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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방심했다 (16/118)

16. 방심했다2021.05.24.

실비아는 델마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 내내 심란한 상태였다. 밤이 깊어 침실로 돌아온 그녀는 드물게도 침대에 눕지 않은 채 방 안을 서성거렸다.

16558807262134.jpg‘글레버 후작에 대한 믿음이 굉장히 두터운 것 같았지.’

특히나 란델에게는 글레버 후작이 더욱 각별할 것이다. 제멋대로 날뛰는 귀족들을 하나로 단결시키고, 그가 돌아올 자리를 닦아놓은 사람이나 다름없으니까.

16558807262134.jpg‘……대체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지.’

실비아는 미간을 찌푸린 채 침대 끄트머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인정하기는 싫었으나 그녀는 현재 란델을 걱정하는 중이었다.

16558807262134.jpg‘만약에 글레버 후작이 어둠 벌레들과 관련이 있다면 분명 상처받을 텐데.’

아름다운 얼굴이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실비아 자신이야 인간의 마음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아니 그의 배신이 그다지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란델은. 그 바보 같은 남자는, 틀림없이 상처받겠지. 자신의 사람들을 믿고 의지했던 만큼이나 깊게. 실비아는 낮에 델마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곱씹으며 심각한 얼굴을 했다. 그때 란델 또한 할 일을 끝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평소와 달리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있는 실비아를 보고 의아하게 말끝을 흐렸다.

16558807262154.jpg“실비아? 왜 누워 있지 않고…….”

란델이 고개를 갸웃하자 결 좋은 금갈색 머리카락이 그 움직임을 따라 사락 흐트러졌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실비아가 팔랑팔랑 손짓했다.

16558807262134.jpg“거기 서서 뭐 해요? 이리 와요.”

16558807262154.jpg“예?”

16558807262134.jpg“약속했잖아요. 오늘부터는 이불 없이 포옹하기로. 약속을 어기려는 건 아니죠?”

16558807262154.jpg“아.”

16558807262134.jpg“올라와요.”

실비아는 이불 아래로 들어가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흰 얼굴은 무구하기 짝이 없었다.

16558807262154.jpg“……하, 신이시여.”

란델은 잠시 한 손으로 눈을 가리고 천장을 보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순수한 얼굴을 하는 아내에게 ‘지금 본인이 얼마나 위험한 발언을 하는 건지 아느냐’라고 묻는다면 저는 미친놈이 되겠지요? 짧게 신을 찾은 그가 동요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신중한 몸짓으로 침대로 올라갔다. 실비아는 란델이 눕자마자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그를 끌어안았다. 란델은 하체가 밀착되지 않게 조심하며 그녀를 마주 안았다. 어쨌거나 약속은 약속이니까. 반쯤은 습관적으로 그녀의 손을 그러쥔 그가 미간을 설핏 일그러트렸다.

16558807262154.jpg“몸이 찹니다.”

16558807262134.jpg“그래요? 오전에 산책하고 돌아와서 내내 불을 쬐었는데도 그러나.”

16558807262154.jpg“회복에 힘쓰는 건 좋지만, 그래도 날이 쌀쌀하니…… 실비아?”

란델은 저를 끌어안고 있던 실비아의 손이 등을 더듬거리기 시작하자 당황해 숨을 들이켰다. 란델은 반사적으로 실비아의 어깨를 잡아채려던 손을 꾹 말아 쥐었다. 행여 회복도 덜 된 사람이 무리하게 될까 봐 쉽사리 건드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는 결국 산만 한 덩치, 마물의 머리뼈조차 으스러트리는 악력을 지니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

16558807262154.jpg“부인, 이게 대체 무슨.”

16558807262134.jpg“잠깐만 가만히 있어 봐요. 엄한 짓 하려는 거 아니니까.”

16558807262154.jpg“지금 이게 엄한 짓이 아니면, 읏…….”

얇은 가운 위로 섬세한 손길이 스쳐 갔다. 차라리 제대로 맞닿은 것이면 모를까, 애를 태우듯 신기루처럼 가볍게 스치는 손길이 더 고역이었다. 간지러움에 저도 모르게 신음을 뱉은 란델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목과 팔 근육이 긴장으로 인해 팽팽하게 달아올랐다.

16558807262154.jpg“실비아. 떨어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란델은 자신이 짐승과 다를 게 무어냐며 속으로 자책했다. 낮게 경고하는 그의 목소리는 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실비아는 그 말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그의 등을 더듬었다. 결국 란델이 힘을 빼고 실비아의 손목을 그러쥐려던 찰나. 그녀가 먼저 손을 멈췄다.

16558807262134.jpg‘여기…….’

실비아는 눈가를 미미하게 찡그렸다.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얇은 실크 가운 너머. 손끝에 우둘투둘한 감촉이 느껴졌다. 흉터였다.

16558807262134.jpg‘한두 개가 아니야.’

자잘한 흉터가 란델의 등 전체에 퍼져 있었다. 지금이야 손가락 크기 정도의 흉터라지만, 만약 어렸을 때 얻은 상처라면 그 당시 등의 절반을 뒤덮고도 남았을 터. 델마가 해주었던 이야기가 갑자기 실체를 가지고 제 앞에 나타난 느낌이었다.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머물 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서. 여덟 살의 나이로 마물의 앞에 뛰어들어야 했던 소년이.

16558807262154.jpg“……실비아.”

한편, 실비아가 움직임을 멈추자 그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란델이 한숨처럼 웃었다.

16558807290624.jpg-제가 주제넘었던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몇 시간 전. 저택으로 돌아오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델마가 어두운 얼굴로 사과를 건넸다. 그 덕에 란델은 델마가 실비아에게 어떤 얘기를 했는지 대강 알고 있었다. 지금의 그녀가 저답지 않게 시무룩한 얼굴을 하는 것도 같은 이유이겠지. 란델은 실비아가 아프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힘 있게 그녀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16558807262154.jpg“난 괜찮으니 그런 얼굴 하지 말아요.”

16558807262134.jpg“…….”

16558807262154.jpg“정말 괜찮습니다.”

실비아는 그때까지도 대답이 없었다. 란델은 상황에 맞지 않게 자꾸만 입술 새로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아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16558807262154.jpg‘걱정하는 건가?’

이러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솔직히 말해서 조금 기뻤다. 비록 실비아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 동정에 가깝다고 할지언정. 그녀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 기뻐서 마음이 간질거렸다. 그 순간. 묵묵부답이던 실비아가 돌연 란델의 품에 고개를 푹 파묻었다. 그는 벌어진 가운 틈으로 스치는 입술의 감촉에 크게 움찔했다.

16558807262154.jpg“부인?”

일순 뒷덜미가 아찔해지는 감각에 퍼뜩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가운의 끈이 다 풀려 있었다.

16558807262154.jpg“이게 무슨……!”

실비아가 자신을 걱정한다는 생각에 방심했다. 란델은 뒤늦게 제 실책을 깨닫고는 황급히 실비아를 떼어내 이불로 돌돌 싸맸다. 그녀는 언제 시무룩한 얼굴을 했냐는 듯 무표정한 태도로 혀를 쯧 찼다.

16558807262134.jpg‘위험했네.’

조금 전, 실비아는 란델의 등에 자리한 흉터를 더듬다가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야’라는 생각에 문득 정신을 차렸다. 정신이 드는 순간 본능의 경고도 함께 돌아왔다. 이대로 가다간 위험하다고. 몸이건, 마음이건.

16558807262134.jpg‘……나보다 몇백 살은 어린놈이.’

실비아는 자신이 자꾸만 새파랗게 어린 청년에게 평정이 흔들린다는 사실이 자존심 상했다. 그래서 약간의 심술을 섞어 란델을 떼어내려고 짓궂게 굴었던 것이었다. 그나저나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반응이 저런 거면 불능…….

16558807262134.jpg‘……음, 그건 아니었지.’

지난번의 일을 상기한 실비아는 제 생각을 정정했다. 한편, 란델은 행복한 생각에 젖어 있다가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기분으로 황당하게 물었다.

16558807262154.jpg“실비아, 방금 뭘……?”

그는 평생을 호화로운 저택에 틀어박혀 자란 아내가 뒷골목의 불량배 같은 얼굴로 혀를 차는 것을 목격하고 충격에 빠졌다. 그러자 실비아는 재빨리 표정을 바꾸고 뻔뻔하게 웃었다.

16558807262134.jpg“어머, 제가 뭘요? 그보다 방금 우리 분위기 좋지 않았나요? 계속하면 좋을 것 같은데.”

16558807262154.jpg“……안 되겠습니다. 이불 없이 포옹하는 건 다시 금지입니다.”

16558807262134.jpg“뭐라고요?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실비아는 강하게 항의했으나 란델은 먼저 거래를 어긴 건 그녀라며 꿋꿋이 표정을 풀지 않았다. 결국 실비아는 오늘도 이불에 말린 도롱이 벌레 신세를 면치 못했다. * * *

16558807262134.jpg‘글레버 후작을 조금 캐봐야겠어.’

간밤에 심술을 반쯤 섞어 란델을 덮치려 했던 실비아였지만, 그가 신경 쓰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물론 그녀는 그 사실을 부정하려 애썼다.

16558807262134.jpg‘조사를 핑계로 바깥으로 나돌아다니다 보면 사고에 휩쓸릴 가능성도 커질 테니까.’

실비아는 무감하게 제 행동을 합리화하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어차피 그녀는 곧 란델을 떠날 사람이었다. 서로를 위해서 자신이 그에게 정을 붙이는 것도, 그가 제게 정을 붙이는 것도 경계함이 옳다.

16558807262134.jpg‘최소한의 의무만 다하고 나면 의미 없어질 부부관계야.’

실비아는 본능적으로 그 생각을 반복해 되뇌었다. 그것은 위기감을 느낀 사람의 방어 본능과 같은 것이었다. 평정을 되찾은 실비아는 가만히 눈을 감고 복도의 벽에 등을 기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옆에 있던 문이 달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내던 여인은 복도에 서 있는 실비아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16558807305655.jpg“……공작 부인?”

16558807262134.jpg“좋은 오후, 글레버 후작 영애.”

실비아는 산뜻한 인사를 건네며 곱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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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베아는 갑작스럽게 제 앞에서 방긋방긋 웃는 그녀가 의심스러웠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16558807305655.jpg“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신지요.”

16558807262134.jpg“날이 좋아서 나들이를 가려고 하는데, 함께 갈 사람이 마땅치 않아서.”

16558807305655.jpg“죄송하지만 불편합니다.”

16558807262134.jpg“아, 목숨을 한 번 구해준 일로는 가까워질 수 없는 건가?”

16558807305655.jpg“……조금만 기다리시죠. 채비해 나오겠습니다.”

실비아가 천연덕스럽게 자신이 은인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자 루베아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그녀를 따라나섰다. 두 사람은 몇몇 사용인, 호위와 함께 바깥으로 나왔다. 루베아가 의아하게 물었다.

16558807305655.jpg“마차로 이동하지 않으시나요?”

16558807262134.jpg“오늘치 산책 대신이네.”

사실은 루베아와 단둘이 마차를 탔다가는 어색함만 가중될 테니, 사람들 사이에 섞여들어 불편함을 중화해보려는 속셈이었다. 우선 경계심을 낮춰야 글레버 후작에 대해 자연스럽게 떠볼 수 있을 테니까. 실비아는 호위로 따라나선 제프리와 함께 루베아보다 두 걸음쯤 앞서 걸으며 간간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이내 뜻밖의 광경을 목격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16558807290624.jpg“아이고, 이게 누구야! 우리 아가씨 아니야!”

거리의 상인들은 루베아를 보고 반갑게 아는 척을 했다. 루베아는 여전히 냉랭한 얼굴로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16558807305655.jpg“그대들은 여전히 무례해. 나는 그쪽 딸이 아니래도.”

16558807290624.jpg“우리가 언제 딸이라고 했나? 딸 같다고 했지!”

16558807290624.jpg“깐깐한 건 여전하구먼!”

상인들은 루베아가 무뚝뚝하게 대꾸한 말에도 움츠러들지 않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루베아 또한 말만 냉랭하게 할 뿐 그들을 대하는 태도는 정중했다. 상인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루베아는 문득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실비아를 발견하곤 얼굴을 슬쩍 구겼다.

16558807305655.jpg“왜 그리 쳐다보시는지.”

16558807262134.jpg“아니, 솔직히 의외라서.”

16558807305655.jpg“무엇이요?”

16558807262134.jpg“그대라면 이렇게 번잡하고 소란스러운 곳은 질색할 줄 알았거든.”

루베아는 대놓고 자신을 폄하해놓고 눈 하나 깜짝 않는 실비아의 태도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 쳤다.

16558807305655.jpg“저 또한 북부의 사람입니다. 이 땅을 다스리는 귀족 중 하나로서 최소한의 도리를 다하고자 하는 것이 뭐가 놀랍습니까.”

16558807262134.jpg“역시 의외라니까.”

16558807305655.jpg“지금 말 다 하셨습니까?”

16558807262134.jpg“농담도 못 하나?”

16558807305655.jpg“저희가 농담을 주고받을 만큼 친밀한 사이는 아니지요.”

깐깐하기가 란델에 버금가는 여자 같으니. 실비아는 내심 투덜거렸으나 지금은 루베아와 친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가판대에 놓여 있던 나비 모양의 머리 장식을 집어 들었다.

16558807262134.jpg“알았네. 사과의 뜻으로 이걸 선물하지.”

16558807305655.jpg“필요 없…….”

16558807290624.jpg“아이고, 이 상품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제가! 친히! 서부까지 가서 구해온 재료로 만든! 수제 머리 장식이랍니다!”

16558807305655.jpg“…….”

짜증스럽게 대꾸하던 루베아는 상인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상인은 그러한 기색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상품에 대한 설명을 줄줄이 늘어놓고 있었다. 실비아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델마를 통해 값을 치렀다.

16558807305655.jpg“……감사합니다.”

전혀 감사하지 않은 얼굴의 루베아가 머리 장식을 받아 들고는 새침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16558807262134.jpg‘귀엽네.’

실비아는 그 깜찍한 태도에 결국 옅게 미소 지었다. 첫 만남부터 웃는 얼굴로 사람을 살살 긁던 건 물론 괘씸했지만. 그녀보다 몇백 살이나 어린 아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리 괘씸하지도 않았다.

16558807262134.jpg‘물론 지금이야 내가 북부에 붙어 있을 핑계가 필요하니 기어오르는 걸 마냥 받아줄 수 없다지만…….’

실비아 본인이 죽고 난 후의 일까지는 그녀가 관여할 바가 아니었다. 그녀는 란델의 인생에 잠시 끼어든 사람일 뿐이다. 불청객인 자신이 사라지고 나면 본래 내정되었던 대로 루베아가 란델과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루베아는 충심이 지나칠지언정 악한 사람은 아닌 듯했고, 글레버 후작의 문제만 없다면 그녀의 가문은 란델에게 큰 힘이 될 테니까.

16558807262134.jpg“…….”

어느새 실비아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그녀는 의식적으로 껍데기뿐인 웃음을 재차 얼굴에 덮어씌우고는 걸음을 옮겼다.

16558807262134.jpg“이만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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