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첫 번째 실연2021.07.01.
“주구우우운!”
실비아가 제프리, 필리아와 함께 저잣거리로 나간 사이. 란델은 영지 외곽에 나타났다는 마물을 처리하기 위해 기사단과 함께 출타 중이었다. 정신없이 마물을 처리하던 란델은 협곡을 쩌렁쩌렁 울리는 고함에 얼굴을 사납게 일그러트리며 고개를 돌렸다.
“어떤 미친놈이 마물의 입속에 들어가고 싶다고 안달인 것 같은데. 그렇게 소원이면 손수 처넣어주지.”
연녹색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얼굴에 피까지 묻어 있어 더욱 섬뜩했다. 기사들은 란델이 한창 전투에 몰두해 있을 때는 맹수보다도 사납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기사단 전체에 ‘큰 소리를 냈다가는 마물과 주군을 자극하는 꼴이니, 토벌 시엔 항상 조심하라’ 하고 일러두었거늘. 대체 어떤 멍청이가 굶주린 맹수의 꼬리를 밟았는가. 기사들은 마음속으로 심심한 애도를 표했다. 물론 마물들이 배로 날뛰기 시작하자 애도는 욕설로 바뀌었다. 하지만 협곡으로 뛰어온 기사는 란델과 기사들의 살기 어린 시선을 신경 쓸 정신도 없어 보였다. 협곡의 절벽 위에 무릎을 꿇고 앉은 기사가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허억, 헉. 주군!”
“젠장, 한마디라도 더 하면 거기서 떨어트려 버릴…….”
“마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아아!”
“……뭐?”
이를 뿌득 갈던 란델은 기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찰나 넋을 놓았다. 그 틈을 타 란델의 팔을 물려던 마물을 기사단장이 기겁하며 처리했다.
‘실비아가 사라졌다고?’
란델은 멍하니 기사의 말을 곱씹었다. 전해 듣기로, 분명 실비아는 호위인 제프리와 함께 나섰다고 했는데?
“제프리는?”
“그게, 저잣거리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마님을 놓쳤답니다! 어떤 여자를 따라가시는 것처럼 보였다는데요!”
기사가 고래고래 외치는 말에 마물들이 더욱 흥분해 날뛰었다. 뒤늦게 이성을 약간이나마 되찾은 란델이 검을 휘둘러 마물의 머리를 쳐냈다. 키에엑! 마물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란델은 눈가에 튄 마물의 피를 닦아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돌아갈 때까지 먼저 수색을 진행하고 있어라.”
소매에 가려진 연녹색 눈이 심상찮은 빛으로 번뜩였다.
“금방 합류할 테니까.”
그 이후, 란델이 협곡의 마물을 모조리 도륙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10분이었다. * * * 쾅! 주점의 문이 부서질 듯 거칠게 열렸다. 실비아는 젖혀진 커튼 너머,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남자의 모습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란델?”
“실비아!”
혼잣말에 가까운 그 작은 중얼거림을 어떻게 들은 건지, 란델이 다급하게 그녀를 향해 뛰어왔다. 실비아의 앞에 선 그가 안절부절못하며 그녀를 살폈다.
“괜찮습니까? 다친 곳은?”
“있을 리가 없…….”
“이자는 누구입니까. 이곳은 또 어떻게 알게 된 것이고.”
다친 곳이 없음을 확인한 란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그제야 벨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막 갈아놓은 칼날처럼 날카로운 시선에 벨라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와.’
흉흉한 살기에 뒷덜미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는 것이 느껴졌다. 눈앞의 남자는 제 소개조차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 란델 벨포르 공작. 북부의 주인이자 왕국의 방패. 벨라는 왜 동족들이 이 남자를 마족 최대의 적이라 일컫는지,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단숨에 이해했다. 제 부인을 향할 때와는 달리 자신에게 닿아 있는 시선이 찌를 듯 매서웠다. 숨이라도 한번 잘못 들이쉬었다가는 곧장 갈가리 찢길 것처럼.
‘……단순한 주점인가?’
란델은 벨라를 경계 어린 눈으로 응시하면서 주위를 살폈다. 언뜻 평범한 주점 같지만, 분위기가 미묘하고 끈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잠시나마 실비아가 이런 곳에 있었다고 생각하니 다시금 속에서 열불이 치솟는 느낌이었다. 란델이 벨라를 노려보며 이를 갈 듯이 물었다.
“내 아내와는 어떻게 만나게 된 거지?”
“그게…….”
그때 벨라보다 한발 먼저 실비아가 입을 열었다.
“제가 브로치를 잃어버렸는데, 그걸 찾아주셨거든요.”
“……네?”
“그래서 제가 감사의 의미로 술을 한잔 사기로 했어요. 이 가게가 근처에서 가깝길래 여기로 들어온 거고요.”
벨라는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말은 전부 거짓이 아닌가. 그러자 실비아가 그녀를 돌아보며 빙긋이 입매를 늘였다. 희고 가는 손끝이 은밀히 테이블 위의 잔을 건드렸다. 실비아는 최면을 걸듯 재차 물었다.
“그렇죠?”
“아.”
벨라는 그제야 금색 눈에 담긴 뜻을 읽어내고는 작게 탄식을 흘렸다. 나는 당신이 준 게 평범한 술이 아닌 걸 알고 있다. 그러니 이번 일은 서로 덮기로 하자. 실비아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확실히, 여기서는 조용히 넘어가는 게 좋겠어.’
만약 실비아가 술에 무언가 들어 있었다며 입을 열기라도 한다면 일이 커진다. 그러니 실비아가 그녀를 미행한 이유를 캐묻지 않는 대신, 이대로 저들을 조용히 내보내는 것이 안전했다.
‘……내가 아까 그 변명에 속아 넘어간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군.’
벨라는 실비아가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벨포르 공작 부인인 것도 알았겠다. 우선은 이 상황을 벗어나고, 저 여자에 대해서는 추후에 더 조사해보면 될 일이었다. 사실 위에서 명령이 떨어진 지는 꽤 되었지만…….
‘으,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바로 알아볼걸. 어차피 별거 없겠지 싶어서 미뤄뒀다고 하면 혼나겠네.’
벨라는 속으로 혀를 차고는 양팔을 벌리며 활짝 웃었다. 그리고 발랄한 어조로 답했다.
“네에, 그럼요. 전부 사실이랍니다. 아무래도 제가 운이 좋았죠. 이렇게 아름다운 분께 빚을 지울 수 있다니.”
“농담도 참.”
실비아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벨라의 말을 받아넘겼다. 속사정이야 어떻든 겉보기에는 화기애애한 광경이었기에, 란델은 미심쩍어하면서도 의심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그가 한숨을 푹 내쉬며 낮게 말했다.
“돌아가서 얘기하죠.”
“시더스 경이랑 세이크린 후작 영애는요?”
“문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필리아는 성으로 먼저 돌려보냈고.”
“알았어요.”
실비아는 란델을 따라 주점을 나서려다가 문득 몸을 돌려 물었다.
“그러고 보니, 브로치를 찾아준 은인인데 이름도 못 들었네요. 이름이 뭐예요?”
이제 된 건가 싶어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던 벨라가 멈칫했다. 그녀는 잠시 침묵하더니 매끄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유려하게 답했다.
“……벨라입니다, 부인.”
“그래요, 벨라. 인연이 된다면 또 만나게 되겠죠. 잘 있어요.”
실비아는 그 인사를 끝으로 란델을 이끌고 가게를 나섰다. * * * 성으로 돌아가는 내내 제프리는 많이 놀랐다며 꺼이꺼이 울었고, 란델은 굳은 얼굴로 말이 없었다.
‘이렇게까지…… 반응이 격할 줄은 몰랐는데.’
실비아는 당황해서 눈을 깜박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는 벨라의 뒤를 쫓으면서도 이렇게까지 파장이 클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토벌하던 마물도 반쯤 내팽개치고 자신의 수색을 지시했다니.
‘물론 전부 처리했다고 하긴 하지만…….’
고작 한 시간 정도 사라졌던 것뿐인데, 다들 자신이 사지에라도 다녀온 것처럼 굴고 있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설마 화난 건가?’
실비아는 성으로 돌아와서도 굳은 얼굴을 풀지 않는 란델을 힐끔거렸다. 옆얼굴만으로도 지금 그의 기분이 굉장히 저조함을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란델은 그녀와 함께 있을 때면 대체로 웃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늘 미소를 띠고 있던 그의 얼굴이 지금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평소 조금 바보 같아 보일 정도로 사르르 웃고 있던 사람이 표정을 굳히자 그 차이가 확연히 느껴졌다.
‘자기가 뭔데 화를 내.’
필리아의 존재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상태에서, 란델이 제게 화를 내는 것 같자 울컥하는 마음을 다스리기가 어려웠다. 물론 실비아 본인은 필리아와 란델이 신경 쓰여서 기분이 좋지 않다기보다는, 새파랗게 어린 것이 제게 대드는 모습이 거슬리는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실비아가 불편한 마음으로 그를 연신 곁눈질하는데, 부부침실 앞에 도착한 란델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실비아.”
“……네.”
속내야 어떻든, 실비아는 겉보기만큼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 사실이 그를 더욱 미치게 했다.
“내가 당신에게 호위를 동행하라 한 것은 당신을 위험에서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란델은 평소답지 않게 격양된 목소리로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제프리에게 말도 없이 그렇게 사라져버리고, 제가 당신이 사라진 동안 얼마나……!”
그는 말을 잇던 중간에 울컥한 건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입을 다물었다. 이내 호흡을 가다듬은 그가 일그러진 얼굴로 꽉 막힌 목소리를 냈다.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했는지 압니까.”
분명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건만, 꼭 우는 것처럼 보이는 얼굴. 그 얼굴에서 읽히는 짙고 깊은 감정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안 돼.’
그것은 본능이었다. 실비아는 란델이 제게 화를 낸다고 생각했다. 공작 부인이라는 중책에 있음에도 멋대로 자리를 비워서, 아마도 어느 정도는 감시의 역할이었을 호위를 따돌려서. 그래서 화를 내는 것이라 여겼는데. 조금 전 본 얼굴은 분노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걱정.’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걱정과 초조함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었지. 저 남자는, 란델 벨로프는. 어느새 그녀를 마음에 담고 있었다. 실비아는 벼락같은 깨달음에 저도 모르게 란델에게서 한 걸음 주춤 물러섰다. 란델은 실비아에게 진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녀는 곧 죽음으로 떠날 사람이고, 그는 남겨져야 할 사람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빠른 죽음을 바라는 실비아에게, 란델의 진심이란 족쇄와 다름없는 것이었다. 여기서 선을 그어야 한다. 실비아는 자기방어에 가까운 태도로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섰다. 그에 란델이 반사적으로 거리를 좁히려는 찰나, 그녀가 상냥하고도 단호한 어조로 사과했다.
“미안해요.”
“실…….”
“공작 부인으로서 그렇게 함부로 처신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제가 너무 경솔했네요. 화가 나실 만도 해요.”
“예?”
란델은 일순 자신이 화를 내고 있었다는 것조차 잊은 듯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지금 란델이 실비아에게 화를 내는 것은 어디까지나 걱정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실비아가 북부로 온 이후 여러 일을 겪은 만큼,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제프리를 호위로 붙여두었는데. 실비아는 제프리조차 따돌리고 뒷골목 깊은 곳에, 더없이 수상해 보이는 여자와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지난번 글레버 후작의 반역 사건 때. 어둠 벌레들의 신호가 발견된 지역을 중심으로 그들의 본거지를 찾아내려 했으나 아직 찾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란델은 실비아가 사라졌다는 소식에 더 예민하게 반응한 것이었다. 이미 한번 실비아를 노렸던 그들이, 또다시 그녀를 해하려 할까 봐. 하지만 실비아는 란델이 지금 화를 내는 이유가 순전히 그녀가 ‘공작 부인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란델은 그 사실을 정정하기 위해서 입을 열려 했으나. 자신을 올려다보며 온기 없이 웃고 있는 실비아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뭔가 잘못됐다. 본능적으로 조금 전 실비아가 무언가를 잘라냈다는 것을 깨달은 란델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부인.”
“저 때문에 마물 토벌 일정에까지 지장을 드려 면목이 없습니다. 사과드려요.”
“실비아, 나는!”
하지만 실비아는 거듭 란델의 말을 막았다. 꼭 그가 어떤 말을 할지 알고, 그것을 거부하려는 사람처럼. 란델은 결국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제 속내를 털어놓으려 했다.
‘내가.’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고. 어느새 손쓸 도리도 없이 깊게 마음에 담아버렸노라고. 하지만 온기 없는 금색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 말은 목 끝에 걸린 채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리고 잠시간 심호흡한 란델이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성을…… 잠시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쉬십시오.”
그는 그 말만 남기고 서둘러 몸을 돌려 실비아에게서 멀어졌다. 제 마음을 고백하지 않았는데도, 이미 그 답을 들은 기분이라. 그래서 심장 한구석이 베인 것처럼 아프게 욱신거렸다. 첫 실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