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 빨간 개 (23/118)

23. 빨간 개2021.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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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8808556729.jpg-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데!

  처음으로 환생이라는 것을 해본 당시의 알리사는 굉장히 날이 선 상태였다. 그녀가 ‘제냐’이라는 이름으로 환생했을 때는 용사 클레온에 관한 이야기가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시간이 흐른 후였다. 대마법사였던 알리사는 행방불명되었다고 알려졌으며, 그녀는 사상 최악의 마왕으로만 기록되어 있었다. 동료들의 배신. 그로 인한 원망. 자신에게 벌을 내린 신에 대한 반발심. 그때는 분노로 눈이 멀어 객기를 버리지 못했던 시기라, 그녀는 신에 대한 반항의 의미로 끊임없이 죽음을 시도했다. 당연하게도 죽을 수는 없었지만, 알리사는 이를 악물고 끊임없이 위험에 뛰어들었다. 그러던 중, 사경을 헤맬 만큼 심한 부상을 입은 그녀를 구한 사람이 있었다.

16558808556733.jpg-이, 이봐요! 정신 차려봐요! 당신 이러다가 죽습니다!

16558808556729.jpg-……져.

16558808556733.jpg-네? 정신이 들…….

16558808556729.jpg-꺼지라고!

16558808556733.jpg-역시 부상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게 확실하군. 조금만 참아요!

16558808556729.jpg-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어?

  남자는 죽게 내버려 두라고 악을 쓰는 알리사를 둘러업고 마물 소굴이던 숲을 가까스로 탈출했다. 무예에 재주가 없었던 그는 숲을 다 나올 즈음에는 알리사보다 넝마가 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알리사는 이를 으득 갈고 남자에게 치유 마법을 사용했다. 전신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무는 것을 본 그가 놀란 듯 입을 벌렸다.

16558808556733.jpg-마, 마법사?

16558808556729.jpg-네가 뭔데 나를 살려!

16558808556733.jpg-컥!

  알리사는 남자를 멀쩡하게 만든 뒤 있는 힘껏 그를 걷어차고 두드려 팼다. 신에 대한 반항심은 여전했지만, 그에 따른 두려움 또한 분명히 존재했기에 죄 없는 인간을 죽였다가 벌이 가중될 것을 염려해서였다. 마법으로는 자기 자신의 부상을 치료할 수 없었으므로 알리사의 힘은 아프지도 않은 수준이었지만. 남자는 알리사가 힘이 빠져 쌕쌕댈 때까지 얌전히 얻어맞았다. 이윽고 알리사는 정말 곧 죽을 것 같은 상태로 숨을 몰아쉬며 으르렁댔다.

16558808556729.jpg-따라오지 마.

  그녀는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다시 마물이 가득한 숲으로 들어가려 했다. 남자는 기겁하며 알리사의 다리에 매달렸다.

16558808556733.jpg-아, 안 됩니다!

16558808556729.jpg-이거 안 놔?

16558808556733.jpg-위험하다니까요! 차라리 저를 밟고 가시, 크헉!

16558808556729.jpg-밟았는데 왜 안 비켜!

  남자는 알리사에게 얼굴을 짓밟히면서도 그녀를 놓지 않았다. 결국 힘이 빠진 알리사는 기절했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남자가 기어코 그녀를 살려놓은 것이었다.

16558808556729.jpg-그 망할 놈이…….

  알리사는 이후로도 얌전히 있지 않았다. 다 낫지 않은 몸을 이끌고 호수에 뛰어드는 일은 예사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남자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를 구했다. 알리사는 ‘아 정말 귀찮게 구네!’라고 윽박지르면서도 남자를 번번이 치료했다. 그러기를 몇 년. 알리사는 마침내 남자가 끈질기게 자신을 구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16558808556729.jpg-변태.

16558808556733.jpg-벼, 벼, 변태라니! 그게 고백하는 사람 앞에서 할 소리입니까? 저도…… 저도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억울해 죽겠는데!

  남자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꽃다발을 내민 채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심호흡을 하며 표정을 가다듬은 그가 한쪽 무릎을 꿇고 정중히 말했다.

16558808556733.jpg-당신이 죽고 싶어 하는 이유는 여전히 모르지만, 그래도 괜찮다면.

16558808556729.jpg-…….

16558808556733.jpg-나와 함께 살아주지 않겠습니까?

  알리사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남자를 응시했다. 지난 몇 년의 시도 끝에 깨달은 것은 ‘죽을 수 없다’라는 사실. 어쩔 수 없이 삶을 살아내야 한다면, 자신을 부양할 누군가가 있는 것이 나을 것이다.

16558808556729.jpg-그래.

  알리사는 그렇게 남자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물론 그는 굉장히 무능한 사람이었기에, 결국 알리사가 용병으로 활동하며 생계를 부양하다시피 해야 했지만.

16558808556733.jpg-제냐.

16558808556733.jpg-엄마!

  아이가 태어났을 때는 이런 삶도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생이 ‘벌’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16558808556733.jpg-이번 토벌은 위험하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꼭 가야겠어요?

16558808556729.jpg-괜찮다니까. 집이나 잘 지키고 있어. 줄리엣 밥도 잘 챙기고.

  알리사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적당히 실력을 숨긴 채 마법사 용병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꽤 먼 곳에서 마물 토벌 의뢰가 들어왔다. 보상이 좋았기에 알리사는 남자의 걱정을 무릅쓰고 토벌을 떠났다. 하지만 그것은 알리사가 활동을 시작한 이후 그녀에게 일감을 빼앗긴 용병들이 꾸민 함정이었다. 알리사가 떠난 사이 용병들은 집을 습격했고, 남자와 줄리엣을 납치했다. 그들에게 만들어주었던 장신구가 깨진 것을 느끼고 곧장 귀환하긴 했으나. 그녀가 숨겼던 실력마저 모조리 드러내며 그들을 찾았을 때는 이미 그들의 숨이 끊어진 후였다.

16558808556729.jpg-……아.

  동료들에게 배신당했을 때의 충격도 그때의 심정에는 비할 수 없었다. 알리사는 넋을 놓고 장례식을 치른 후, 남자와 아이의 옷가지를 끌어안고 집에 틀어박혔다. 그러나 그녀가 가족을 찾기 위해 잠깐이나마 본 실력을 드러냈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

16558808556733.jpg-대단한 마법사라지. 내 밑에서 일해 보는 것은 어떻겠나?

16558808556733.jpg-다른 이들이 제시한 급여의 두 배를 주겠네. 내게 충성하게.

  알리사에 대한 소문을 접한 귀족 혹은 왕족은 그녀를 제 수하로 들이기 위해 경쟁했다. 그녀가 더는 일을 할 마음이 없다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알리사는 결국 다른 이들에게 ‘제냐’라는 무기를 빼앗길까 걱정한 하급 귀족의 손에 죽임당했다. 그토록 바라던 죽음이었건만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세 번째 생에서도, 그다음 생에서도.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며 다가오는 이성은 꽤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않았다. 관계를 쌓지도, 아이를 만들지도 않았다. 또다시 상실의 고통을 겪을 바에는 철저히 혼자가 되는 것을 택한 것이다. 이제는 실비아 플로레트 벨포르가 된 그녀의 마음속에는 무수한 생채기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깊은 상흔을 남긴 것이 두 번째 삶의 일이었다.

16558808622289.jpg-두 사람, 혹시 아이 소식은 아직 없나요?

16558808622299.jpg-만약 당신이 후계자에 대한 압박감 때문에 초야를 바라는 것이라면……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해서 백작 부인과 란델이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차마 평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부부로서 최소한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어차피 자신은 죽을 사람이라는 생각에 그 ‘의무’에 아이라는 문제가 포함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더 정확히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기에 잊었다.

16558808622304.jpg‘다 지난 일이야. 어차피 란델과 잠자리를 갖을지언정 아이는…… 생기지 않게 할 거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실비아는 속으로 그리 되뇌며 자신을 다독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벽녘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 * *

16558808622289.jpg“또 오마. 그때까지 몸조심하고.”

16558808622304.jpg“조심히 가세요, 어머니. 아버지도요.”

플로레트 백작은 왕성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해야 했으므로 하룻밤만 머물고 돌아가야 했다. 부부는 떠나기 전 실비아를 번갈아 포옹했다. 백작은 딸을 힘 있게 끌어안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16558808622378.jpg“실비아. 결혼식 날에도 말했지만, 힘들다 싶으면 언제든 돌아오거라. 알겠지?”

16558808622304.jpg“……네.”

이렇듯 백작 부부의 선연한 애정을 정면으로 맞닥뜨릴 때마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이 감정은 죄책감인 걸까, 아니면 버거움인 걸까. 실비아는 꽉 잠긴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하고는 두 사람을 배웅했다. 그녀는 오스턴의 이동 마법진을 통해 사라지는 마차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16558808622304.jpg“란델은?”

16558808556733.jpg“마물이 출현하지 않는다면 오늘은 성에서 업무를 볼 예정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델마가 답했다. 간밤의 일 때문인지, 실비아는 란델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불편해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16558808622304.jpg“곧 데뷔탕트 연회를 열어야 하니 시장에 나가봐야겠어. 채비해주겠나, 델마?”

16558808556733.jpg“필요한 물건이 있으시면 상인을 성으로 부르겠습니다, 마님.”

16558808622304.jpg“아니야. 내가 직접 둘러보고 싶어서 그러네.”

델마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호위인 제프리를 불러오겠다며 물러갔다. 실비아는 혹시나 자신의 외출 사실을 들은 란델이 찾아올까 싶어 제프리가 도착하자마자 도망치듯 성을 벗어났다.

16558808638723.jpg“마님, 괜찮으십니까?”

제프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 호칭에 지나가던 사람 몇이 그들을 호기심 깃든 눈으로 돌아보았다. 오랜만에 옛 기억을 떠올려서일까. 오늘따라 사람들의 시선이 유달리 거북했다. 한 손으로 후드 자락을 더 깊이 끌어 내린 실비아가 부탁했다.

16558808622304.jpg“……경. 바깥에서는 나를 가명으로 부르게. 뭐든 괜찮으니까.”

16558808638723.jpg“예? 어떻게 그런!”

16558808622304.jpg“괜찮아. 내가 공작 부인인 것을 알면 사람들이 불편해하지 않겠나.”

16558808638723.jpg“알겠습니다.”

다행히 제프리는 그 변명에 금세 수긍했다. 실비아는 사람들의 시선이 가신 후에야 편하게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한결 나아진 그녀는 복작거리는 시장 거리를 둘러보며 꽃과 장식 등을 살폈다.

16558808622304.jpg‘데뷔탕트라.’

실비아는 하얀 안개꽃을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곧 데뷔탕트 무도회와 더불어 북부의 사교 시즌이 시작된다. 본래라면 데뷔탕트는 왕궁에서 치르는 것이 원칙이지만,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북부는 예외였다. 북부에 거주하는 귀족 영애들 한정으로, 그들은 벨포르 성에서 여는 데뷔탕트 무도회에 참석해도 왕성에서 데뷔탕트를 치른 이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16558808622304.jpg‘아무리 생각해도 결혼 상대를 잘못 고른 것 같아. 남편이 일을 너무 열심히 해도 문제군. 도저히 죽을 틈을 잡을 수가 없으니.’

실비아는 결계가 한층 안정되었다며 기쁘게 떠드는 사람들을 보며 불만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사야 할 물건은 없었으나 성으로 돌아가기가 싫어 거리를 서성일 때였다.

16558808556733.jpg“비켜!”

거리 저편에서 소란이 가까워졌다. 실비아는 제프리와 얼굴을 마주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16558808622304.jpg“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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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8808622304.jpg“옳지.”

‘마님’이라고 할 뻔한 제프리는 실비아의 눈총을 받고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실비아는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소란이 이는 쪽으로 향했다.

16558808556733.jpg“이익, 비키라니까!”

험악하게 얼굴을 구긴 남자가 막무가내로 사람들을 헤치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를 커다란 후드를 눌러쓴 여인이 쫓고 있었다.

16558808556733.jpg“저놈! 누가 저놈 좀 잡아주세요! 소매치기야!”

여인의 목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제프리가 어깨를 움찔할 정도였다. 실비아는 좋은 목청이라며 감탄한 후 고개를 기울였다.

16558808556733.jpg“세상에, 무슨 일이래요?”

16558808556733.jpg“소매치기래요!”

16558808556733.jpg“어머, 어쩜 좋아.”

사람들은 여자의 외침을 들었는지 수군거렸다. 몇몇 사람이 나서서 남자를 붙잡으려 했지만, 워낙 덩치가 있는 데다가 힘이 세서인지 아무도 그를 막아서지 못했다.

16558808622304.jpg‘분풀이 상대 정도는 되려나.’

실비아는 기분도 좋지 않았는데 마침 잘되었다며 흠, 하고 웃었다. 그녀가 제프리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자 그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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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8808622304.jpg“왜 그렇게 놀라? 그나저나 경, 저 소매치기범. 잡아 오게.”

16558808638723.jpg“예?”

16558808622304.jpg“우리에겐 어려움을 겪는 영민을 도와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어, 골목으로 들어가는데?”

16558808638723.jpg“헉!”

어딘가 고장 난 것처럼 버벅대던 제프리는 그 말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소매치기범은 사람들을 뿌리치고 어둑한 골목길로 사라졌다. 그는 실비아와 골목을 번갈아 바라보며 갈팡질팡하더니 이내 입술을 깨물고 신신당부했다.

16558808638723.jpg“마님, 저기 보이시죠? 저기가 경비대 건물입니다. 마님께서는 경비대에 가서 협조를 요청해주십시오. 꼭 그 안에 계셔야 합니다.”

16558808622304.jpg“알았어. 그러니 가보게. 이러다가 놓치겠어.”

실비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프리는 재빨리 소매치기범을 쫓아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그가 사라지자마자 경비대 건물을 뒤로하고 지척에 있던 다른 골목으로 들어갔다. 후드에 가려진 금색 눈동자에서 붉은 빛이 반짝였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그림자에서부터 검은 망령이 연기처럼 피어났다.

16558808622304.jpg“방금 그 사람, 어디로 갔니?”

제프리는 아마 얼마간 길을 헤맬 것이다. 자고로 뒷골목이란 그와 같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니까. 하지만 망령의 눈은 어디든 닿아 있다. 실비아는 금세 소매치기범의 위치를 알아낸 망령에게 명령했다.

16558808622304.jpg“일어나려 할 때마다 넘어트리렴. 내가 거기 도착할 때까지 잡아놔.”

망령은 인간을 괴롭히라는 말에 신이 나서 사라졌다. 실비아는 어떻게 하면 남자를 효율적으로 괴롭힐 수 있을까 고민하며 망령이 알려준 위치를 향해 느긋하게 걸었다. 이윽고 그녀가 모퉁이를 도는 순간이었다.

1655880867614.jpg“드디어 잡았다, 이 도둑놈!”

16558808556733.jpg“아악!”

여인의 목소리와 함께 굵직한 비명이 들려왔다. 실비아는 찰나 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인지하지 못하고 눈을 깜박였다. 그러니까, 붉은 머리카락의 어여쁜 여인이…….

16558808556733.jpg“사, 살려줘!”

16558808693023.jpg“슬르근 믈 슬르! 는 으늘 느 슨으 즉으으!”(살리긴 뭘 살려! 넌 오늘 내 손에 죽었어!)

소매치기범의 넓적다리를 사납게 물어뜯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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