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자기야?2021.06.28.
‘라폴드라는 그놈도 그렇고, 요즘 마족들은 다…… 이렇게 이상한가?’
실비아는 미간을 슬쩍 좁혔다. 마족은 본디 인간을 해치고 싶어 안달해야 정상이었다. 마물보다야 인간에 가까운 지성이 있다지만, 살인에서 극상의 쾌락을 얻는 것은 마족도 다르지 않았다. 다르게 말하자면 살인의 본성을 참기 어려워해야 정상이라는 뜻이었다. 대다수의 마족이 비틀림을 넘어온 후 얼마 되지 않아 발각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살의가…… 없어.’
하지만 눈앞의 마족에게서는 살기가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라폴드야 란델에게 하도 얻어맞다 보니, 그에 대한 두려움으로 잠시나마 이성이 본능을 이겼던 것이라 쳐도. 눈앞의 이 마족이 내보이는 친근함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아니, 저자의 태도는 친근함을 넘어서서…… 어지간한 인간보다 더한 능청스러움이었다. 자연스럽게 ‘자기’라는 호칭을 내뱉는 저 모습을 보라. 저게 어딜 봐서 인간을 죽이려 드는 마족이란 말인가.
‘돌연변이인가? 마족도 돌연변이가 있나?’
실비아가 혼란스러움에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러자 여인이 손을 올려 그녀의 입술을 살짝 튕겼다.
“그러면 못 써요. 예쁜 입술이 망가지잖아.”
“아니…….”
실비아는 황당함에 입을 벌렸다. 너는 지금 그게 중요하니? 내가 너를 미행하다가 들킨 이 상황에? 하지만 이 마족에게는 정말로 그것이 더 중요했다.
‘잘 꼬셔서 직원으로 쓰면 딱 좋을 것 같은데?’
마족, 벨라는 속으로 이게 웬 횡재냐 싶어 싱글싱글 웃었다. 처음에는 제 미모에 반한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자신을 미행하나 싶었다. 마침 무료했겠다, 장난삼아 팔다리라도 자르며 정체를 캐물어 볼까 했는데. 눈앞의 인간 여자는 그런 식으로 죽이기에는 아까웠다.
‘서큐버스에 버금가는 미모라. 흔치 않아.’
눈처럼 새하얀 은발에 어딘가 나른해 보이는 금색 눈. 거기에 장인이 정성 들여 빚은 조각상처럼 완벽한 이목구비까지. 여자는 그야말로 마족의 한숨마저 자아내는 미인이었다.
‘귀족인가?’
이렇게 귀티 나는 미인은 흔치 않다. 게다가 평민이 이런 미모를 지녔다면 벌써 근방에 소문이 쫙 깔렸겠지.
‘그래도 뭐, 우리 가게의 술 한잔이면 될 테니까 상관없어.’
벨라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입꼬리를 늘였다. 까르르 웃음을 흘린 그녀가 실비아의 팔짱을 꼈다.
“자기야. 우리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술이나 한잔 어때?”
“……인연? 이게?”
“사소한 건 따지지 말고. 지난 일은 잊는 거라고 했어.”
“전혀 사소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근처에 내가 하는 가게가 있거든? 거기로 가자! 얼른 와!”
실비아가 황당한 듯 중얼거렸으나 벨라는 무시하고 그녀를 질질 잡아끌었다. 힘이 어찌나 센지 실비아로서는 저항할 턱이 없었다. 결국 실비아는 가게가 어디인지라도 파악해두자 싶은 마음에 몸의 힘을 뺐다. 그러자 벨라가 심각한 얼굴을 했다.
“자기야, 자기 몸이 너무 종잇장 같다. 어쩜 이렇게 한주먹거리도 안 될 것 같은 몸으로 태어났어?”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면 마족이 맞는데 말이지…….’
실비아는 참 이상한 마족이라고 생각하며 벨라를 따라갔다. 그녀의 말대로 가게는 멀지 않았다. 구석진 곳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니 종소리와 더불어 왁자지껄한 소란이 그들을 반겼다. ‘간판 없는 가게’라고 적힌 간판을 달고 있는 술집의 내부는 어둑했다. 은은한 조명에 비친 가구들은 하나같이 고급스러웠다. 바쁘게 술을 나르던 직원이 벨라를 알아보고는 활짝 웃었다.
“사장님 오셨어요?”
“어. 내 자리는?”
“당연히 비워뒀죠!”
“잘했어. 우리 가게 대표 술 한잔이랑, 나는 늘 먹던 거로. 알지?”
“그럼요!”
벨라가 직원에게 은근슬쩍 실비아를 눈짓하며 윙크해 보였다. 직원은 그 신호를 알아듣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사라졌다.
“자자, 이쪽이야.”
벨라는 실비아를 이끌고 안쪽 자리로 향했다. 벽과 테이블 주위에 두꺼운 커튼이 있어 주위와 어느 정도 분리된 곳이었다.
‘직원이랑 손님들은…… 전부 인간이군. 평범한 술집인 건가?’
실비아는 벨라에게 이끌려 안쪽 자리로 향하면서 티 나지 않게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이곳에 벨라를 제외한 마족은 없었다. 대낮부터 술을 몇 잔이나 마신 것인지 눈이 풀린 손님들도 인간, 직원들도 인간. 딱히 수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기에 실비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으.’
물론 입구에서부터 격렬하게 입을 맞추는 남녀커플을 비롯해 전체적인 분위기가 상당히 끈적하고. 이렇게 인간이 많은 곳에서 살의 하나 없이 웃고 있는 마족은 무척이나 수상했지만.
“곧 가져다줄 거야. 우린 앉아 있자.”
벨라는 실비아를 푹신한 소파에 앉히고는 커튼을 쳤다. 두꺼운 커튼이 주위를 둘러싸자 바깥의 소란도 조금 잦아들었다. 그녀는 테이블 위로 팔을 올려 턱을 괴더니 요염한 웃음을 흘렸다. 옅은 갈색의 단발이 사르르 흩어지고 분홍색 눈이 흥미로 반짝였다.
“그래서, 자기야. 나는 왜 따라왔던 거야?”
실비아가 움찔했다.
“……사소한 문제는 잊자며?”
“어차피 술이 나올 때까지 할 얘기도 없는데 뭐 어때.”
벨라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생긋 웃었다. 실비아는 그녀의 사고방식을 따라가기가 힘들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혀를 쯧 찼다. 한편으로는 인간과 사고방식이 다른 만큼 어설픈 변명으로 속여 넘기기도 쉬울 듯했다. 무구한 미소를 입가에 건 실비아가 태연히 말했다.
“부딪쳤을 때 들은 목소리가 내 취향이어서. 노래라도 한 곡 부탁해볼까 했지.”
벨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머. 혹시 지금 그거 고백?”
“아니야.”
“귀여워라. 사실 나는 예쁜 건 다 좋아서. 우리 집에서 위스키 한잔 마시고 갈래?”
“아니라니까.”
실비아는 제게 달라붙는 벨라를 떼어내면서도 정말 저런 변명이 먹히네, 싶어서 신기해했다. 그때 직원이 쟁반에 잔 두 개를 받치고 나타났다.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얼른 마셔봐. 이게 우리 가게 대표 메뉴야!”
벨라는 직원에게서 잔을 빼앗듯 가져와 하나를 실비아에게 내밀었다. 실비아는 옅은 푸른색의 음료를 잠시간 들여다보았다.
‘독이 들어 있지는 않아 보이는데.’
차라리 이 안에 든 것이 사람을 죽이는 독이면 죽을 수 있을지도 모르건만. 애석하게도 눈앞의 마족은 당장 저를 죽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뭔지 모르니까.’
실비아는 제 몸에 몰래 해독 작용을 하는 마법을 걸어두고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어때, 맛있지? 집에 가서도 계속 생각날 것 같고 그렇지?”
“……확실히 그렇네.”
실비아는 무감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대꾸했다. 제 몸에 걸어두었던 마법이 작용하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사람을 해하는 독이면 어느 정도의 통증은 느껴져야 하는데, 통증이 없었다. 독은 아니지만, 독이나 다름없는 무언가라.
‘역시 평범한 술집은 아니군.’
실비아는 술이 마음에 든 것처럼 또다시 잔을 기울였다. 벨라는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다가 은근한 어조로 운을 뗐다.
“자기야, 혹시 우리 가게에서 일할 생각은 없어?”
“일?”
“응. 저렇게 음료나 좀 나르고, 가끔 청소만 하면 되는데. 우리 가게 직원이 되면 이 음료도 공짜로 마실 수 있어.”
벨라는 제 손에 쥔 잔을 빙글빙글 흔들며 웃었다. 가게 안의 조명을 받은 술은 마법 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오묘하게 반짝거렸다. 하지만 실비아는 여전히 차분한 웃음을 띤 채였다. 그녀가 덤덤해 보이자 조바심이 난 벨라가 이것저것 덧붙였다.
“일급도 높아. 게다가 자기는 특별히 일급도 두 배로 쳐 줄게. 다른 직원들한테는 비밀이야.”
“두 배면 나쁜 조건은 아니네.”
실비아가 중얼거린 말에 벨라가 화색을 띠었다. 그녀는 당장에라도 몸을 일으킬 것처럼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렇지? 그럼 계약서에…….”
“그런데 나는 사장이 직접 나서서 채용하는 게 아니면 싫어서.”
한순간 벨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그러자 여우처럼 보였던 인상이 일순 섬뜩하게 변모했다. 하지만 벨라는 빠르게 평정을 되찾고는 다시 눈을 가늘게 휘었다. 그녀가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웃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사장…….”
“아니잖아.”
묘한 확신이 어린 투에 벨라가 멈칫했다. 실비아는 손에 쥐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는 손끝으로 잔 표면을 톡톡 두드렸다.
‘애초에 마족이 단신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비틀림에서 넘어온 마족은 대개 얼마 지나지 않아 발각된다. 잠시만 이성을 놓으면 인간을 죽이려 한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와 더불어 가장 큰 이유를 차지하는 것은 생김새였다. 보랏빛 피부, 검은 눈에 세로로 길게 찢긴 붉은 동공. 그것은 마족임을 나타내는 징표이자 상징이었다. 하지만 벨라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인간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이는 마법 약을 복용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혹 어둠 벌레 무리 내에 마법사가 있다고 해도, 저렇게 완벽한 효과의 약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드물지.’
보통 그런 약을 만들 수 있을 만큼 실력 있는 마법사는 자존심이 굉장히 강하다. 그렇기에 몇십 골드를 제시해도 쉽사리 마법, 혹은 마법 약을 팔지 않는다. 돈에 제 모든 걸 파는 오스턴이 예외인 것이다. 그렇다면 고위 마법사를 움직이는 것은 무엇이냐?
‘권력이지.’
인간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편한 방법은 권력자가 되거나, 그 권력자와 손을 잡는 것이다. 때문에 고위 마법사는 대개 특정 권력자와 손을 잡고, 그 권력자를 통해서만 의뢰를 받고 마법을 사용했다. 그것이 마법사가 본인의 자존심을 지키고, 일신의 안위도 보장받는 가장 편한 방법이었다.
‘마법사 본인일까, 아니면 권력자일까.’
마족을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보이게끔 만드는 약을 제작하는 마법사. 그리고 그 마법사를 휘하에 두고 있을지도 모르는 누군가. 둘 중에 정확히 누구인지는 몰라도, 확실한 것은 눈앞의 마족이 누군가와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이었다. 비틀림에서 넘어온, 인간 세상에 연고 하나 없는 마족이 저렇게 몸을 숨길 방법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
‘애초에 이 가게부터 말이 안 돼.’
금색 눈이 가게 안을 재차 훑어보았다. 가게는 전체적으로 고급스러웠다. 달리 말하자면 부유한 것들로 그득하다는 소리였다.
‘연고 없는 마족이 엄두를 낼 만한 금액은 아니지.’
마법 약의 효과는 영구적이지 않다. 그 효과가 어떠한 것이든지 마찬가지였다. 그것만은 불변의 진리. 그러니 마족이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려면 주기적으로 약을 복용해야 한다. 저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드는 돈만 해도 어지간한 귀족 가문의 기둥을 뽑을 수 있을 터.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간도 크게 마족을 인간 세상에 숨겨주고 있는 놈의 얼굴을 보아둬서 나쁠 건 없겠지. 생각을 정리한 실비아가 빙긋이 웃으며 말을 맺었다.
“정말로 나를 고용하고 싶으면, 사장을 불러와. 사장이랑 이야기하게.”
벨라는 그제야 슬슬 상대의 태도가 기묘하다는 것을 느꼈다.
‘뭐지, 이 인간?’
분홍색 눈이 경계로 가늘어졌다. 당장에라도 저 고운 손발을 장난감처럼 뜯어내겠다고 하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역시 저 얼굴이 너무 아깝다. 어차피 직원에게 여자에 대해 알아 오라고 신호를 보내두었으니, 곧 알게 되겠지.
‘우선은 그때까지 시간을 끈다.’
약이 들어간 술도 마셨으니 회유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벨라는 지금까지 백이면 백 모두가 넘어오던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자기, 취했어? 내가 진짜 사장인데…….”
“사, 사장님!”
“저것 봐, 쟤도 나를 사장님이라고 부르잖아. 그보다 무슨 일이야?”
때마침 직원이 커튼을 젖히며 다급하게 달려 들어왔다. 벨라는 양팔을 벌려 직원을 환영하고는 작게 물었다.
“알아봤어?”
“저 여자, 벨포르 공작 부인이랍니다.”
“……뭐?”
직원이 창백한 얼굴로 고한 말에 벨라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벨포르 공작 부인이라고요! 저 여자를 찾겠다고 지금 거리에 벨포르 기사단이 쫙 깔렸……!”
쾅! 그 순간, 술집의 문이 거친 소리를 내며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