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강아지 싸움에 여우 등 터진다2021.06.24.
“이 시간에 여기서 무얼 하십니까, 세이크린 후작 영애.”
제프리의 얼굴은 평소와 다르게 표정 없이 굳어 있었다. 하지만 필리아는 더없이 환한 웃음을 머금으며 기대 어린 눈을 했다.
“나 보고 나온 거야?”
“오늘 야간 순찰 당번이었을 뿐입니다. 이만 들어가십시오.”
고저 없는 목소리로 일갈한 제프리가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미련 없이 돌아섰다.
‘또.’
필리아는 생판 남을 대하는 듯한 그 태도에 울컥해 입술을 깨물었다.
-이쪽은 필리아 세이크린 후작 영애이십니다, 마님. 주군을 보좌하며 몇 번 뵈었습니다.
-오는 길에 경비대원을 만나 상황을 설명해두었으니 곧 이리로 올 겁니다. 그쪽에서 모시겠지요.
낮에도 몇 번이나 저런 태도였다. 마치 그녀와 그 사이에는 아무 접점도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녀는 멀어지는 그를 따라 다급히 걸음을 옮기며 이를 악물었다.
“아직도 화 안 풀렸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만 지켜주겠다고 했잖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호위는 맡지 않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그건.”
말을 꺼내다 보니 서러움이 북받쳐 필리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모른 척 필리아를 피해서 걷던 제프리가 순간 울컥한 듯 몸을 돌렸다. 눈물 어린 푸른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
그러나 제프리는 입 안의 살을 짓씹으며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내 평정을 되찾은 그는 메마른 눈으로 필리아를 내려다보며 낮게 읊조렸다.
“그건 ‘필리아’와 한 약속이지 ‘세이크린 후작 영애’와 한 약속이 아니니까요.”
“제프리.”
“가보겠습니다. 다음부터는 격 없는 호칭도 자중해주시길.”
“제프리, 잠깐만……!”
필리아가 제프리를 붙잡으려 했으나 그는 금세 성의 모퉁이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순식간에 홀로 남겨진 그녀는 제자리에 쪼그려 앉아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나쁜 새끼.”
작은 중얼거림이 어둠 속에 울려 퍼졌다.
“천하의 바보 머저리 같으니. 가다가 확 자빠져버려라.”
필리아는 이후로 한참이나 찬 바람을 맞으며 그 자리에 웅크려 이런저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
한편, 제프리는 모퉁이 너머의 벽에 기대어, 그녀가 방으로 돌아갈 때까지 묵묵히 그 욕설을 듣고 있었다. 등 뒤로 숨긴 손은 핏줄이 도드라질 만큼 세게 그러쥔 채였다.
* * * 다음 날 아침. 란델과 실비아, 필리아는 식당에 모여 아침 식사를 했다. 간밤에 분함을 달래느라 바깥에 오래 나가 있던 탓에, 두툼한 숄을 두르고 따뜻한 수프를 떠먹던 필리아는 표정이 점차 썩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더 드십시오.”
“괜찮다니까요.”
“그래도…….”
“괜찮다고.”
란델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실비아를 살뜰히 챙겼다. 실비아 또한 늘 그랬듯이 웃는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겉보기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화기애애한 부부의 모습을 목격한 필리아는 황당함에 스푼을 떨궜다.
‘쟤 뭐야?’
란델과 형제처럼 자란 그녀조차 본 적 없는, 다 녹아내린 얼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기 부인이 국왕 측 사람이라는 자각은…… 있는 건가? 없는 것 같은데?’
전날, 필리아는 처음에 제프리가 실비아를 ‘마리아’라고 부르기에 그들이 연인인 줄 알고 반사적으로 날을 세웠다. 이후 실비아가 벨포르 공작 부인이라는 말을 듣고 자신이 오해했음을 깨달았으나, 한번 상한 기분은 쉽사리 나아지지 않았다.
-필리아 세이크린입니다, 공작 부인. 벨포르 공작님의 어릴 적 정혼자이기도 하지요.
그런 상태에서 자신을 무시하고 실비아만 살뜰히 챙기는 제프리의 모습에 화가 나 일부러 그녀의 심기를 긁은 것이었다. 식사가 끝나면 이러한 사실들을 실비아에게 설명하고 사과할 참이었는데. 눈앞의 광경을 보니 그런 마음이 싹 사라졌다.
‘나라도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어. 당분간 초경계 태세다.’
란델은 이미 그른 것 같으니 자신이라도 저 여자를 경계하는 것이 옳았다. 필리아는 이글거리는 시선을 실비아에게 고정한 채 음식을 잘근잘근 씹어 삼켰다.
‘……질투하나?’
한편, 그 시선을 질투라고 착각한 실비아는 유치한 오기가 생겼다. 그녀는 란델이 저를 채근하느라 입가 부근에 와 있는 포크를 향해 불쑥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입을 벌려 란델이 쥔 포크 끝에 꽂혀 있던 과일을 삼켰다. 쨍그랑.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란델이 포크를 떨어트리고 버벅거렸다.
“뭐…….”
“고마워요. 이제 당신도 식사해요, 나는 그만 챙기고.”
뒷말에 힘을 준 실비아는 쓴맛에 표정을 구기지 않으려 노력하며 눈을 곱게 접어 웃었다. 힐긋 곁눈질하자 아니나 다를까 필리아가 오만상을 구기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덕에 실비아는 한결 상쾌한 기분으로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 * *
“시더스 경을 불러주게.”
“알겠습니다, 마님.”
묘하게 기 빨리는 아침 식사가 끝난 후. 실비아는 어제 필리아를 만나느라 미처 살피지 못한 것들을 확인한다며 나갈 채비를 했다. 물론 핑계였지만.
‘이런 저잣거리가 아니라 비틀림이 잦은 곳을 돌아다녀야 할 텐데 말이지. 그런 곳은 핑계가 마땅치 않으니…….’
실비아가 속으로 혀를 차는 사이, 델마의 부름을 받은 제프리가 도착했다.
“마님!”
하루 전의 그가 어딘지 가라앉은 모습이었던지라 내심 신경이 쓰였는데.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지금의 제프리는 평소처럼 발랄한 모습이었다.
“오늘도 나가십니까?”
“그래. 내가 경을 너무 번거롭게 하는 건 아닐지 모르겠군.”
“차라리 성을 나가는 게 나을지도…….”
“음?”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시죠!”
수심 어린 얼굴로 중얼거리던 제프리는 황급히 얼버무리고는 방을 나섰다. 실비아는 갸웃하며 따라나섰다. 그렇게 두 사람이 정원을 가로질러 정문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식사 때 목격한 란델의 애정행각으로 인해 속이 좋지 않았던 필리아는 산책 중 그들을 발견하고 우뚝 멈춰 섰다.
“……공작 부인?”
“영애.”
“어디 가십니까?”
“저잣거리에 다시 나가볼까 해서.”
실비아의 뒤에 서 있는 제프리를 일별한 필리아가 얼른 말했다.
“저도 동행하겠습니다.”
“……영애가?”
“네.”
실비아는 의심스러운 기색이 여실한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장 직전의 아침 식사 자리에서만 해도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지 않았던가. 하지만 필리아는 뻔뻔하게 웃었다.
‘제프리도 보고, 감시도 하고. 일석이조네.’
란델은 원래도 바보 같긴 했지만, 지금은 실비아가 독초를 내밀어도 좋다고 받을 것 같았다. 그러니 혹 실비아가 수상한 짓을 하지 않는지 감시할 겸, 제프리의 얼굴도 실컷 보자!
‘신난다.’
……라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었지만, 사실 후자가 본심에 가까웠다. 필리아는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싱글싱글 웃었다. 제프리는 남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실비아는 여전히 의아했지만, 마땅히 거절할 핑계를 찾지 못한 탓에 동행을 수락했다. 그렇게 형성된, 서로가 조금 불편한 일행은 거리로 나섰다.
“어제보다 사람이 많은 것 같군.”
“아무래도 사교 시즌이 가까워졌으니까요. 벨포르 성에서 열리는 데뷔탕트 무도회 이후로도 각 가문에서도 돌아가며 무도회를 열어야 하니 준비할 게 많을 수밖에요.”
실비아의 물음에 필리아가 답했다. 하나, 둘, 셋……. 실비아는 북부 귀족 가문의 수를 세어 보다가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주요 가문의 무도회만 해도 대체 몇 번을 참석해야 하는 건지.’
심지어 사교 시즌이 끝난 후로는 왕의 탄신일까지……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데뷔탕트의 주최만 끝나면 당분간 칩거하든가 해야지. 애초에 벌은 이미 끝났는데 대체 왜 죽으면 안 된다고 하는 건지.’
실비아는 불만스러운 눈으로 하늘을 힐긋 노려보았다.
‘자기가 신이면 다인가. ……다긴 하지.’
그녀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궜다가 복잡한 생각을 떨치기 위해 주위로 눈을 돌렸다. 연한 분홍색의 꽃을 발견한 그녀가 꽃을 한 다발 집어 들었다.
‘데뷔탕트 무도회는 흰 꽃과 분홍색 꽃 위주로 장식한댔으니 이것도 괜찮으려나. 조금만 가지고 돌아가서 델마에게 의견을 물어볼까.’
실비아는 그런 생각을 하며 하녀를 통해 꽃값을 치렀다. 물건을 살펴보겠다는 핑계로 바깥에 나온 것이니 어느 정도 구색은 맞춰야 했다. 그러나 거리 반대편 가판대를 살펴보던 필리아가 실비아의 손에 들린 꽃다발을 발견하고는 문득 말했다.
“아, 그 꽃은 성에 두시면 안 돼요.”
“왜?”
“란…… 아니, 공작님께서는 세이렌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으시거든요. 모르셨어요?”
필리아는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는 오랜만에 제프리와 함께 있게 되어 많이 누그러진 상태였다. 그렇기에 악의 없이, 단지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이었으나. 필리아가 란델을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있는 실비아는 그것이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명색이 란델의 아내인 실비아가 자신보다도 그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고 말이다. 실비아는 이유를 알 수 없이 속에서 치솟는 짜증을 억누르기 위해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켰다.
‘그래…… 아직 새파랗게 어린 것이니까. 저렇게 발칙할 수도 있고 그런 거겠지.’
물론 필리아가 란델을 좋아하건 말건 실비아와 상관이 없긴 하지만. 그 감정을 이유로 그녀를 자꾸만 공격해대니, 그녀도 사람인 이상 기분이 나쁜 것은 당연했다. 적어도 실비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이 란델에게 달리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지극히 당연한 감정이라고. 합리화를 마친 실비아는 난감한 기색으로 손안의 꽃다발을 내려다보다가 그것을 제프리에게 떠넘겼다.
“이미 값을 치렀으니 어쩔 수 없지. 시더스 경, 선물이네.”
“예?”
“혹시 경도 세이렌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나?”
“아, 아니요!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윗사람의 선물을 거절하는 것은 아랫사람의 도리가 아니었다. 제프리는 눈을 데구루루 굴리다가 얼른 꽃다발을 받아들고 웃었다. 그 광경을 본 필리아는 속에서 열불이 뻗치는 기분이었다.
‘쟤는 저걸 또 좋다고 받아?’
필리아는 혹 실비아가 제프리에게 정말로 관심이 있는 것인가 하여 눈을 뾰족하게 떴다. 실비아와 필리아, 두 사람의 오해는 소리 없이 깊어져만 갔다. 그때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한 사람이 인파에 밀려 실비아와 가볍게 부딪쳤다.
“아, 미안해요.”
“괜찮…….”
후드를 깊이 눌러쓴 여인은 고개를 꾸벅 숙여 사과하고는 그녀를 지나쳐 걸어갔다. 괜찮다고 대답하려던 실비아는 직후 저도 모르게 고개를 홱 돌렸다.
‘방금.’
조금 전, 여자와 부딪쳤을 때. 한순간이지만 ‘어둠’이 느껴졌던 것 같은데? 하지만 여인의 뒷모습은 이미 인파에 휩쓸려 저만치 멀어진 후였다. 실비아는 다급함에 인파를 헤치고 여자를 쫓았다.
“마님? 어디 가십니까!”
“공작 부인?”
등 뒤로 제프리와 필리아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으나 금세 멀어졌다.
‘또 다른 마족인가?’
실비아는 복잡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마족이 지닌 ‘어둠’으로는 망령 등을 다룰 수 있으나 본인의 모습을 바꾼다거나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와 부딪쳤던 여자는, 후드 아래로 반쯤 드러났던 피부색이 인간의 것이었다.
‘모습을 바꿔주는 마법 약이야 전에도 있었다지만. 공격 마법이 아니라 그런 종류의 마법도 마족에게 적용되는 건가.’
실비아가 지극히 마법사다운 의문에 잠긴 사이 여인은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들어갔다. 실비아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발걸음을 재촉해 여인을 따라갔다. 그러나 그녀가 골목에 발을 들였을 때는 이미 여인의 모습이 사라진 후였다.
‘분명 여기로 들어갔는데.’
실비아가 오랜만의 운동에 지쳐 작게 숨을 몰아쉴 때였다. 등줄기에 섬찟함이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귓가에 고운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흐응.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건 아닌 것 같네.”
“……!”
“누구시길래 날 따라왔을까? 무슨 일인데?”
실비아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려다가 제 목덜미에 단도의 날이 닿아 있는 것을 깨닫고는 움직임을 멈췄다. 이렇듯 가까이 있으니 확신이 섰다. 어둠에서 태어난 자들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불쾌함.
‘마족이야.’
여인, 아니, ‘저것’은 마족이었다.
“우선 얼굴이나 좀 볼까.”
콧노래를 부르듯 중얼거린 여인이 불시에 실비아의 후드를 휙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후드 안으로 감춰두었던 새하얀 은발이 사르륵 흘러내렸다.
“어머나?”
여인은 놀란 듯 감탄했다. 이렇듯 깨끗하고 밝은 은발은 왕국 내에서도 드물었다. 그녀는 호기심이 일었는지 단도를 거두어들이며 실비아의 몸을 자신과 마주 보도록 돌렸다. 그리고 그 직후.
“어머, 어머머!”
여인은 제 후드를 휙 젖히고는 화사하게 웃었다.
“어쩜, 나만큼 예쁜 자기는 또 처음이네?”
실비아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