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부질없지 않다2021.06.03.
전야제가 끝난 후, 사람들은 다음 날 있을 본격적인 사냥대회를 기대하며 벨포르 성으로 돌아왔다. 실비아는 란델이 오스턴과 만나는 사이, 먼저 옷을 갈아입고 침실로 돌아왔다. 달칵. 등 뒤로 방문을 틈 없이 닫은 실비아가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침대 끝에 털썩 걸터앉은 그녀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느른히 웃었다.
“그래서, 뭘 봤니?”
실비아의 눈에 붉은 기운이 한차례 일렁였다. 그러자 허공에 검은 그림자처럼 보이는 망령이 나타났다.
망령은 자신이 적진이나 다름없는 벨포르 성에 들어와 있는 게 불안한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기색을 눈치챈 실비아가 망령을 안심시켰다.
“괜찮아. 내가 미리 확인해봤는데, 마물 급의 어둠이 감지되지 않는 이상은 결계가 작동하지 않더라고. 그러니 안심하고 말해보렴.”
그 말을 듣고서야 망령은 불안해하던 것을 그쳤다. 실비아의 명령으로 루베아에게 붙어 있던 망령은 손짓 발짓을 해가며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설명했다. 들리는 말은 없었지만, ‘어둠’을 다룰 수 있는 실비아는 망령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급 마족 라폴드라……. 도와줘서 고마워. 이만 쉬어도 좋아.”
실비아가 다정히 망령의 어깨를 토닥였다. 망령은 수줍은 듯 허공을 몇 바퀴 뱅뱅 돌다가 이내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홀로 남은 실비아는 익숙하게 베개 위로 머리를 기대며 몸을 눕혔다. 양손을 모아 배 위에 얹은 그녀가 천장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어쩐다…….’
실비아의 끈질긴 방문으로 그녀는 루베아와 전보다는 가까워진 상태였다. 하지만 루베아는 여전히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녀의 입으로 글레버 가문 내의 일을 듣기는 요원할 듯해, 전야제 때 리본을 고쳐 묶어주는 척하며 망령을 몰래 붙여둔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수확이 있었다. 그것도 마족과 손을 잡은 반역이라는 엄청난 수확이. 하지만…….
“…….”
실비아는 두꺼운 벽 너머의 하늘을 올려다보듯 천장을 빤히 바라보았다. 불현듯 비틀린 미소를 지은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지금도 보고 계시죠?”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실비아는 멋대로 말을 이었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께서 제게 명했던 것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들지 말라는 것뿐이었으니.”
많은 인간이 다치고 죽을지도 모르는 음모를 알게 되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그 사실을 알자마자 어떻게든 참사를 막으려 힘썼을 것이다. 하지만 실비아는 평범한 인간이라 할 수 없었다. 수많은 생을 반복해오며 키운 것이라고는 무력감, 절망, 인간에 대한 깊은 혐오 등밖에 없었다.
‘어차피 부질없어.’
몸 바쳐 사람들을 마족에게서 보호하면 무엇 하나. 어차피 인간은 상대가 제게 위험하다는 판단이 들자마자 그 상대를 제거하려 들 텐데. 한없이 위선적이고, 한없이 이기적인 존재. 그것이야말로 인간이었다. 실비아는 오른팔로 눈가를 가리며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네요. 역겹다는 점이.”
애초에 실비아가 글레버 후작가에 대해 알아보려 했던 것은 란델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란델이 ‘알리사’였던 자신과 겹쳐 보일 때마다 마음이 욱신거렸다. 그래서 내심 다정한 그가 자신과 같은 일을 겪지 않기를 바랐다. 그것은 틀림없는 진심이었다. 하지만 란델이 ‘알리사’와 겹쳐 보이는 것만큼. 실비아가 ‘알리사’였을 때 느꼈던 비참함과 배신감, 원망 등의 감정 또한 함께 거세졌다. 실비아는 더는 ‘알리사’가 아니었다. 대마법사, 희망의 등불. 그 모든 이름은 동료들의 손에 떠밀려 켈베티아에 떨어질 때 함께 묻혔다. 실비아에게는 나서서 인간을 구해줘야 할 의무가 없다. 그것만은 신 또한 부정하지 못하리라. 그러니 실비아는 이번 일을 그저 지켜볼 생각이었다. 운이 좋아 이번 반역에 자신이 휩쓸려 죽을 수 있다면 더 좋을 테고.
‘……루베아는 어떻게 하려나.’
침묵할까? 아니면 연회장에서의 습격에 대한 단서를 제공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제 목숨을 걸고 나설까? 실비아는 개인적으로 전자이기를 바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 * * 다음 날이 밝았다. 실비아는 신에게 보란 듯이 화려하게 치장한 후 성을 나섰다. 하지만 정작 그에 영향을 받은 것은 란델인 듯했다.
“……부인.”
오늘도 바깥에서 실비아를 기다리고 있던 란델이 그녀를 마주하자마자 표정을 누그러트리며 웃었다. 실비아는 웃는 것만으로도 인상이 저렇게 변하는 것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기분 좋아 보이네.’
란델은 실비아의 손을 잡고 본 사냥대회가 이루어질 숲으로 향하는 내내 조금 상기된 얼굴이었다. 하긴, 부인이 이렇게 예쁜 데다가 친밀한 가신들과의 행사를 앞두고 있으니 들뜰 만도 하지. 문제는 저 기분이 곧 테이블에서 떨어진 화병처럼 산산조각 날 것이라는 점이지만.
‘잘생겨서 그런가?’
란델의 준수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없던 양심이 도로 자라나는 기분이었다. 실비아는 글레버 후작의 반역을 알면서도 침묵하고 있는 것이 조금 찔려서 일부러 천연덕스럽게 입을 열었다.
“란델.”
“예?”
“내가 예쁜 게 사실이긴 하지만, 계속 그런 얼굴로 있으면 나랑 하고 싶다는 거로 알 거예요.”
“무, 뭐, 제 얼굴이 왜…….”
란델은 실비아의 물음에 화들짝 놀라 손으로 얼굴을 더듬었다.
‘……따끈하군.’
뒤늦게 제 얼굴이 달아올라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겸허한 얼굴을 하며 슬며시 손을 내렸다. 그가 낭패한 심정으로 입술을 짓씹었다.
‘너무 티가 났나?’
란델은 자신이 실비아를 좋아한다는 것을 자각한 후, 최대한 그녀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란델과 실비아의 결혼은 왕의 주선으로 인해 이루어진 정략혼이다. 그것은 곧, 실비아에게는 란델을 좋아해야 할 의무가 없다는 뜻이었다.
‘물론 실비아가 서로 좋아하도록 노력하자고 하긴 했지만……. 그건 결국 육체적인 관계를 위해서 하는 말인 것 같았으니.’
가뜩이나 시작이 좋지 않았는데, 평생 얼굴을 보고 살아야 할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마음을 강요하는 건 쓰레기나 하는 짓이었다. 그래서 란델은 최대한 제 마음을 티 내지 않으면서 실비아가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티를 내지 않는 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지만. 란델은 자신의 당황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정색하며 말했다.
“실비아. 그런 얘기는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에요.”
“대체 어디가 날 위한다는 건데요?”
“……아무튼, 그런 말은 농담으로라도 하지 마십시오.”
“하여간 더럽게 깐깐하네.”
“방금 뭐라고 중얼거린…….”
“당신이 굉장히 선하고 좋은 사람이라고요.”
“아닌 것 같은데…….”
란델이 심란하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마차가 숲 입구에 도착했다. 란델은 언제 풀어진 얼굴을 했냐는 듯 엄숙한 영주의 얼굴을 하며 실비아를 에스코트해 마차에서 내렸다. 미리 도착해 있던 가신들이 그들에게 예를 갖췄다.
“벨포르의 주인을 뵙습니다.”
란델은 화답의 의미로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 같은 날까지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고, 다들 준비하지. 곧 대회를 시작하겠네.”
“알겠습니다.”
가신들 역시 저마다 미소 띤 얼굴로 흩어져 무기를 점검하고, 가족과 인사를 나누었다. 숲은 사람들의 기대와 승부욕 등으로 들썩였다. 란델은 실비아를 천막 아래까지 데려다준 후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 맞췄다.
“다녀오겠습니다, 실비아.”
“……다치지 말아요.”
란델 정도의 실력이라면 고작 하급 마족의 수작에 다치진 않겠지만. 그래도 글레버 후작이 끼어 있으니 조금 불안했다. 실비아가 끝내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툭 꺼내놓은 말에 란델이 눈을 크게 떴다.
‘걱정해주는 건가?’
절로 마음이 간질거리고 입꼬리가 올라가려 했다. 하지만 실비아는 제 ‘몸’이 다칠까 봐 걱정하는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또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았다. 란델은 결국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께서도 무사하셔야 합니다.”
그는 그 말을 남기고 사냥 대회의 개막식을 진행하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실비아는 란델이 멀어지자마자 눈을 움직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글레버 후작과 루베아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후작과 루베아는 주변 사람들에게서 조금 떨어져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역시, 분위기가 좋아 보이지는 않네.’
실비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을 지켜보는데, 후작에게 무어라 쏘아붙인 루베아가 몸을 돌리더니…….
‘음?’
실비아에게 다가왔다. 실비아는 당황해 후작과 루베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후작은 무언가 못마땅한 것처럼 루베아를 뒤따라와 그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사이 루베아가 실비아의 앞까지 다가왔다. 사냥복 차림의 그녀는 사무적으로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를 건넸다.
“공작 부인.”
“……어, 그래. 오늘도 참가하나, 영애?”
“예. 그래서 인사를 드릴 겸 손수건을 받으러 왔어요.”
“손수건?”
엘바레스에서 귀족 여인이 손수건을 건네는 것은 보통 큰 전쟁에 나가는 기사, 혹은 가족과 친구들을 배웅할 때였다. 이런 작은, 심지어 결속을 다지는 의미가 짙은 사냥대회에서까지 굳이 손수건을 건넬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란델에게도 손수건을 주지 않았는데. 실비아는 당황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지금이 사냥대회라는 건 둘째 치고, 왜 하필 나에게? 나는 그대의 가족도 아닌데…….”
“가족은 아니어도 유일한 친구이시잖습니까.”
“……친구? 누가?”
“공작 부인과 제가요.”
“친구 아니라며?”
“부정한 적은 없는 걸로 아는데요.”
루베아는 뻔뻔하게 턱을 치켜들고 손을 내밀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맡겨놓은 물건을 찾는 것처럼 보일 듯한 당당함이었다. 그 태도에 말린 실비아는 황당함을 금치 못하면서도 손수건을 찾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델마가 챙겨주었던 것이 하나 있었다. 실비아는 루베아가 내민 손 위에 손수건을 올렸다.
“여기 있네.”
“감사합니다.”
루베아가 싱긋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그 순간.
“……!”
손수건을 건네주는 짧은 틈. 루베아는 그 틈을 타 실비아의 손에 작게 접은 쪽지를 쥐여주고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손수건을 품에 챙겼다.
“원하는 사냥감이라도 있으신가요? 손수건을 받았으니 작은 동물이라도 잡아드려야 할 것 같네요.”
“……됐으니 가보기나 하게. 곧 대회가 시작할 것 같으니.”
“알겠습니다. 그럼 부인과 닮은 동물이라도 찾아보지요.”
루베아는 끝까지 우아하게 예를 갖추고는 멀어졌다. 글레버 후작은 의심을 감추지 못하는 눈으로 실비아를 힐끔거리다가 부리나케 딸을 따라갔다.
“…….”
그 모습을 본 실비아의 눈이 깊이 침잠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쪽지를 쥔 손을 꾹 말아 쥐었다. 그때 공터 저편에서 란델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사냥 규칙은 전야제와 같다. 각자에게 지급된, 이름이 적힌 띠를 자신이 잡은 사냥감에 감아놓으면 대회가 끝난 후 수거해 점수를 집계하는 식이야.”
듣기 좋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실비아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사람들 틈으로 그녀와 시선을 맞춘 란델이 짧게 웃어 보이고는 말의 옆구리를 찼다.
“그럼 출발하지.”
히히힝! 말이 앞발을 들며 짧게 울고는 숲으로 달려갔다. 란델의 뒤를 따라 오스턴과 소수의 기사가 숲으로 달려가자 가신들도 하나둘 그 뒤를 따랐다. 실비아의 호위인 제프리는 사람들이 떠나는 모습을 보며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다가 밝게 말했다.
“마님께서는 누가 우승할 것 같으십니까? 요즘은 사냥 결과를 두고 가벼운 내기를 하는 게 유행이래요!”
“…….”
“마님?”
제프리는 실비아가 제 손바닥을 빤히 들여다보며 아무 말도 없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하.”
실비아는 허탈한 웃음을 흘리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인간이 이럴 수가 있지.”
“뭐가 말입니까?”
“……아무것도 아니네. 그보다 시더스 경.”
“예?”
“갑자기 란델이 너무 보고 싶어서 말이야.”
“예에?”
공작 부부의 사이가 좋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듯 직접적으로 두 사람의 금슬을 접한 것은 처음이었다. 아직 소년미가 남아 있는 청년, 제프리가 얼떨떨한 탄성을 내지르며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실비아는 그런 말을 내뱉어놓고도 한 점 흔들림 없는 웃음을 띤 채 몸을 일으켰다. 금색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나도 대회에 참가해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