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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아이는 안 돼요 (22/118)

22. 아이는 안 돼요2021.06.14.

루베아는 반역을 알리려 했던 공로로 후계자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다만 반역은 무거운 죄였으므로, 글레버 후작가는 백작가로 강등되었다. 루베아는 겸허히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가문 자체가 몰락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굉장한 자비였으니까. 시간이 흘러 루베아의 상처가 모두 회복된 날, 그녀는 공작성을 떠나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다.

16558808400597.jpg“그동안 돌봐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16558808400606.jpg“곧 있을 사교 시즌부터는 백작이겠군. 조심히 돌아가게.”

16558808400597.jpg“감사합니다.”

루베아는 란델에게 깍듯이 인사하고는 그 곁의 실비아를 돌아보았다. 잠시 실비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그녀가 그림 같은 자태로 예를 갖췄다.

16558808400597.jpg“부인께서도 부디 건강하시길.”

16558808400637.jpg“……그래.”

그 태도가 첫 만남과는 판이했던지라 실비아는 조금 묘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부부에게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인 루베아가 마차에 올라 떠났다. 연회에 참석했던 가신들은 사냥대회 직후 돌아갔으니, 그녀가 마지막이었다.

16558808400637.jpg‘당분간은 조용하겠네. 어차피 사교 시즌이 시작되면 다 의미 없어지겠지만.’

실비아는 묘하게 적막해진 성을 돌아보며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생각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깨졌다.

16558808400648.jpg“주인님, 마님. 플로레트 백작 부부께서 조금 전 영지에 들어서셨다는 소식입니다.”

16558808400637.jpg“아.”

잠시 잊고 있었는데, 결국 이렇게 되는군. 실비아는 제 부모의 반응이 눈앞에 선한 나머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 * * 아니나 다를까.

16558808400658.jpg“실비아! 몸은 좀 어떠니!”

16558808400663.jpg“아가아아!”

플로레트 백작 부부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눈물 바람으로 실비아를 끌어안았다. 실비아는 어쩜 이렇게 예상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반응이냐며 영혼 없는 웃음으로 그들을 마주 안았다.

16558808400637.jpg“오셨어요. 어머니, 아버지.”

16558808400606.jpg“다들 들어가서 말씀 나누시지요. 바람이 찹니다.”

란델은 걱정이 스민 눈으로 실비아와 백작 부부를 안으로 안내했다. 그는 백작 부부와 실비아를 응접실까지 데려다준 뒤, 식사를 준비하라 이르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백작 부인은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걱정을 와르르 쏟아냈다.

16558808400658.jpg“등을 다쳤던 건 좀 어떻니? 네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오려 했는데, 결계가 안정되지 않았다고 해서.”

16558808400663.jpg“끄흡흑끅.”

백작이 눈물로 그 말에 동의했다. 이후 실비아는 상처가 잘 아물었는지 확인해야겠다며 팔을 걷어붙이는 백작 부인을 말리기 위해 진땀을 빼야 했다.

16558808400637.jpg‘자고 싶다…….’

잠깐 사이 실비아는 십 년은 더 늙어 보이는 얼굴로 그리 생각했다. 북부에 온 이후로 여러 보양식과 보약을 챙겨 먹고, 활동량도 늘었다지만 그녀의 체력은 여전히 바닥을 기는 수준이었다. 침대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들 수 있을 만큼 피곤하다는 뜻이었다.

16558808400637.jpg‘이 또한 지나가리.’

실비아가 속으로 그 말을 되뇌며 이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길 바라고 있을 때였다. 간신히 눈물을 그친 백작이 훌쩍이며 입을 열었다.

16558808400663.jpg“실비아.”

16558808400637.jpg“네, 아버지.”

16558808400663.jpg“플로레트로 돌아올 생각은 없느냐?”

16558808400637.jpg“……네?”

찻잔을 집어 들던 실비아가 멈칫하며 되물었다. 백작은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아내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16558808400663.jpg“이번 반역도 그렇고, 저번에 연회장에서 습, 습…….”

16558808400658.jpg“숨 쉬어요, 여보.”

16558808400663.jpg“스읍격을 당했던 일도 그렇고. 아무래도 너에게 북부는 너무 위험한 곳 같아서 말이다.”

백작 부인 또한 걱정 그득한 얼굴로 크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실비아는 난감한 표정을 감추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16558808400637.jpg‘……겨우 란델을 설득했는데. 이번에는 부모님이 난리이시군.’

자신이 부귀영화, 명예, 하다못해 왕좌를 노리는 것도 아니고. 고작 저 하나의 죽음만을 바라는데 왜 그것마저 이렇게 쉽지 않은지 모를 노릇이었다. 아무튼, 북부를 떠나게 되면 죽을 길이 더욱 요원해진다. 실비아는 속내를 감추기 위해 최대한 화사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말에 거짓이 짙은 만큼 그녀의 웃음도 짙어졌다.

16558808400637.jpg“걱정하시는 건 충분히 이해해요. 다만 남편이 너무 좋아서 그이와 떨어져 지낼 자신이 없답니다. 전 여기에 있을게요.”

털썩. 식사 지시를 마친 후 막 문을 열고 들어오던 란델은 그 말에 다리에 힘이 풀려 문손잡이를 쥔 채 그대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실비아는 그 소리를 듣고서야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6558808400637.jpg“란델?”

16558808400606.jpg“실, 실비아. 방금 무슨…….”

란델은 조금 전의 일이 꿈인가 싶어 넋 나간 얼굴로 중얼거리다가 얼굴을 화악 붉혔다. 그 광경을 본 백작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16558808400658.jpg‘어머, 어머.’

사실 백작 부인은 성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수심이 가득했다. 나름 딸을 위해 고르고 고른 혼처였는데. 결혼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몇 번이나 위험한 일을 겪는 건지. 백작과 백작 부인 모두 말은 안 했지만 내심 본인들의 결정을 자책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걱정으로 딸의 인생을 너무 일찍 결정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들의 걱정과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단내가 풍겼다.

16558808400637.jpg“란델, 괜찮아요? 방금 바닥에 무릎을 박은 것 같은데.”

16558808400606.jpg“아닙……니다. 식사하러 가시죠.”

란델은 발끝까지 떨어졌던 심장을 주섬주섬 주워 올리고 몸을 일으켰다. 실비아가 좋아하는 것은 ‘란델 벨포르’가 아니라 그의 몸이라는 생각을 하자 집을 나갔던 이성이 돌아왔다. 장인과 장모 앞에서 바보 같은 모습을 보여 부끄러워진 란델이 잠시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16558808400637.jpg‘하체가 부실한 게 부끄러운 건가?’

저번의 일을 생각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은데. 실비아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모른 척해주기로 했다. 물론 란델이 알았다면 통곡하며 땅을 쳤을 생각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일행은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실비아의 부모님이 방문했다는 소식을 들은 요리사가 솜씨를 한껏 발휘한 음식들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맛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백작 부부는 식사보다는 실비아와 란델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다.

16558808400606.jpg“더 먹어요.”

16558808400637.jpg“……당신도 함께 먹어야죠. 몸에 좋다잖아요.”

16558808400606.jpg“그러니 저보다는 부인께서 드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실비아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제게 보양식 위주로 음식을 권하는 란델을 향해 웃는 얼굴로 이를 갈았다. 란델은 그것을 반쯤은 의도로, 또 반쯤은 실비아를 챙기고 싶다는 마음에 못 본 척하며 계속해서 음식을 권했다. 속사정을 모르는 백작 부부에게는 참으로 화기애애한 모습이었다. 평소라면 무례라는 생각에 진작 시선을 거두었을 백작 부인의 마음을 부풀릴 정도로.

16558808400658.jpg“저기.”

란델이 응접실에서 주저앉았을 때부터 눈을 빛내고 있던 백작 부인이 기대에 차 물었다.

16558808400658.jpg“두 사람, 혹시 아이 소식은 아직 없나요?”

16558808400606.jpg“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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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란델은 사레들렸다. 실비아는 생선구이를 썰다가 말고 그대로 굳어졌다. 백작은 포크를 떨어트렸다. 그러고는 란델을 죽일 듯한 얼굴로 노려보기 시작했다. 셋 중에서 가장 먼저 당황을 갈무리한 것은 란델이었다. 그는 가볍게 헛기침을 해 목을 가다듬고는 답했다.

16558808400606.jpg“때가 되면 생기겠거니 생각 중입니다. 너무 걱정은 마십시오.”

사실 아이는커녕 초야도 아직이지만, 차마 장인과 장모 앞에서 그에 대해 언급할 수는 없었다. 그때 란델은 문득 스쳐 간 가정에 아, 하고 탄식했다.

16558808400606.jpg‘혹시 실비아가 초야에 집착하는 이유도…… 아이 때문인가?’

연녹색 눈이 힐끗 옆자리를 곁눈질했다. 실비아는 란델의 시선이 제게서 떨어진 틈을 타 보양식을 다시 그의 앞으로 밀어두고 있었다. 나름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를 쓴 것 같으나 애석하게도 다 보였다. 그 말간 얼굴을 보자 이 가정이 상당히 합리적으로 느껴졌다. 하긴, 스물두 해 동안 저택에 갇히다시피 한 채 자란 아내가 제 몸을 탐하는 것보다야 이편이 더 말이 되지 않겠는가. 란델은 조금 미안해졌다.

16558808400606.jpg‘그럴 필요 없는데도.’

물론 후계가 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북부는 늘 위태로운 곳이고, 란델이 왕의 경계를 사고 있음을 고려하면 하루라도 빨리 후계자를 양성해야 했다. 하지만 실비아의 마음을 원하게 된 지금. 란델은 실비아가 자신과 같은 마음이 아니라면 더더욱 의무적인 잠자리를 가지고 싶지 않았다. 영주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에 양심이 조금 아프긴 했지만. 지금까지 영주로서 고군분투한 시간이 있으니 이 정도의 직무유기는 괜찮지 않을까 애써 합리화했다.

16558808400606.jpg‘방으로 돌아가서 말해줘야겠군. 후계자를 가져야 한다는 의무에 시달리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을 정리한 란델은 미안한 마음에 실비아의 앞으로 접시를 도로 밀어주었다.

16558808400606.jpg“드십시오.”

16558808400637.jpg“…….”

실비아는 분한 얼굴로 포크를 움켜쥐었다. 그러다가 손이 아파 금세 힘을 풀긴 했지만 말이다. * * * 식사가 끝난 후, 백작 부부는 손님방으로, 실비아와 란델은 공작 부부의 침실로 돌아왔다. 실비아는 종일 백작 부부에게 시달려 피곤했던 탓에 작게 하품을 하며 이불을 덮었다.

16558808400637.jpg“불 끌까요?”

16558808400606.jpg“잠시만.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란델은 망설임 끝에 실비아를 붙잡았다. 실비아는 의아함에 눈을 깜박이며 몸을 일으켰다.

16558808400637.jpg“뭔데요?”

아직 초야도 치르지 않은 사이에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니 적잖은 용기가 필요했다. 란델은 할 말을 고르고 또 고른 끝에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16558808400606.jpg“실비아.”

16558808400637.jpg“네.”

16558808400606.jpg“만약 당신이 후계자에 대한 압박감 때문에 초야를 바라는 것이라면……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16558808400637.jpg“……아이, 요?”

실비아는 드물게도 말을 더듬었다. 이불을 움켜쥔 손의 손마디가 그녀의 얼굴만큼이나 창백하게 변했다. 하지만 약간의 죄책감, 긴장 등에 매몰된 란델은 그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16558808400606.jpg“내게 후계자가 없는 건 사실이지만, 당신이 그걸 신경 쓸 필요는 없다는…….”

그가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 실비아가 불쑥 내뱉었다.

16558808400637.jpg“아이는 안 돼요.”

16558808400606.jpg“……예?”

16558808400637.jpg“……아.”

순간 반사적으로 말을 내뱉었던 실비아가 한발 늦게 낭패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은 탓에 잠깐이지만 평정을 잃었다. 속으로 자책한 그녀는 곧 재빠르게 표정을 바꾸고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16558808400637.jpg“말이 잘못 나왔어요. 배려해줘서 고마워요, 란델.”

16558808400606.jpg“…….”

16558808400637.jpg“잘 자요.”

실비아는 란델이 무어라 말할지 두려워 일부러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감아버렸다. 당황한 란델은 그녀를 붙잡을 생각도 못 하고 자신이 들은 말을 곱씹어보았다.

16558808400606.jpg‘분명 아이는 안 된다고…….’

실비아는 말이 잘못 나왔다고 했지만. 란델은 찰나 보았던, 겁에 질린 듯한 실비아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마치 상처가 있는 곳을 건드려진 것만 같은 얼굴.

16558808400606.jpg“…….”

란델은 이불에 파묻혀 보이지 않는 실비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커다란 손이 이불 위를 머뭇머뭇 배회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그녀에게 닿지 못하고 가만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조금 전의 그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묻고 싶다. 당신이 왜 그런 얼굴을 했는지 알고 싶다. 당신에 대해, 더 알고 싶다.

16558808400606.jpg‘하지만 이런 말을 하면 분명 부담스러워하겠지.’

실비아의 반응이 그린 듯 예상된다는 것조차 그녀와 자신의 온도가 다르다는 뜻이었다. 그 사실을 씁쓸해하던 란델은 이불을 쓰고 등을 돌리고 있는 실비아를 보고 누웠다. 한동안 그녀의 등을 바라보던 그가 나직한 한숨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실비아는 란델의 기척이 잦아들자 이불 속에서 안도했다.

16558808400606.jpg-만약 당신이 후계자에 대한 압박감 때문에 초야를 바라는 것이라면……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무저갱 깊숙한 곳에 가라앉아 있던 기억이 순식간에 되살아나는 기분.

16558808400637.jpg‘그만 생각하자. 그만 생각해.’

하지만 그것은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실비아는 결국 그림자처럼 짙은 기억에 그대로 삼켜졌다. 신에게 벌을 받은 직후, 두 번째로 시작한 삶의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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