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비바람에 꺾이지 않는2021.06.07.
“따라와라, 루베아.”
글레버 후작은 사냥대회가 시작하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숲의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전날부터 후작의 감시에 시달렸던 루베아는 끌려가다시피 하며 그를 따라갔다. 그녀는 앞서가는 후작의 등을 보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굳이 나를 데려가는 것도 결국 나 또한 공범이라는 걸 되새겨주려는 거겠지.’
후작이 그러쥔 손목이 아프게 욱신거렸다. 하지만 루베아는 최대한 후작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끌려가는 중이었다. 만약 후작이 자신의 반항에 일을 더 빨리 벌이거나 한다면 그녀의 계획이 어그러지니까.
‘……쪽지는 전해졌을까.’
물론 루베아의 계획은 실비아가 란델에게 제 쪽지를 전해주었다는 가정을 전제로 세워진 것이었다. 「벨포르 공작님, 루베아 글레버입니다.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자면, 제 아버지가 마족 라폴드와 손을 잡고 반역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제가 이 사실을 눈치채자 공작님께 접근하는 것을 막는 바람에 부득이하게 공작 부인을 통해 이야기를 전합니다. 사냥대회가 시작되면 두 사람이 마물을 소환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러니 공작님께서 기사들과 도슬러 님을 대기시켜 반역을 막아주시길 간청드립니다. 저 또한 글레버 가문의 사람으로서 이번 일을 미리 알고 막지 못한 실책이 큽니다. 함께 책임을 질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내용은 사실이라는 걸 제 이름과 명예를 걸고 맹세합니다. 서둘러 주세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루베아 글레버」 글레버 후작은 루베아가 반역 사실을 알게 된 후로 공작과 접촉하려 할까 봐 전전긍긍하며 딸을 감시했다. 하여 루베아는 어쩔 수 없이 실비아에게 쪽지를 전할 수밖에 없었다. 힘없고, 어리고,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알려진 공작 부인에 대한 후작의 경계는 한결 덜할 테니까. 하지만 루베아는 실비아가 제 쪽지를 전해주었을 것이라 확신할 수가 없었다.
‘하긴, 그동안 내가 벌인 하극상이 얼만데. 쪽지를 확인하지 않고 버렸을지도.’
루베아는 자조하듯 웃었다. 그녀는 실비아에 대한 반감과 별개로, 그동안 자신의 행동이 주제넘었다는 사실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 첫 만남에서는 서슴없이 실비아를 비난했고, 그 이후로도 자신을 찾아오는 그녀를 끈덕지게 내치려 애썼다. 실비아가 자신의 무례를 너그럽게 봐주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우습게도 실비아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되어서야 그녀가 그동안 자신을 많이 배려했다는 것이 절절히 느껴졌다. 루베아는 자신이 이렇게 위선적인 사람이었나 싶어 또 한 번 비소를 지었다. 그사이, 약속 장소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라폴드를 발견한 후작이 정중히 인사했다.
“라폴드.”
“아, 후작. 왔군. 딸도 데리고 왔네.”
“행여 허튼짓을 할까 싶어서 말입니다.”
“자네도 참 독한 인간이야.”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글레버 후작은 그동안 힘을 주어 잡고 있던 루베아의 손목을 놓아주며 싸늘히 일갈했다.
“쓸데없이 도망칠 생각은 말아라.”
“…….”
루베아는 반항의 의미로 대답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눈에 가시가 돋친 것을 본 후작은 혀를 끌끌 차더니 품에서 작은 보석을 꺼냈다. 일전에 연회장에서 사용되었던 것과 같은, 이동 마법진이 새겨진 보석이었다.
“보석은?”
“여기 있습니다.”
“곧 신호가 올 테니 준비하지.”
“예.”
루베아는 초조한 기분으로 주먹을 그러쥐었다.
‘내가 쪽지를 전하자마자 그 소식이 공작님의 귀에 들어갔다고 해도 시간이 아슬아슬해. 제발…….’
루베아는 란델, 혹은 하다못해 그녀와 사이가 좋지 않은 오스턴 도슬러라도 나타나 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절망스럽게도 주위는 여전히 고요했다. 그때 하늘에서 붉은빛이 찰나 반짝였다. 어둠 벌레들과 약속했던, 비틀림이 발생했다는 신호였다. 하늘을 유심히 살피고 있던 라폴드가 흥분한 어조로 외쳤다.
“좋아, 후작! 마력을……!”
쐐액-! 그 순간. 허공을 가르며 나타난 화살이 글레버 후작의 손에 들려 있던 보석을 정확히 꿰뚫었다. 챙-!
“크윽!”
날카로운 파열음이 허공을 울렸다. 후작은 간발의 차이로 제 손을 꿰뚫으려던 화살을 피하며 비틀거렸다. 라폴드는 바닥을 구르는 화살과 보석의 잔해를 보며 격노했다.
“뭐야! 어떤 버러지 같은 새끼가……!”
“결계…….”
“……뭐?”
후작이 신음처럼 중얼거린 말에 라폴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후작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반투명한 결계가 그들의 머리 위에서부터 퍼져나가며 숲을 뒤덮었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하늘을 뒤덮는 결계. 그에 뒤따라 사방에서 가까워지는 살기까지. 불길함이 벼락처럼 등줄기를 관통했다. 라폴드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설마…….”
“가르넷 글레버.”
그리고 그 불길함은 끝내 현실이 되어 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듣기 좋을 정도로 낮은, 하지만 지금만큼은 흉흉한 살기로 인해 살벌하게 가라앉은 목소리. 루베아는 거짓말처럼 들려온 그 목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숲 안쪽에서 거대한 인영이 망토를 펄럭이며 나타났다.
“지금부터 당신을 마족과 동급으로 간주, 반역을 벌여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으려 한 죄로 체포하겠다.”
그는 기사단과 오스턴을 등 뒤에 둔 란델이었다.
*** 하루 전 저녁. 전야제가 끝난 후, 란델은 실비아를 먼저 방으로 돌려보내고 비밀리에 회동을 가졌다.
“어둠 벌레들의 본거지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면목 없습니다.”
수색을 명받았던 기사가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란델은 고개를 저으며 기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으니 고개 들어. 그들이 일을 벌이는 날에는 분명 신호가 있을 거다. 그 신호를 토대로 본거지를 알아낸다.”
“존명.”
“그리고 오스턴.”
“예, 주군.”
“네가 할 일은 결계를 쳐 그들이 빠져나갈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호위를 붙여줄 테니 결계를 유지하는 데에만 집중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오스턴이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내일, 우리의 목적은 글레버 후작과 더불어 반역에 협력한 이들을 모두 잡아들이는 것. 그리고 무고한 사상자를 내지 않는 것이다.”
란델은 더없이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선언했다.
‘글레버 후작…….’
그 이름을 생각하자 문득 또다시 가슴 한구석이 선득했다. 란델은 가만히 눈을 감고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사는 게 워낙 어려워서 말입니다. 길에서 처음 만난 남자였지만 이 일만 해내면 거금을 주겠다 하는데, 어떻게 거절하겠습니까?
연회장에서의 습격을 벌였던 하인을 붙잡았을 때. 란델은 하인이 ‘길에서 처음 만난 남자’라고 한 사람이 어둠 벌레라고 확신했다. 하여 하인을 살벌하게 추궁했으나 그는 정말 아는 게 없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결국 그는 별다른 소득 없이 하인을 처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란델은 포기하지 않고 남자의 행방을 찾으려 애썼다.
-추가 수당은 꼭 챙겨주셔야 합니다, 주군?
-달아놓으라고 몇 번을 말해. 그러니 탐색에만 집중해라, 오스턴.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오스턴을 끌고 거리를 헤매던 날이었다. 하인이 문제의 남자를 만났다는 거리와 그 주변을 샅샅이 수색하기를 며칠째. 연신 소득 없는 일에 지친 오스턴이 하소연했다.
-저는 정말 요즘 이 일 때문에 잠도 못 자고, 몸과 마음도 힘들고, 물론 마님을 그렇게 만들고 성에 불순한 물건을 들인 그놈은 찾아 죽여 마땅하지만…….
-알았으니 그만 좀…… 음? 글레버 후작?
란델은 더 이상 못 걷겠다며 제게 매달려 징징거리는 오스턴을 떼어내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거리 한쪽에 자리한 작은 술집 앞. 문양 없는 마차에서 내린 중년의 남성이 후드를 고쳐 썼다. 그가 후드를 고쳐 쓰는 찰나 드러난 얼굴을 알아본 란델이 고개를 갸웃했다.
-후작이 이 시간에 술집이라니, 별일이군.
글레버 후작은 평소 바르고 성실하기로 유명했다. 딸인 루베아의 교육을 위해 술과 담배도 입에 대지 않는다는 소문이 파다할 정도였다. 그런 글레버 후작이 대낮에 술집을 찾다니. 굉장히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란델은 혹시 제 가신에게 말 못 할 힘겨움이라도 있는 것인가 싶어 짧게 자책했다. 글레버 후작은 그가 공작위를 잃을 뻔했을 때, 앞장서서 다른 이들을 설득하고 다녔던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고민이 있다는 사실을 미리 눈치채고 살피지 못한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따라와라, 오스턴.
란델은 이제라도 그의 고민이 무엇인지 알아봐야겠다는 마음으로 후드를 눌러쓰고 후작의 뒤를 따랐다.
-……어딜 가는 거지?
하지만 술집으로 들어가는 줄 알았던 후작은 뒷문으로 빠져나가 골목길로 향했다. 란델은 의아했지만 다른 가게에 가려는 건가 싶어 오스턴과 함께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글레버 후작은 점점 더 어둡고 좁은 길로 들어갔다. 란델이 뒤늦게 이상함을 감지했을 무렵. 그는 모퉁이 너머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꼬리는 잘라냈나.
-사실 꼬리라고 할 것도 없지. 그저 돈에 제 목숨을 판 놈일 뿐. 아무튼 공작이 직접 놈의 목을 쳤으니 이번 일은 여기서 끝날 것이네.
란델은 일순 제 귀를 의심했다. 평소 자상하고 유쾌하던 글레버 후작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욕심과 오만으로 가득 찬, 뱀 같은 목소리.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너무도 다른 후작의 모습과 대화의 내용에 찰나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굳어졌다. 란델의 등 뒤에서 마찬가지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오스턴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충격에 젖어 있는 와중에도 대화는 이어졌다.
-일은 제대로 준비하고 있는 거겠지? 사냥대회 장소는 어디라던가?
-벨포르 성의 북쪽에 있는 숲이네. 좌표가 있으면 더 수월했겠지만, 란델 그놈은 내가 그렇게까지 저를 싸고돌았는데도 기밀이라며 좌표를 알려주지 않더군. 하여간 정이 가질 않는 놈 같으니.
오스턴은 순간적으로 그 말에 자신이 모욕당한 것처럼 반사적으로 이를 까득 갈았다. 그 작은 소음에 후작이 흠칫하며 경계심 서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금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오스턴은 한발 늦게 제 실책을 깨닫고는 황급히 투명화 결계를 자신과 란델의 몸에 덧씌웠다.
-누가 있나?
-……아니, 아무도 없군.
란델과 오스턴은 간발의 차로 후작의 눈을 피했다. 하지만 후작과 남자는 오스턴의 기척으로 인해 위험을 느낀 것인지 다음에 다시 만나자며 만남을 파했다. 오스턴과 란델은 두 사람이 사라질 때까지 움직이지 못하고 가만히 숨을 죽였다. 마침내 인기척이 모두 사라지고 나서야 오스턴은 결계를 거두며 머뭇머뭇 입을 뗐다.
-……죄송합니다, 주군.
-…….
란델은 오스턴에게 등을 보인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글레버 후작이 ‘어둠 벌레’인 것으로 보이는 남자를 만났을 때부터 내내 말이 없었다. 오스턴은 란델의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자신의 실수로 저들을 붙잡지도 못하게 되었으니 질책이 떨어질 것이라 여기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아니. 잘했다, 오스턴.
-……예?
오스턴은 반사적으로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 그러자 어느새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고 있는 란델의 얼굴이 보였다. 믿었던 이에게 배신당하고도, 그 상처를 감추며 애써 웃는 얼굴이.
-네 덕에 들키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잘했어.
-주군.
-내 감정에 대한 것은 부가적인 문제야.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저들의 계획을 알아내고 증거를 찾아 참사를 막는 것이다. 성으로 돌아간다.
란델은 그 말을 끝으로 오스턴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골목을 벗어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오스턴은 잠시간 그 자리에 서서 그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란델의 등은 그가 오스턴을 처음 만났을 때와 다름없이 넓고 단단했다. 마치 거센 비바람에도 무너지지 않을 성벽처럼. *** 한편, 란델이 전부터 그들의 뒤를 캐고 있다는 것을 몰랐던 글레버 후작과 라폴드는 당황했다.
“이, 이게 무슨!”
“젠장, 후작!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분명 저놈은 모른다고……!”
“어디서 기분 나쁜 목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여기 있었나, 라폴드.”
란델은 차게 비소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주위를 포위하듯 둘러싸고 있던 기사들 또한 발검했다. 루베아는 일련의 상황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말고 문득 의아해졌다.
‘……잠깐.’
그녀가 실비아에게 전했던 쪽지에는 분명 ‘라폴드’에 관한 내용도 있었다. 하지만 란델은 이곳에서 라폴드를 만난 게 의외라는 듯 말하고 있었다. 고운 미간이 설핏 일그러졌다.
‘그럼 공작 부인은 어떻게 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