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내 남편의 정혼자2021.06.21.
“으아아악!”
소매치기범은 발광했으나 언뜻 소녀로 보일 정도로 앳된 여인은 끈질겼다. 그녀는 흡사 털이 붉은 개처럼 사내의 다리를 물고 늘어졌다.
“느 든 느느!”(내 돈 내놔!)
“이년이 진짜!”
결국 고통으로 눈이 뒤집힌 소매치기범이 손을 치켜들었다. 여인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퍽!
“꺼억.”
그때 둔탁한 소리가 울리며 사내의 몸이 기울어졌다. 여인은 깜짝 놀라 눈을 뜨며 턱의 힘을 풀었다. 넓적다리가 너덜너덜해진 소매치기범이 기괴한 자세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엥?”
여인은 의아함에 미간을 찡그렸다. 내가 물어뜯은 건 넓적다리인데 저 자식은 왜 기절을 한 거지.
‘천벌? 천벌인가?’
“괜찮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와중에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앞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여인이 고개를 들었다.
‘미친.’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속에서 감탄이 튀어나왔다. 깊이 눌러쓴 후드 아래로 결 좋은 은발이 흘러내렸다. 어둑한 골목 속이었지만 황금빛 눈의 광채만은 두 눈에 선연했다.
“우선 일어나지.”
눈이 멀 것 같은 미인을 목격한 그녀가 제게 내밀어진 손을 맞잡으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천사?”
“음?”
망령을 이용해 남자를 기절시킨 실비아가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그녀를 바라보는 푸른 눈이 기이하리만치 반짝거리고 있었다.
‘……강아지?’
남자를 물어뜯던 것도 그렇고, 꼬리가 붕붕 흔들리는 듯한 환영이 보이는 것도 그렇고. 실비아는 어쩐지 빨간색 털을 가진 강아지 같다고 생각하며 여인을 일으켰다.
“마……리아! 왜 여기 계십니까!”
그때 골목 저편에서 제프리가 대경해 뛰어왔다. 그는 소매치기범을 찾아 골목을 한참 헤맨 듯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실비아는 태연히 둘러댔다.
“길을 잃었네.”
“그렇게 코앞에서요?”
“저번에 숲에서도 보지 않았나. 나는 길을 잘 못 찾아.”
“아니, 그렇게 길치이셔서 이 험한 세상을 어찌 살아가시려고……!”
“……맞는 말이긴 한데, 기분이 좀 나쁘군.”
실비아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가 무사함을 확인한 제프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프리?”
그때 여인이 제프리를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생기로 반짝이던 푸른 눈이 어딘가 충격을 받은 것처럼 굳어 있었다. 상당히 격 없는 부름에 실비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두 사람, 아는 사이인가?”
잠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알 수 없는 분위기 속, 나지막이 한숨을 삼킨 제프리가 사무적인 어투로 입을 열었다.
“……이쪽은 필리아 세이크린 후작 영애이십니다, 마님. 주군을 보좌하며 몇 번 뵈었습니다.”
“세이크린 후작 영애라고?”
실비아는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눈앞의 여인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앳된 느낌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결 좋은 붉은 머리카락도 그렇고 곳곳에서 은근한 귀티가 흘렀다.
‘후작이랑 닮았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르겠지만.’
한편 여인, 필리아는 무언가 불쾌한 듯 미간을 좁히고 중얼거렸다.
“마님? 하지만 조금 전엔 분명 마리아라고…….”
“가명일세.”
“아. 벨포르 공작 부인이셨군요.”
필리아는 납득했다는 양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여전히 껄끄러워하는 티가 났다.
‘뭐지?’
미묘하게 가시 돋친 기색을 읽어낸 실비아가 입매를 굳혔다. 평소답지 않게 싸늘한 기색의 제프리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이만 돌아가시지요, 마님.”
“후작 영애는…….”
“오는 길에 경비대원을 만나 상황을 설명해두었으니 곧 이리로 올 겁니다. 그쪽에서 모시겠지요.”
실비아는 난처하게 입을 다물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제프리의 말에는 틀린 구석이 없었다. 필리아는 벨포르 성에 정식으로 방문을 요청한 것도 아니며, 이곳은 성이 아닌 저잣거리였다. 실비아가 굳이 나서서 필리아를 성으로 데려가야 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었다. 소매치기범의 문제는 경비대에서 처리할 것이고.
‘벨포르의 충신 가문이라서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건가.’
지금으로선 필리아가 그녀를 껄끄러워할 만한 이유는 그것밖에 없었다. 다만 의아한 것은, 루베아와는 달리 실비아를 보는 필리아의 눈에는 감정적인 적의가 실려 있다는 점이었다. 실비아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였다.
“제가 정신이 없어 소개가 늦었네요.”
필리아가 매끄럽지 않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녀는 어딘지 울컥한 기색이었다. 날이 서 있는 웃음과 함께, 그녀가 실비아를 향해 예를 갖췄다.
“필리아 세이크린입니다, 공작 부인. 벨포르 공작님의 어릴 적 정혼자이기도 하지요.”
“……뭐?”
그 말에 실비아의 얼굴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 * *
“필리아?”
소식을 들은 란델은 황급히 성 앞으로 마중을 나왔다. 그는 적잖이 놀란 얼굴이었다. 실비아, 제프리와 함께 걸어오던 필리아는 그를 보자마자 반갑게 웃으며 달려갔다.
“야! 나 왔다!”
“컥.”
그녀는 란델의 목을 조르듯 격하게 그를 포옹했다. 란델은 필리아가 넘어질까 싶어 급하게 양손으로 그녀를 지탱하긴 했지만 기겁해 속삭였다.
“뭐야, 갑자기 왜 이래? 미쳤어?”
“조용히 하고 웃어. 맞기 싫으면.”
“……?”
필리아가 이를 악물고 웃으며 속삭였다. 란델은 그 말에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당기면서도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 어설픈 모습을 본 필리아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차라리 웃지 마. 그게 낫겠다. 지렁이도 그것보단 자연스럽게 웃겠어.”
“……뭐 어쩌라는 건지. 내려가.”
란델은 그 속삭임에 발끈하며 그녀를 던지듯 떨쳐냈다. 필리아가 지금 감히 날 던진 거냐며 파들거렸다. 하지만 워낙 작고 짧은 대화였기 때문에, 실비아의 눈에는 두 사람이 그저 반갑게 웃으며 포옹하는 것으로 보였다. 란델은 필리아를 밀어내고 곧장 실비아를 돌아보았다. 그는 간밤의 일 때문인지 조금 머뭇거리다가, 이내 부드러운 웃음을 띠고 그녀를 맞았다.
“왔습니까, 부인.”
“네, 다녀왔어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실비아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태도로 그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란델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어색함을 지우기 위해 일부러 필리아를 향해 툴툴거렸다.
“그나저나, 남부가 어디라고 거길 가? 심지어 호위도 하나 없었다며.”
“네가 무슨 상관이야? 아무 문제 없이 재밌기만 했거든요.”
“그래? 그렇게 즐거운 여행이었다니 다행이군. 세이크린 후작에게 연락을 넣어야겠어. 딸을 보면 기뻐할 테지.”
“……미안, 잘못했어. 나 잠깐만 숨겨주라. 남부에서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힘이 하나도 없단 말이야. 아버지의 잔소리를 버티려면 다시 체력을 비축해야 한다고.”
필리아는 란델이 눈썹을 슬쩍 들어 올리며 한 말에 금세 꼬리를 내렸다. 그녀가 실비아와 제프리를 따라 벨포르 성까지 오게 된 것도 같은 이유였다.
-공작님께 인사도 드릴 겸, 당분간 벨포르 성에 몸을 의탁하려 합니다. 함께 돌아가도 괜찮을까요?
필리아는 란델이 태어났을 때부터 함께한 소꿉친구이자 세이크린 후작 영애였다. 이 정도의 요청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위치라는 뜻이었다. 해서 실비아는 필리아와 함께 벨포르 공작성으로 돌아왔다. 성에 방문을 요청한 손님을 환대하는 것도 공작 부인의 의무니까. 그런데 막상 란델이 필리아와 생각 이상으로 친근한 모습을 보이자 기분이 가라앉았다.
‘아이들끼리 사이가 좋으면 좋은 거지. 란델이 공식적으로 나를 홀대하는 것도 아니니 상관없어.’
실비아는 자신의 가라앉은 기분을 그렇게 합리화했다. 필리아를 구박하면서도 실비아를 살피던 란델은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이자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가 혹시 몸이 좋지 않은 건지 물으려는 순간, 제프리가 한발 먼저 말을 꺼냈다.
“주군. 마님께서 감기에 걸리실지도 모르니 이만 안으로 들어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 그래. 다들 이만 들어가지. 필리아 너는 윌콧을 찾아가고.”
란델이 제 외투를 벗어 실비아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들어갑시다, 부인.”
“네.”
실비아는 외투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붙잡으며 뒤를 힐긋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필리아가 굳은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란델 때문인가.’
또다시 마음이 복잡해진 나머지 실비아는 한숨을 푹 내쉬고 성으로 들어갔다. 그때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란델은 낮 동안 업무를 다 끝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실비아와 함께 일찍이 방으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은 후, 침대 헤드에 기댄 실비아가 툭 물었다.
“세이크린 후작 영애랑 많이 친한가 봐요. 어렸을 때는 정혼자였다고 하던데.”
“아…… 그리 보입니까?”
란델은 아까의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필리아는 어렸을 때부터 란델과 형제처럼 부대껴 자랐다. 지금이야 란델이 많이 자라 필리아와 덩치 차이가 꽤 난다지만, 어렸을 때의 그는 필리아보다도 키가 작았다. 게다가 필리아는 원체 성격이 활발하고 과격한 탓에 어렸을 때는 싸울 때마다 그가 일방적으로 얻어맞곤 했다. 필리아와 란델은 사이가 좋다기보다는 사이 나쁜 형제나 다름없었다. 오늘은 서로 오래간만에 만난 지라 그나마 살가웠던 것이었다. 란델은 허허로운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친구니 그리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정혼자라는 것도 부모님들끼리 친하셔서 장난삼아 이야기가 나왔던 것뿐이지, 실제로는 약혼한 적조차 없습니다.”
“그런가요?”
“예. 그래도 세이크린 후작의 손에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 당분간은 이곳에 머물도록 해야겠습니다. 사교 시즌이 시작되면 좋건 싫건 집으로 돌아가야 할 테니까.”
그때 윌콧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인님. 잠시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아, 내가 나가지.”
란델은 곁눈질로 실비아가 이불을 덮고 누운 것을 확인하고 낮게 말했다. 란델은 발소리를 죽이며 밖으로 나가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윌콧이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세이크린 후작 영애께서 늘 머무시던 방을 내어드렸습니다.”
“잘했어. 당분간은 잘 부탁하네.”
“염려 놓으십시오.”
실비아는 등을 돌리고 누운 채 귀를 막듯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문밖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던 대화가 베개에 가로막혀 더는 들리지 않았다. 실비아는 눈을 감은 채 가만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자꾸만 속이 얹힌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란델 때문이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 했다. * * * 그날 밤. 검은 그림자가 벨포르 성의 외벽을 따라 슬금슬금 움직였다. 그림자가 향한 곳은 후원 너머, 성의 구석에 자리한 기사단 숙소였다.
‘다들 들어갔나?’
그림자의 주인, 필리아는 성의 모퉁이에 몸을 숨긴 채 야외 연무장을 힐끔댔다. 하지만 야외 연무장은 훈련용 허수아비를 제외하고서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더 일찍 나왔어야 했는데.’
오랜만에 벨포르 성에 방문해서일까. 어렸을 적 그녀를 돌봐주던 사용인들이 일제히 몰려와 잔소리를 해대는 탓에 빠져나오는 것이 늦었다.
-남부가!
-어디라고!
-전쟁터에 가길!
-가요!
‘으으, 등이 다 닳아 없어지는 줄 알았네.’
필리아는 아직도 등이 얼얼한 느낌이 들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아무튼, 기사단 숙소 주변은 적막하기 짝이 없었다. 주위를 휘휘 둘러보던 필리아가 눈을 빛냈다.
‘……조금만 더 가까이 가보자. 3층 방이라고 했던가?’
그녀는 수풀 사이에 몸을 숨겨가며 기사단 숙소에 가까이 다가갔다. 허수아비 뒤에 몸을 숨긴 필리아가 3층의 창문 수를 세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등 뒤에서 불쑥 나타난 손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챘다.
“꺄악……!”
“쉿.”
반사적으로 비명을 지르려던 필리아는 익숙한 목소리에 멈칫했다. 몸을 돌리자 눈에 익은 사람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프리.”
남색 머리카락, 검은 눈. 언뜻 강아지처럼 보일 만큼 순한 눈매. 모두 필리아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다만 그녀를 향한 표정이 시리도록 차갑다는 것만 제외하면. 벨포르 기사단의 막내, 제프리 시더스가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시간에 여기서 무얼 하십니까, 세이크린 후작 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