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차기 켈베티아의 주인2021.07.05.
“와,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실비아가 란델을 이끌고 주점을 벗어난 후. 벨라는 다리에 힘이 풀려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어느새 제 손에 식은땀이 흥건히 배어나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재차 헛웃음을 지었다.
“기껏해야 인간 주제에 뭐 그렇게 살의가 철철 넘쳐?”
자신을 노려보던 연녹색 눈에서 느껴지는 살기가 어찌나 흉흉하던지. 하마터면 이지도 없는 마물처럼 본능적으로 그에게 덤벼들 뻔했다. 벨라는 한동안 심호흡을 해 평정을 되찾고는 몸을 일으켰다.
‘아무튼 큰일 날 뻔했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조사 좀 해둘걸. 그랬으면 그 여자를 여기까지 데려오지도 않았을 테고.’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을 돌이킬 수도 없으니, 보고라도 제때 하는 수밖에. 그리 마음먹은 벨라는 새하얗게 질려 있는 직원에게 지시했다.
“나 들어갈 거니까, 혹시 벨포르 사람들이 다시 와서 사장한테 죄를 묻겠다고 그러면 네가 사장이라고 해.”
“예? 제가요? 왜요!”
“월급 잘 주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벨라는 항의하는 직원의 면전에 대고 커튼을 쳐버렸다. 그녀는 커튼으로 주위의 시선을 차단하고는 손을 뻗어 테이블 아래를 더듬거렸다. 그러자 달칵, 하는 소리가 나더니 소파 뒤의 벽이 반으로 벌어졌다. 드르륵. 벨라가 그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 등 뒤로 벽이 다시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좁은 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벨라가 벽에 걸려 있던 까마귀 가면을 집어 들어 얼굴에 쓰는 것과 동시에, 갑작스레 양옆이 확 트이며 널따란 공간이 나타났다.
“이봐, 지금 장난해? 속임수를 쓰다니!”
“구질구질하게 굴지 말고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시지?”
“이 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까!”
그 안은 온통 붉었다. 이미 거나하게 취해서 인사불성이 된 사람들은 계속해서 술을 마시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 역시 벨라처럼 각종 동물을 본뜬 가면을 쓰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포커를 비롯해 여러 게임 도구들과 금화가 그득히 널린 채였다. 까마귀 가면을 쓴 직원이 정중히 묻는 소리가 들렸다.
“올인하시겠습니까, 손님?”
이것이 ‘간판 없는 가게’의 진짜 모습이었다. 물론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이들은 이 가게의 ‘특별 음료’에 중독된 이들밖에 없지만.
‘호구들.’
벨라는 타락의 향을 들이쉬듯이 깊게 숨을 들이켜고는 기분 좋게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게임에 돈을 걸고, 돈을 잃고, 아우성치기를 반복해댔다. 그 모습은 언뜻 이지 없는 짐승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은밀한 파티장을 쭉 가로질러 가면 그녀의 ‘진짜’ 집무실이 나왔다. 벨라는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후 책상 위에 놓인 검은 구슬을 툭 건드렸다. 그녀가 가면을 벗고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사이, 구슬에서 붉은빛이 새어 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텅 빈 집무실에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무슨 일이지.]
“아, 왕자님. 조금 전에 제가 누굴 봤게요?”
[왕자가 아니라 왕세자. 몇 번을 말하나.]
“아이참,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제가 누굴 봤게요오?”
상대는 불편한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냈지만 벨라는 굴하지 않았다. 그녀가 싱글싱글 웃기만 하고 말을 잇지 않자, 결국 상대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답했다.
[누군데.]
“벨포르 공작 부인이요! 진짜 예쁘더라고요. 단순하게 생김새만 따지면 저만큼 예쁜 정도?”
[어디서.]
“음…… 그게.”
벨라는 눈을 도르륵 굴리다가 결국 이실직고했다. 실비아가 먼저 자신을 따라왔고, 자신이 그 얼굴에 반해 그녀를 직원으로 끌어들이려다가 그녀가 벨포르 공작 부인임을 알았다고. 이야기를 다 듣고 한참이나 말이 없던 남자가 흉흉하게 이를 갈았다.
[미쳤나? 네가 북부로 자리를 옮긴 지도 벌써 몇 달이 지났어. 공작의 결혼 같은 큰일이 생기면 알아서 조사를 해뒀어야…….]
“아, 잘못했다니까요! 그래도 본업까지 들키지는 않았거든요!”
벨라가 손가락으로 귀를 틀어막고 빼액 소리를 질렀다. 그에 앓는 듯한 신음을 흘린 그가 말을 돌렸다.
[……분수 모르고 설치던 그놈은 어떻게 됐어.]
“라폴드요? 죽었어요. 공작한테 걸려서.”
[기대한 적도 없긴 하지만, 역시나.]
남자가 비소했다. 그는 문득 ‘공작’이라는 단어가 불쾌한 듯 중얼거렸다.
[벨포르는 고작 이 정도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건가. 하여간 개 같은 새끼.]
벨라는 태연했다. 그가 란델 벨포르를 증오한다는 것은 딱히 비밀도 아니었다. 물론 란델 벨포르 역시도 그녀의 주인을 경멸할 테지만 말이다.
‘둘 다 똑같다고 하면 맞겠지. 닥치고 있자.’
남자는 한동안 험악한 욕을 중얼거리더니 그녀를 불렀다.
[벨라.]
“네?”
[슬슬 세이크린 후작한테도 작업 들어가. 파티장에 끌어들인 놈 중에 후작과 친한 인간이 하나 있었지?]
“아, 그렇죠. 빚이 벌써 100골드쯤 쌓였던데요. 멍청하기는.”
[그중에 일부를 탕감해준다는 조건으로 후작을 소개받아. 핑계는…… 대충 주류 납품에 관한 거라고 하고, 다른 생각 못 하게 제대로 세뇌해. 그 김에 공작 부부 소식에 대해서도 알아놓으면 좋고.]
“그거야말로 제 전문이죠.”
[한 번만 더 실수했다가는 네 머리를 호수에 처박을 줄 알아.]
살벌한 말을 끝으로 구슬의 빛이 픽 꺼졌다. 벨라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는 과장된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우리 왕자님, 까칠도 하시지.”
확 관둬버릴까, 안 그래도 요즘 인간을 볼 때마다 살의를 억눌러두기가 힘들 지경인데.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비죽이던 벨라는 이내 불평을 그쳤다.
“뭐, 그래도 어차피 저분이 우리의 새로운 왕이 되실 테니까.”
그리고 그때가 되면, 인간을 원하는 만큼 마음껏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먼 옛날, ‘마왕 알리사’가 군림했던 그 시절처럼. 벨라는 한동안 학살의 상상에 취해 황홀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다가, 극적인 몸짓으로 구슬을 향해 예를 갖췄다.
“명을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차기 켈베티아의 주인이시여.”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어느새 사교 시즌의 시작이 코앞으로 다가온 탓에, 필리아는 벨포르 성을 떠나 후작령으로 돌아가야 했다.
“공작님, 공작 부인. 곧 다시 뵙지요.”
필리아는 허리를 숙여 인사하다가 힐긋 부부를 일별했다. 란델과 실비아는 필리아를 배웅하기 위해 정문 앞에 나와 있었다. 하지만 멀찍이 거리를 벌린 채 어색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각자 북부와 남부에 가 있는 듯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무슨 일 있었나?’
필리아는 의아함에 푸른 눈을 도르륵 굴렸다. 하지만 그녀는 당분간 제프리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슬퍼하느라 곧 의문을 지웠다.
‘뭐, 란델이 드디어 공작 부인과 거리를 두기로 마음먹은 거면 잘 된 거지.’
오히려 란델은 지금까지 과도할 정도로 실비아에게 살가웠다. 혹시 자신이 남부에 내려가 있던 사이 란델의 몸에 마족이라도 들어간 건가 싶었으니 오죽할까.
‘물론 얼굴만 놓고 보면 이해가 가긴 해.’
실비아를 경계하는 필리아조차 선뜻 수긍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는 아름다웠다. 지금껏 여자라고는 모르고 살았던 란델이니 아내가 된 사람이 저렇게 미인이라면 어느 정도 홀리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해와 수용은 별개의 일. 란델은 북부의 영주로서 실비아를 경계해야 할 의무가 있었고, 다행히 슬슬 제정신으로 돌아온 듯 보였다. 필리아는 대견하다는 얼굴로 란델의 팔을 한번 툭 쳤다.
“나 간다?”
“사라져, 빨리.”
“하여간 틱틱대기는.”
란델은 귀찮은 파리를 쫓듯 미간을 찡그리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필리아는 란델에게 얄밉게 혀를 쏙 내밀어 보인 뒤 후다닥 마차에 올랐다.
“가요!”
행여나 란델이 마차의 문을 부술까 봐 걱정하는 것인지 그녀는 마부를 재촉해 순식간에 떠났다. 벨포르 성에서 세이크린 후작저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필리아는 숨을 크게 들이쉰 뒤 망토의 끈을 단단히 여미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녀가 예상했듯이, 땅에 발을 디디자마자 등으로 매서운 손길이 날아들었다.
“이게 미쳤지, 미쳤어! 남부가 네 놀이터냐? 어? 전쟁 구경이 웬 말이야, 웬 말이!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네 등짝에 전쟁 나게 해줘?”
“아, 엄마! 아파!”
필리아가 표정을 찡그리고 후작 부인을 향해 징징댔다. 후작 부인은 그 외침에 멈칫하더니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딸의 망토를 잡아당겼다.
“벗어봐.”
“아니, 왜……!”
“벗으라니까!”
필리아는 양손으로 망토 자락을 쥐고 버텼으나 후작 부인을 이길 순 없었다. 후작 부인은 망토 아래에 감춰져 있던, 여러 겹의 솜옷을 발견하고는 눈을 부라렸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어쩐지 손에 닿는 감촉이 이상하더라니! 네가 옷을 껴입었다고 내가 못 때릴 줄 알아, 어?”
“엄마, 엄마, 엄마! 나 죽어! 죽어!”
필리아는 이번에야말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후작 부인은 그녀의 등이 얼얼해질 때쯤이 되어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필리아는 혹여 후작 부인이 ‘한 대만 더 맞아라’ 하고 손을 치켜들까 봐 황급히 말을 돌렸다.
“아빠는? 대문에서 기다리고 계시다가 다리를 꺾어버리시겠다더니…….”
“어제까지만 해도 여기 계셨다. 오늘은 손님이 와서 잠깐 응접실에 가셨어. 네 아버지가 거기 있을 때 들어가는 게 네 신상에 좋을 거다.”
후작 부인이 혀를 쯧쯧 차며 저택으로 들어가려는 듯 몸을 돌렸다. 필리아는 재빨리 그녀의 팔짱을 끼고는 헤헤 웃었다.
“보고 싶었어, 엄마. 그런데 손님은 누군데?”
“뭐 어디 주점 사람이라는데. 궁금하면 네 아버지를 불러주…….”
“아아니, 그건 됐어요. 들어가자!”
필리아는 후작 부인이 응접실 쪽으로 몸을 돌리자 황급히 그녀를 끌고 계단으로 향했다. 그녀가 후작 부인의 등을 떠밀며 응접실의 문을 힐긋 돌아보았다.
‘추워서 그런가?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쁜 것 같지.’
“필리아. 안 오니?”
“지금 가!”
필리아는 어쩐지 으스스한 느낌에 어깨를 떨었지만, 곧 착각이겠거니 생각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 * * 벨포르 성에서 데뷔탕트 무도회가 열리기 며칠 전. 란델과 실비아는 벨포르 성에서 후원하는 고아원의 시찰을 위해서 함께 마차에 올랐다.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실비아가 란델에게 선을 그은 이후, 벌써 며칠째 이어지는 침묵이었다. 물론 대화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같은 침실을 썼고, 식사를 함께했다. 각각 공작과 공작 부인이기에 업무상 필요한 대화도 몇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실비아는 턱을 괴고 밖을 내다보다가 맞은편에 앉은 란델을 힐끔 쳐다보았다.
‘기분…… 나빴으려나.’
그녀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둘 중 누구도 확실하게 마음을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실비아는 암묵적으로 더는 다가오지 말라 선을 그었고, 란델 역시 그녀의 뜻을 알아들은 듯 그 이후 깍듯이 거리를 지켰다. 그 미묘한 거리감이 안심되는 동시에, 어쩐지 허전한 느낌이 드는 건 분명 기분 탓일 것이다. 어차피 실비아가 죽음을 바라는 이상, 란델에게 상처를 주는 건 필연적인 일이었다. 애초에 결혼을 결심했을 때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 아닌가. 그녀가 새삼스럽게 미안함을 느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실비아는 란델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애써 죄책감을 지워냈다. 그때 마차가 멈추었다. 란델은 먼저 몸을 일으켜 마차를 벗어난 후 실비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
실비아는 잠시간 란델과 물끄러미 시선을 맞추다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서로 다른 손이 맞닿고, 이내 가볍게 겹쳐졌다. 란델은 실비아가 땅에 사뿐히 발을 디디는 것을 확인하고 곧장 손을 물렸다. 미련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담백한 움직임이었다. 목마른 자에게 떨어진 물 한 방울, 휴식이 간절한 자에게 찾아온 순간의 단잠처럼. 실비아는 찰나에 손에 닿았던 온기가 사라지자 외려 미묘한 공허함이 느껴지는 탓에 가만히 손을 쥐었다가 폈다. 그때 고아원의 원장인 듯 보이는 중년의 여자가 다가와 그들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