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2021.07.08.
“어서 오십시오, 공작님. 공작 부인.”
란델과 실비아는 언제 어색해했냐는 듯 재빨리 웃음을 띠었다. 란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여자가 이어 실비아에게도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부족하지만 메리벨 고아원의 원장을 맡은 세라입니다.”
“반갑네.”
“아이들은 지금 빨래를 걷고 있습니다.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저희 고아원의 운영 방침이라서요. 그럼 가실까요?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세라는 굉장히 살가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란델과 실비아에게 메리벨 고아원의 곳곳을 안내했다. 그들이 향한 곳마다 아이들은 제각기 할 일을 도맡아 하다가 활짝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공작님!”
“와! 공작님이다!”
란델은 시찰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반갑다며 달려드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였다. 그에게 매달리는 아이가 얼마나 많았던지 섣불리 걸음을 옮길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실비아는 란델과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해 그가 아이들에게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슬쩍 자리를 벗어났다.
‘이쪽은 좀 조용하려나.’
아이들이 모두 란델 쪽으로 몰렸으니, 조금 전까지 아이들이 빨래를 걷고 있었다던 뒤뜰은 상대적으로 한산할 것 같았다. 실비아는 소란을 피해 뒤뜰로 향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유달리 따사로운 햇살과 맑은 하늘이 보였다. 흰 이불이 빨랫줄에 널려 잔잔하게 흔들렸다. 그 사이로, 잿빛 머리카락의 남자가 몇 명의 아이들과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남자와 아이들의 얼굴에는 신이 난 듯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어어, 거기! 잡아!”
그때 한 소년이 찬 공이 실비아의 발치로 굴러왔다. 그녀는 몸을 굽혀 공을 주워들었다.
“공작 부인?”
공을 줍기 위해 헐레벌떡 뛰어오던 오스턴이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적갈색 눈동자가 동그랗게 뜨였다. 실비아는 그에게 공을 건네며 웃었다.
“의외네. 그대는 아이들과 딱히 친밀하지 않을 것 같은 성격으로 보였는데.”
“무슨 뜻입니까?”
“지극히 마법사다운 성격으로 보였다는 뜻이야.”
“그거 욕이잖습니까!”
“그럴 리가.”
실비아는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오스턴은 황당하다는 듯한 시선을 보내더니 아이들에게 공을 던져주며 목소리를 높였다.
“난 잠깐 쉴 테니까, 너희끼리 놀고 있어.”
아이들은 오스턴이 던진 공을 잡아채고도 머뭇거리며 걸음을 떼지 않았다. 개중 당찬 인상의 소녀가 용기를 내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와 말했다.
“저기, 그……분도 껴서 하면 안 돼요?”
“이거 재밌는데.”
“진짜 엄청 재밌는데…….”
아이들은 실비아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분위기 때문인지, 쉽사리 다가오지 못하고 그녀를 힐끔거렸다. 오스턴은 실비아가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런 걸 할 만한 분이 아니시다. 얼른 가봐. 심판 봐줄 테니까.”
“히잉.”
“알겠어요, 형.”
아이들은 아쉬워하며 멀어졌다. 실비아는 애초에 필요하지 않다면 몸을 움직이는 일을 지양하려 했으므로 딱히 그를 말리지 않았다. 아이들은 금세 아쉬움을 잊고 즐거운 얼굴로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 광경을 보던 실비아가 다시금 감탄했다.
“아이들이 자네를 잘 따르네. 역시 놀라워.”
“대체 마님 눈에는 제가 어떤 놈으로 보이는 겁니까?”
“공놀이에서 공격을 한 번 성공시킬 때마다 5브론즈를 준다고 해야 참가할 것 같은?”
“허. 제가 아무리 돈에 미친놈이어도 그렇게까지 비정한 인간은 아닙니다. 게다가…….”
오스턴이 고개를 돌려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적갈색 눈이 짙게 가라앉았다. 그가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빚이 있거든요.”
오스턴 도슬러. 그는 본디 서부 변방의 고아원 출신이었다. 길에서 아사하지 않고 고아원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은 분명한 그의 행운이었으나. 그곳이 메리벨 고아원처럼 마냥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은 아니라는 것이 그의 불행이었다.
-오빠아, 나 피터 보고 싶어…….
-아직 떠나기 전일 거야. 내가 원장님께 가서 인사라도 한 번 더 할 수 있냐고 여쭤볼게.
어렸던 오스턴은 고아원의 동생이 칭얼대며 한 말에 밤늦게 원장실을 찾았다. 그날 입양을 간 아이에게 작별 인사를 따로 전할 수 있겠느냐 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가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던 찰나. 그는 방 안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대화로 인해 그대로 굳어졌다.
-약속했던 10골드네. 세어보게.
-아이고, 저희가 거래한 게 벌써 몇 년인데요.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다음에는 누구를 보낼 생각인가?
-아, 오스턴이라고. 나이는 좀 있는데, 영리한 아이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영리한 아이가 아니야. 당장 일을 시켜도 무리 없을 정도로 건강하고 힘이 좋은 아이지.
인자하다고 생각했던 원장은 사실 아이들을 비싼 값에 팔아넘기는 범죄자였다. 오스턴은 그 대화를 듣고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방 안에서 누군가 몸을 일으키는 듯한 기척이 들린 것과 동시에. 그는 더 생각이라는 걸 이을 새도 없이 그대로 고아원에서 빠져나와 도망쳤다.
-애들을 두고 와버렸어…….
오스턴은 자신보다 어린 동생들을 그곳에 두고 왔다는 생각에 죄책감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는 어렸고 나약했으며, 용기가 없었다. 다시 돌아가봤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생각과 그래도 어떻게 혼자만 도망칠 수 있냐는 생각이 끊임없이 충돌했다. 오스턴은 괴로워하며 거리를 헤맸다. 며칠을 내리 굶던 그가 끝내 정신을 잃고 쓰러지던 날, 지나가던 한 노인이 그를 거두었다.
-나와 함께 가지 않겠느냐.
노인은 떠돌이 마법사였다. 한때는 마법사로서 그럭저럭 위세를 누린 적도 있지만. 결국에는 세속에 환멸이 생겨 본인이 마법사라는 것을 감추고 이곳저곳을 떠도는 중이었다. 오스턴을 거두어 기르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턴이 마법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인은 오스턴을 제자 삼아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가르쳤고, 그는 필사적으로 배웠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금의 이 가르침이 필요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오스턴은 노인을 뛰어넘는 실력의 마법사가 되었고, 노인은 평화롭게 숨을 거두었다. 스승의 장례를 치른 오스턴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자신이 있던 고아원을 뒤집어엎는 것이었다. 오스턴은 제 기억보다 조금 더 살이 찌고 늙은 원장을 짓밟으며 사납게 물었다.
-애들 어딨어.
-모, 몰라! 난 모른다고! 팔아치운 게 벌써 몇 년 전인데 그걸 일일이 다 기억……! 커헉!
오스턴은 원장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를 경비대에 넘기고 직접 아이들을 찾아 나섰다. 오스턴은 필사적으로 자신과 같은 고아원에 있던 아이들의 행방을 쫓았으나. 결국 아이들이 전부 목숨을 잃은 후에야 그들의 무덤이나마 만들어줄 수 있었다.
-다시는 누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게.
오스턴은 마법을 쓰지 않고 손수 땅을 파 아이들을 묻어준 후, 평생 그들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겠다고 맹세했다. 그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 가장 먼저 떠오른 방법은 제대로 된 고아원을 세우는 것이었다. 제대로 된 시설을 갖추고, 아이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을 원장이 있는 ‘좋은’ 고아원을. 그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돈을 모아야 했다.
-일자리 좀 있나?
그때의 오스턴은 갓 얻게 된 능력에 자만해 있던 상태였다. 마법이란 드문 재능이었고, 그러한 재능을 타고난, 심지어 실력마저 좋은 자신이니 명예와 돈 정도야 금세 모일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귀족들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나타난 오스턴을 쉽사리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약속했던 보수에 비해 금액이 적…….
-어허. 내가 출신도 분명하지 않은 자네를 써주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내가 고용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다른 귀족들도 자네를 달리 볼 걸세.
지금까지의 마법사들은 대부분 귀족 출신이었기에, 태생이 불분명함에도 대단한 재능을 지닌 그를 시기하고 멸시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툭하면 수고비를 내어주지 않으려 드는 귀족들 탓에 오스턴은 점점 지쳐갔다. 왕성에 무작정 찾아가 보기도 했으나 왕성의 인간들은 귀족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왕성의 입구를 통과하는 데에만 5골드라는 경비병의 으스댐에, 오스턴은 순간적으로 성문을 날려버릴까 고민했으나 원장과 같은 범죄자가 되고 싶지는 않아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오스턴이 끝내 인간에 대한 환멸마저 느낄 때쯤. 그를 주시하던 하급 귀족이 슬그머니 접근했다.
-자네, 돈이 필요하다고 했지? 내가 도와줄 수 있네.
오스턴은 이리저리 치이느라 피곤해진 정신으로 하급 귀족의 거창한 사업 계획을 들었고, 그에게 휩쓸려 가지고 있던 모든 돈을 그에게 투자했다. 당연하게도 귀족은 사기꾼이었다. 오스턴은 뒤늦게 그를 쫓아 응징했으나 돈을 돌려받을 수는 없었다. 결국 빈털터리가 된 오스턴은 모두가 기피하는 전장을 떠돌며 용병 일을 했다. 호화로운 환경에서 여유롭게 연구하며 지낼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음에도 매일 수십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을 때.
-나와 함께 가지 않겠나.
처음으로 그를 동등한 ‘인간’으로 대하고 거두어준 것이 란델이었다. 그는 란델의 밑에서 구르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고, 그 돈으로 고아원을 여럿 세워 저와 같은 아이들을 돌봤다. 메리벨 고아원 또한 오스턴이 세운 곳이니, 당연히 이곳의 사람들과 스스럼없을 수밖에. 한편, 그러한 사정을 모르는 실비아가 심각하게 물었다.
“빚이라니. 설마…… 자네 저 아이들에게도 돈을 뜯어낸 건가?”
“……내가 말을 말아야지. 이만 들어가십시오. 주군께서는 아마 지금쯤 동쪽 방에 있을 겁니다. 아이들의 낮잠 시간이거든요.”
오스턴은 그 말을 남기고 공놀이를 하는 아이들에게로 다가가 말했다.
“너희도 이만 들어가. 곧 독서 시간이잖아. 애들도 깨우고.”
“하지만 우리는 안 잤는데!”
“대신 밖에서 놀았지.”
“힝.”
오스턴이 아이들과 실랑이하는 사이, 실비아는 고민하다가 그가 일러주었던 동쪽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눈앞의 광경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풉.”
실비아는 간발의 차이로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그도 그럴 것이, 란델이 대여섯 살 즈음으로 보이는 아이들과 뒤엉켜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비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 얼굴이 스물다섯은 무슨. 저런 어린아이들 사이에서도 위화감이 없는 모습이라니.’
벨포르 공작성에서는 늘 실비아가 먼저 잠들곤 했던지라 그의 잠든 얼굴을 제대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란델은 그의 곁에 누워 있는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긴장이 죄 풀린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이 참 우스우리만치 평화로워 보였다. 불편함으로 가득했던 마음을 한순간이나마 가라앉힐 만큼. 실비아는 숨을 죽이고 걸음을 옮겨 란델의 머리맡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으음.”
란델은 얼굴로 내리쬐는 햇살 때문에 눈이 부신지 잠결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에 실비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눈가에 그늘을 드리웠다. 그녀가 뒤늦게 제 행동에 놀라 손끝을 움찔하는데, 일그러져 있던 란델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
그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녀가 시선을 비스듬히 내리깐 채 입술을 달싹이던 차에, 란델의 눈꺼풀이 움찔 떨리더니 혼몽한 연녹색 눈이 드러났다.
“……실비아?”
잠기운으로 가라앉은 목소리가 나지막이 허공을 울렸다.
실비아는 그가 온전히 정신을 차리기 전에 서둘러 손을 거두어들이고는 몸을 일으켰다.
“이제 곧 아이들의 독서 시간이라길래 와봤어요.”
“아.”
“그만 일어나요. 아이들도 슬슬 깨는 것 같으니.”
란델의 곁에서 잠에 취해 있던 아이들은 그들의 대화 소리를 듣고 하나둘 눈을 비비고 있었다. 란델은 머리카락이 부스스해진 채 상체를 일으켰다. 실비아는 그에 픽 웃음을 흘리고는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역시 아직 애네.”
“……무슨.”
놀란 란델이 석상처럼 굳어져 있을 때, 먼저 정신을 차린 아이들 몇몇이 고개를 갸웃하며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누구세요?”
“아! 오늘 책을 읽어줄 선생님인가 봐!”
“책 읽어주세요!”
실비아가 일찌감치 뒤뜰로 빠져나갔던 탓에 그녀를 알지 못하는 아이들이 금세 재잘거렸다. 공놀이를 하던 아이들보다 어려서인지 그들은 실비아를 어려워하지 않고 그녀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실비아는 잠시 당황하다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책을 펼쳤다.
“대신 떠들면 안 돼.”
“네!”
아이들은 금세 실비아가 잔잔한 목소리로 읊어주는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뒤늦게 이성을 되찾은 란델은 그 모습을 조금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아이를 싫어하는 건…… 아닌가.’
굳어진 얼굴로 ‘아이는 안 된다’라고 하던 것과 달리, 지금의 실비아는 무척이나 평화로워 보였다. 란델은 제 머리를 쓸며 웃던 실비아의 모습을 상기하자마자 또다시 술렁이는 마음을 느끼고는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아무튼, 그런 방법으로라도 꾸준히 표현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같이 있어 주고, 챙겨주고. 상대방이 친구분의 몸뿐 아니라 마음도 원하게 될 때까지.
그래, 그 말을 왜 잊고 있었을까. 실비아의 온도와 그의 온도가 같지 않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던 일이지 않았던가.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그녀가 자신을 밀어낼 때마다 홀로 상심하는 것이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 그녀의 온도가 자신과 같아지도록 노력하는 것이었다.
‘……물어보자.’
저렇게 편안한 웃음을 띠고 있으면서, 왜 아이는 안 된다고 했던 건지. 당신은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내가 없는 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란델은 처음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