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의외인 것들2021.05.20.
“아이고, 마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사용인들은 실비아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눈물까지 보이며 안도했다. 실비아는 그들의 반응이 조금 민망했다. 큰 부상이었던 것은 맞으나, 오스턴이 마법으로 외상을 치료해둔 덕에 그녀는 굉장히 수월하게 회복한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약하게 보여서 나쁠 건 없으니까. 평소에 이런 모습을 보여 놓아야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죽는다고 해도 쉽게 납득하겠지.’
실비아는 그리 생각하며 사용인들의 호들갑을 웃음으로 넘겼다. 하지만 아침부터 수많은 보약, 보양식 등이 식탁을 그득히 메우고 있는 것을 보고 곧장 정색했다.
“난 다 나았어요.”
“완전히 회복되려면 멀었습니다. 드셔야 합니다.”
“싫어요.”
“……이제부터 잠들 때 이불을 두르지 않고 포옹해도 좋습니다.”
“……포크 이리 줘요.”
실비아는 오로지 신의 눈을 속이겠다는 일념으로 눈물을 머금고 보약까지 모두 삼켰다.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트린 란델은 실비아에 의해 식당에서 쫓겨나면서도 연신 미소 띤 얼굴이었다. 다소 파란만장했던 식사가 끝나고, 란델은 결계석 설치를 위해, 실비아는 산책을 위해 바깥으로 나섰다. 주치의가 그녀에게 운동 삼아 저택 주변을 한 바퀴 돌 것을 권했기 때문에 떠밀리듯 나온 것이었다. 벨포르 공작성의 사람들이 울망거리는 눈을 할 때마다 어쩐지 선뜻 거절의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거절했다가는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쓰레기가 되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결국 정원을 두 바퀴째 돌게 된 실비아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다들 개인 줄 알았더니 여우였나?”
“뭐라고 하셨나요, 마님?”
“아. 아무것도 아니야. 신경 써줘서 고맙네, 델마.”
실비아는 점잖게 얼버무렸다. 고개를 갸웃하던 델마는 인자한 웃음과 함께 도톰한 숄을 건네고 한 걸음 물러났다. 저택 안에서 지내던 며칠 사이에 날이 꽤 쌀쌀해져 있었다. 실비아는 사양하지 않고 숄을 둘렀다.
‘흠.’
무의식중에 숄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던 실비아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내 상처를 응급 처치한 게 글레버 후작 영애라고 했었지.’
정신을 차린 후 란델에게서 들었다. 루베아 글레버가 당시 재빠르게 응급처치를 하고, 더불어 이어진 조사에서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입을 연 덕에 범인을 수월히 특정할 수 있었다고.
‘솔직히 의외네.’
실비아는 내심 혀를 찼다. 금색 눈이 냉랭한 빛을 띠었다. 루베아가 응급처치를 한 것이야 워낙 사건사고가 많은 북부에서 지내다 보니 관성적이었다고 해도. 자칫하면 자신이 이번 일의 배후로 지목당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진실을 고하다니.
‘괜히 입을 다물었다가 나중에 일이 복잡해질까 봐 그런 거겠지.’
그리 납득하며 당시의 기억을 되짚어 보던 실비아는 이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젠장, 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하면.
고통으로 인해 정신이 가물가물하던 때. 귓가에 낮게 떨어지던 욕지거리. 그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 글레버 후작이었다.
‘느낌이 좋지 않아.’
본능적인 꺼림칙함이었다. 실비아가 미간을 좁힌 채로 서 있다가 델마에게 무어라 말을 걸려던 참이었다.
“……아.”
루베아는 정원의 모퉁이를 돌다가 말고 실비아를 발견하고는 움찔했다. 순간적으로 난감한 기색을 띠었던 그녀는 이내 당황을 갈무리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공작 부인.”
“글레버 후작 영애.”
“쾌차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나야말로 영애가 신속하게 처치해준 덕에 회복이 수월했다고 들었네. 고마워.”
사실은 루베아의 치료로 인해 죽을 수 있는 기회를 날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하지만 실비아는 그런 기색을 일절 내비치지 않고 무구하게 웃었다. 그녀는 신의 눈이 닿아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불편을 티 낼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반면 그 사실을 모르는 루베아는 실비아의 웃음에 찔린 듯이 불편한 얼굴을 했다.
“아, 그…….”
무언가 내키지 않는 듯 여러 번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가 끝내 책을 읊듯 다다다 말을 쏟아냈다.
“저야말로 구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건강하신 모습을 보았으니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부인께서는 모쪼록 좋은 날을 오래도록 즐기다가 돌아가시길.”
“어? 어…….”
실비아가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한 사이,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완벽하게 예를 갖춘 루베아가 휙 몸을 돌려 멀어졌다. 잠시 어안이 벙벙해 서 있던 실비아는 곧 이성을 되찾고는 떨떠름하니 말했다.
“델마.”
“예, 마님.”
“혹시 글레버 후작 영애가 마법사던가? 방금 시간이 조금 빠르게 흐른 것 같았는데.”
“부끄러우신가 봅니다.”
“……부끄러움? 자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루베아 글레버와 부끄러움이라니. 정반대의 단어를 한데 모아놓은 것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실제로 본인이 그 말을 들었다면 질색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델마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 흐뭇하게 웃고만 있었다. 사촌끼리 아웅다웅하는 걸 구경하는 큰 어른의 얼굴이랄까. 실비아가 그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다가 본래의 목적을 상기하고는 아, 소리를 냈다.
“그러고 보니 그대에게 물을 것이 있는데.”
“들어가서 말씀하시지요. 바람을 오래 쐬셨습니다.”
델마가 인자한 미소로 권했다. 실비아는 사양하지 않고 따스한 실내로 자리를 옮겼다. 소파에 앉아 담요까지 두르고 나서야 대화를 재개할 수 있었다. 실비아가 진중한 얼굴로 물었다.
“글레버 후작이 란델과 꽤 친밀해 보이던데. 혹시 달리 계기가 될 만한 일이라도 있던 건가?”
“아…….”
델마는 순간적으로 난처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실비아는 그것을 못 본 체하며 조용히 그녀의 답을 기다렸다. 한동안 무언가를 고심하던 델마가 이윽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님께서는 선대 공작님께서 북부에 자리 잡으신 이유를 아십니까?”
“……아니.”
실비아는 적당히 대꾸했다. 그녀는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왕실이니 정치니 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사실상 버려진 지역이나 다름없던 북부에 왕족이 자처해 정착했다는 소식에 의외라고 생각했던 기억은 있으나, 그것이 다였다. 델마는 평소보다도 더욱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선대 공작님과 선왕께서는 각별한 형제지간이셨습니다. 하여 선대 공작님께서는 당신이 왕실에 남아 있다가는 하나뿐인 형제에게 누가 될 것이라며 북부로 자처해 오신 것이지요.”
아무리 우애가 좋은 형제라고 한들, 그들이 계승권을 지닌 왕족으로 태어난 이상 아무런 마찰도 없을 수는 없었다. 형제는 서로를 진심으로 위했지만, 주변에서 그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더 능력 있는 사람이 왕위에 오르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왕제시여, 당신께서 마음만 굳히신다면 저희는 기꺼이 당신의 손발이 되겠습니다.
선대 벨포르 공작, 즉 당시의 둘째 왕자는 문무를 겸비한 인재였다. 특히나 무력은 첫째 왕자를 뛰어넘을 정도였다. 하여 신하 중 둘째 왕자를 왕으로 옹립하려는 이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왕위에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둘째 왕자를 끊임없이 회유하려 들었고, 그는 결국 분란을 종식하기 위해 왕실을 떠나기로 했다. 첫째 왕자가 간곡히 붙잡았으나 그는 완고했다.
-저는 형님께 해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둘째 왕자는 끝내 로클렌의 성을 버리고 ‘벨포르’라는 새로운 성을 받아 북부에 정착했다. 이후로 그는 매일 사선을 넘나들며 마족을 몰아내는 데에만 힘썼다. 그로써 벨포르 공작의 의지가 굳건하다는 것을 확인한 신하들은 하나둘 첫째 왕자를 지지했고, 그는 수월히 왕위에 올랐다. 형제는 각자의 자리에서 행복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았다. 그리고 벨포르 공작 부부의 하나뿐인 아들, 란델 벨포르가 8살이 되던 해. 공작 부부는 마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북부가 발칵 뒤집혔지요. 벨포르의 이름 아래 하나가 되기 전, 북부를 다스리던 가문들이 주인님을 인정할 수 없다며 하나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으니까요.”
선대 벨포르 공작이 북부에 정착하기 전. 북부는 가문별로 제 영지를 지키기에도 급급했다. 그런 그들을 하나로 통합한 것이 선대 벨포르 공작이었다. 그가 가문들을 하나로 모은 후 북부가 훨씬 사람이 살 만한 곳이 되었음은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호랑이가 사라진 곳에서는 여우가 날뛰는 법. 선대 벨포르 공작 부부가 어리디어린 후계자 하나만을 두고 급작스럽게 사망하자, 본디 북부에 뿌리를 두고 있던 가문의 주인들이 이를 드러냈다.
-공자님께서는 너무 어리십니다.
-성인이 될 때까지 대리인을 두는 법도 있다고는 하나, 하루하루가 힘겨운 마당에 제대로 된 주인의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공자님께서 당장 전선에 나설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나이가 어려서. 약해서. 당장 북부를 이끌어 나갈 만한 능력이 없어서. 사람들은 제 욕심을 빛 좋은 변명들로 포장해 란델을 끊임없이 공격했다.
“그러던 중…… 주인님께서 사라지신 일이 있었습니다. 안 좋은 마음을 먹은 자들에게 해코지를 당한 건가 하여 다들 주인님을 찾아 나섰지요.”
델마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직도 그때의 일이 머릿속에 생생했다.
-도련님!
-도련님, 어디 계세요!
벨포르 공작성의 사용인들은 란델이 사라졌다는 말에 크게 자책하며 하루 종일 발에 피가 나도록 란델을 찾아다녔다. 부모의 죽음조차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을 여덟 살 어린아이. 그런 주인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델마 역시 가슴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노을이 지고, 밤이 깊을 때까지 란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사용인들은 시신이라도 찾아야 하지 않겠냐며 수색을 포기하지 못했다. 그들이 성에 들러 상황을 정비하고 재차 수색에 나서려던 차였다.
-……도련, 님?
누군가 열린 문 너머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 말에 벼락 맞은 듯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린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굳어졌다. 차마 숨을 쉬고 몸을 움직일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저, 저거 공자님 아니야?
-뭐? 공자님이라고?
-세상에, 어쩜 좋아…….
성문으로 곧게 이어진 길 한가운데. 길을 터주듯 양쪽으로 물러나 수군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피투성이의 어린아이가 반쯤 다리를 절다시피 하며 걸어왔다.
란델은 얼굴의 절반 이상이 피범벅이 되어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한 채였다. 그의 오른손에는 날의 반절이 날아간 검이, 왼손에는 마물의 사체로 보이는 것이 들려 있었다. 사람들, 사용인들 모두 머릿속으로는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란델을 부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작 여덟 살 된 아이의 것이라기에는 너무도 흉흉한 살기가 숨통을 조였다.
-이거…….
란델은 결국 제힘으로 사용인들의 앞까지 걸어와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내가, 잡았어.
-나도…… 지금 당장 북부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려고…….
란델은 힘겹게 말을 잇다가 말고 그대로 쓰러졌다. 사용인들의 앞에 서 있던 델마는 반사적으로 그 몸을 받아 들었다. 그 순간의 느낌은, 그 감정은 차마 말로 표현하지 못할 것이리라.
“……그날의 상황이 알려지자 영민들이 들고일어났습니다. 제 욕심만 채우려는 가주들을 비판하고 주인님을 지지하노라 목소리를 높였지요.”
평소에는 정치건, 다스리는 사람이 누구건 관심 둘 새도 없이 제 삶을 꾸려가기 바빴던 사람들이 분노해 일어섰다. 란델의 공작위 계승을 인정하라는 목소리는 날이 갈수록 커졌고, 종내에는 현왕의 귀에까지 닿았다. 현왕은 란델을 경계했으나 여론을 이기지 못하고 그를 인정했다.
-란델 벨포르의 공작위 계승을 인정한다. 또한 그를 열 살까지 내 아들의 배동으로 삼아 왕궁에 머물게 하고, 그동안 북부에 병사를 지원해주겠다.
왕은 란델이 열 살이 될 때까지 그를 보호하겠다는 변명 하에 그를 왕궁에 두고 감시했다. 란델이 왕궁에 머무는 동안, 북부의 남은 세력들이 또다시 꿍꿍이를 꾸미길 바랐던 것이나 애석하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주인님께서 공작위를 이어받으셨는데도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던 이들은 북부 사람들이 나서서 처리했습니다. 그때 앞장서서 귀족들을 하나로 단합시킨 이들 중 한 분이 글레버 후작님이시고요.”
델마가 말을 마치며 고맙다는 듯 설핏 웃었다.
“……얘기해주어 고맙네, 델마.”
하지만 실비아는 차마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