가라니까?
-그래? 알았어. 잘 있으렴.
알리사는 소년의 말에 선뜻 떠나려는 듯 이동 마법진을 그려냈다. 소년은 알리사가 정말 떠나려고 할 줄은 몰랐는지 사색이 되어 그녀를 붙잡았다.
-자, 잠깐! 진짜 가게?
-네가 가라며?
-여기 마물의 숲인데?
-그래서?
-…….
소년은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이 부끄러운지 선뜻 자신을 데려가달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고. 알리사는 그 사실을 뻔히 알고도 소년을 놀리고 있었다. 실비아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그 광경을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저 아이는 내가 죽고 난 이후로 어떻게 됐을까.’
첫 번째 삶. 마족과의 전쟁이 한창이던 때, 그녀는 연구에 필요한 재료를 구하기 위해 마물이 가득한 숲에 갔다가 저 소년을 만났다. 소년은 결국 자존심을 굽히고 자신을 따라왔고, 이후로 진영 내에서 심부름꾼 노릇을 하며 지냈었다. 연구가 막바지에 달했을 때쯤에는 신경이 날카로워졌던지라, 한참이나 소년을 만나지 않았는데…….
‘그렇게 될 줄 알았으면 죽기 전에 돈이라도 좀 챙겨줄걸.’
실비아는 새삼 그 사실이 안타까워 혀를 찼다. 어쨌든 자신이 구해온 아이였으니 약간의 책임감이 느껴져서였다. 실비아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에도 기억은 흘러갔다. 내내 미간을 찡그리고 있던 소년이 마지못해 입술을 달싹였다. 실비아는 그 입에서 나올 이름을 알고 있었다.
‘레오.’
그녀는 결말을 알고 있는 극을 관람하듯 따분하게 기억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온.
-응?
-……레온이라고, 내 이름!
소년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본 실비아가 눈을 크게 떴다.
-아아, 레오? 레오라고?
-아니, 그게 아니라! 당신 귀먹었어?
-그래, 레오야. 누나랑 같이 갈까?
-……아주 내 말은 듣지도 않는구먼. 그래, 내 이름은 이제부터 레오다. 됐어?
소년은 체념해서 중얼거렸고, 알리사는 마침내 소년의 항복 선언을 받아내고는 기분 좋게 웃으며 그와 함께 떠났다.
“……뭐야.”
한편, 그 자리에 홀로 남겨진 실비아는 주변이 점차 흐릿해진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방금 분명…….’
-클레온이라고, 내 이름!
‘클레온’이라고 했는데? 그녀가 혼란스럽게 눈을 깜박이는 것과 동시에, 시야가 급변했다. * * *
“……!”
눈꺼풀이 반짝 들리는 것과 동시에 폐부로 공기가 밀려들었다. 그 감각이 생소해 실비아는 잠시간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숨을 쉬는 행위에 익숙해져야 했다.
‘살았구나.’
그것은 감탄이 아닌 실망이었다. 짤막한 실망을 느낀 실비아는 이내 표정을 갈무리했다. 지난 99번의 삶 동안 이런 일이 워낙 비일비재했기에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실망이 가시자 잠시 물러나 있던 혼란이 다시 그 자리를 채웠다. 실비아는 자신이 깨어나기 직전 보았던 기억 때문에 적잖이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레오가 클레온이라고?’
분명히 자신은 그를 ‘레오’로 알고 있었다. 실제로 레오는 알리사를 따라 진영에 합류한 이후로도, 주변인들이 그를 레오라고 부를 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모두가 그 소년을 레오로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자신이 잘못 알고 있었던 거라고? 클레온은 분명 ‘마왕’ 알리사를 죽였던…….
“깨어났습니까.”
그때,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실비아는 흠칫 생각을 멈추고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란델?”
어둑한 방 안에 주홍색 촛불만이 일렁였다. 그 빛을 등지고 침대 곁에 앉아 있는 것은, 이상하게 얼굴이 많이 상한 것처럼 보이는 란델이었다. 실비아의 목소리에, 잠시간 말없이 침묵하던 그가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몸은 좀 어떻습니까.”
“몸, 은…….”
실비아는 그제야 자신이 등을 크게 다쳤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몸을 뒤척이며 일어나려 하자 란델이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아직 일어나면 안 됩니다. 오스턴의 마법으로 외상은 아물었다지만 후유증이 남았을 수도 있습니다.”
실비아는 그 말에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엎드려 있는 게 아니라 누워 있더라니.’
란델은 실비아가 움직이지 않겠다고 하자 머뭇대다가 손을 물렸다. 양손을 침대 위로 깍지 껴 맞잡은 그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란델과 함께 있으면서 이렇게까지 분위기가 가라앉은 건 처음이라 실비아는 어색하게 눈만 도르륵 굴렸다. 그러다가 불현듯 란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쓰러진 이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부쩍 초췌해 보이는 것이…….
“당신.”
다음 순간. 실비아는 무언가에 놀라 손을 뻗어 란델의 얼굴을 감쌌다. 그가 움찔하며 물러나려 했으나 실비아는 놓아주지 않았다. 희고 가는 손끝이 그의 눈가를 가볍게 쓸었다. 란델의 눈가는 어둑한 와중에도 확연히 드러날 정도로 붉어져 있었다.
“……설마 울었어요?”
“아닙니다.”
란델은 황급히 부정하며 몸을 뒤로 물리려 했다. 하지만 실비아가 몸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다급히 그녀를 막았다.
“일어나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당신 정말로 울었어요?”
“…….”
이어진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실비아는 순간적으로 저도 모르게 툭 내뱉었다.
“……왜?”
또다시 마음이 술렁거린다. 실비아는 인간의 마음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매 순간, 매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게 사람의 마음이고 감정이다. 제게 모든 걸 줄 것처럼 굴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싸늘한 얼굴을 하는 것도 보았다. 영원히 함께하자는 약속을 고작 반나절 만에 저버린 사람도 보았다. 실비아는 인간의 선의도, 그 마음의 영원함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이 깨어나지 못할까 봐.”
왜 자꾸만 이 남자만은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왜 란델 벨포르, 이 사람의 마음은 영원히 지금처럼 반듯하고 곧을 것만 같이 느껴질까. 실비아는 저도 모르게 도망치듯 란델의 얼굴에서 손을 물렸다. 하지만 란델이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에 제 얼굴을 기대는 것이 먼저였다.
손바닥에 닿아오는 체온이 뜨겁게 느껴졌다. 입술의 움직임, 숨결, 속눈썹의 팔랑임 등이 손바닥을 간질였다. 란델은 실비아의 손에 제 얼굴을 기댄 채로 그녀를 보며 애처롭게 웃었다.
“걱정했습니다, 정말로.”
그 얼굴, 감정, 목소리.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실비아의 속을 묵직하게 흔들었다. 그녀조차 당혹스러울 만큼 거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