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전야2021.05.31.
솔직히 말해서, 루베아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벨포르 공작 부인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았었다. 실비아에게 목숨을 빚진 것은 맞지만, 그것과 북부의 일은 별개다. 하여 정말 내키지는 않지만, 필요하다면 란델을 유혹해서라도 실비아를 제자리로 돌려보내려 했는데.
‘저 얼굴…….’
란델은 태어났을 때부터 그를 보아온 루베아조차 생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목도한 순간, 루베아는 당연하게도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저런 얼굴을 하는 사람의 마음을 돌린다는 게 가능한가?’
불가능. 질문을 떠올리는 것과 동시에 머릿속에 답이 그려졌다.
“돌아갑시다, 부인.”
란델은 그야말로 사랑에 빠진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 북부에서는 대개 연회와 같은 큰 모임이 벌어지면 마지막을 사냥으로 마무리하곤 했다. 영민들의 생활에 위협이 될 수 있는 맹수와 짐승들을 미리 없애고, 마물과의 전투에 대한 대비이자 훈련의 일환이었다. 같은 맥락으로, 이번 벨포르 성에서 주최된 연회의 마무리 또한 가신끼리의 소소한 사냥대회였다. 전통적으로 북부에서의 사냥대회는 총 두 개의 행사로 이루어진다. 그중 첫 번째는 전야제였다. 사람들은 가볍게 몸을 풀자는 의미에서 본 사냥대회 전날, 노을이 질 무렵 숲에서 사냥과 동시에 연회를 벌였다. 실비아는 전야제에 참석하는 이들을 위해 마련된 천막 아래에 앉아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요즘 남편이 좀…… 이상한 것 같아.”
정확히는 며칠 전, 루베아와 나들이를 한 날 이후부터의 일이었다. 그날은 참 희한하게 생긴 인형을 가져왔다 싶더니.
-선물입니다. 북부에만 자생하는 나무의 가지인데, 달여 먹으면 몸에 좋다기에…….
그다음 날부터 하루에 하나씩, 어딘가 기묘한 선물과 꽃을 가져오는 것이 아닌가. 일반적인 선물이 아니긴 했지만, 실비아는 오랜 세월을 산 만큼 심상찮은 전조를 잘 읽어내는 사람이었다.
-……설마.
그녀는 란델이 세 번째로 꽃다발을 선물한 날, 불길한 상상에 어깨를 떨었다. 실비아가 제 손에 들린 꽃다발을 보며 심란해하던 그때. 방 안으로 들어온 델마가 꽃다발을 발견하고는 활기차게 외쳤다.
-어머, 메리골드네요! 잘 말리면 약차로도 쓸 수 있답니다.
-그럼 그렇지.
‘설마 란델이 진심이 된 건 아니겠지’라는 불안감은 그 말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물론 실비아가 먼저 ‘좋아해보도록 노력하자’라는 말을 건네긴 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원활하게 초야를 치르기 위해 던진 미끼였을 뿐이다. 다행히 란델은 실비아를 제 앞마당에 있는, 후 불면 날아갈 민들레 홀씨 정도로 여기는 듯했다. 이렇듯 선물까지 가장해 약초를 전달하는 걸 보면.
‘어째 요즘 들어 걱정이 점점 심해지는 것 같단 말이지.’
한편, 어쩌다 보니 실비아의 옆에 앉게 된 루베아가 은은한 짜증이 배어 있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래서 지금 그 얘기를 굳이 제게 하시는 의도가 뭐죠?”
실비아가 짐짓 무구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친구 사이에 이 정도 얘기도 못 하는 건가? 그래도 우리 정도면 나름 친하다고 생각하는데.”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친구 한번 안 사귀어 보셨나요? 보통 이런 사이를 친구라고 하지는…….”
“아, 그래? 몰랐네. 친구가 하나도 없어서.”
“…….”
루베아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지금 여기서 ‘우리는 친구가 아니다.’라는 말을 하면 자신이 굉장한 쓰레기가 될 것만 같았다.
‘……공작님이 이상하다고 말할 처지가 아닌 것 같은데.’
저 정도면 천생연분 아닌가? 아무튼, 이상한 사람과 함께 있다 보니 그녀까지 정신이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고개를 저어 잡념을 털어낸 루베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실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영애도 전야제 사냥에 참여하는 건가? 직접?”
“계속 여기에 앉아서 부인의 남편 자랑을 듣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군요.”
“자랑이라니?”
“아무튼 가보겠습니다. 따라오지 마세요.”
“아, 잠깐만.”
그때 실비아가 손을 뻗어 루베아의 소매를 잡아챘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루베아의 목을 장식하던 리본을 매만져준 후 빙긋 웃었다.
“리본이 풀려 있기에.”
“……감사합니다.”
루베아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실비아는 잘 다녀오라며 손을 팔랑여 그녀를 배웅했다. 실비아와 헤어져, 활을 들고 전야제가 벌어지는 숲으로 들어온 루베아는 얼굴을 구겼다.
“하여간 거슬리는 사람.”
실비아와 함께 있다 보면 늘 이상하게 휘말린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필리아 세이크린과 더불어 암암리에 기가 세기로는 북부 제일이라고 여겨지는 루베아건만. 실비아는 단순히 기가 센 것을 넘어, 어딘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기묘한 위압감이 있었다. 루베아는 이내 혀를 쯧 차고는 사냥에 집중했다.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인 만큼, 아무리 몸 풀기용 전야제라지만 한 마리도 잡아가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쓸 만한 사냥감이 영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 봐야 하나?’
루베아는 오늘따라 운수가 참 별로라고 생각하며 숲의 깊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소리를 죽이며 주위를 탐색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찾았다.’
작은 기척을 감지한 루베아가 숨을 죽이고 기척이 느껴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풀 사이에 몸을 숨기고 나뭇잎 틈으로 바깥을 내다본 그녀는 의아함에 눈을 깜박였다.
‘아버지?’
짐승의 기척인 줄 알았는데, 시야에 들어온 익숙한 뒷모습은 분명 글레버 후작의 것이었다. 루베아는 사냥에 흥미가 없는 그가 이런 깊은 숲까지 들어온 것이 이상해 그를 부르려 했다. 하지만 곧바로 들려온 대화로 인해 그녀는 그대로 굳어졌다.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는 거겠지요.”
“당연하지. 지난번에 연회장에서도 보지 않았어? 아직 원하는 곳에 비틀림을 발생시키지는 못해도, 대략적인 위치를 예상하는 건 어느 정도 가능해졌다고.”
글레버 후작의 물음에 날카롭게도, 발랄하게도 들리는 목소리가 답했다. 루베아는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불길함에 본능적으로 숨을 멈추었다. 눈을 굴려 글레버 후작의 어깨 너머를 확인한 그녀가 경악으로 눈을 부릅떴다. 보랏빛 피부, 온통 새까만 눈 한가운데 길게 찢어진 붉은색의 동공.
‘……마족?’
글레버 후작의 앞, 허공에 유유자적 떠 있는 그는 틀림없는 마족이었다.
‘아버지가 어째서 마족을…….’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귓전을 가득 메웠다. 루베아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눈앞의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연회장? 비틀림의 위치를 예상해? 설마 연회장에서의 습격도…….’
한순간 머리를 스쳐 간 가정에 눈앞이 아찔해지는 듯한 충격이 그녀를 덮쳤다. 그 와중에도 후작과 마족의 대화는 이어지는 중이었다. 글레버 후작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주셔야 합니다.”
“아아, 알았다고. 나는 란델 그 빌어먹을 놈에게 복수하고, 너는 그놈 대신 북부의 주인이 되고. 하여간 인간들의 그 명예욕이라는 게 뭐길래.”
“당신 또한 란델의 목을 베어가 하급 마족 처지를 벗어나기 위해 나와 손잡은 것이 아닙니까.”
“건방지긴. 하여간 한 마디를 안 져요.”
마족이 혀를 끌끌 차며 허공에서 몸을 한번 빙글 뒤집었다. 그의 등 뒤로 삼각형의 갈퀴가 달린 꼬리가 살랑였다. 그 움직임에 루베아는 마족의 정체를 눈치챘다. 장난스러운 목소리, 언뜻 소년 같은 외양. 삼각 갈퀴가 달린 꼬리.
‘하급 마족 라폴드.’
루베아는 가만히 입술을 짓씹었다. 하급 마족 라폴드. 그는 몇 해 전, 비틀림을 넘어온 마족이었다. 다만 하급 마족답게 지닌 힘이 약해, 호승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란델에게 달려들었다가 죽기 직전에 도망쳤다.
-두고 봐라, 건방진 인간 놈! 다음엔 반드시 그 번지르르한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주마!
그 말을 남기고 사라진 후 돌아와서 덤볐다가, 다시 죽을 뻔해 도망치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이제는 북부의 꼬마 아이들도 ‘갈기갈기 라폴드’라고 말하면 그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알아들을 정도였다.
‘최근에 이상하게 안 보인다 했더니, 비틀림을 연구하고 있던 건가.’
루베아는 수풀 너머로 라폴드의 심장이 위치한 곳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무의식중에 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이라면…….’
지금 라폴드를 죽이면, 좌우지간 제 아버지가 마족과 손을 잡는 중죄를 저지른 일은 덮고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루베아가 그런 생각으로 갈등하는 사이 글레버 후작은 무표정한 얼굴로 경고를 늘어놓았다.
“실수라도 했다가는 당신도 저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다는 걸…….”
“잠깐.”
그때 라폴드가 돌연 미간을 찡그리며 후작의 말을 끊었다. 후작은 불쾌한 듯 얼굴을 일그러트렸으나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순식간에 적막이 찾아들었다. 라폴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분 나쁜 느낌이 드는데.”
그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루베아는 혹 자신이 기척을 냈나 싶어 숨을 참았다.
“……!”
그 순간 라폴드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붉은 시선이 정확히 루베아가 몸을 숨긴 곳에 꽂혔다. 그녀가 섬뜩함에 반사적으로 활시위를 당기려는 순간, 귓가에 속삭임이 스며들었다.
“이게 누구야. 망령인 줄 알았더니, 후작 딸이잖아?”
“헉.”
루베아는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터트리며 몸을 물렸다. 그 바람에 수풀이 흔들리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눈 깜짝할 새에 그녀의 지척까지 다가온 라폴드가 장난스럽게 눈을 휘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봐, 후작! 여기 당신 딸이 있는데? 반응으로 보아 우리 얘기를 다 들은 것 같네.”
“……뭐?”
후작은 순간 평정을 잃은 목소리를 냈다. 얼굴을 무섭도록 굳힌 그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수풀 사이에 주저앉은 루베아를 발견한 그가 거칠게 그녀의 어깨를 잡아챘다.
“이게 무슨……! 대체 네가 왜 여기 있는 게야!”
“아버지…….”
“아니, 됐다. 긴말할 것도 없지.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라폴드.”
“그래, 잘 가.”
“아버지!”
후작은 반항하는 루베아의 손목을 강하게 잡아채며 라폴드에게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라폴드는 재미있는 구경을 했다는 듯 실실 웃음을 흘리며 그들을 보내주었다.
“아버지, 잠시만요. 아버지!”
“따라와라.”
루베아는 후작의 손에 끌려가며 필사적으로 그와 대화를 시도하려 했다. 하지만 후작이 한마디 말도 없이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하는 데만 열중하자 결국 분통을 터트렸다.
“아버지! 지금 아버지께서 무슨 짓을 저지르신 건지 아세요? 대체 왜……!”
“조용히 하지 못해!”
루베아는 지금껏 늘 차분했던 후작이 낮게 윽박지르는 모습에 놀라 움찔 어깨를 떨었다. 후작은 주위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루베아의 손을 내팽개쳤다. 그가 씨근덕거리는 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쓸어 올렸다.
“무슨 짓이라니. 내가 내 것을 되찾겠다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단 말이냐.”
루베아는 후작의 눈이 욕망과 분노로 점철된 것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후작은 루베아의 양어깨를 그러쥐고 강하게 속삭였다.
“루베아. 벨포르가 나타나기 전까지 북부의 주인은 우리나 다름없었다. 글레버였단 말이다.”
“…….”
“하루 남았다. 딱 하루만 지나면 너도 더는 공작 부인 자리를 위해 전전긍긍할 필요 없어. 이건 다 우리를 위한 일이다.”
루베아는 차마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후작을 바라보다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제가 공작 부인 자리에 전전긍긍했던 것은 글레버와 북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함이었어요. 그런데 아버지께서 그 모든 것을 망치셨군요.”
하지만 욕망에 눈이 먼 후작은 끝끝내 냉랭한 얼굴로 루베아를 밀쳤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어차피 돌이킬 수 없다. 이 일이 바깥으로 퍼져나갔다가는 결국 너 또한 죽게 될 테니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도록 해라.”
후작은 그 말만 남기고는 몸을 돌려 사라졌다. 홀로 숲에 남겨진 루베아는 울분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머릿속에 후작이 남긴 말이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이 일이 바깥으로 퍼져나갔다가는 결국 너 또한 죽게 될 테니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도록 해라.
“…….”
한참이나 석상처럼 서 있던 루베아는 숲이 완전한 어둠에 잠기기 직전에야 발을 떼었다. 숲을 벗어나는 그녀의 발밑으로 새까만 그림자가 일렁이듯 바닥에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