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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17/118)

17.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2021.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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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비아가 루베아를 이끌고 도착한 곳은 한적한 공원이었다. 언제 어디에서 마물이 나타나 헤집을지 모르니 눈에 띄는 장식이나 꾸밈은 없었지만, 바람이 선선하니 나들이하기 좋은 곳이었다.

1655880744064.jpg“두 분 말씀 나누시지요. 저희는 물러나 있겠습니다.”

델마와 사용인들은 돗자리를 펴고 준비해온 다과를 간단히 차리고는 거리를 두고 섰다. 호위인 제프리는 그보다는 가깝게 물러났다. 루베아는 사용인들이 멀찍이 물러난 후에야 나직이 입을 뗐다.

16558807440644.jpg“슬슬 말씀해주실 때도 되지 않았나요? 저를 이곳까지 부르신 이유 말입니다.”

실비아는 그 말에 차를 한 모금 넘기고는 잠시간 루베아를 바라보았다. 루베아 글레버는 단순히 ‘친해지기 위해서’라는 변명에 넘어갈 만한 사람이 아니다. 쓸데없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진실과 거짓을 섞어서 답변할 필요가 있었다.

16558807440648.jpg“영애가 연회장에서 했던 말이 마냥 틀리지는 않아. 나는 분명 북부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지.”

그리고 그건 오랜 세월을 산 실비아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적당한 웃음, 거기에 은근한 어조를 곁들여 말했다.

16558807440648.jpg“그래서 이제부터 알아가려 하네. 나보다 북부의 사정을 잘 아는 영애라면 내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되는데. 아닌가?”

16558807440644.jpg“제가 부인께 좋은 일을 할 것 같습니까?”

16558807440648.jpg“어차피 내가 살아 있는 한 그대가 공작 부인이 될 일은 없을 텐데. 그럴 바에는 나를 돕는 편이 현명하지 않겠어?”

언뜻 무례하다고도 비칠 수 있는 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루베아가 찻잔 너머로 실비아를 째릿 노려보았다. 실비아는 그 시선을 태연히 받아넘겼다.

16558807440648.jpg‘란델이 어둠 벌레와 관련 있는 가신을 아직 특정하지 못한 걸 보면 최근 출입 기록에는 문제가 없었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근래의 사건이 벌어지기 전부터 어둠 벌레가 북부에 들어와 있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최근의 출입 기록에 드러나지 않음은 물론이고, 내부의 조력자와도 얼마든지 만날 수 있겠지. 티 나지 않게 루베아의 반응을 살피던 실비아가 찻잔을 들며 운을 떼었다.

16558807440648.jpg“그러고 보니 부친과 퍽 친밀해 보이던데. 주변에 마물이 가득한 상황에서도 딸 걱정에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올 정도로.”

그녀는 시선을 비스듬히 내리깐 채 태연히 차를 한 모금 삼켰다. 치밀하게 계산한 행동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그 덕분인지, 루베아 또한 찻잔을 소리 없이 내려놓으며 덤덤히 답했다.

16558807440644.jpg“아무래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는 아버지께서 홀로 저를 키우셨으니까요. 활 같은 것도 직접 가르쳐 주셨던지라 자연스럽게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죠.”

글레버 후작가에 관해 따로 조사해본 적은 없는지라 실비아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16558807440648.jpg‘……딱히 무언가를 숨기는 기색은 아니야. 후작이 루베아 앞에서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은 건가?’

실비아는 의아함에 미간을 설핏 구겼다. 애석하게도 루베아는 미미하게 자랑스러운 기색까지 내비쳤다. 그녀는 진심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존경하고 있는 눈치였다.

16558807440644.jpg“제 아버지는 훌륭하신 분입니다. 공작님의 승계에도 큰 도움을 드렸고, 그 덕에 저희 가문에 대한 영민들의 신임도 두터운 편이죠.”

물론 그것이 결국 넘치는 자기애, 가문 자랑으로 이어지기는 했지만. 어깨를 펴고 자랑을 이어가던 루베아의 얼굴이 문득 어두워졌다.

16558807440644.jpg“하지만 그만큼 무리하고 계시죠. 요즘은 그래도 예전보다 나들이나 산책도 자주 하신다지만…….”

루베아는 작게 중얼거리다가 말고 정색했다.

16558807440644.jpg“그런데 제가 왜 이런 걸 부인께 말씀드리고 있는 거죠?”

16558807440648.jpg“……나인들 아나?”

16558807440644.jpg“설마 지금 제게 미인계라도 쓰시는 건가요?”

16558807440648.jpg“말은 바로 해야지. 나는 미인계를 쓰는 게 아니라 그냥 미인인 거네.”

16558807440644.jpg“……어이가 없어서 원.”

16558807440648.jpg“내가 할 말이야.”

실비아와 루베아는 서로를 마주 보며 나란히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쪽에 그림자처럼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프리는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생각했다.

16558807461055.jpg‘이상하게 두 분…… 닮으셨네?’

물론 그는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호위로서 현명한 처사였다. 한편 실비아는 루베아와 투덕거리는 와중에도 머리 한구석에서 그녀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16558807440648.jpg‘외출을 자주 한다, 라…….’

금색 눈이 가늘어졌다. 물론 루베아의 말대로 단순히 나들이, 산책일 수도 있으나 상대가 글레버 후작인지라 의심이 깊어졌다.

16558807461055.jpg“……!”

그때 제프리가 인기척을 느끼고는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들려 했다. 하지만 직후, 인기척이 가까워지는 방향을 바라본 그가 얼떨떨한 목소리를 냈다.

16558807461055.jpg“어? 주군?”

16558807440648.jpg“뭐?”

실비아는 뜻밖의 이름에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돌렸다. * * * 실비아가 루베아를 데리고 외출에 나선 그 시각. 란델은 오스턴과 함께 영지를 돌며 새로운 결계석을 설치하고 있었다.

16558807475272.jpg“…….”

한쪽에 서서 오스턴이 결계석을 교체하는 것을 응시하던 란델이 슬그머니 입을 뗐다.

16558807475272.jpg“오스턴.”

16558807475285.jpg“왜 부르십니까.”

16558807475272.jpg“……고민이 있는데.”

16558807475285.jpg“1분에 1브론즈.”

16558807475272.jpg“하여간 한 마디를 안 넘기지. 어?”

란델이 장난처럼 툴툴거렸다. 하지만 오스턴은 진심이었다.

16558807475285.jpg“…….”

16558807475272.jpg“…….”

오스턴이 계속해서 침묵하자 란델은 끝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까딱했다.

16558807475272.jpg“달아놔.”

16558807475285.jpg“초 단위로 기록해두겠습니다.”

16558807475272.jpg“참고로 이건 내가 아니라 내 친구 이야기다.”

16558807475285.jpg“예예, 말씀하십시오. 듣고 있습니다.”

오스턴은 심혈을 기울여 기존에 박혀 있던 결계석을 빼내며 대꾸했다. 란델은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고민하다가 최대한 말을 골라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16558807475272.jpg“친구에게…… 애인이 있는데. 그 애인이 육체적인 관계를 제외하고서는 친구에게 크게 관심이 없는 것 같다더군.”

16558807475285.jpg“흠.”

16558807475272.jpg“……꼭 상대에게 원하는 게 몸밖에 없는 것처럼 군다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나?”

제 입으로 객관적인 상황을 설명하자 두 배로 심란해졌다. 머릿속에 어젯밤의 상황이 재차 떠올랐다.

16558807440648.jpg-그보다 방금 우리 분위기 좋지 않았나요? 계속하면 좋을 것 같은데.

  실비아가 자신을 걱정하는 듯해 못내 기뻐하던 중 기습을 당해서일까. 그녀가 바라는 게 자신의 몸뿐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은 기분이라 충격이 꽤 컸다.

16558807475272.jpg‘……내가 그렇게 별로인가. 하긴, 필리아 그 녀석도 이 덩치 큰 바보를 어쩌면 좋냐고 허구한 날 한탄했지.’

란델은 조금 시무룩해진 채로 오스턴의 답을 기다렸다. 결계석의 먼지를 털고, 빈자리에 새 결계석을 단단히 고정하던 오스턴이 불쑥 물었다.

16558807475285.jpg“그 친구분께서는 애인을 진심으로 좋아하신답니까?”

16558807475272.jpg“어?”

16558807475285.jpg“하긴, 좋아하지도 않는다면 할 필요가 없는 고민이긴 하군요.”

16558807475272.jpg“어……?”

저도 모르게 반문부터 내뱉어놓고 한 박자 늦게 오스턴의 질문을 이해한 란델이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16558807475272.jpg‘좋아하는 감정이라고?’

그의 귓가가 화악 달아올랐다.

16558807475272.jpg‘내가 실비아를 좋아……하는 거였나?’

대체 언제부터? 란델은 오스턴의 질문으로 인해 새삼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실비아가 자신을 걱정하는 것 같아 기뻐하고. 그녀가 제게 바라는 게 몸뿐이라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섭섭하고. 그녀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관심이 가고, 웃음이 나고.

16558807475272.jpg‘맙소사.’

지금껏 실비아의 앞에서 민망할 정도로 어설프게 굴어놓고, 정작 이 감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이미 그녀가 왕의 첩자일 거라는 의심까지 저만치에 던져두고 있었는데도. 그것은 단순히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있다는 말로는 포장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란델은 결국 잠시 바닥에 쪼그려 앉아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심호흡을 했다. 자신이 실비아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새삼 지금의 기분이 이해되었다. 손에 가려진 그의 얼굴이 처연히 일그러졌다.

16558807475272.jpg‘당신이…… 당신의 의지로 나를 원했으면 좋겠다.’

‘부부의 의무’라는 이유가 아닌, 온몸과 온 마음으로. 실비아가 단순히 제 몸이 아닌, ‘란델 벨포르’라는 사람을 원했으면 좋겠다는 욕심. 그 욕심 때문에 지금껏 기분이 이렇게 불편했던 거였다.

16558807475272.jpg“머저리인가.”

란델은 멍청했던 스스로를 작게 욕하고는 얼굴을 가리던 손을 내렸다. 오스턴이 해괴한 것을 보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16558807475285.jpg“…….”

16558807475272.jpg“……큼.”

란델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자연스럽게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끊겼던 대화를 이어갔다.

16558807475272.jpg“그렇지, 아무래도.”

16558807475285.jpg“그러면 우선 선물부터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16558807475272.jpg“선물?”

16558807475285.jpg“자고로 뭐가 됐건 간에 뜻밖의 선물을 받으면 사람은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비싼 선물일수록 더더욱이요.”

16558807475272.jpg“…….”

16558807475285.jpg“어어? 지금 얼굴로 욕하시는 겁니까?”

오스턴이 발끈하자 찔린 란델이 황급히 표정을 가다듬었다. 뾰족한 눈으로 란델의 뒤통수를 노려보던 오스턴이 툴툴대며 몸을 일으켰다.

16558807475285.jpg“아무튼, 그런 방법으로라도 꾸준히 표현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같이 있어 주고, 챙겨주고. 상대방이 친구분의 몸뿐 아니라 마음도 원하게 될 때까지.”

오스턴이 다음 장소로 이동하자며 란델의 어깨를 툭 건드리고 멀어졌다. 란델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숨을 깊이 내쉬었다.

16558807475272.jpg‘그래, 노력하는 것밖에는 답이 없겠지.’

실비아에게 자신이 바라는 건 단순한 육체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했다. 그것을 위해서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어떤 노력이 필요하든 상관없었다. 란델이 자신할 수 있는 것은 끈질길 정도로 깊고 진실한 마음뿐이니까. 연녹색 눈이 결의로 빛났다. 란델은 몸을 돌려 성의 소식을 주기적으로 보고받는 기사를 찾아 물었다.

16558807475272.jpg“실비아는?”

16558807475285.jpg“아, 조금 전에 글레버 후작 영애와 공원으로 나들이를 가셨다고 합니다.”

16558807475272.jpg“할 일을 마치면 그리로 가지.”

결계석을 추가로 설치해야 할 장소를 머릿속으로 추려보던 란델이 싱긋 웃었다. 우선은 작은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지.

16558807475272.jpg“아내와 함께 돌아가겠네.”

  * * *

16558807461055.jpg“어? 주군?”

16558807440648.jpg“뭐?”

실비아는 뜻밖의 이름에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공원 저편에서 걸어오는 란델의 모습이 보였다.

16558807475272.jpg“실비아.”

무표정하던 란델은 실비아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부드럽게 웃었다. 차갑디차갑던 얼굴에 한순간에 온기가 감돌았다. 실비아는 그 모습을 묘한 기분으로 지켜보았다. 그의 표정 변화가 극적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16558807440648.jpg“……그게 다 뭐예요, 란델?”

그의 품에 들린, 목이 길쭉한 오리 인형과 꽃다발 때문이었다. 루베아 또한 그가 안고 있는 인형의 기이함 때문에 인사조차 잊은 채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실비아의 시선이 인형에 닿아 있음을 깨달은 란델이 머쓱한 얼굴로 그녀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16558807475272.jpg“당신이 전에 방이 춥다고 했던 게 기억이 나서. 껴안고 자기에도 좋고, 보온석이 들어 있어 따듯하다고 합니다.”

란델이 인형과 꽃다발을 내밀었다. 실비아는 무의식중에 선물을 받아 들면서도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녀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던 제프리는 란델의 어깨 너머로 오스턴과 시선이 마주쳤다.

16558807461055.jpg‘저게…… 뭡니까, 오스턴 님?’

16558807475285.jpg‘난 말렸다.’

16558807461055.jpg‘예?’

16558807475285.jpg‘친구 얘기라고 했을 때 알아챘어야 했는데, 돈에 정신이 팔려서…… 아무튼 난 말렸어.’

16558807461055.jpg‘그게 무슨 소립니까?’

제프리가 눈썹을 움찔거리며 시선으로 물었지만 오스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눈을 감아버렸다. 한편, 실비아는 황망한 얼굴로 품 안의 인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16558807440648.jpg‘앞으로는 자기 대신 이걸 껴안고 자라는 소린가? 만지지 말라는 소리를 돌려 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았으나 그녀의 예상은 죄다 암담했다. 독특한 생김새의 인형과 화사한 꽃다발. 어울리지 않는 두 조합이 묘하게 우스꽝스러웠다.

16558807440648.jpg“란델. 이거 혹시…….”

실비아는 제 추측이 맞는지 확인하려 시선을 들어 란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노을을 받은 그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것을 보자 막을 새도 없이 웃음이 새어 나왔다.

16558807440648.jpg“……고마워요.”

참 신기한 사람. 시선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들여다보일 것처럼 올곧고 투명한 연녹색 눈이 기이한 안도감을 주었다. 실비아는 본래 꺼내려던 말조차 잊고 해사하게 미소 지었다. 란델은 처음으로 마주하는 실비아의 그늘 없는 웃음에 한순간 숨조차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가, 이내 마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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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8807440644.jpg‘……세상에.’

그리고 란델의 얼굴을 본 루베아는 충격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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