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울렸다2021.05.17.
실비아는 정말이지 오랜만에 제대로 동요했다. 죽으려 했던 자신을 걱정했다는 말에 이미 사라지다시피한 양심이 아픈 것인지. 아니면 그토록 싸늘한 얼굴을 할 줄 아는 남자가 제 앞에서만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로운 얼굴이라서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늘 차분하던 속내가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의 본능은 무언가 위험을 감지한 듯이 ‘착각이겠지’라는 마음으로 동요를 덮어버렸다. 인간에게 영원한 마음이란 없다. 이 남자도 결국 몇 번의 배신과 절망을 겪고 나면 변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리고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
무의식중에 란델이 저처럼 감정 없는 얼굴이 된 것을 상상한 실비아는 애써 생각을 잘라냈다. 이윽고 평소와 다름없는 상태로 돌아온 그녀는 제 눈앞의 광경에 심각해졌다.
‘……뭐 저렇게 귀여운 짓을 해?’
란델은 눈을 처연히 내리깐 채 실비아의 손에 제 얼굴을 기대고 있었다. 그것이 마치 덩치 큰 개가 응석을 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인이 아프다는 이유로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이 구는 개.
‘얼굴만 보면 저 사람이 다친 줄 알겠네.’
실비아는 란델의 불그스름한 눈가를 바라보다가 미미하게 한숨을 삼켰다. 손끝으로 란델의 볼을 톡톡 두드린 그녀가 양팔을 벌렸다.
“자.”
“……?”
“거래하자는 건 아니고, 조금 추워서요. 체온 좀 빌려줄래요?”
사실 란델의 지시로 인해 방 안은 북부치고는 약간 더울 정도로 따뜻했다. 하지만 실비아는 뻔뻔한 태도로 그렇게 말했다. 울 것 같은 얼굴의 란델을 볼 때마다 마음이 심란해졌기 때문이었다. 잠시간 멍하니 실비아를 바라보던 란델은 이내 허허로운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거절하지 않고 침대로 올라가 실비아를 마주 끌어안았다.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번에는 란델이 안긴 듯한 모양새였다.
실비아는 제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란델의 등을 토닥이며 일부러 너스레를 떨었다.
“저번이랑 상황이 반대네요.”
“……그렇군요.”
“나는 누구처럼 이불로 묶어두지도 않고 아주 점잖네.”
“실비아.”
실비아가 이 상황에서도 ‘묶는다’에 강세를 두어 말하자 란델은 핀잔하듯 그녀를 불렀다가, 이내 웃어버렸다. 짓궂은 농담을 던지며 자신을 달래려는 실비아의 마음이 느껴졌다. 정작 크게 다쳐 사경을 헤맨 건 그녀이고, 그러한 상황을 막지 못한 잘못은 란델 본인에게 있었는데도. 그 조용한 배려에 마음이 아렸고, 감정을 숨기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자책이 일었다.
“……실비아.”
란델은 실비아가 정신을 잃은 내내 고민했던 말을 꺼내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다. 진작 생각을 정리해두었음에도 막상 말을 꺼내려 하자 목구멍이 턱 막힌 듯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품 안의 온기가 선연했기에 더욱 거부감이 들었다. 이 온기를, 웃음을 잃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실비아가 크게 다치기까지 했는데 속에 담아두기만 할 수는 없는 얘기였다. 결국 란델은 어렵사리 말문을 뗐다.
“마물을 모두 처리한 직후 플로레트 백작 내외께도 서신을 보냈습니다. 당신의 부상에 대해서.”
실비아는 그 말에 란델의 등을 토닥이던 손을 움찔 멈추었다.
‘……바로 달려오려 하실 것 같은데.’
상식적으로는 란델의 행동이 옳긴 했으나, 문제는 제 부모였다. 플로레트 백작 부부는 외동딸인 실비아의 일에 특히나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들이었다. 자신이 이따금 손끝만 베여도 눈물을 감추지 못했는데, 이렇듯 큰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곧장 북부로 달려오려 할 터였다.
-실비아!
-아가아아!
“…….”
생각만 해도 피곤했다. 실비아가 몰래 곤란한 표정을 짓는 사이 란델의 말이 이어졌다.
“다만 아직 오스턴이 개량한 결계석의 설치가 끝나지 않았고, 개량된 결계의 안정성도 확인되지 않아 당장 북부로 오겠다고 하시는 건 말렸습니다. 위험하니까요.”
“잘했어요. 정말로요.”
“하지만…… 당신 한 사람을 플로레트 영지까지 이동시키는 건 가능할 겁니다.”
“……네?”
실비아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그녀가 몸을 떼어 란델의 얼굴을 보려 했으나 란델은 그녀의 허리 뒤로 팔을 감은 채 얼굴을 들지 않았다.
“란델. 나 좀 봐요.”
실비아는 몸을 일으키려 애썼으나 애초에 힘부터 극명하게 차이 나는 두 사람이었다. 그는 실비아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작게 중얼거렸다.
“오스턴이 죽는소리를 내긴 하겠지만, 플로레트 영지는 수도 바로 옆에 붙어 있으니 거리상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이동 마법진으로 당신을 플로레트 저택의 침대 위로 옮긴다면 몸에 무리가 가지도 않을 거고…….”
“잠깐, 잠깐만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실비아는 당황해 란델의 말 중간에 끼어들었다. 그러자 란델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바람에 그녀는 얇은 잠옷 너머로 숨결이 내려앉는 것을 고스란히 느끼고는 흠칫했다.
“이번 일로 느꼈겠지만, 북부는 위험한 곳입니다. 솔직히 말해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은 아니에요.”
“…….”
“그러니 당신은…… 원한다면 앞으로 수도나 플로레트 영지에 머물러도 괜찮습니다. 당신이 원하면 곧장 오스턴에게 이동 마법을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실비아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란델은 침묵이 이어지는 사이에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게 옳다.’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실책이었다.
-그 보석은…… 제 드레스 끝단에 붙어 있었습니다. 레이스에 엉켜서요.
루베아 글레버는 자신이 실비아를 지혈하기 위해서 드레스를 찢어낼 때 보석이 바닥을 구르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드레스를 확인해보니 확실히 끝단의 레이스에 무언가와 엉킨 듯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자신에게 불리하게 적용될 것이 여실한 말이었지만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자신이 본 진실을 고했다. 란델은 그 말을 토대로 그녀를 조사했고, 그녀의 동선까지 샅샅이 되짚어 올라간 결과 한 하인의 존재가 드러났다. 그는 연회에 참석한 어느 가신의 하인이었다. 수사망이 좁혀지자 가신은 그 하인이 연회 중간, 입속에서 문제의 보석을 뱉어내는 걸 보았다고 실토했다. 행여 자신에게까지 의심이 미칠까 봐 지금껏 입을 닫고 있었다는 변명도 함께였다. 처음에는 저항하던 하인은 끝내 제 범행을 인정했다.
-사는 게 워낙 어려워서 말입니다. 길에서 처음 만난 남자였지만 이 일만 해내면 거금을 주겠다 하는데, 어떻게 거절하겠습니까?
하인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란델은 하인이 말한 ‘남자’가 최근 영지에 스며든 어둠 벌레 중 하나라고 확신하고 추궁을 이어갔지만, 그는 더 아는 것이 없었다. 결국 란델은 하인의 목을 효시하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해야 했다. 연회장에 들어선 이들은 모두 사전에 몸수색을 받았지만, 워낙 작은 보석인 데다가 그것을 입속에 숨겨 들어오려 할 줄은 몰랐기에 미처 막지 못했다. 어둠 벌레까지 영지에 스며든 상황이니 더 주의했어야 했는데.
-……안일했다.
란델은 차마 그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정작 첩자의 낌새라고는 보이지 않던 실비아를 의심하려 애쓰지 않고, 다른 곳에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그랬다면 실비아가 지금처럼 사경을 헤매는 일은 없었을 텐데. 란델은 실비아가 의식이 없는 내내 자책으로 밤을 지새웠고, 결국 그녀를 안전한 곳으로 보내주는 것이 옳다고 결론지었다. 결혼식 날의 습격도 그렇고, 연회장에서의 일도 그렇고. 지금껏 평화로운 삶을 살던 실비아는 자신과 엮인 이후로 벌써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게다가 앞으로 몇 번이나 이런 일이 반복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영지에 숨어든 어둠 벌레를 찾아낸다 해도, 켈베티아와 맞닿아 있는 이 땅의 특성 자체를 뒤바꿀 수는 없었다. 자신과 이 북부는, 그녀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일 뿐이었다. 란델은 씁쓸한 마음으로 그것을 인정했다. 그 후 최대한 여상한 태도로, 그녀에게 강요라는 느낌을 주지 않으려고 몇 번이나 말을 골랐다. 결국 덤덤히 말하는 것은 실패했지만, 란델은 진심이었다. 그는 실비아가 원한다면 곧장 그녀를 안전한 곳으로 보내줄 생각이었다. 가신들은 반발하겠지만, 그에게 공작 부인의 의무는 실비아의 안위에 비하면 하찮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원래부터 내가 감당할 일이었다. 그걸 실비아가 잠시나마 나눠 들어준 것뿐이고.’
란델은 속으로 그리 되뇌며 실비아의 결정을 기다렸다. 이윽고 실비아가 알 수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게 되면 공작 부인의 자질을 의심받을 수도 있는데요.”
“감히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성의 안주인으로서 해야 하는 업무는요?”
“당신과 결혼하기 이전에도 제가 일정 부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로 돌아가는 것뿐입니다.”
란델은 차분한 태도로 준비했던 대답을 늘어놓았다. 아무래도 해가 뜨자마자 오스턴에게 이동 마법을 준비하라고 일러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결계 개량에 이어서 바로 또 장거리 이동이냐고 성질을 부리겠지만, 어쩔 수 없지.’
오스턴은 절대 못 한다며 길길이 날뛰다가도, 돈을 충분히 챙겨주면 군말 없이 제 몸을 갈아 넣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수고비를 두둑이 챙겨주면 되겠지. 란델은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예산을 가늠해보았다. 그때 실비아가 그를 불렀다.
“란델.”
“예.”
“이제는 이곳이 내 집이에요.”
란델은 일순 숨 쉬는 것을 잊었다. 그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는 사이 뒤통수로 부드러운 손길이 닿아왔다. 사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실비아가 란델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녀는 더없이 잔잔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북부가 마음에 들어요. 델마와 사용인들도 좋고, 오스턴도 좋고, 당신도 좋아요.”
“…….”
“그러니까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요. 미안해하지도 말고.”
실비아는 란델이 북부를 떠나라고 했을 때 내심 심장이 철렁했다. 이곳을 떠났다가는 또다시 무료하게 시간을 죽이며 하루하루를 흘려보내야 한다. 실비아는 이 이상 삶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 삶이란 언제나 버텨내야 하는 것이었다. 짧고도 신기루 같은 즐거움, 기쁨 등을 위해서 기나긴 생을 버텨내기에 그녀는 이미 너무 지쳐 있었다. 그렇기에 위험한 일이 끊이지 않는 북부를 벗어났다가는 또다시 시간의 무게에 짓눌릴 것이 뻔했다. 차라리 이곳에서 실패할지도 모르는 죽음을 계속해서 시도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버티기 쉬웠다. 하지만 그 말을 날 것 그대로 꺼내놓을 수는 없기에 진실과 거짓을 교묘히 뒤섞었다.
‘……진심처럼 느껴지지 않았나?’
실비아는 란델에게서 오랫동안 답이 돌아오지 않자 슬슬 불안해졌다. 그녀가 눈을 굴리다가 그에게 말을 붙여보기로 하고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란델은 등의 상처를 피해서 실비아를 힘 있게 끌어안았다.
“……고맙습니다.”
“…….”
“그리고 미안합니다.”
란델의 목소리는 먹먹하게 잠겨 있었다. 실비아 본인의 목소리보다 훨씬 진정성이 짙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미안하다고 하지 말라니까요.”
“그래도요.”
“당신도 은근 고집 센 거 알아요?”
“부정은 안 하겠습니다.”
란델이 답하며 낮게 웃었다. 몸이 틈 없이 밀착되어 있었던지라 그가 웃자 몸의 울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란델의 웃음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듯해 굉장히 묘한 기분이었다.
‘……따뜻하네.’
실비아는 그의 온기가 싫지 않아 얌전히 안겨 있었다. 그러던 중 란델이 돌연 상체를 휙 세우더니 실비아를 이불로 돌돌 싸매고 몸을 일으켰다.
“그럼 쉬고 계십시오. 저는 주치의를 불러오겠습니다.”
무어라 대꾸할 틈도 없었다. 란델은 재빠른 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일견 다급하게까지 느껴졌다. 순식간에 방에 홀로 남은 실비아는 눈을 도르륵 굴리며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오…….’
불능은 아니었구나? 그사이, 실비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란델은 닫힌 방문에 등을 기대고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
하마터면 제게 마음도 없는 사람에게 달려드는 짐승이 될 뻔했다. 란델은 윌콧에게 주치의를 불러달라 전한 뒤, 곧장 제 방의 욕실로 향했다. 욕실 안에서 찬물을 들이붓는 소리는 그 뒤로 한참이나 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